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빠나사띠 숫따 - Introduction to the Anapanasati Sutta
Introduction to the Anapanasati Sutta
아나빠나사띠 숫따 (호흡에 대한 사띠수행을 말한 경전)의 소개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화를 내며 비판할지 모른다.
이 책은 ‘붓다가 집중(사마타)명상과 위빠사나 명상으로 2가지
서로 다른 형태의 명상을 가르쳤다’는 편견과 다른 입장에서 말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쪽에 치우친 신념을 빨리어로 ‘에깜소-와다’라고 부른다.
이 말은 자신의 견해만 옳고 다른 견해는 모두 그르다고 여기는 편견을 뜻한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어떤 사람이 붓다의 가르침과 다르거나 새로운 견해를 가졌을 때
그 사람에게 화내지 말고, 먼저 유연하게 들어라’라고 당부했다.
붓다는
‘그가 주장하는 바를 면밀하게 들어보고 나서 붓다의 가르침(경전)과 옳고 그른지 비교하라’
고 말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붓다의 가르침(경전)’이다(주석서 또는 복주석서가 아니다.)
‘화내지 말아라’라는 붓다의 권고는 마음이 오염되지 않게 지켜낸다.
화내는 과정에서 그 비판이 올바른지 판단 할 수 없게 된다.
이 책은 경전에 근거하여 명상수행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을 설명할 것이다.
“이 방식만이 명상 수행의 유일한 방법이다”라는 편견을 꼭 붙들고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정직하게 숙고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옳은 길에서 벗어나 있을지 모른다.
어떤 가르침이 최고의 개념을 갖는 것처럼 보여도 그 가르침에 대해
경전과 비교하여 종종 질문하고 조사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붓다의 가르침에서 멀어질 수도 있다.
붓다는 편견과 단견에서 오는 무익함과 어리석음을 이와 같이 비유했다.
옛날에 어느 왕이 재미 삼아 왕실 코끼리와 태어날 때부터 장님인 사람들을 데려오게 했다.
그리고 장님들에게 코끼리를 만지고 나서 코끼리의 모습을 묘사하게 했다.
코끼리의 꼬리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가 빗자루의 비와 같다고 했다.
다리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가 나무와 같다고 했다.
몸을 만진 사람은 코끼리가 벽과 같다고 했다.
귀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가 농사용 풍구와 같다고 했다.
장님들은 코끼리의 모습을 모두 다르게 설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만이 코끼리의 모습을 진실하게 묘사했다고 확신했다.
그들은 코끼리의 일부분만 만진 것을 깨닫지 못했고 단지 한쪽에 치우친 진실만을 알았다.
장님들은 서로와 논쟁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견해를 고수했다.
그 논쟁은 싸움과 격투로 끝이 났다.
왕과 신하들은 장님들이 계속 서로 싸우고 결투하는 것을 보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붓다는 이와 마찬가지로 단견과 편견으로 진리와 사물을 본다면
철학자뿐만 아니라 수행자들도 서로 논쟁하고 싸우는 것을 지적했다.
그런 이들은 자신의 견해에 독선적으로 집착하, 홀로 진리를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붓다들은 진리의 모든 측면을 보고 고려한다.
경전이 주석서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비록 경전에 대한 주석서들이 유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석서가 붓다의 원래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을 꼭 확인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불교는 결코 한쪽에 치우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불교적 사고방식과 견해는 다방면에 걸쳐 경험되고 다각적인 시각을 가진다.
진리가 다양한 면을 가진다면 한쪽으로 치우친 방식에서 말해 질 수 없다!
그래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록 세상이 여래와 논쟁할지라도 여래는 세상과 논쟁하지 않는다.
모든 진리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과 논쟁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붓다에게 그의 견해를 물었을 때 붓다는
“여래의 견해는 이 세계의 인간, 성인, 악인, 그 어떤 사람과 대립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불교인의 태도가 이와 같다면 어떻게 수행자가 어떤 문제로 서로 그리고 세속 사람들과 투쟁할 수 있겠는가?
명상 수행자가 독선적인 태도를 가질 때 진리(담마)를 찾는 것을 그만둔다.
독선주의는 모든 이들을 - 열린 마음과 청정한 마음을 구하는 사람들마저도 - 떼어놓기 때문이다.
독선주의는 투쟁을 일으키고 독설을 퍼붓게 한다.
명상과 정신적 정화는 우리에게 자비, 연민, 인내를 가르친다.
그렇다면 어떻게 독선주의가 진리의 이름으로 만연할 수 있을까?
“이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라는 선입관에 집착하는 것은 불교인의 태도로 이해될 수 없다.
붓다는
“열려있음(Open), 이것이 죽지 않음에 이르는 문이다.
눈에 작은 먼지가 낀 사람이 맹목적인 믿음에서 벗어나 분명하게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라는 말과 함께 붓다는 가르침을 숨김없이 보여주었다.
선불교의 한 이야기에서 이런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어느 날 한 학자가 선사에게 갔다.
그는 선사에게 선의 의미에 대해서 물었다.
선사는 조용히 찻잔에 차를 부었다.
찻잔이 가득 찼지만 선사는 계속 차를 부었다.
학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선사에게 성급하게 물었다.
“왜 당신은 찻잔이 가득 찼는데도 계속 붓기만 합니까?”
선사는 대답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당신은 마음이 가득 차 있는 체로 선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선을 이해하려 하기 전에 먼저 마음속의 선입견을 비우세요.”
부디 이 책을 선입견에서 벗어난 열린 마음으로 즐겨 읽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