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레리 시 15수
(김희보 문학평론가의 해설로 그의 시의 흐름을 알아본다.)
꿀벌
프란시스 드 미오망드르에게
아무리 네 침이 날카롭고
치명적이라 하여도 금빛 꿀벌이여
내 가슴의 부드러운 바구니는
꿈처럼 엷은 레이스를 입었을 뿐이다.
아름다운 표주박 젖가슴을 쏠지니
그 위에서 '사랑'은 죽거나 잠들게 마련
진홍빛 둥글고 순응치 않는 그 살결에
조금만이라도 닿을 수 있게 하라!
나는 재빠른 고통이 무척 필요하다.
짤막하게 끝난 아픔은
까닭 모를 고뇌보다 견디기 쉽다.
나의 감각이여 이 고통스러운
황금빛 침에 의해 깨어나기 바라노니
이것이 없다면 사랑은 죽었거나 잠든 것이다!
[작자]
발레리(Paul Valery. 프랑스. 1871-1945)는 남 프랑스 세트 출신. 몽페리에 법과대학에서 공부하며, 거기서 피에르 루이스와 사귀었고, 앙드레 지드와도 교우 관계를 가졌다. 또한 말라르메와 서신을 주고 받는 기회를 얻어, 후에 화요회(火曜會) 회원이 되었다. 시의 방법론적으로는 에드거 앨런 포의 영향이 결정적이었고, 포, 보들레르, 말라르메로 이어지며, 발레리에 이르러 프랑스 상징주의 시정신의 끝을 장식하였다. 시집으로 <젊은 바르크>, <매혹>, <해변의 묘지> 등이 있다.
석류
너무 많은 알맹이에 버티다 못하여
반쯤 방실 벌려진 단단한 석류여
스스로의 발전에 번쩍거리는
고귀한 이마를 나는 보는 듯하다!
오오 방실 입 벌린 석류여
너희들이 겪어온 세월이
오만하게도 너희들로 하여금
애써 이룩한 홍옥(紅玉)의 칸막이를 삐걱거리게 하여도
또한 껍질과 메마른 황금이
어느 힘의 요구에 따라
찢어져 빨간 보석과 과즙이 되어도
그래도, 그 빛나는 균열은
비밀의 구조를 지니고 있는
내가 지닌 영혼을 생각하게 한다.
[해설]
발레리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 출전했다가 제대한 후 작품을 쓰기 시작하여, '나르시스는 말한다' 등 나중에 <구시첩(舊詩帖)>에 수록되는 다수의 작품을 썼다. 1892년까지 창작을 하던 발레리는, "모든 것은 허무하다" 하는 지적(知的) 위기에 휩싸여, 그 때까지 거주하던 몽페리에를 떠나 파리의 하숙에 들어박혔다. 그 무렵의 사정은 난해한 소설 <테스트 씨와의 저녁 시가>에 묘사되어 있다. 그는 시와 결별할 작정을 하고 옛 시들을 수정하는 동안에 불현듯 시에 관한 흥미가 다시 생겨, 4년 동안에 걸쳐 퇴고에 퇴고를 거듭한 후 시집 <젊은 파르크>를 출판하였다.
애정의 숲
우리는 나란히 길을 따라가면서
순수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름 모를 꽃 사이에서
말도 없이...손을 마주잡았다.
우리는 단 둘이 약혼자처럼
목장의 푸른 밤 속을 걸었다.
그리고 이 선경(仙境)의 열매인
광인들에게 정겨운 달을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끼 위에서 죽었다.
아주 멀리 소근대는 친밀한 숲의
부드러운 그늘 사이에 둘이 묻혀서.
그리고 저 높은 하늘 위 무한한
빛 속에서 우리는 울고 있었다.
오, 나의 사랑스런 말없는 동반자여!
