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배 시인이 만난 문인들 16
복동 황 명 시인
김송배
‘처음부터 많이 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다만 두 편쯤의 괜찮은 시를 남기고 싶다. 그러면서 부끄럽게 또 한 권의 시집을 묶는다. 몇 편이나 건져 올려질까 두렵기만 하다.’ 황 명(黃命) 시인은 1993년에 발간된 두 번째 시집 『눈은 언제나 숨쉬는 별빛』머릿글에서 이와 같이 적고 있다.
그는 본명은 황복동(黃福童)이다. 1931년 경남 창녕에서 출생하여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면서 그해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작품 「분수」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당시 신춘문예 당선자들의 모임인 ‘신춘시’ 동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내가 그와 만나게 된 것은 그가 한국문협 부이사장으로 재임할 때 문협 심포지엄에 참가하면서 만나게 되었는데 그후 내가 한국 예총에 입사하고부터는 매일 만날 수 있어서 가끔 퇴근 시간에 응암동 어느 술집에서 술도 마신 적이 있었다.
1. 오죽하면 하늘을 우러러 스스로의 / 노여움을 자제하는 저 / 묵시의 입김은 / 얼마나 거룩한 / 종교 같은 것이라 할까 // 2. 일찍 하늘로 승화하지 못한 / 먼 태고적 우리 / 어버이들의 눈물이 마침내 / 영원과 맞서는 자리에 / 찬란한 무지개를 피우듯 / 아기찬 우리들의 / 의욕으로 되살아 오르는가 // 3. 언제고 한번은 / 끝없는 강물을 이루고 싶은 마음에서 / 우러러 오던, / 하늘이여, / 해여, / 달이여, / 별이여, / 지금은 모두가 / 나에게로 어울려드는 / 이 창업의 경이 같은 / 아 청청히 나의 가슴을 굽이치는 강물아.
이처럼 신춘문예 당선작「분수」의 담백한 언어와 정갈한 시의 구도같이 그의 인품도 단아하다. 또한 그의 성격도 온화하면서도 엄격하여 작품도 많이 발표하지 않아서 1985년, 데뷔 30년만에 첫 시집『날아라 아침의 새들아』와 두 번째 시집 『눈은 언제나 숨쉬는 별빛』, 생전에 시집 두 권밖에 상재하지 않았다.
그가 작품에서는 조병무 문학평론가의 말대로 ‘종교와 같은 갈구와 그 갈구에 대한 기도가 상존한다. 영원의 관계를 관조하면서 많은 영감을 한 폭 무한의 가능성으로 조감하여 영원성을 찾아 나선다. 시인에게 존재하는 대상은 때로는 추상적인 암시의 굴곡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완벽한 조형을 만들어 내어 온건한 심성을 절묘하게 그려’내고 이는지도 모른다.
그는 성남고교 교사를 거쳐 휘문고교에서 33년이란 긴 세월을 봉직하면서 한국문협 이사, 펜클럽 이사와 한국문협 시분과회장과 부이사장을 지내고 이사장을 두 번 역임하는 문협맨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에서 ‘문학의 해’를 정해서 문학행사를 대대적으로 전개할 때 그는 그 조직위원회 집해위원장을 맡아서 문학과 문인들의 사기를 북돋운 바 있다.
그는 문협 이사장을 재선하기 위해 출마했을 때 조경희 선생이 대항마로 출사표를 던졌다. 그는 아래 위층에서 매일 대하는 사이이니까 자신의 선거운동을 도와야 한다고 하고 조경희 선생은 예총 입사때 나를 채용했다는 인연을 내세우면서 자신을 지지해야 한다고 해서 입장이 난처해진 일이 있었다.
결국 두 분에게 실질적으로 직접 도움을 드리지 못함을 사과(이때 홍성유, 김양수 선생이 동석했음)하고 운신의 폭이 이처럼 좁아지는 것은 절감하게 된 적이 있었다. 그에게는 선거 일선에 직접 나서지 않지만, 인연의 의리상 조경희 선생을 배신할 수 없다는 나의 지론을 전했다.
