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빙글리의 신학을 계승한 불링거는 성찬론에 있어서 칼빈의 제네바 교회와의 차이점을 극복하고 취리히 합의신조를 이끌어냈다. 불링거가 1566년 발표한 제2차 스위스 신앙고백은 스위스 연방의 모든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의 근거가 될 만큼 츠빙글리주의를 안착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츠빙글리는 불링거와 칼빈을 통해서 칼빈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칼빈은 츠빙글리의 근본적인 신학을 이루고 있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명백한 차이를 강조하는 신 인식에 공감하였다. 츠빙글리의 영향은 칼빈의「기독교 강요」최종판의 서두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인식’이라는 문구에도 나타나 있다. 또한 후대의 칼빈주의에서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이란 용어가 널리 사용되었다.
츠빙글리의 신학은 오늘날 서유럽의 민족국가 지도를 대략적으로 탄생시키는 데에도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교황과 교황의 인준을 받은 황제의 신적인 권력을 투쟁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반대했을 뿐인데도 1648년 서유럽 게르만 세계의 종교전쟁을 종식시킨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됐기 때문이다. 이 조약으로 칼빈주의를 수용한 개혁교회가 합법적인 교파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츠빙글리의 신학적 유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구분선 아래에서 확인해 보자.
조용석, 『츠빙글리, 개혁을 위해 말씀의 검을 들다』(서울: 익투스, 2014), pp. 66~73.
1531년 제2차 카펠 전투에서 츠빙글리가 전사한 후,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가 후계자직을 계승하게 된다. 그는 츠빙글리의 신학적 출발점인 예정론을 그대로 수용했고, 그 결과 유기된 자들의 저주에 대한 명백한 진술을 표명하는 칼빈의 이중예정론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성찬론 역시 츠빙글리의 입장을 존중했다. 그러나 이를 성령론적 전망 속에서 다시금 바라보았다.
1549년 칼빈과 불링거는 성만찬에 대한 이해에서 취리히와 제네바 교회 간의 차이점을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과 루터의 공재론을 비판하며, 성령의 사역은 물질적인 떡과 포도주에 구속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취리히 합의는 제네바와 취리히 교회 사이의 화해를 가져왔으며, 이로 인해 칼빈은 스위스 개혁교회 안에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칼빈주의와 루터주의 간격은 더 멀어졌으며, 동시에 칼빈주의가 츠빙글리주의를 대체하는 효과를 가져 왔다.
츠빙글리와 마찬가지로 불링거 역시 여러 차례 자신의 신학을 개괄적으로 제시했다. 이 가운데서 가장 널리 전파된 것이 바로
1566년의 '제2차 스위스 신앙고백'으로, 이는 스위스 연방 내외에서 모든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적인 근거로 활용되었다. 전반적으로 평가해보면 츠빙글리주의는 불링거 시대에 와서 안정적으로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불링거는 1504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 가톨릭의 사제였다. 다시 말하면 불링거는 사생아였다. 그는 1529년 로마 가톨릭의 사제직을 버리고, 개혁교회로 교적을 옮겼다. 그는 자녀를 열한 명이나 두었는데, 특이한 것은 매우 자상한 아버지로 평판이 자자했다는 것이다. 사제의 사생아로 태어나 불운한 유년시절을 보냈을 텐데, 오히려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극복했던 것 같다. 이러한 그의 모범적인 결혼생활은 종교개혁운동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자상한 아버지의 교육적인 영향 때문인지 그의 아들은 모두 성장하여 목사의 길을 걸었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칼빈주의는 취리히의 종교개혁과 함께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츠빙글리는 불링거와 칼빈을 통하여 칼빈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츠빙글리를 개혁교회 창시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츠빙글리와 칼빈 사이의 차이점도 간과할 수 없다. 불링거는 츠빙글리의 선지자적 신정정치의 이념을 계승하여 교회와 국가가 밀접한 상호협력 관계 속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링거는 항상 설교단에서 선지자적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그러면서도 교회만의 고유한 자유 영역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츠빙글리처럼 정치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반면에 칼빈은 교회와 국가를 향한 그리스도의 통치를 주장하면서 불링거에 비해서 교회의 자유를 더욱 강조했다. 여기에는 그가 프랑스에서 겪었던 박해, 제네바에서 사역하며 경험했던 의회와의 갈등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칼빈은 츠빙글리의 하나님 이해, 특히 하나님과 피조물의 명백한 차이를 강조하는 그의 근본적인 신학적 입장에 공감했다. 이는 후대에 이르러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Extra Calvinisticum)이라는 개념으로 회자되었다.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은 일반적으로 "칼빈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밖에서(Calvinistic beyond or outside)'"라는 의미로 성만찬 논쟁에서 불거져 나온 것인데,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성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인성 밖에 초월하여 계신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피조물 또는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인 차이를 강조하는 스위스 개혁자들의 기본적인 신학 사상의 특징을 지칭하는 용어로 불린다.