[해설]
시집 <젊은 파르크>는 순수 음악에 가까운 것으로서, 그 격조 높은 음악성으로 해서 "순수시(純粹詩)의 교과서"라고 일컬어진다. 발레리는 이어서 시집 <매혹>을 출판하였고, 산문으로 5권의 평론집 <바리에테>를 출판하였다. 유작(遺作)으로 그의 문학적 고백 <나의 파우스트>가 있다.
사라진 포도주
어느 날 나는 바다를 항해하며
(하늘 아래 어디 있으련만, 지금은 기억에서 사라졌다)
포도주를 조금 바다에 부었으니
'허무'의 제물을 위하여...
오오 술이여, 누가 너의 사라짐을 원하겠는가?
혹은 내가 점쟁이의 말을 따랐던가?
또는 다시금 술이 흐르는 피를 생각하며
내 마음의 비밀을 위하여 순종함인가?
잠시 동안 장미빛 연기가 솟아오르지만
곧 평상시와 같이 투명한
맑은 바다는 그대로이다...
이 포도주가 헛되다 하는가, 파도는 취하였다!
나는 본다, 바다 바람 속에 출렁이는
아주 깊숙한 모습을...
[해설]
발레리는 한때 오랜동안 시를 쓰지 못하여 괴로워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오랜 침묵에서 깨어나 <젊은 파르크>를 쓰게 되었을 때에, 그 작업은 발레리에게 있어서 일종의 정신의 훈련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발레리는 말한다.ㅡ"실신 상태에서 흥분하여 무엇인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걸작을 창조해 내기 보다는 완전히 의식된 상태에서 가진 정신으로 무엇인가 약한 것이 나로서는 바람직하다".(김희보)
발자국 소리
네 발자국 소리, 나의 침묵에서 생겨나
경건하게 천천히 걸어
내가 누운 침대를 향하여
말없이 차겁게 다가온다.
순수한 사람의 모습, 드높은 그림자
상쾌하다, 조심스런 네 발걸음!
신이여!...짐작할 수 있는 온갖 선물이
그 맨발에 실려 있다!
비록 그대가 입술을 앞으로 내밀고
나의 상념(想念) 속에 사는 자를
누그러지게 하기 위하여 미리
키스의 양식을 줄 준비를 한다 하더라도
그 우아한 행위를 서둘지 말지니
꼼짝 않고 있는 이 흐뭇한 마음
나는 그대를 기다리며 살아왔던 것이고
나의 마음은 그대로 그대의 발자국 소리였다.
[해설]20세기 최고의 서구적 지성(知性)이라 일컬어지는 발레리는, 제노바에 머물 때에 거센 '폭풍의 하룻밤'을 보내며, '지성의 우상' 이외의 모든 우상을 거부하는 생애의 대강(大綱)을 결정하고, 이후 그에 충실하게 수행하는 생활을 하였다. '사라진 포도주'와 '발자국 소리'는 모두 그와 같은 결의에서 결정(結晶)된 작품이다. 위의 시는 <매혹>(1922)에 수록된 작품.
공기의 정령(精靈)
보이지 않고 알 수도 없는,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살기도 또 죽기도 하는
나는 날아다니는 향내음.
보이지 않고 알 수도 없는
우연, 아니면 영감(靈感)인가?
내가 왔다고 할 때는
이미 끝난 것!
누가 읽고 또 알 것인가?
맑고 똑똑한 정신에도
많은 오해의 씨앗이 있다!
보이지 않고 알 수도 없는
속옷 갈아입는 여인의
언뜻 보이는 젖가슴!
[해설]원제목 '실프(Sylphe)'는 켈트 족 또는 게르만 족의 신화에 나오는 공기의 요정 또는 바람의 신(風神)이다. 발레리는 이 '실프'에 기탁하여 시인의 마음에 떠오른 시상(詩想)의 형성을 암시하고 있다.
잠자는 여자
LA DORMEUSE
루시앙 파브르에게
나의 젊은 연인은 마음에 어떤 비밀을 불태우고 있는가
영혼은 얌전한 가면을 통하여 꽃내음을 빨고 있다.
