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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대 강좌 6- 3 강
p.109~110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업은 마음을 따라 일어나므로 마음은 허깨비와 같다. 만약 이 分別心(분별심)을 떠나면 곧 모든 有趣(유취)를 소멸한다.”고 하셨습니다.
有趣라고 하는 것은 온갖 삶의 갈래. 존재의 갈래를 有趣라고 합니다. 존재의 갈래는 六道(육도). 또는 六識(육식). 지옥 · 아귀 · 축생 · 인도 · 천도 · 아수라. 기본적으로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요.
그 여섯 갈래를 하는 소리입니다. 有趣(유취)를 소멸한다. 그런 것들을 다 소멸한다.
또 어떤 스님이 대주화상에게 묻기를 여기 세 가지 대화를, 큰 스님들의 세 가지 법문을 소개 했는데 참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어떤 스님이 대주 화상에게 묻기를“어떤 것이 대열반입니까?”
“열반” “열반” “열반” 우리가 열반을 얼마나 그리워합니까?
그래서 그것을 물었습니다.
대주화상이 대답하기를 “생사의 업을 짓지 않는 것이 대열반이다.”라고 했습니다.
생사하고 열반은 반대니까 그렇지요.
그 스님이 묻기를 “어떤 것이 생사의 업입니까?” 라고 하니,
이것이 중요합니다. 대주화상이 대답하기를 “대열반을 구하는 것이 生死業(생사업)이다.”라고 했습니다.
뭐 견성 하려고 하고, 도통하려고 하고, 부처님 되려고 하고, 뭘 하려고 하는 그 마음이 생사업이다.
이겁니다.
그러면 그 마음 없으면 불자도 안 되고, 부처도 안 믿고, 공부도 안 하고, 이렇게 될 텐데 그것을 어떻게 하나요?
이것이 막다른 골목입니다. 그 문제는 저는 모르겠습니다.
구하기는 구해야 되는데 그것을 구하는 생사 업 이라고 했으니 정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겁니다.
내 목적지가 바로 여기인데, 이쪽으로 간다고 목적지를 향해서 가는 것이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간단히 다시 정리하면 이 말이거든요. 그렇습니다.
또 고덕이 이르기를 “도를 배우는 사람이 한 생각에 생사를 計較(계교)하면 생사 문제에 대해서 이러고저러고 생각하면,
곧 魔軍(마군)의 길에 떨어지며, 한 생각에 여러 견해를 일으키면 곧 외도에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마군이나 외도나 같습니다.
그러니까 부처 되려고 하는 마음이든지 어떤 마음이든지, 착한 일을 한다. 무슨 보살행을 한다. 이런 마음을 일으켜도 그것은 곧 외도나 마군에게 떨어진다. 이랬습니다.
한 생각 일으키는 것. 그 일으킨 마음을 쫓아가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자선사업이고, 봉사활동이고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枝葉(지엽)적인 것이고,根本(근본)을 드러내야 되거든요.
禪佛敎(선불교)는요. 항상 그 宗旨(종지)가 근본취지가 근본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근본을 떠나지 말라. 이해하시겠지요?
선한일 하고, 봉사활동 하고, 보살행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도덕적으로 아주 좋은 일입니다.
불교에서도 권하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선불교에서는 그것도 이미 근본에서 한 걸음 벗어난 일이다.
근본에서 한 걸음 벗어난 일이라면, 선한 일을 하든 나쁜 일을 하든, 벗어난 것은 똑 같다 이겁니다.
그래서 뭐라고 했지요? 不思善不思惡(불사선불사악)하라. 그랬지요.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한 걸음 벗어난 입장에서는 선이나 악이나 똑 같습니다.
그 까짓 것 뭐 보살행이나 자선사업이나, 무슨 어떤 수녀가 하~~ 평생을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나, 선불교에서 보면 그것 다 지엽적인 일이다.
몇 푼어치 안 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저 앞의 이야기나 똑 같습니다.
열반을 구하려고 하고, 성불하려고 하는데 얼마나 좋은 생각입니까?
그렇지만 그것을 구하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좋은 것을 구하려고 해도 이미 그것은 벌써 근본에서 벗어난 일이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열반을 구하는 그 마음이 이미 生死業(생사업)이다.
답이 나왔지요?
