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요
1)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가는데 허리에 끈을 묶고 들어가는 이유는?
2) 지성소 안의 제일 안쪽에는 베레쉬트(여성) 근본 하나님이 거하시는 것을 비유하였다.
3) ‘엘로힘’ 하나님의 역할은 ‘베레쉬트’ 하나님을 드러나게 하는 것인데 드러난 그 결과는?
나. 본론
“내가 땅(게)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번역이 잘못되었다.
(카고 에안 휩소도 에크 테스 게스 판타스 헬퀴소 프로스 에마우톤)
바른 번역은 ‘내가 그 게(혈과 육, 썩은 마음)로부터 나와 (공중으로) 하나님에게로 들어 올려 지면(수동태), 모든 사람들을 나에게로 이끌겠노라.’다.
내가 세상(몸과 마음)의 썩은 정과 욕심으로부터 나와서 십자가에 매달아 지면 그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많은 사람들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는 뜻으로 깨달음을 갖는다는 뜻이다.
1)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가는데 허리에 끈을 묶고 들어가는 이유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간다. 따뜻한 짐승의 피를 들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때는 옷에 방울을 달고 허리에 끈을 묶고 들어간다. 대제사장이 지성소 안에서 움직이면 방울 소리가 나서 살아 있구나 하는 것을 밖에서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대제사장이 죽은 것이 확실하므로 밖으로 끌어내야 하는데 이때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죽을 수밖에 없으므로 대제사장의 몸과 연결된 끈을 밖으로 잡아당겨 시체를 지성소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는 의미로 표현했는데 이 내용은 성경에 없는 내용이다.
대제사장이 지성소 안에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릴 때 먼저 향을 뿌려야 하는데 향을 피워놓고 눈을 떴을 때 휘장에 그려져 있는 천사의 모습이 보이면 대제사장은 죽게 되며 그 시체를 지성소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 대제사장의 눈에 천사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은 비유로 마음이 생겼다는 의미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생겼다는 뜻이다.
휘장(마음) 너머에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없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생기면 세상에 속한 자가 되는 것이다. 창 1장 여섯째 ‘욤’에 ‘자칼’과 ‘네케바’가 등장한 다음 무색계 천상 너머에 ‘베레쉬트(근본)’가 있다.
그래서 지성소 안에서는 어떠한 몸과 마음도 없다는 것을 비유로 설명하였을 뿐이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몸과 마음)의 어떠한 작용도 없는 것이 지성소 안이다. 태어남은 고통이다. 고통이 없으려면 태어나지 않아야 한다. 십자가에서의 몸과 마음의 죽음이 무아다. 이 내용이 성경의 핵심 내용이다.
- 디도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침입하였을 때 유대인들은 모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성전의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경우, 모두 죽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로마군에 의해 성전은 불태워졌고 법궤도 사라졌다. 로마 군대는 전멸되지 아니하였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하나님이 떠나신 것을 생각하며 통곡의 벽에서 슬퍼하였다. 모두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비사와 비유로 설명한 것을 알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다.
2) 지성소 안의 제일 안쪽에는 베레쉬트(여성) 근본 하나님이 거하시는 것을 비유하였다.
‘베레쉬트(여성)’는 지성소 안의 제일 안쪽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비유하였다. 근본을 지칭한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번역한 ‘엘로힘(남성)’은 휘장에 나타난 천사로 비유한다. ‘엘로힘’과 ‘베레쉬트’는 하나님이며 근본이다. 창 1:1에 하나님이 두 번 나오는데 하나님이 둘이 아니라 그 속성이 둘이라는 것이다. ‘베레쉬트’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우리의 근본을 비유한 것이며 ‘엘로힘’ 하나님은 ‘베레쉬트’를 드러내는 역할에 머문다.
‘베레쉬트’는 우리의 마음 너머에 거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아무리 정결하고 성스럽다고 해도 ‘베레쉬트’를 만날 수 없다. 우리가 아무리 눈물을 흘리고 애원해도 ‘베레쉬트’ 근본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마음으로는 알 수 없다. ‘베레쉬트’는 우리의 마음과 가깝지만,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하나 될 수 없는 관계다. 우리 마음 안에는 죄가 있다. 이 죄와 하나님(베레쉬트)은 함께 거할 수가 없다.
그러면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 것인가? 아니다. 그래서 엘로힘 하나님이 등장하는 것이다.
비유로 ‘엘로힘’ 하나님은 지성소의 휘장에 나타나 있다. 휘장은 우리의 마음을 비유한 것이다. 바로 ‘엘로힘’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맞대면 하여 있다. 우리의 죄가 있는 마음과 맞대면 하면 반드시 충돌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이것을 ‘창조하다’로 오역한 ‘바라’다. 이 충돌이 일어나면 마음에 있는 육신의 정욕 안면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심판을 받아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성경에서 말씀하는 고난의 과정은 시작된다.