나면서부터 지닌 그 정열은 어떤 헛된 양식으로
잠자는 이 여자의 광채를 만들어 내는가.
숨쉬고 꿈꾼다, 소리도 없이. 거부하기 힘든 잔잔함.
오오 눈물보다 힘찬 안식이여, 너는 승리를 차지한다.
이 깉은 잠의 장중한 파도와 풍요로움이
이와 같은 원수의 가슴 위에서 힘을 합칠 때.
잠자는 여자여, 그림자와 내팽겨친 황금빛 거름이여
네 역겨운 쉼은 하늘이 내린 은혜를 입고 있으니
오오 꽃송이 옆에 근심스러이 누워 있는 암사슴이여,
영혼은 저승으로 가서 지금은 없으나
부드러운 배 위를 흐르는 한쪽 팔이 가리고 있는 네 모습은
자지 않는다. 내 눈은 네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해설]
발레리는 보들레르, 말라르메를 잇는 상징주의 계보에 속하는 시인이지만, 주지적이며 기교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그는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영감이나 정열이 아니라 맑은 의식과 노력이라고 말하였다.
나르시스와 말하다(1)
NARCISSE PARLE
나르시스의 진혼(鎭魂)을 위하여
오오 형제여 슬픈 백합화여, 너희의 나체 속에서
내 몸이 요청되었기에 나는 '아름다움'에 고민한다
그리고 너희에게 님프여, 님프여, 오오 샘물의
님프여, 순수한 침묵에 내 공허한 눈물을 바치고 있다.
큰 적막함이 나를 듣고 있다, 그 적막함에 희망을 나는 듣고 있다.
맑은 물이 솟아 오르는 소리는 변하여 황혼을 내게 알려준다.
은색 풀이 신선한 어둠 속에서 자라나는 소리가 내게 들린다.
그리고 사라진 샘물의 비밀의 밑바닥까지
무정한 달이 맑은 그 거울을 걸어 놓는다.
그리고 나는 이 갈대밭에 정열을 담아 몸을 내던지고
오오 짙푸른 물이여, 내 슬픈 '아름다움' 때문에 고뇌하고 있다.
나는 이제 마술사의 물밖에 사랑할 수 없다.
그 물의 웃음도 예전의 장미꽃도 나는 잊고 말았다.
부드러이 내게 다가와 안기는 샘물이여
숙명적인 순수한 네 빛을 어찌 나는 탄식하랴
필멸의 짙푸름 속에 내 양눈은 젖고 말았다
꽃들의 관을 쓴 내 그림자를 길어 올린 것이다.
아아 그림자는 헛되고 영원한 것은 눈물이다.
푸른 숲을 뚫고 애정이 담긴 나무들의 팔을 통과한
모호한 시간의 온화하고 흐릿한 빛이 나타나
해거름의 여광(餘光)으로 나는 구성한다
몸은 벌거숭이, 슬픈 물이 나를 끌어당기는 창백한 경계(境界)에...
더할 나위 없는 환락의 악마, 그리움의 얼어붙은 그림자여.
물 속 거기서 나의 달과 이슬의 육체가 있다
오오 나의 양눈에 대치되고 있는 온순한 형태여.
여기에 내 은색 팔, 그 동작의 순수함...
숭엄한 황금색 속에 나의 나긋나긋한 손은
무성한 잎사귀가 껴안고 있는 이 죄수를 부르고 피곤하여
막연한 신들의 이름을, 메아리를 향하여 너는 외친다...
[해설]
발레리는 시를 쓰는 작업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무아(無我) 상태에서 번갯불을 기다리느니보다는, 맑은 정신과 의식적인 의지를 가지고 나의 마음대로 반짝거리는 불꽃을 만들기를 좋아한다".