淨名(정명) 유마거사지요. 이 이르기를 “여러 마군은 생사를 즐기지만 보살은 생사를 버리지 아니하고,생사와 더불어 파도치면 파도치는 대로 같이 물을 탄다 이겁니다.
배를 잘 모는 사람은 파도를 잘 타야 됩니다.
외도는 여러 견해를 즐기지만 보살은 모든 견해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마거사의 아주 참 뛰어난 안목이지요.
그래놓고 세 가지 예를 들고, 이것은 알음알이로 벗을 삼고 알음알이를 방편으로 삼아서, 알음알이 위에서 평등한 자비를 실천하고 알음알이 위에서 모든 불사를 짓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는 다만 그가 삼아승지겁의 긴 세월이 空(공)함을 통달하여 생사와 열반이 모두 고요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까도 이야기 했듯이 근본자리는, 우리가 지금 아무리 좋은 생각하고, 별 기가 막힌 대혜스님의 법문을 가지고 이러고저러고 이야기를 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이미 근본자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쑤~ㄱ 물러나와 있는 상황이지요.
그래서 쉬는 시간에 잠깐 생각이 일어나는 것.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생각이 일어난 그 當體(당체)자리를 한번 생각해봐라.
그것이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정리할 수가 있겠지요.
‘나는 누구인가?’ 그 화두나 똑 같은 겁니다.
생각이 일어난 그 근본자리. 당체자리를 한번 살펴봐라.
거기에는 삼아승지겁 이라는 긴 세월이 없습니다.
삼아승지겁 이라는 것이 없어요.
거기는 부처도 없고 조사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자리입니다.
그런 묘한 자리가 우리 개개인에게 이미 다 갖춰져 있으니까 숨 쉬고 사는 겁니다.
안 그러면 부처나 달마는 사람이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箇箇丈夫誰是屈(개개장부수시굴)이라
개개가 다 丈夫인데 누가 굴복할 까닭이 있느냐 이겁니다.
우리도 다 똑 같은 세계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 자리는 석가가 가졌다면 나도 가졌고, 달마가 가졌다면 나도 가졌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를 잘 활용할 줄 알고, 우리는 그만 물에 떠내려가서 저기 어디 시궁창에나 그런 곳에 그냥 떠내려가서 헤매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불교 공부를 하는 것은, 왜 지금 간화선인가?
그것은 바로 이 근본자리. 우리의 本來面目(본래면목). 참 생명의 그 자리를 좀 찾아보고, 최소한도 그 자리 주변에서 맴돌자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가 손에 딱 잡혀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면 그 자리 주변에서라도 좀 맴돌기 위해서 이런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선불교 공부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바로 그 근본자리에서 가깝게 우리가 맴돌자.
그러다 보면 어느 문이 나타나고 확 문 열고 들어가면 될 것 아니냐 이겁니다. 이 강당 주변에 와서 맴돌다 보면 수위가 문을 썩 여는 수가 있어요.
그럼 그냥 쑥 들어가 버리세요.
그런 맴도는 훈련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불교 공부를 하고, 참선을 하고 선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예를 들어서 토요 정진 회라든지, 일요 정진 회라든지에 쫓아다니면서 이렇게 한 번 맴돌아 보는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바로 그 근본자리에 탁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냥 萬事休(만사휴)입니다.
모든 것을 다 쉬어요.
그 때쯤 되면 일을 마친 대장부입니다.
그러면 뭐든지 해도 괜찮습니다.
무엇이든지 상관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표현을 여기서 한 것입니다.
알음알이로 벗을 삼고 알음알이로 방편을 삼아서, 알음알이 위에서 평등한 자비를 실천하고 알음알이 위에서 모든 불사를 짓는 것이다.
이 우리 알음알이.
이것 대단한 것입니다.
근본자리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하더라도 온갖 공능이 있습니다.
알음알이의 공능이 대단합니다.
달나라도 가지요.
우리나라도 며 칠 안 있으면 달나라 간다 네요.
컴퓨터니 인터넷이니 온갖 과학기술. 의료기술. 전기. 전화 등등 온갖 기술들이, 이것이 뭡니까?
전부 망상에서 이룩한 공덕입니다.
알음알이가 만들어낸 큰 공능입니다.
그것이 아주 묘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그것이 묘입니다.
망상할 줄 아는 그것이 묘라고요.
