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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도(道)의 씨앗을 잉태하고(태을금화종지) 3/4
그러므로 『태을금화종지』에 있어서는 우선 이것부터 이해하라. 철학적이 되지도 말고 사회의 꼬임에 넘어가지도 말며, 믿지도 말고 불신하지도 말라는 것. 기억하라. 내가 말하는 '믿지 말라'는 것은 불신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불신도 일종의 믿음, 즉 부정적인 믿음이다. 내가 말하는 믿지 말라는 것의 의미는 믿음도 불신도 둘 다 버리라는 것이다. 아무 결론도 내리지 말고 그냥 마음을 열어두라. 그대의 무지를 숨기려 들지 말고 그냥 그대의 무지를 깨닫기만 하라. 그대는 순진한 바보가 되어야 하며 '나는 모른다.'고 말해야 한다.
모든 정의(正義)는 '나는 모른다.'로 시작된다. 모르면서 아는 척하고 지식인인 양 행세를 하게 되면 그 믿음이 장애를 만들고 거짓 경험들을 창조해낼 것이다. 그리하여 그 믿음에 중독되게 되면, 그리고 실제로 믿음은 LSD나 마리화나나 히로뽕과 같아서 그 믿음에 중독될 경우 환각의 세계가 펼쳐지면서 상상의 날개는 제 멋대로 날게 된다. 그대는 더 이상 실제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여 하나의 얼간이로 전락한다.
그것이 '얼간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자기만의 세계에 살면서 자신의 꿈을 구축하여 현실과는 완전히 단절되어 버린 사람, 그러나 그의 상상은 너무나 실제적이라서 현실이 그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LSD나 마리화나나 다른 종류의 마약을 먹을 때 일어나는 일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대 속에는 작은 환상의 나라가 만들어진다. 매우 휘황찬란하다. 적어도 그대가 마약에 중독되어 있는 동안은 그렇다. 그리고 중독되어 있을 때는 경험하는 모든 것이 실제인 것처럼 여겨진다.
매일같이 이런저런 사람들이 내게 와서 말한다. 세상이 이렇게나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마약을 통해서 입니다라고 그대가 알게 된 것은 꿈의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마약이 그대의 비판적인 안목을 마비시켰을 뿐이다. 마약이 이성을 중독 시키기만 하면 그 때부터는 꿈의 세계가 제멋대로 펼쳐지는 것이다. 그리고 비판적인 안목이 결여될 때 이성의 기능이 상실되고, 상상력이 제 멋대로 작용할 때, 그 때는 마치 궁극적인 진리가 성취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아니다. 그것은 진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화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중독에서 완전히 깨어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완전히 벗어난 사람, 그만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저명한 심리학자였던 월리암 제임스( William James)가 아산화질소의 흡입으로 소위 그가 말하는 궁극적 진리라고 하는 것을 접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마약 복용자가 없었던 관계로 그는 몇 안 되는 경험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아산화질소의 효력으로 그는 자신이 궁극적 진리와 조우했다고 생각 했다. 그는 유명한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소수의 사람들이나 하는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는 즉시 노우트에 메모를 남겼다. 그는 그의 의식에 정말 무한히 값진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자각할 정도로 정신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즉시 기록해 두어야만 했다. 누가 아는가? 혹시 그가 깨어났을 때는 그것을 잊어버릴지도...
그래서 그는 기록을 남긴 후 그가 조우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약기운이 가실 때를 기다렸다. 그는 자신이 부처나 그리스도가 되었으며 하나님이나 혹은 우파니샤드의 기록자들과 노자, 짜라투스트라, 또는 모하멧이 보았던 그런 어떤 것을 목격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 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의 노트를 보고 그는 매우 당황하고 놀라게 되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는 것이었다.
남자는 여러 부인네랑 얼씨구,
여자는 한 남편네랑 절씨구.
이것이 바로 그가 조우했다는 그 '궁극적 진리'였다. 제 정신이 아닐 때는 아무리 우스운 일이라도 절대적으로 보인다. 이성이 작용하지 않고 비판적인 능력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을 때는 어떠한 어리석은 일이라도 그렇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어리석지가 않다. 그 순간만큼은 그것이 궁극적인 진리로 보여지는 것이다.