나르시스와 말하다(2)
잘 있으라, 고요한 늪 위에 사라진 반영(反映)이여
나르시스여...이 이름만으로 부드러운 향내음이
상쾌한 마음에 밴다. 이 공허한 무덤 위에
죽은 자의 영혼을 조문하는 장미 꽃잎을 따서 뿌리라.
나의 입술이여, 사랑하는 한 망령(亡靈)을 진혼하게 하는.
키스를 따서 뿌리는 장미 꽃잎이 되라.
밤이 오는가 싶으면 먼 곳에서 갑자기 으시시한 소리로
선잠과 그림자로 넘치는 꽃술을 향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단지 달빛만 하릿하게 미르테(銀梅花)의 가지에 어른거린다.
오오 쉽사리 옮겨지는 그림자, 나는 이 미르테 밑에서
너를 사랑한다, 잠의 숲 속 거울에 내 몸을 비쳐주는
슬픔과 외로움 때문에 꽃으로 피어 있는 육체여.
눈앞에 네가 있는 이 황홀함에서 몸이 풀려날 방법이 없다.
허망한 시간은 이끼 위의 손발을 부드러이 어루만지며
어스름한 쾌락의 극치에서 바람을 깊숙히 채우고 있다.
잘 있으라 나르시스...죽는다. 지금은 바로 황혼.
내 마음의 한숨에 따라 내 형태는 흔들흔들 흔들리고
목동의 피리는 상(喪)을 당한 장막에 싸여 하늘을 가로질러
들판을 떠나는 양떼의 억양이 풍부한 여운을 연주하고 있다.
하지만 샛별의 불을 켜는 차겁고 어기찬 하늘에
안개가 드리우고 고요한 무덤이 만들어지기 그 전에
숙명의 물의 적막함을 깨뜨리는 이 키스를 어서 받으라.
단지 희망만으로 이 수정(水晶)의 수면을 부수는 데 족하리라.
나를 쫓는 한숨에 잔 물결은 나를 빼앗아 가리라.
경쾌하게 피리 부는 사람은 남의 신세를 아랑곳하지 않겠으나
휘청이며 끊이지 않는 피리를 나의 한숨은 생생하게 약동시킨다...
사라지라,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신들이여,
음전하고 고독한 피리여, 너는 달에 부어라
우리의 은빛 눈물의 온갖 모습을.
[해설]
시 창작에서 멀어졌던 발레리가 다시 시를 쓰게 된 것은 20년의 침묵 후였다. 그는 512행의 장시 '젊은 파르크'를 쓰는 데 5년(1913-17년)이 걸렸다. 그리고 3년 후에 <해변의 묘지>(1920)를 발표하였다. 짧은 시들을 모아 <매혹(魅惑)>이란 표제로 최후의 시집을 출판한 것은 1922년이었다. 발레리는 이 세 권의 시집으로 "현대 시인 중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평가 받게 되었다.
해변의 묘지 (1)
LE CIMETIERE MARIN
사랑하는 영혼이여, 영원한 생명을 구하지 말아라.
네 가능한 영역을 추구하라. *핀다로스 <무녀(巫女)> 제3
비둘기들이 거니는 이 *조용한 지붕
소나무 사이에 또한 무덤 사이에 가물거리고ㅡ
'한낮' 올바른 곳 거기에 불길로 만드는
바다여 바다, 언제나 반복되는 바다!
오오 한 가닥 회상의 이 보상
신들의 고요함에 대한 아주 오랜 바라봄!
Ce toit tranquille, ou marchent des colombes,
Entre les pins palpite, entre les tombes;
Midi le juste y compose de feux
La mer, la mer, toujours recommencee!
O recompense apres une pensee
Qu'un long regard sur le calme des dieux!
섬세한 빛의 한없는 순수한 작업이
눈에 보이지 않는 물방울의 수많은 다이아몬드를 불태우고
그리고 또한 한없는 쉼이 이루어지는가!
