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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제2의 인생을 책임지겠다던 아들
이상욱 / 법학전문대학원
39년 6개월의 교수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준비했던 ‘정년퇴임 기념 피아노 독주회(2021년 8월 28일)’를 마칠 즈음, 사회를 맡았던 제자가 갑작스레 가족들이 참석하신 분들에게 인사를 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예정에 없던 일인지라 딸네 가족과 아들 내외가 두서없이 천마아트센터 챔버홀의 무대 위로 주섬주섬 올라오게 되었다. 애초 각본에도 없던 일이고 준비 없이 갑자기 마련된 자리였지만, 딸 내외와 아들 내외가 그래도 크게 당황하지 않고 무난하게 인사를 하고 넘어가나 싶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잡은 아들이 인사말 끝에, “이제 앞으로 아버지의 제2의 인생은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호기 있게 마무리를 하는 게 아닌가. 상투적인 인사말도 아니고 전혀 뜻밖의 발언이었다. 순간 객석에서도 “와!”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나 자신도 전혀 기대하지도 않은 난데없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가슴에 깊이 새기지도 않았고 그냥 잊어버렸다.
그리고 며칠 뒤 딸네 가족은 미국으로 떠나고, 아들 내외도 백일이 지난 손자를 데리고 서울로 돌아갔다. 집에는 다시 아내와 단둘이 남게 되니, 외손자 둘과 어린 손자 등 한동안 시끌벅적 떠들고 부산하던 집이 갑자기 적막강산으로 변하였다. 더구나 9월 1일 수요일에는 아내마저 출근하고 나자 이 세상에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그날 아침, 난 갈 곳을 잃은, 아니 가야 할 곳이 없는, 그야말로 고독한 영혼이 되었다. 혼자가 된 그 기분, 그 당혹감을 잊을 수 없다. 이제는 아침에 눈을 떠도 가야 할 곳이 없다는 그 자괴감! 이러다가 이제 이 세상에서 잊혀지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닌지, 음습한 바람이 뼛속까지 헤집고 들어오는 듯했다. 더구나 피아노 연주회에 대한 긴장감도 풀리면서 몰려오는 공허하고도 허전한 마음, 먹먹해지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 앞으로 어떻게 지내지? 그날 오전은 참 길게 느껴졌다. 오후에 아내에게 전화하여 다른 이야기는 못하고 ‘입안에 곰팡이가 피겠다.’고 하자, 아내는 바쁜 사람에게 쓸데없는 전화한다는 투로 피아노를 치거나 노래를 부르란다. 아니 피아노는 아무 때나 치면 되는가? 노래도 감정이 되고 분위기가 되어야 부르는 거지. 내 상황이나 심정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남에게 말하듯 던지는 무성의한 답을 듣자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 이 문제는 나 자신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면서 서서히 정신을 추려 나갔다.