이 개념에 대해 좀 더 부연설명을 하자면, '참된 예배와 거짓된 예배의 구별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표현할 수 있다. 참된 예배는 보이지 않는 절대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며, 거짓된 예배는 피조물인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츠빙글리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사 순서 중 성찬식에 결정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떡과 포도주가 사제의 축성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된다는 교리(화체설)에 근거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찬식이야말로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이 숭배의 대상이 된 대표적인 우상숭배의 증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근거하여 루터의 공재설 또한 화체설을 근본적으로 개혁시키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피조물 또는 인간은 하나님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의 함축적 의미이다.
이 원칙에 의거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가 고안한 모든 인간적 제도가 비판을 받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교황의 신적 위치가 공격받는다. 루터는 반가톨릭 전선에 앞장서면서 서유럽 세계의 반교황주의 운동의 포문을 열었지만, 츠빙글리와 칼빈처럼 하나님과 인간의 전적인 차이를 부르짖으면서까지 투쟁하지는 않았다. 츠빙글리와 칼빈은 반교황주의 운동의 성경적 근거를 최종적으로 제시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자.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일 뿐이다. 따라서 교황이 교리를 만들 수 없다. 교리는 오직 성경말씀에서 나온다.
중세의 신정정치 이념은 교황만이 추구한 것이 아니다.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와 스페인을 비롯한 영국까지도 신정정치를 추구했다. 이와 관련하여 대표적이면서도 단순한 예를 들고자 한다. 무심코 던져본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르만 민족이 중심이 되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가 통치했던 신성로마제국이 왜 이름에 '신성(거룩한)' 이라는 단어를 붙였을까?"
그들은 로마제국의 합법적 계승자인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에 항상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동로마제국은 황제가 곧 교황의 역할을 자임했다. 하지만 서유럽은 그렇지 못했다. 서로마제국의 후예라고 자부하는 로마 교황청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교황은 신성로마제국을 로마 교황청의 방위부대로, 신성로마제국은 로마 교황청을 후견인으로 생각하면서 서로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교황이 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어서 마지못해 교황과 공생관계를 유지했을 것이다. 그래서 '신성'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로마 교황청의 종교적 이념을 수용하면서 공생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정책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 로마 가톨릭 세계의 맹주이자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교황인 것처럼, 교황의 인준을 받은 황제도 그리스도에게서 안수를 받은 엄연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군림할 수 있었음을 당시 상황을 통해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다른 예를 들면, 영국의 종교개혁을 주도한 헨리 8세 또한 자신의 이혼사건을 계기로 교황의 인준을 거부하고 스스로 영국의 교황이 되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이혼사건은 유럽 대륙으로부터 분리를 시도한 앵글로색슨 민족의 열망이 담긴 역사적 사건이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헨리 8세의 이혼이 영국 성공회의 원인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매우 짧은 역사적·신학적 식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전적인 차이'를 주장한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은 당시 시대적 정서에 반항하는 매우 강한 폭발력을 지닌 중요한 신학적 개념이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서유럽 게르만 세계의 종교전쟁이 종식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칼빈주의를 수용한 개혁교회는 합법적인 교파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루터교회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을 통하여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인준을 받아 보호를 받게 되었지만, 개혁교회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터교회는 가톨릭교도인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비호를 받게 되었기 때문에 황제가 지닌 준교황적 위치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개혁교회는 칼빈주의가 근본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하나님과 인간의 전적인 차이' 에 근거하여 황제의 신적 권한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서유럽의 민족국가 탄생의 포문을 루터가 연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 서유럽의 민족국가 지도를 대략적으로 탄생시킨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은 결국 스위스 종교개혁자들의 공로였다. 그들은 민족국가의 성립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투쟁하지 않았다. 오직 교황과 교황의 인준을 받은 황제의 신적인 권력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반대했을 뿐이다. 더 나아가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은 '교회는 인간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주장했다.
이처럼 하나님과 인간(피조물)이 다르다고 주장한 츠빙글리의 생각은 중세 시기에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미신적·주술적 신앙으로부터의 해방을 주도했다. 츠빙글리의 이러한 신학사상은 다음과 같이 과감하게 표현할 수 있다.
인간은 불완전한 죄인이기에 결코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하나님이 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인 것처럼 행동하면서 성례전을 통하여 일종의 종교적 마법을 행사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악습은 사라져야 한다.