깊은 늪 위에 지칠 줄 모르는 하나의 태양이 쉴 때에
영원불멸이 낳은 순수한 두 작품
'시간'은 반짝이고 '꿈'은 그대로 슬기가 된다.
흔들리지 않는 보물 창고, 미네르바의 간소한 신전
고요함의 무더기, 또한 눈에 보이는 물웅덩이여
용솟음치는 물, 불꽃의 베일 아래
많은 잠을 간직하는 '눈'이여
오오 이 나의 침묵!...영혼 속의 건축이여.
하지만 천 개의 기왓장이 출렁이는 황금의 정상(頂上) '지붕'이여!
단 하나의 한숨에 엉킨 '시간'의 성당이여
이 순수함의 경계에 나는 놀라서 길들여지니
단지 내 바다를 향한 눈동자에 에워싸여ㅡ
더구나 신들에게 바치는 내 고귀한 제물과 같이
맑은 반짝임은 높은 하늘에다
왕자(王者)의 업신여김을 뿌린다.
*핀타로스(BC 518쯤-438쯤) = 그리스의 시인. *조용한 지붕 = 바다. 시집 <매혹(魅惑)>(Charmes, 1922)에 수록.
해변의 묘지 (2)
마치 과일이 달콤한 맛에 녹듯이
그 형태가 사라지는 입 속에서
그것의 부재(不在)가 환락으로 변해 가듯이
나는 지금 내 미래의 연기를 숨쉰다
더구나 하늘은 타버린 영혼에게 노래한다
떠들썩한 해변, 해변의 변화를.
Comme le fluit se fond en jouissance,
Comme en delice il change son absence
Dans une bouche ou sa forme se meurt,
Je hume ici ma future fumee,
Et le ciel chante a l'ame consumee
Le changement des rives en rumeur.
아름다운 하늘, 참다운 하늘이여, 변화하는 나를 보라!
수많은 오만함 후에, 또한 수많은 이상한
그러나 힘있는 무위(無爲) 후에
나는 이 빛나는 공간에 몸을 맡긴다
나의 그림자는 죽은 자들의 집들 위를 지나
그 희미한 움직임에 나를 익숙하게 한다.
영혼은 하지(夏至)의 횃불에 노출되어
나는 뜨거운 화살을 가진 너를 뚫어지게 본다
빛의 넘쳐 흐르는 정의여!
나는 너를 성결한 그대로 네 최초의 장소에 돌려보낸다ㅡ
이제 너 스스로를 보도록 하라!...그러나
그림자의 어두운 반신이 없으니 어찌 빛을 돌려보내랴.
오오 나 혼자를 위하여, 나 혼자에게, 나 자신 속에
한 마음의 곁에 시가 태어나는 근원에
공허함과 순수함이 오는 곳 사이에
나는 기다린다, 내 크나큰 내심의 메아리를,
씁쓸하고 으시시하며, 더구나 공명(共鳴)하는 우물,
언제나 미래의 공허함을 영혼 속에 울리는 것을!
[해설]
전 24절, 각 절 6행, 총 144행 구성인 장시 '해변의 묘지'는 난해하기로 정평(定評)이 있다. 발레리는 이 시를 쓴 동기에 관하여, "어떤 감상이나 사상을 전개하려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아직까지 써보지 않은 시를 써보기 위해서"라고 말하였다.
해변의 묘지 (3)
너는 아는가, 무성한 잎에 사로잡힌 체하는 것이여,
가냘픈 그 쇠그물을 씹는 샛강이여!
감겨진 내 눈 위의 눈부신 비밀이여
어떤 육체가 그 무위(無爲)의 끝에 나를 끌고 가는가
어떤 이마가 그 육체를 이 해골의 땅에 끌어당기는가?
한 줄기 불꽃이 나의 죽은 자들을 그 이마에 생각한다.
Sais-tu, fausse captive des feuillages,
Golfe mangeur de ces maigres grillages,
Sur mes yeux clos, secrets eblouissants,
Quel corps me traine a sa fin paresseuse,
Quel front l'attire a cette terre osseuse?