일단, 전에도 연구년으로 1년 동안 쉰 적이 있으니 그때를 상기하며 지내보자고 내심 다짐하였다. 그렇지만 그것도 쉽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연구년 중에는 여전히 연구하고 논문을 작성하여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고, 강의 준비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는 그럴 일이 전혀 없다. 물론 마음 한 켠에는 해방감도 있었다. 그래도 하던 일이 책을 보는 일이다 싶어 교보문고 장바구니에 넣어놓았던 인문 철학 서적, 역사 서적을 주문하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퇴임한 사실을 알게 되었던지 대구가정법원에서 의뢰한 이혼 조정 사건을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 서너 건씩 하게 되어 차츰 생활이 안정권으로 접어들었다. 더불어 옛 효성여대의 제자가 소개해 준 카페에서, 커피 내리는 법을 배우게 되어 핸드드립 커피에 서서히 빠져들었다. 커피는 원두의 종류, 그라인드로 가는 원두의 굵기, 물의 온도, 물줄기의 정도나 속도 등에 따라 섬세하게 맛이 변한다는, 오묘한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커피는 홍차와는 또 다른 묘미가 있었으며, 커피야말로 과학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가정용 전동그라인드를 비롯하여, 주둥이가 가늘게 길고 완만한 드립 포트와 드립 서버, 온도계 등 커피와 관련된 기구를 하나둘 장만하였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 커피는 매일 아침과 오후, 하루 두 번 신선한 원두를 갈아 직접 내려서 마시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가곡 교실에 등록하여 열심히 노래 연습도 하였고, ‘가을 음악회’의 발표회 무대에 올라 부족한 솜씨지만,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가곡 ‘대지의 노래(우광혁 교수가 작사 작곡하고, 고성현 교수가 불렀던)’를 불러 청중으로부터 갈채를 받은 소중한 경험도 하였다. 그런 중에 미국에 있는 딸네 집에 가서 근 3개월을 머물다 왔고, 아내랑 그리스 여행도 다녀왔다. 또한 대구고등법원 조정위원협의회 회장을 맡게 되어 이런저런 행사도 준비하게 되었으며, 그동안 소원했던 고등학교 동창회에도 얼굴을 내밀곤 하였다. 특히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 때의 절친, J 교수와 L 사장과는 줌(Zoom)을 통한 수다 떨기가 시작되었다. 나보다 1년 먼저 정년 퇴임한 J 교수의 줌을 이용하여 매월 둘째 화요일에는 만사를 제치고 저녁을 일찍 먹은 후 8시부터 10시가 넘도록 대화가 이어졌다. 아내는 남자들이 뭐 그렇게 말이 많으냐고 놀렸지만, 그동안 쌓인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서인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또한, 커피를 같이한 카페 사장이 중심이 되어 독서 모임을 결성하였는데, 아내와 같이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한 달에 한 권씩 책을 읽게 되는데(10명의 회원이 돌아가면서 책을 추천하였다), 시내 S 고등학교의 사서교사로 재직 중인 선생님 한 분이 전체적인 감상평 등 논의할 내용을 정리해 주었다. 매월 마지막 일요일 오후에 3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회원들이 카페에 모여 앉아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데, 횟수를 거듭할수록 이들과도 친해졌다. 특히 대학을 졸업한 뒤부터는 전혀 읽지 않았던 소설책을 읽었는데(‘밝은 밤’,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 ‘작별인사’, ‘순례주택’, ‘메리골드 마음사진관’ 등), 내게는 상당히 생소한 것으로서(내가 추천하여 읽은 책은, ‘삶이 던지는 질문은 언제나 같다’, ‘철학이 필요한 순간’, ‘모든 삶은 흐른다’, ‘철학이라는 해독제’ 등 아내가 좋아하지 않는 장르이다), 새로운 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소중한 색다른 경험이었다. 이렇게 저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덧 퇴임한 지 2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이처럼 나름 모색한, 퇴임 후의 소소하고 소박한 생활에 적응할 무렵 예상치 않은 변수가 발생하였다. 2023년 10월 며느리가 둘째를 출산함으로써 저간의 상황이 변하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 사실 1983년에 딸이 출생한 이후 여식은 처음이라 집안의 경사라고 할 만큼 반가웠고, 며느리에게도 몹시 고마웠다. 그런데 3개월의 출산 휴가가 끝난 1월 중순에 며느리가 직장으로 복귀하면서 육아 문제가 제기되었다. 