선에서 보면 그것이 망상이라고 하겠지만, 또 망상 빼놓고 따로 없으니까요.
우리가 이런 것들도 도외시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래서 알음알이를 나쁜 것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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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간절히 삿된 무리[邪師輩]가 어지럽게 한 말을 따라 귀신 굴속으로 끌려 들어가서 눈을 감고 망상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삿된 선비들의 폐해. 다만 앉아서 공부해야만 그것이 진짜라고 하는 좌선 제일주의 폐해를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공무를 보면서, 가정살림을 살면서, 청소하면서, 빨래하면서, 온갖 할일 다 하면서, 바로 할일 하는 그놈. 그놈을 우리가 내 손으로 콱 잡는 일입니다.
오히려 일상생활하면서 더 좋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쩌면 침체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生活禪(생활선). 活動禪(활동선). 그래서 모든 거사들이 대혜스님에게 극구 와서 이렇게 질문하고 도를 통해가고 하는 것이지요.
진짜 프로는 이렇게 생활선하는 사람이 프로입니다.
선방에만 죽치고 앉아 있는 사람은 대혜스님의 소견에서 보면 그것이 오히려 아마추어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해온 것이 그렇잖아요.
아마추어와 프로가 뒤바뀌었습니다.
여러분들이 프로입니다.
아마추어들이 앉아 있다고요.
근래에 조사의 도가 衰微(쇠미)하고 이런 무리가 삼대와 좁쌀 같이 많습니다. 참으로 한 소경이 여러 소경들을 끌고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으니, 심히 가련하고 불쌍합니다.
그러니까 모두 그것이 좋다고, 좌선하는 것이 진짜 공부라고 생각을 하고는 자꾸 그것을 권하는 겁니다.
그것이 지금 유행입니다.
그냥 하던 일 하면서 거기서 챙길 줄 아는 그것이 진짜 살아있는 공부인데, 꾸역꾸역 먼 길 가서 몇 시간이라도 앉아 있어야 그것이 공부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제가 그 전에 조계사 앞에 불교서점에서 서적을 산다고 하는데, 어떤 거사 분들이 두 분 앉아서...
이것을 아주 여러 번 이야기해서 그 거사 분한테 참 미안한 일인데요.
아~ 자기는 지금까지 좌선한 것이 계산 해보니까 2000 몇 시간이더라고...
또 한 사람은 아~
그러냐고 하면서 자기는 아직까지 그렇게 안 되고 1000시간이 좀 넘었는가?
하는 소리를 제가 들었어요.
그래서는 야, 어쩌다가 저 열정. 선불교에 대한 저 열정을 가지고 바로만 들어갔다면, 저런 사람들이 상당한 경지에 올랐을 텐데,
앉아 있는 시간 계산하고 공부가 얼마 됐다고 이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을 제가 직접 듣고 직접 봤습니다.
그 때도 그런 아마추어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천하에 둘도 없는 간화선의 최고가는 지침서.
이 서장을 가지고 우리가 눈을 확실하게 밝혀야 되는 것입니다.
선에 대한 바른 안목을요.
원컨대 당신은 척추를 굳게 하여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마십시오.
이것은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말이지요.
이런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비록 잠시 냄새나는 가죽부대에 구속되어 있는 것을 문득 구경의 진리로 여기더라도, 냄새나는 가죽부대.
이 몸뚱이를 딱 고정시켜 놓은 것을 최고의 진리라고 여기더라도 마음이 어지러운 것은 오히려 아지랑이와 같을 것입니다.
몸은 떡 앉아 있는데 이놈의 마음은 천리만리로 가서 온갖 세상 시비 다 하고, 온갖 좋은 일, 주지 다 하고, 몸은 앉아 있는데 그러고 있는 겁니다.
이거 그대로 이야기 해 놨네요.
몸은 딱 앉아 있는데 마음이 어지러운 것은 오히려 아지랑이와 같을 것입니다.
비록 마음이 잠시 멈추기는 하나 돌로 풀을 눌러둔 것과 같아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돌로 풀을 눌러 놔 보세요.
그것이 그렇다고 뿌리가 죽나요?
나중에 보면 노오랗게 새싹이 옆으로 비집고 나와요.
우리의 마음 됨됨이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앉아서 누른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공부를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활발발 하는 것.