알더스 헉슬리( Aldous huxley )는 말하고 있다. 그가 처음으로 LSD를 복용했을 때, 그는 흔해 빠진 의자가 놓여 있는 평범한 방에 앉아 있었다. 일단 LSD가 작용하기 시작하자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것이다. 그것은 광채가 나고 있었다. 의자로부터 사방으로 휘황찬란하고 황홀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의자는 예전의 그 의자였다. 그 모든 게임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상상력의 작용일 뿐이다. 그대를 미치게 한 것은 바로 그 LSD이다. 그것이 모든 비판적인 능력들을 앗아가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믿음은 의심의 적이지만 신뢰는 의심의 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신뢰는 의심을 통하여 자란다. 믿음은 의심을 억누름으로써 자란다. 그래서 믿음은 일종의 마약이다. 마약이 하는 일이 바로 그런 일이다. 회의하는 능력에 의해 사람은 바보로 전락하지 않고 상상의 희생물이 되지도 않는데 마약은 바로 그 능력을 억압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수세기 동안 종교가 해온 짓들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들은 말한다.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면 지옥에 떨어진다. 믿으라. 의심이 생기면 그것을 억누르라. 집어던지고 나와 덮어놓고 믿으라. 그들은 계속해서 지껄인다. 믿음을 보지 못하는 것들의 실상이다. 믿으라. 그러면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진리라고 하는 것은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현상이다. 그것은 중독당하지 않은 의식, 열린 의식으로부터 발원한다. 믿는 것도 안 믿는 것도 아니며,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않고 그냥 자유롭고 한가할 뿐이다. 의심도 쓸모는 있다.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하기까지는 도움이 된다. 의심은 신뢰의 친구이다. 의심하는 과정이 있음으로 해서 그대는 상상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았다면 상상력은 파괴만을 일삼아 왔을 것이다.
가령 그대가 힌두교도로 태어나게 된다면 쿤달리니( kundalini )에 대해서 읽고 듣게 되어 그 모든 경험들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언제라도 그 뱀의 힘은 척추 밑으로부터 풀려나와 웅장한 소리를 발하면서 일곱 번째 차크라를 향하여 돌진할 것이다. 그것을 믿어온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경험은 너무나 실제적이라서 의심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는 결코 쿤달리니 현상을 접해 본 적이 없었다. 모하멧도 거기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힌두교도로 태어난 붓다조차도.....
그러나 그는 매우 진실한 탐구자로서 모든 종류의 믿음을 던져버렸기 때문에 쿤달리니 현상과 만날 수 없었다. 마하비라도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으며 짜라투스트라도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 무엇이 일어났단 말인가? 그들이 놓쳐 버렸단 말인가? 그것은 믿음이다. 그대가 일곱 개의 차크라가 존재한다고 믿게 되면 그것들은 그대의 삶에 있어 사실이 되어 버린다. 그대가 무엇을 믿든 그것은 사실로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현대엔 쿤달리니 에너지 학설을 제창한 고삐 크리슈나(Gopi knshna)는 십삼 년 동안이나 좌정하고 앉아 쿤달리니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십삼 년은 긴 세월이다. 십삼 년 동안이나 쿤달리니의 존재에 대해서 믿고 척추를 들여다보면서 기다릴 수 있다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은 기적이 아니다. 어느 날 그것이 일어났다. 뱀은 또아리를 풀고 마치 폭포소리와도 같은 웅장한 소리를 발하면서 돌진하여 뇌를 관통했다. 그 이후로 고삐 크리슈나는 자신이 천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대의 쿤달리니가 상승한다면 그대도 천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의 천재성이 과연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물론 그는 몇몇 바보 같은 시, 삼류에도 끼지 못하는 하찮은 시는 쓴다. 만약 그런 것이 천재라면 사람들은 쿤달리니를 차라리 아래에 잠재워 놓는 것이 나으리라. 무슨 놈의 천재가 그렇단 말인가? 그런 식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상에 불과하다. 그리고 무언가를 믿게 되면 그것은 사실로 나타난다. 그래서 위험하다. 믿음으로 시작하지 말라. 도교의 시각은 이렇다. 탐구하고 실험해보고 그리하여 저절로 결론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이제 경문으로 들어가자.