우리 인간은 감각적 욕망을 정말 좋아한다. 이것들이 없으면 삶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성경에서는 이 고난을 과정으로 생각하여 반드시 거쳐야 할 유익한 것이라 한다. 지성소 제일 안쪽에 거하시는 하나님(베레쉬트)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창세기에 이방인들을 모조리 죽이는 수많은 전쟁 이야기가 서술되어 나오고 있고, 짐승을 번제로 드리는 이야기와 일천번제(一天燔祭)를 드리는 내용도 등장한다. 모두 내 안에 번뇌 망상 곧 짐승이 나타나면 잡아서 끊임없이 죽여서 번제로 드려야 한다는 실제 이야기를 비유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새 언약 안에서는 참 아이(속사람)가 나타나면 거짓 아이(겉 사람)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계시록에도 수많은 죽음이 등장하는데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번뇌 망상(마음)들을 모두 죽이는 것으로, 비유로 말씀하고 있다. 번뇌 망상들은 죄를 가지고 있다. 무명에서 기인한다. 십사만 사천으로 비유하며, 불경에서는 팔만사천 번뇌로 비유한다.
사람들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전쟁의 신으로 오판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 되면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몸 밖의 전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며, 세상에 속한 생명들을 죽이는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에서는 실인 살생을 금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마음과 대면하면서 충돌하는 내용이 성경 전체의 이야기이며, 모두 비사와 비유의 관계로 기록된 말씀이다. (어느 종파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이 죽이라고 해서 죽인다고 한다. 오해한 것이다)
하나님이 내 안에 임하면 감각적 욕망인 그 적을 없애야 하는 진통의 과정은 클 수밖에 없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이 내 안에 오시면서 일어나는 현상을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3) ‘엘로힘’ 하나님의 역할은 ‘베레쉬트’ 하나님을 드러나게 하는 것인데 드러난 그 결과는?
여호와 하나님(엘로힘)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사라지지 아니하였다면 아직 베레쉬트가 내 안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몸 된 성전이 내 안에 온전히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 된 성전이 세워지면 반드시 ‘엘로힘’ 하나님은 사라져야 한다. 이것이 신약에서의 십자가 사건이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내 안의 그리스도 예수로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 보혜사 성령(오역)으로 번역한 ‘파라클레토스(근본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임하게 된다. 불경에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같은 내용이다. 이때부터는 하나님은 없다. 내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며, 성경에서는 그리스도 또는 단독 자 그리고 에클레시아로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다.
새 언약에서는 몸 된 성전을 세우는데 방해가 되는 세력이 있다. 사탄 마귀(겉 사람)다. 곧 밖의 육체 예수다. 에덴동산 안에 있는 뱀으로 그려져 나온다. 밖의 육체 예수를 여전히 섬기고 받들고 예배드리고 한다면 내 안에 몸 된 성전이 세워질 수 없다. 반드시 그 예수를 쫓아내야 한다. 그래서 모세가 광야에서 놋 뱀을 장대에 높이 매다는 것이 뱀은 뱀인데 놋 뱀(심판)이다. 깨달음을 남기고 가는 뱀이다. 몸 밖의 그 육체 예수 곧 대상의 하나님이 사탄 마귀이며, 거짓말하는 자이며, 속이는 자 곧 루시퍼로 등장한다.
이 사탄 마귀가 내 안에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마음 안을 해체하여 그 실체가 무엇인지 반드시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자기가 거짓 마음에 속아 넘어간다.
창 1:1에 나타난 엘로힘(하나님)은 ‘창조하다’로 오역한 ‘바라’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바라’의 속성 때문에 우리가 결국은 내 안에 있는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 ‘바라’의 속성이 십자가 사건을 가져온다. 십자가의 속성이 없으면 사생자다. 이 ‘바라’의 속성을 가지신 이를 ‘엘로힘’이라 부르며,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다. 몸 밖에 있는 하나님은 사탄 마귀이며, 속이는 자이며, 바알 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모두 몸 밖의 예수가 주는 술에 취해 있어서 가짜 하나님을 섬기며 경배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했다. “나는 너의 선생이 아니다. 너는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내게 속하고 내가 널리 퍼뜨린 넘치는 샘에 도취 되어 있다(도마복음 13)”
각자 안에서 근본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였다. 자신은 중매쟁이 역할만 하고 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 역할을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는 한 번만 감사하면 될 일이다. 그 핵심을 이룬다면 그 보답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바라’하시는 것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이 너무도 힘들고 싫기도 하다. 내 뜻대로 하지 못하고 세상과 거꾸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세상에서도 재미있게 놀고 즐길 것은 즐기고 천국에도 가고자 한다. 길들여지지 않은 마음, 술 취한 마음을 따라 풍류를 즐기면서 오락을 하고자 한다. 그래야 스트레스도 해소되고 남에게도 자랑거리가 된다. 수다를 떨어야 삶의 의미가 생긴다. 안 그러면 우울증도 오고 심하면 정신병이 온다.
그래서 이 길은 가는 자만 갈 수 있는 경수가 끊어진 자들이다. 대부분 큰 환란과 고난을 만나서 울부짖다가 지친 자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세상(코스모스)에서는 이들을 미련한 자, 바보라 한다. 부자들에게 권세 있는 자들에게는 조롱거리이며 비웃음거리다. 그래서 이들이 다시 만든 하나님이 대우주를 창조한 위대한 하나님이며, 돈 신, 권세 신이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이 마귀 사탄이 더더욱 사람의 마음 세상을 꼬이며 지배한다는 것이 성경 기록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간결하게 말씀하신다.
‘하나님과 재물(두 주인),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없다(눅 16:13).’ 내 욕망을 이룬 자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불행하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