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시집 『혼자 춤추는 異邦人』
서정을 갈무리하는 방식
이 기 철
(시인. 전 영남대학교 교수)
시를 쓴다는 일이 때로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 우리를 참담하게 만들기도 한다. 시를 쓴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왜 쓰느냐' 하는 자기 질문을 우리는 수없이 되풀이 하면서 시를 생각하기도 하고 다듬기도 한다. 어떤 시인이든지 이같은 질문, 이같은 다듬음을 자기에게 던지지 않는 시인은 없다.
우리의 경험으로는 대체로 몇 번씩은 시를 버리고 다시 되찾는다. 버린다는 말은 괴로움 속의 길 찾기인 시를 포기해 버리고 싶은 때 오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고 되찾는다는 말은 포기해 버리고 싶은 시가 스스로도 모르게 잠자리에, 식탁에, 책상 위에 스스로를 찾아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랄 때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생각하면 시를 쓰지 않고 편하고 윤택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도 시인은 그러한 편하고 윤택한 길을 택하지 않고 어렵고 괴로운 시의 길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한 번 택한 시의 길은 이미 시인에게는 운명과 같은 것이 되어 바꿀래야 바꿀 수 없는 생의 반려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 같은 삶의 길을 택한 사람들이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이젠 기쁨과 슬픔, 번뇌와 열락의 길은 모두 시와 맞물려 있다. 시가 기쁨이고 시가 슬픔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에도 우리는 가난하고 고달픈 시를 쓰면서 살아가고 있다.
김송배 시인이 한꺼번에 3권의 책을 펴냈다. 시집으로『혼자 춤추는 이방인』, 시선집으로 『허물벗기 연습』, 산문집으로『그대, 빈 가슴으로 대학로에 오라』가 그것이다. 이 세 권의 시집과 산문집은 모두 1994년 여름을 통해 펴낸 책들인데 이로써 김송배 시인은 그의 끊임없는 창작의 욕, 축적된 시혼을 이번 여름을 통해 유감없이 발휘한 셈이다.
세 권의 책들을 한꺼번에 받았기 때문에 모두를 통독할 시간의 여유가 없어 우선 그의 시집『혼자 춤추는 이방인』만을 읽고, 그의 시의 면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나는 김송배 시인을 소박하고 거짓 없는 서정시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김송배 시인에게는 실례가 되는 말인지, 치하가 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아는 김송배 시인의 풍모는 그런 것이다. 그밖에 내가 김송배 시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고향이 나와의 이웃, 합천이라는 것과 연배가 나와 동년배라는 것뿐이다. 그 말은 김송배 시인의 교유는 주로 작품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내가 아는 김송배 시인은 서정시인의 바탕과 자질을 갖추고 있는 시인인데, 나는 이번 시집『혼자 춤추는 이방인』에서도 그런 점을 확인 한다.
우리 집 식탁은 잔잔한 여름 들판이었다
무리 지어진 푸성귀들이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빈 접시에 담겨지고
혼을 불러
꽃 향기를 피웠다
정갈한 몇 마디의 언어
빈 접시와 나란히
여름 들판에 누워있다
나도 가끔 빈 접시가 되었다
시처럼
시처럼.
--「그릇, 그 몇가지 실험 · 10」전문
내가 그를 소박하고 거짓 없는 서정시인이라고 말한 바의 시적 체현이 이 시에는 그대로 담겨 있다.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어휘나 행의 처리도 돋보이지만 그의 식탁 위에 놓인 푸성귀들을 보고 거기서 순수한 식물적 언어들을 연상하는 상상력은 일상생활을 배합해 시를 만드는 생활 시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작품임을 읽을 수 있다.
'정갈한 몇 마디의 언어'가 담긴 빈 접시와 나란히 '나도 가끔 빈 접시가 되었다'는 구절은 그런 점에서 감동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활과 서정의 배합으로 시를 창작해 낼 수 있는 그의 감수성은 다음과 같은 시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흙 한 줌만큼이라도 꿈을 쟁깃날에 예리 하게 갈아야 했습니다
한 촉 여린 싹으로 곱게 틔워질
내 깊은 속 뜻
표표한 흙먼지에 길게 잠재우고
아 언젠가 갈무리 되어질 여윈 육신이여,
뜨거운 햇살받이로 증발한 영혼은
마침내 나락으로 함몰하는
아아, 또 다른 꿈을 갈아엎고 있었습니다.
--「경작기」전문
'한 촉 여린 싹으로 곱게 틔워질 / 내 깊은 속뜻'을 쟁깃날에 갈면서 그 깊은 속뜻이 씨앗의 푸른 잎으로 피어나는 날을 기다리는 심정은 '표표한 흙먼지에 씨앗을 잠재우는' 마음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시가 「그릇, 몇가지 실험」과 다른 점은 그가 가진 소박한 자연 친화의 바탕 위에 일상의 고뇌를 담으려 하는 점인데, 그 점이 바로 윗 시의 후반부 '뜨거운 햇살받이로 증발한 영혼은 / 마침내 나락으로 함몰하는 / 아아, 또 다른 꿈을 갈아엎고 있었습니다'에서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음을 우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읽기로는 이번 시집에서 가장 돋보이는 시편들은 시집 전반부의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연작으로 보인다. 이 연작들은 그의 다른 시편들에 비해 행의 길이도 유장하고 구성도 비교적 크다. 연작으로 할만한 시인 자신의 필연성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 필연성이 무엇인가는 정확히 말하기 어렵지만 내가 읽기로는 위에서 말한 서정과 생활, 그리고 삶의 고뇌와 그것을 감싸 안으려는 노력과 따뜻한 마음씨가 아닌가 한다.
나뭇가지마다 돋는 새움은
가을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의 슬픔을 생각하지 않는다
산으로 들로 이어지는 생명의 신비한 햇살에 반짝인다
아니, 생명은 우수수 그냥 떨어지는 늦가을 마른 잎을 싫어한다
당신의 따스한 품안을 노래하는 눈동자
어느 날 잡풀로 쓰러진 불면을 앓는 앞개울에서
휘영청 달빛 사이로 번지는
미물들의 숨소리는 마냥 아름답기만 한데
바람이여, 마지막 남은 나뭇잎은 흔들지 말라
이제 막 설영근 한 톨의 결실을 위해서
온몸으로 피멍든 진통
오, 이 가을 다시 돋아야하는 생명의 아픔을 알겠다
눈물 지우며 뒤돌아보는 어머니
나의 어머니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 5」 전문
전편의 시의 흐름이 미려하고 어휘도 적절하게 안정되어 있지만,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가을의 뭇 생명들의 '피멍든' 결실을 '눈물 지우며 되돌아보는 어머니'의 마음에 비겨 노래 한 것이다.
앞으로 김송배 시인의 시의 향방이 어느 쪽으로 향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바라건데 삶의 따뜻한 감싸 안기로서의 서정시인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와 같은 방향이 반드시 필요하고 바람직스러운 것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94.12.『예술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