여조사께서 말씀하셨다.
빛이 회전하게 되면 천지음양의 기가 응집이 된다.
그대의 의식은 바깥으로 흐른다. 이것은 하나의 사실로서 구태여 믿을 필요조차도 없다. 그대가 사물을 볼 때 그대의 의식은 대상을 향하여 흐른다. 예를 들어 그대는 지금 나를 보고 있다. 그러면 자신은 잊어버리고 나에게 집중하게 된다. 그때 그대의 에너지는 나를 향하여 흐르고 그대의 귀는 나를 향하여 열리게 된다. 이것은 바깥으로의 유출이다. 그대가 꽃을 보고 매료되면 꽃에 관심이 쏠리게 된다. 자신은 잊어버리고 꽃의 아름다움만 의식하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안다. 매 순간 그것이 일어나고 있다. 잘 생긴 여자가 지나가면 갑자기 그대의 에너지는 그녀를 향해 흐르기 시작한다. 우리는 빛의 이러한 바깥 유출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극히 일부분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매순간 빛은 바깥으로 새어 나간다. 그대는 자신은 망각해 버린 채 장면만을 의식하게 된다.
빛은 안으로 회수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을 의식할 수 있도록 그대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가 되어야 한다. 그때 자각(self-knowledge)이 일어난다. 보통 우리는 반쪽 인생을 살고 있다. 반은 살아있고 반은 죽어 있다. 현실이 그렇다. 그리고 빛은 점점 바깥으로 흘러나가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대는 점점 안으로 허해지고 궁핍하게 된다. 그리하여 블랙홀이 되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우주에서 커다란 규모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이제야 물리학자들은 블랙홀들을 발견해 냈다. 그러나 도교인들은 훨씬 전에 블랙홀을 발견해 냈다. 그러나 그들은 우주 공간에 있는 블랙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 내면에 있는 블랙홀에 관심이 있었다. 블랙홀이란 그대의 모든 에너지가 소모되고 고갈되어버려 텅빈, 그 에너지의 근원을 그대가 다시 충전시킬 수 없게 된 상태를 가리킨다.
과학자들은 에너지가 계속해서 방사만 되고 돌아오는 것은 없기 때문에 태양은 조만간 블랙홀이 되어 버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무한한 에너지의 원천이다. 수백만 년 동안 태양 에너지로 해서 나무와 꽃과 사람과 짐승과 새들이 살아왔다. 수백만 년 동안 태양은 태양계에 에너지를 공급해 온 것이다. 그러나 태양은 소모되고 있다. 조금씩조금씩, 그리하여 어느 날 그것은 붕괴되고 말 것이다. 남아있는 에너지가 더 이상 없게 될 것이다. 갑자기 모든 빛이 사라지고 마지막 빛줄기마저도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이다. 그때 그것은 블랙홀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람들이 바로 이런 식의 삶을 산다. 이러한 계속적인 유출 때문에 그들은 블랙홀들이 되어간다. 이것을 보고 저것을 보며, 에너지를 보는 자에게로 회수하지 않고 계속해서 대상에만 소비하고 있다. 이것은 에너지의 방류이다. 삼십 세가 되면 삶은 거의 끝장이 나 버린다. 이제 그는 하나의 블랙홀이다. 칠십에 이르러서 무덤에 묻히지만, 사람들은 삼십 세 안팎에 이미 죽는다. 무덤에 묻히는 것은 별개 문제이고 그들이 죽는 것은 삼십 안팎이다. 그리고 나는 히피들의 생각에서 한 톨의 진리를 본다. 삼십이 넘어서까지 살아있는 사람을 발견하기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블랙홀이 되고 소모되고 완전히 고갈이 되어버린다. 그들은 어떻게 그럭저럭 연명은 해 나간다. 그러나 그들은 죽은 채로 산다. 마치 과거의 기세가 그들을 살아있게 해 준 듯이. 이런 일이 벌어진다. 자전거를 탈 때 그대는 페달을 밟아야 한다. 그러나 간혹 가다가 페달을 밟지 않아도 아까 밟아놓은 페달의 여력으로 해서 자전거는 얼마간 계속 달린다. 내리막길일 경우는 더욱 멀리까지 갈 수 있다. 그리고 삼십이나 삼십오 세 이후로는 인생은 내리막길이다. 삼십오 세가 절정이다. 삼십오 세 이후로 그대는 내리막길이다. 그대는 아무 에너지가 없이도 털털거리며 굴러갈 수 있다.