물론 이전에 입주한 도우미 아주머니가 있었지만, 아기 두 명을 혼자서 감당하기에 역부족이 아닐 수 없었다. 아들 내외가 파트 타임으로 또 다른 도우미 아주머니를 오도록 할지 고민하자, 기존의 도우미 아주머니가 불편하다고 하면서, 조금만 도와주면 자신이 해보겠다고 하여, 임금을 더 올려주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보도록 결정하였단다. 처음에는 안사돈이 올라가 도와주길래 나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따금 저녁 무렵에 손자와 페이스톡을 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런데 설날을 지내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아들이 전화해서는 ‘이번 주말에 부부 모두 학회와 세미나가 있고, 장모님도 다른 일정이 있다고 하니 아버지가 오셔서 도와줄 수 없으시냐’고 물었다(일요일은 도우미 아주머니가 종일 쉰다). 사실 이미, 왕년에 딸과 아들을 비롯하여 외손자 둘을 키워본 경험이 유한지라, 크게 고민하지 않고 선뜻 응하였다. 그리고 그 후 몇 번 더 불려 올라가곤 했는데, 그런데 그게 어느새 슬그머니 그냥 상주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주말에 하루 이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보름씩 머물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 돌이 지난 손자를 아침 9시경에,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어린이집에 데려다준 뒤, 백일을 지난 손녀에게 수유하고 등을 살살 토닥여서 트림하게 한 후, 품에 안고서 잠을 재우고, 이따금 기저귀를 가는 일이 반복되는 일상이 된 것이다. 물론 도우미 아주머니가 있지만, 청소하거나 부엌일을 할 때, 심지어 화장실에 출입할 때마다 손자와 손녀를 돌보는 일은 내 몫이 되었다. 오후 4시 30분경 손자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오면 놀이터에 같이 가서 놀거나, 집에서 책을 읽어주거나, 손자가 좋아하는 버스 등 각종 장난감으로 같이 놀아주는 일도 일상이 되었다. 그런데 3월이 되자 가까운 곳의 어린이집이 미흡했던지 며느리가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곳으로 옮겼다. 그 바람에, 아침 8시 50분에 오는 버스 시간에 맞추어 밥 먹이고, 세수하고, 유니폼으로 갈아입혀서 버스를 태워야 하고, 오후 2시 30분에 오는 버스 시간에 맞추어 데리러 가는 일이 하나 더 늘었다. 손자가 지난번의 어린이집보다 오후에 일찍 집으로 오게 되자, 며느리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지 after class를 신청하여 월요일 화요일 금요일은 오후 4시 30분에 마중 나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허겁지겁, 허둥지둥하는 통에 엄청 피곤한 하루가 되었지만, 이 생활도 차츰 적응하게 되고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아침에 손자를 버스 태워 보내면, 손녀를 유모차에 태우고 동네 주변을 한 바퀴 도는 여유도 생겼다. 호젓하게 커피를 마시며 밖을 보노라면 햇빛에 반사된 뒷산 나무들의 초록빛이 너무 푸르러 가슴이 아릿해지곤 하면, 손녀랑 산책을 나서는 것이다. ‘왕북초등학교’를 지나고 ‘삼성어린이집’을 지나면 전국비구니회관이 있는 ‘법룡사’를 거치고, ‘충신교회’를 지나 곡물창고를 지나면 소나무가 많은 ‘영릉 ․ 정릉’을 지난다. 그리고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을 지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광평로 큰길이 나오고, 삼성아파트를 지나고 까치마을을 지나서 일원역 1번 출구까지 오면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그 길을 다시 되돌면 총 한 시간이 걸리는데, 손녀는 살포시 자고 있다.
이렇게 하여 어느새 퇴임 후의 일상이 손자와 손녀 육아로 책정된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오른쪽 팔목의 통증이 너무 심하여 정형외과에 가서 진료를 받았다. 의사는 X레이 사진을 찍고 검사를 하더니, ‘건초염’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스테로이드 주사가 좋다는데, 내가 당뇨가 있으므로 약을 처방해 주면서, 당분간 오른팔은 사용하지 말고 조심하라고 하였다. 아! 손녀를 자꾸 안아서 유발된 것인데. 손녀가 내 품에만 안기면 그렇게 편하게 잠이 잘 드는데 어떻게 모른 채 외면하란 말인가? 정형외과 의사인 아들은 미안한지, 손목 교정대와 통증에 바르는 약을 주었다. 그렇게 두어 달을 지나도 차도가 없자, 며느리도 합세하여 결국 아들이 주사를 놓아서, 이제 건초염은 완치가 된 듯하다. 그사이에 아예 내 생활의 근거지는 대구가 아니라 서울로 바뀌어 버렸다.