Une etincelle y pence a mes absents.
닫혀져 순수하게 물질 없는 하나의 불로 가득 찬
빛에 받혀진 이 대지의 조각,
이 땅은 내 마음에 든다, 햇빛에 지배되고
황금과 돌과 어스럼한 나무로 만들어져,
수많은 대리석은 수많은 망령(亡靈) 위에 떨고 있고ㅡ
그 언저리의 충실한 바다는 나의 무덤들을 지키며 잔다!
찬란한 개여, 우상 숭배자들을 멀리하라!
홀로 목자의 미소를 머금고
신비한 양들, 고요한 내 묘석의 흰 무리를
오랜 시간에 걸쳐 내가 치고 기를 때에
멀리하라, 거기서 조심성 많은 비둘기들은
헛된 꿈들과,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천사들을!
한번 여기 오면 미래는 게을러진다.
선명한 매미 소리는 메마름을 긁어내고ㅡ
모든 것은 불타고 모든 것은 해체되며
무엇인지 모를 가혹한 '요정'이 되어...
부재(不在)에 도취하면 삶은 한없이 크고
고통은 달콤하며 정신도 또한 깨끗이 맑아진다.
[해설]
발레리는 이 '해변의 묘지' 가운데 개인적 모놀로그(독백)를 담고 있다. 즉 어렸을 때의 추억은 고향 세트(Sete) 바닷가의 묘지가 떠올랐고, 묘지에서 바라보는 지중해 해변에서의 삶과 죽음, 움직임과 정지, 존재와 무(無)에 대한 명상을 담은 것이다.
해변의 묘지(4)
죽은 자들은 숨겨져 바로 이 땅 속에 있고
이 땅은 다시금 그들을 따스하게 하며 그 신비를 만들게 한다.
'한낮'은 저기 높이, '한낮'은 움직이지 않고
자기 속에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 모습에 걸맞는다...
완전한 두뇌여, 또한 완벽한 왕관이여
나는 네 손에 있는 은밀한 변화.
너는 나만 소유하기 때문에 네 두려움을 간수한다!
나의 뉘우침, 나의 의혹, 나의 부자유
그것은 네 커다란 다이아몬드의 흠집이다...
하지만 나무들 뿌리 밑의 정처 없는 사람들은
대리석으로 무거운 그들의 밤 가운데서
이미 천천히 너희 편이 되었다.
그들은 부재의 두려움 속에 녹아 들고
붉은 흙은 흰 씨족(氏族)을 삼켰으며
삶의 은혜는 꽃들 속에 옮겨갔다!
지금은 어디 있는가, 죽은 자들의 귀익은 소리
각자의 기교와 그 특이한 영혼은?
일찍이 눈물 맺혔던 곳에는 구더기가 기어 다닌다.
간질린 소녀들의 째지는 듯한 소리
그 눈과 치아와 눈물 맺힌 눈꺼풀
타오르는 불길과 장난하는 매혹적인 젖가슴
내맡기는 입술에 빛나는 그 피 맺힘
더할 나위 없는 마지막 선물과 그것을 지키는 손가락
모든 것은 땅 속에 기고 영원한 윤회(輪廻)로 돌아온다.
[해설]
발레리는 특히 10절 이하에서 대리석 무덤 아래 누워 있는 죽은 자들을 통하여, 죽음과 영생 문제를 생각한다. 그는 종교적 신앙의 위로와 죽음 이후의 영생을 단호하게 물리친다. 모든 것을 앗아가는 죽음과 공허한 해골 앞에 무(無)의 열반(涅槃)세계도 산산히 부셔진다. 때문에 이 시 부제(副題)에 핀다로스의 "네 가능한 영역을 추구하라"고 말한 것이다.