도교인들의 경험은 만약 되돌리는 비법만 터득한다면 유출을 통하여 소모되던 에너지가 점점 응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모든 집중의 과학이다. 다음에 시간을 내서 거을 앞에 서서 한 가지 실험을 해보라. 그대는 거울을 바라보며 거을 속의 자신의 얼굴과 눈을 응시한다. 이것은 유출이다. 물론 그대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반사된 그대의 얼굴이지만 그것도 하나의 대상이다.
이번에는 잠시동안 모든 것을 거꾸로 해 보라. 거울 속의 영상에 의해 그대가 바라다 보여진다고, 즉 그대가 영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거을 속의 영상이 그대를 바라다보고 있다고 느껴보라. 그대는 아주 이상한 공간에 있게 될 것이다. 잠시동안 만이라도 그것을 시도해 보라. 어떤 무한한 에너지가 그대 속으로 흘러 들어와 그대는 아주 생기에 넘치게 될 것이다. 전에는 전혀 이것을 알지 못했었기 때문에 아마 깜짝 놀라게 되리라. 그대는 에너지의 완전한 원(circle)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록 도교 경전에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내가 보기에 이것은 누구나가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인 것 같다.
욕실에 들어가거든 우선 반사된 상을 바라보라. 그대는 바라보는 쪽이고 반사된 상은 대상이 된다. 이제 상황을 거꾸로 바꾼다. 그러면 보는 자는 거을 속의 상이요, 그대 자신은 하나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는 갑자기 변화가 일어나면서 엄청난 에너지가 그대 속으로 밀려들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을 해 본 적도 없고 안 적도 없기 때문에 처음에 그대는 매우 놀랄 것이다. 미쳐버린 것처럼 보일 것이다. 몸이 떨리고 진동이 일어날 것이다. 또는 방향감각이 무너져 버릴 것이다. 그대는 지금까지 줄곧 외향적으로만 살아왔기 때문이다. 내면으로의 회귀는 서서히 터득되는 것이다.
그러나 원은 완전하다. 며칠만 그것을 해보면 하루 종일 얼마나 생기가 넘치는지 놀랄 정도일 것이다. 단지 몇 분간만이라도 거울 앞에 서서, 원이 완전해지도록 에너지가 자신에게 되돌아 오게 해보라. 원이 완성될 때마다 거기에 위대한 침묵이 있게 될 것이다. 불완전한 원은 불안정을 창출한다. 원이 완전해지면 휴식이 창출된다. 그대 속에 중심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중심을 갖게 되면 파워가 생기게 되는데 그 파워는 그대의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실험이다. 그래서 그대는 이것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시도해 볼 수가 있다.
장미꽃을 바라볼 때 처음 몇 분간은 꽃을 응시하라. 그러다가 반대로 바라보기 시작하라. 이제 장미꽃이 그대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때 그대는 장미꽃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보내주는지 놀라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나무와 별과 사람을 대상으로 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하는 것이다. 그냥 서로의 눈을 바라다 보라. 처음엔 상대편을 바라보다가 이제는 되돌아오는 에너지를 느끼기 시작하라. 돌아오는 선물이 있다. 새로운 에너지가 물 붓듯 쏟아져 그대를 가득 채울 것이다. 그대는 생명력이 충일되어 젊음이 넘치게 될 것이다.
여조사께서 말씀하셨다.
빛이 회전하게 되면 천지 음양의 기가 응집된다.
이것은 빛을 원운동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대의 빛은 반원으로 움직인다. 나가기만 할 뿐 되돌아 오지는 않는다. 조만간 그대는 블랙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원이 완성이 된다면 그대는 화이트홀이 될 것이다. 현대물리학은 블랙홀 이후로 화이트홀도 발견하게 되었다. 화이트홀은 에너지의 창고로서 블랙홀의 정반대이다.