첫댓글 아주 좋은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이해는 초신자에게 조금 어려울 수 있지만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거나 혼합되지 않고 구분되어 연합(결합)되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네, 일단 그 정도는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에이프릴 네, 그러셔야 합니다.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 (extra-Calvinisticum, The Calvinistic beyond/outside)이란 영원하신 아들인 그리스도가 그의 초기 지상사역 동안과 영원히 육체 밖에서도 (etiam extra carnem, alsobeyond the flesh) 존재하고 활동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칼뱅신학의 중요한 교리이다. 이 용어는 칼빈파 신학자들을 순수 루터파가 이런 식의 밖에서도(extra)를 강조하는 개혁신학의 주장에 대해 그것을 칼빈신학자들이 주장하는 밖에서 (extra-Calvinisticum)라고 조롱조로 표현하면서 만들어진 신학적 용어이다. 영원한 아들이 지상 사역을 하는 동안에도 육체를 넘어서서 영원히 자신의 존재를 유지한다는 교리이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루터교도들이 개혁주의 신학을 언급할 때 사용하지만 칼빈주의자들은 교부들을 포함한 다양한 기독교인들이 이 교리를 주장해 왔다고 주장한다. 육체 밖에서(etiam extra carnem)라는 신학적 용어는 이미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논의되어 왔었다.
루터파는 인정하지 않는 교리이군요. 개혁주의와 차이가 났겠지만 루터파가 조롱을 했다는 표현이 조금 의외네요.
칼뱅과 extra calvinisticum
extra calvinisticum 관련하여 기독교강요 2.13.4에서 칼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무한한 본질(immeasurable essence)을 가진 말씀이 인간의 본성과 결합하여 한 인격을 이루었다면, 우리는 그가 그 속에 제한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놀라운 사실이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내려왔지만, 하늘을 버리지 않았고(without leaving heaven), 자의(自意)로 동정녀의 태에서 태어나시며, 지상을 두루 다니시며, 십자가에 달리시는 동시에, 그가 태초로부터 하신 바와 같이, 항상 세상에 편만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한 인격안에서 그의 신성과 인성의 온전하게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칼케돈 신조의 핵심 내용에도 충실한 점을 칼빈이 주장한다. 속성간의 전달을 반대하는 개혁파는 신성과 인성간에 어떤 작용보다는 신성은 신성이고 인성은 인성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했다.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있다는 깊은 의미를 위 댓글에서 배웁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extra calvinisticum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Q. 48
[질문 48] 그리스도께서 신성으로는 우리와 함께 계시고, 인성으로는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이 두 가지 본성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까?
[답] 1)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신성은 불가해적(무한하며)이며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분이 취하신 인성의 영역 넘어(extra naturam humanam)에도 계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그의 인성과 연합하여 있습니다.
이렇게 문답식으로 짧게 이야기 하니 조금 더 이해가 되네요.
@에이프릴 네, 공감합니다.
칼빈이 이중예정을 말했어요
칼빈이 이중예정을 말한 바 없고 칼빈 후대의 개혁주의자들이 이중예정으로 강화시켰다고 하는 분들이 가끔 있는데요. 기독교강요를 제발 읽으시면 좋겠어요.
칼빈의 기독교강요 3권 21장 제목이 "영원한 선택: 하나님은 이로써 어떤 이들은 구원에 이르도록, 또 어떤 이들은 멸망에 이르도록 예정하셨음"입니다.
이하 아래 링크를 읽어 보세요.
https://cafe.daum.net/1107/Y4cZ/29
칼빈이 이중예정을 위와 같이 말했는데도 베자가 바꿨다느니 후대에 변개한 것이니 횡설수설 하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이중예정괴 타락전 선택을 선언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도르트 신조보다 더 이후에 나온 것을 모르는 분도 있고요.
독서를 하고 말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중예정을 무슨 대단한 파격적인 이야기로 몰아세우고 새삼스러운 충격으로 호들갑 떠는 분들이 있는데요. 그건 오버 하는 겁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교회가 장로교회이고 이 장로교회의 표준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CF)에 이미 나오는 내용입니다. 혹시 장로교 목사나 소속교인들이 이중예정을 모르거나 부정하거나 충격을 먹었다면 새신자 교육부터 다시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중예정에 관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하 WCF)의 선언을 보겠습니다.
"WCF 3장 3항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자신의 작정을 통해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딤전 5:21, 마 25:41) 영생에 이르도록 예정하셨고, 그 나머지는 영원한 죽음에 이르도록 미리 정하셨다(롬 9:22-23, 엡 1:5-6, 잠 16:4)."
https://cafe.daum.net/1107/YcL1/5
다시 잘 읽었습니다. 이중예정을 이해하려면 먼저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수준의 인간이나 피조물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노베 네, 공감합니다.
이 포스팅 내용에서 많은 배움을 얻습니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을 통하여 칼빈주의와의 관계를 알고, 아울러 하나님의 불가해성과 비공유적 속성을 알게 되어 큰 유익을 얻었습니다.
불링거가 소통의 달인이었다는 평가를 많이 받더군요. 알려진 바와 달리 자상한 면이 많았나 봅니다.
오랫동안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사명에 충실하기도 쉽지만은 않은 일인데, 불링거의 사역으로 개혁을 안착시키고, 영국 청교들에게까지 신학을 전수해주었으니 큰 일을 했군요.
그렇군요.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