어느 날, 아들이 사는 아파트의 상가 앞을 지나는데, 평소에는 늘 닫혀 있던 반찬가게가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알아보니 오후 4시부터 영업을 한다는 것이다. 다음 날 버스를 내린 손자를 데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 반찬가게에 들렀다. 반찬가게에서 손자가 좋아하는 ‘메추리알’, ‘우엉 조림’, ‘잡채’ 등 몇 가지를 사는데, 반찬가게 주인인 아주머니가 손자를 예쁘게 봐주어 손자랑 같이 자주 반찬가게에 들르게 되었다. 그 후 내가 대구 와있던 동안 손자가 엄마 아빠랑 같이 반찬가게에 갔던지, 어느 날 내가 손자를 데리고 갔더니, 반찬가게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으면서, 손자를 보고 “○○는 엄마를 닮아서 예쁘구나”라고 하였다. 그런데 손자가 대뜸, 반박을 하는 게 아닌가. “아니에요. 나 엄마 안 닮았어요”. “그래? 그럼 누구 닮았니?” “나 할아버지 닮았어요” 아! 그 순간 가게 안에 있던 몇몇 아주머니들이 “와!”하고 탄성을 질렀다. 놀이터에서 몇 번 만나 안면이 있는 한 아주머니는 “할아버지는 좋으시겠어요”라고 한마디 보탰다. 맹세코 이건 내가 주지시켰거나 가르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날 저녁 며느리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할아버지를 너무 좋아해요”라고 한술 더 떴다. 가끔 손자가 밤에 자기 전에 눈감고 두 손을 모아 깍지낀 채 기도를 하곤 하는데, 내가 대구 내려간 날에는 너무 진지하게 기도하길래 며느리가 무슨 기도하는지 슬쩍 물어보았단다. 손자는 거침없이 ‘할아버지 빨리 오시라’고 기도했다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그렇다. ‘아버지의 제2의 인생을 책임지겠다’던 아들의 발언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 손자와 손녀의 육아를 통하여 색다른 기쁨을 맛보게 한 것이다. 목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여 노심초사 조심조심 안고 하던 손녀가 어느 순간 뒤집기를 하더니, 배밀이를 하고, 혼자 앉기 시작하면서 엉금엉금 기어서 온 방을 헤집고 다니게 되었다. 그 무렵 의자에 앉아서는 온 식탁을 어지럽히며 이유식을 맛있게 먹고, 또 얼마 뒤부터는 의자를 짚고 혼자 일어서더니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 게 아닌가. 이러한 일련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즐거움! 사실 젊었을 때 멋모르고 자식들을 키울 때와는 또 다른 기쁨과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내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나를 닮았다고 거침없이 외치는 손자!
나만 보면 해맑게 웃으며 안아달라고 두 팔을 내미는 손녀!
그래, 내 제2의 인생을 책임져 준 아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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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수님, 정말 고맙습니다. "올해의 숙제는 끝났다"라고 하시는 교수님께 축하드립니다. 이렇게 숙제를 부지런히 해 주시는 분께, 복이 듬뿍 내리시기도 빕니다. 교수님의 일상을 거울에 비추듯이 잔잔하게 보여주시네요. 원고를 읽으면서 교수님의 일상을 그리며 따라갔는데...... 마지막에는 웃음이 터졌습니다. 예쁜 손자도 눈에 그려보구요. 글로 자주 뵈어요!
편집위원장님! 부족한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년 은퇴 기념으로 '피아노 독주회'를 개최하신 법대 교수님이 이젠 멋진 육아 일기도 쓰시고~ 정말 다재다능하시네요. 부럽습니다. 최고!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