빛이 회전하게 되면 천지 음양의 기가‥‥
천지(天地)란 안과 밖, 위와 아래, 하나님과 세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것, 알 수 없는 것과 알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은 하나님을 지칭하고 땅은 드러난 세계를 지칭한다.
인간(human)이란 말의 어근을 기억하라. 그것은 땅을 의미하는 휴머스( humus )라는 말에서 왔다.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사람은 휴먼(human)이라고 불리운다. 하지만 인간은 단순히 흙에서 왔다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하늘의 원이 완성될 때 그들은 하나가 된다. 어떤 신성한 요소가 그대를 관통한 것이다. 이제 그대는 더 이상 땅의 존재가 아니다. 더 이상 일개 인간이 아니다. 그대는 신성한 존재가 된 것이다. 그 먼지가 신성으로 빛을 발할 때 그때 그대는 생명의 광휘를 알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에너지가 되돌아와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에너지는 어디서든지 회수될 수 있다. 거기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단지 비법만 터득하면 된다. 그 요령만 터득하면 그것은 어디에서나 가능하다. 푸르른 나무를 바라보면 마치 나무의 모든 수액이, 나무의 모든 물기가 그대 존재 속에 흡입 된 것처럼, 그대는 그렇게도 생기가 넘쳐난다. 달을 바라보아도 그대는 놀라게 될 것이다. 취하는 데에 이제는 더 이상 술이나 마약이 필요 없다. 그대는 달로 완전히 취해버릴 수가 있다. 회수하는 요령만 안다면 달은 그대에게 엄청난 에너지를 되돌려 줄 것이다.
인도의 고대 경전인 리그베다에는 소마( soma )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과학자들은 소마가 LSD와 같은 것일 거라고 생각한다. 학자들은 그것이 기후의 변화 때문에 지금은 사라져버린 히말라야의 어떤 버섯종류였을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만약 사라지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망각해 버린 것일 거라고도 생각한다. 그것은 히말라야의 어느 깊은 계곡에서 번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그것이 너무 위험한 젓이라서 고대의 현자들이 의도적으로 그것을 숨겨버렸는지도 모른다.
알더스 헉슬리는 소마가 궁극적인 마약이었으며 장차 우리가 궁극적인 마약을 발견하게 되면 그것을 소마라고 부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산스크리트어에서 소마가 달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대는 놀라게 될 것이다. 그래서 힌디어( Hindi )로는 월요일이 소와르( somwar )이다. 달의 요일인 소와르, 소마는 달에 대한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버섯의 이름도, LSD, 마약의 일종도 아니다.
그것은 달과 하나가 되는 비밀스런 과학이다. 그리고 바다가 달의 영향을 받듯이 만약 달로부터 에너지를 거두어들일 수 있다면 그대는 놀라게 될 것이다. 엄청난 기운과 위대한 감로가 그대에게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다. 술을 전혀 마시지 않고도 그대는 흠뻑 취할 수가 있다. 달은 그대 존재의 중심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그대를 차갑고 평온하게 만들 것이다. 달은 여성적인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마치 그대가 사랑하는 여인을 포옹할 때 갑자기 커다란 침묵과 고요가 가슴속에서 일어나듯, 달로부터 에너지가 회수될 때는 똑같은 일이 아주 큰 규모로 일어나는 것이다.
달은 여성 원리이다. 반면에 태양은 남성 원리이다. 달은 음이요, 해는 양이다. 달은 그대에게 젖을 줄 수 있다. 어떤 버섯을 찾아 히말라야까지 갈 필요가 없다. 그 버섯은 언제나 하늘에 있다. 달이 바로 그 버섯이다. 그대는 에너지를 회수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달 뿐만 아니라 태양으로부터도 에너지를 얻어내는 비밀스런 방법들이 있어 왔다. 태양숭배는 어떤 기법으로부터 왔다. 많은 태양 신전들이 세워졌다.