그는 아쉬웠지만 인연과 의리라는 표현에 이해를 한 것이다. 선거운동에 나서지는 않지만, 나의 개인 한 표는 어쩔 수 없이 조경희 선생에게 던져야 했던 것이다. 결과 그가 재선에 성공하고 조선생이 고배를 들었지만 문제는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 정확하게 2년간 예총회관에서 만났을 때 드리는 인사도 받지 않은 채 일체의 행동을 외면하는 곤고(困苦)를 겪어야만 했다. 자연스럽게 문협과의 사이가 멀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이런 문제는 당시 ‘문학의 해 조직위’에서 삼일절 기념행사로 문인 독도방문이 있었다. 조직위 사무국장의 위촉으로 이 행사에서 전체 진행(사회)를 맡게 되었는데 부산에서 해양대 실습선에 탑승하기 직전에 진행자를 바꾼다는 통보를 받았다. 연유를 물었더니 집행위원장의 방침이라고 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가 그를 선거에서 적극 협조하지 않았다는 개씸죄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임기 마지막 해(1997)에 가서 온화한 예 모습을 대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998년 문협 이사장 임기를 마치고 명예이사장으로 문협을 위해서 헌신하던중 뇌출혈로 10월 2일 작고했다. 그는 사모님 송순영 여사와 세 따님 그리고 많은 문인들의 애도 속에 문인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 다음해에 채수영 오덕교 등 동국대 후배들이 주선하여 유고시집『분수와 나목 』이 발간되었는데 평생 상재한 두 권의 시집 외에 미발표작품이 무려 2백여 편 넘게 자택 서재방에 간직해 두었다는 점에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채수영 시인이 결론을 내린 것처럼 발표하는 데에도 신중을 기해서 ‘들어 내놓은 시’와 ‘감추어둔 시’로 분류한 것 같다. 그는 등단 43년 동안 겨우 두 권밖에 상재하지 않은 시집에서 그의 결벽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아직도 뛰는 가슴은 있다. 너무 세차게 몰지는 말았으면, 자꾸만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세상이 귀찮아서가 아니다. 사람들이 못마땅해서는 더욱 아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싫어서, 내가 서 있는 곳이 너무 추워서 그런 것도 아니다. 오랜 시간 너무 허송한 것 같아 스스로 뉘우치고 있다. 그렇다고 내 모습을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다. 소위 변신 같은 것, 생각해 본 적 없다. 살아온 대로, 써온 대로, 살고 쓸 것이다.
이렇게 소박한 사유(思惟)가 그의 내면에 흐르고 있었다. 그의 풍모와 언술들이 엄숙해 보이지만 그의 잔정은 만인의 정감으로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사장직이 종반에 접어들 무렵 어떤 여류문인과의 염문관계를 폭로하는 ‘괴편지’가 전 임원들에게 배달되어 한동안 고통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는 미남형의 외형과 지적인 시인의 면모가 함께 어우러져서 빚어낸 하나의 사건이었다. 소위 문협 사인방시절부터 문협 주변에서 살아온 그에게는 항상 김시철, 성춘복 선생과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위의 ‘괴편지’ 이후에 일거일동을 확인하는 사모님에게 이들은 보증인이 되어야 했다.
서울 대학로 문예진흥원 앞 공원에서 거행된 문인장에는 많은 회원들이 명복을 빌었으며 ‘인명재천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당신이 우리에게 안겨준 이 충격은 너무나도 놀랍고 노라운 것이어서 그거 망연자실할 뿐이오. 그렇게 지금 당신은 우리 곁은 떠나고 있소’라는 김시철 선생의 조사와 강 민 선생의 조시는 우리를 오열하게 했다.
그는 사모님 송여사와 세 딸을 슬픔으로 남겨두고 강원도 문막쪽 귀래저수지 근처 원주공원묘원에서 안식에 잠겨 있다. 며칠 전 11주기를 맞아서 한국문학의 집에서 ‘음악이 있는 문학마당’에 지인들이 모여서 추모문학의 밤을 열고 그를 기렸다.
*[문학공간] 2009. 9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