바로 위없는 보리를 구하고 구경의 안락한 곳에 이르고자 한다면 또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래 가지고는 안 될 일이다 이것이지요.
그런 식으로 공부 하는 것이...
應無所住而生其心(응무소주이생기심) 금강경.
소의경전이라서 다 아시잖아요.
본래 이 마음은 활발발하게 작용하게 되어 있는 것이 마음의 속성입니다.
본래의 모습이 그런 것이라고요.
그것을 그렇게 구속해서 한 곳에 가두면, 억지로, 억지로 가두면 가둬지긴 해요. 잠깐은 가둬져요.
그렇지만 마치 돌로 풀을 누른 것 같아서 옆으로 비집고 나와요.
어느새 망상이 와서 천리만리 내 닿고 있는 겁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내 마음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한 인간을 사랑하는 일도 좋아할 때는 영원히, 영원히 그냥 억 만년이라도 오로지 당신만을 이렇게 하지마는,
그것은 그 순간에 하고 싶은 소리일 뿐이지 세상에 그런 마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마음을 가졌다면, 왜 사랑 안 하다가 이제 와서 사랑 한다고 그래요?
그것은 변한 것 아닙니까?
자기도 금방 변해 온 것입니다.
변해서 거기 와서 영원히, 영원히 라고 읊조리고 있지만, 금방 변해 왔는데 그것을 잊어버리고는...
그렇게 변해서 왔듯이 또 그렇게 변해갑니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라고요.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의 마음인데 어쩌란 말입니까?
그것을 알아야 된다 이 겁니다.
잠깐 붙들어 매 놨다 합시다.
사람이 와서 그렇게 붙들어 매면 상당히 오래갈 것 같지요?
돌로 풀을 누른 것과 같아서 어느새 다른 방향을 향해서 노오란 싹이 비집고 나가는 겁니다.
그것을 너무 믿지 말라고요.
스님들은 세속 생활에 찬물 끼얹는 사람이지요. 하하하~~~
부처님이 그랬으니까 할 수 없는 것이지요.
부처님의 맏아들이 되어서 안 닮을 수 있나요?
찬물 끼얹어야지요.
그 찬물 끼얹고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정신 좀 차리면서 현실을 현실대로 파악하면서 살면 훨씬 가뿐합니다. 훨씬 가뿐하고 이득이 많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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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또한 자기의 과거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무리의 가르침[所誤]을 받았었습니다.
뒤에 만약 참다운 선지식을 만나지 못했다면 거의 일생을 헛되이 보낼 뻔했습니다.
항상 생각함에 곧 참을 수가 없습니다.
아~ 과거 오랜 세월동안 내가 엉뚱한 데로 헤맨 것을 생각하면 지금 참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이 스님이 화가 나서 입에다 거품을 물고 비방하고 그러는 겁니다. 그것이 선지식이지요.
무슨 목석처럼 점잖게 가만히 있는 것이 선지식이 아닙니다.
과거 내가 불교공부를 잘못 한 것을 생각하니까 지금 이를 갈고 싶고,
그냥 갈아서 마시고 싶을 정도로 분이 끓어오른다는 말입니다.
우리 불자들도 불교가 좋고 부처님이 좋아서 인연을 맺었는데 엉뚱하게,
우리 스님들 출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엉뚱한데 가서는 허송세월하는 스님들도 많고,
또 엉뚱한 사찰에 인연을 맺어서는 그만 불교의 바른 길로 들어서지 못하고 엉뚱한 데로 헤매서는 몇 십 년을 그냥 엉터리 불교를 공부하는,
그것은 공부도 아니지요.
공부라는 말을 붙이기가 해당이 안 되는 허송세월하고, 또 엉뚱한 데로, 그야말로 同墮地獄(동타지옥)가는 사례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것은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자꾸 이것을 바로잡아 줘야 됩니다.
바로 안내해 주고요.
이 대혜스님 같이 욕을 먹더라도 바로잡아 줘야 됩니다.
“내가 네한테 이익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正道(정도)로 가라.
正法(정법)으로 가라.
제발 좀 정법으로 가라.
나를 미워해도 좋다.
욕을 해도 좋고 그 미움과 욕을 다 들어가면서 나는 당신을 정법으로 인도하고 싶다.”
이 정도의 용기를 가지고 우리 불자들이 방력 있게 나가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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