코나라크( Konarak )의 태양 신전은 태양에 대한 찬양의 표시이다. 그것은 단순한 숭배가 아니었다. 그것은 양의 에너지를 얻어내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것은 특히 여성에게 좋다. 잠재적인 여성원리가 활성화되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태양 숭배자가 되는 것이 좋고, 남성은 달 숭배자가 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숭배는 단순한 의식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의 방법이 되어야 한다.
빛이 회전하게 되면 천지 음양의 기가 응집된다.
빛과 어둠은 남성과 여성, 가벼움과 무거움, 은혜와 중력, 생명과 사망, 동과 정을 상징한다. 이 모든 것들이 빛과 어둠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빛이 원으로 움직이게 되면 그대는 점차 자신이 누구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모르게 된다. 외향성은 양의 원리요, 내향성은 음의 원리이다. 여성은 자연적으로 내향적이고 남성은 외향적이다. 심지어 사랑행위를 하는 동안에도 남성은 눈을 뜨고 한다. 그는 엿보고 싶어 하는 눈도둑이다. 여기서 포르노 사진이 가능하게 된다. 여성은 아무도 포르노 사진에 관심이 없다. 그 속에서 아무런 요점도 발견하지 못한다.
애인과 사랑행위를 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눈을 감는다. 여성은 내향적이며 그녀의 에너지는 안으로 흐른다. 그러나 에너지는 원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남성은 남성으로 남게 되고 여성은 여성으로 남게 될 것이다. 둘 다 반쪽들, 똑같은 하나의 반쪽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매력이라는 것이 있게 되고 서로를 요구하게 된다. 그대가 에너지를 원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면 더 이상 이성을 원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대 속의 남성과 여성이 만나 서로의 속으로 용해되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제 전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전체가 되는 것은 신성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요, 탄트라이다. 전체가 된다는 것은 신성해진다는 것이다.
빛이 회전하게 되면 천지 음양의 기가 응집된다.
칼 구스타프 융( Carl Gustav Jung )은 이러한 결정화(結定化)를 가리켜 개성화( individualization )라고 불렀다. 대개 그대는 단지 분열된 외가리들이거나 아니면 군중들로 존재한다. 그대는 많은 자기들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나' 작은 '나', 그리고 상대방을 지배하려는 온갖 투쟁과 경쟁심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불행한 것은 그가 바로 여럿으로 나누어져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여럿인데 어떻게 편히 쉴 수 있겠는가? 한쪽이 '이것을 하라고 하면 다른 쪽은 '안돼'라고 하고 또 세번째 부분은 '다른 것을 하자'라고 하는데 말이다.
어느 쪽을 따르든 그대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반대하던 다른 부분이 말썽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잘못됐다. 다른 쪽이 훨씬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우겨댈 것이다. "만약 나를 따라왔더라면 지금쯤은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보아라. 나를 따르지 않은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 따랐더라도 다른 목소리들이 아우성을 쳤을 것이다.
인간은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그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왜냐하면 그는 여럿으로 분열되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하나가 된다면 만족감은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여럿일 때 불만족은 당연하다. 여럿일 때 그대는 끊임없는 갈등 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그대가 하나일 때 갈등은 사라지고 근원으로 되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결정화(=응집)이다. 그리고 거기에 이르기 위한 방법은 빛을 회전시켜 그대 속의 음과 양이 더 이상 분리되어 있지 않게 하는 것이다.
빛은 바로 그대가 숨을 쉬는 것처럼 움직여야 한다.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그대는 들이마시고 내쉰다. 단지 내쉬기만 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라. 그는 살 수 없다. 그의 육체는 죽을 것이다. 또는 들이마시기만 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라. 그 역시 살아남지 못할 젓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대의 영혼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대의 영혼은 죽어버렸다. 그대는 단지 빛을 내뿜거나 아니면 들이마시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대는 지금까지 내쉼과 들이쉼이 하나의 일, 일련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깊게 내쉬어라. 그리고 깊게 들이마셔라.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호흡이 필요하듯 영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식이 필요하다. 그대의 의식이 반쪽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원으로 완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하고 남성 역시 여성이 되는 법을 알아야 한다. 남성과 여성이 같은 정도에 이르렀을 때, 남성과 여성이 완전히 균형을 이루었을 때 그 상태가 바로 결정화요, 개성화다. 거기에서 영혼이 탄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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