해변의 묘지 (5)
더구나 위대한 영혼이여 너는 원하는가
파도와 황금이 지금 여기에 육체의 눈에 만드는
거짓된 색채를 지니지 못하는 꿈을?
허무한 연기가 될 때 너는 여전히 노래하려는가?
오오! 모든 것은 달아났다! 나의 존재는 죽음에 스며들고
이 드높은 불사(不死)에 대한 초조감도 또한 죽고 있다!
초라하고 파리한 영혼불멸이여, 검은 금박(金箔)의 영생이여
죽음을 어머니의 품이 희게 한 역겨운
월계관을 쓴 위로의 여인이여
아름다운 거짓이여, 또한 공손한 책략이여!
누가 모르며 또 누가 거부하지 않는가
이 텅 빈 두개골과 또한 이 영원한 웃음을!
수많은 삽자루의 흙의 무게 아래
이제 흙이 되어 우리의 걸음을 머뭇거리게 하는
지하에 누운 조상들이여, 사는 이 없는 두개골들이여
파 먹는 것들, 물리칠 수 없는 구더기는
비석 아래 잠든 당신들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생명을 먹고 살며, 나는 그것을 떠난 적이 없다.
모름지기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인가 아니면 미움인가?
그 감추어진 치아는 이렇듯 내게 가깝구나
아아 모든 이름이 그 치아에 걸맞을 만큼!
오오! 그것을 보고 원하고 꿈꾸며 내게 와서 닿는다!
내 육체는 그것이 마음에 든다, 내 침대에까지 기어와도
여전히 나는 살고 있다, 이 구더기에 사로잡혀!
[해설]
발레리는 주제와 명상이 철학시인 '해변의 묘지'에서, 자칫 빠지기 수운 현학(衒學)과 딱딱함을 극복하고, 풍부한 감수성과 명쾌하고도 은밀한 이미지와 연상적(聯想的)인 상징, 그리고 때로는 시인 자신이 가장 경계하던 서정적이며 관능적인 감정과 감각도 섞어 표현하고 있다. 이 시의 원문이 지닌 시적 음악성은 거의 마술적인 미(美)를 지녔다고 평가되고 있다.
해변의 묘지 (6)
제논! 잔인한 제논! *에레아의 제논이여!
너는 나를 꿰뚫었는가
진동하고 날며 그러나 날지 않는 그 날개 달린 화살로
그 음향은 나를 낳고, 화살은 나를 죽인다!
아아 태양...영혼에 대한
거북의 그림자, 발걸음이 큰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아킬레우스!
아니, 아니!...일어서라! 이어지는 시대 속에!
파괴하라 나의 육체여, 생각에 잠기는 이 자세를!
들여마셔라 내 가슴아, 지금 태어나는 바람을!
상쾌한 바람이 바다에서 불어와
내게 영혼을 돌려준다...오오 소금기 나는 힘이여!
파도에 달려가 다시금 생기 넘치게 솟구치련다!
그렇다! 열광으로 날뛰는 넓은 바다여
점박이 표범의 털가죽이여, 태양의 수천 개 우상에
구멍 뚫린 고대 그리스 무사(武士)의 외투여
자신의 푸른 살에 취하여
침묵하는 듯한 소란 가운데, 자기와 자기의
반짝이는 꼬리를 물어 뜯는 히드라(七頭蛇)여,
바람이 분다!...이제 살아야 한다!
넓고 큰 대기(大氣)는 내 책을 펼치고 또 닫으며,
파도는 거품을 날리면서 바위에서 미끄럼을 탄다!
날아가라, 눈부신 책장이여!
부셔라 파도여! 환희의 물로 부셔라
배의 흰 돛이 낚시질하는 이 고요한 지붕을!
*에레아의 제논은 BC 5세기의 그리스 철학자. "날고 있는 화살은 멈추어져 있다" 또는 "빨리 달리는 아킬레우스는 거북을 따라잡을 수 없다" 등 운동과 시간에 관한 역설(逆說)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