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六日壬戌 行至釣投院津頭 足繭 不堪寸進 求肉燭淚 塗足 步履稍安 津東有裳邊路 路出石壁 右有大江 江岸皆深峽巨麓 津路三十里也
16일에 釣投院(조투원) 나루터에 다다르니 발이 부르트고 조금도 나아갈 수 없어 소기름을 구해 발에 바르고 조금씩 안전하게 걸었다. 나루터 동쪽에 裳邊路(상변로)가 있는데, 길에 石壁(석벽)이 돌출하여 있고 우측에는 큰 강이 있는데, 江 안쪽은 모두 깊은 골짜기와 큰 산기슭이다. 나루터 길은 30리이다.
※足繭: 발바닥이 부르틈. 繭고치 견. 肉燭: 소의 기름으로 만든 초.
至浦灘 踰小峙 卽梧江 峽間初見野色 江左闊遠 有新堂市 市南有 月岳山 列峀疊立 丙午之方便 如畵境梧江村 西有一峰 特立如舟立櫓也 權氏多居
浦灘(포탄)에 이르러 작은 고개를 넘으니 梧江이고 골짜기 사이에 처음으로 들판이 보인다. 江 왼쪽은 아득히 멀리 펼쳐지는 新堂市가 있고, 市 남쪽에는 月岳山이 있는데 봉우리가 첩첩히 늘어 서 있고, 丙午(남쪽) 방면으로는 마치 그림처럼 梧江村이 펼쳐지고, 西쪽에는 봉우리가 톡 튀어나왔는데, 마치 배 위에 노가 서 있는 듯하다. 權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峀산굴(山窟) 수, 巖穴, 산봉우리. 疊겹쳐질 첩. 櫓큰 방패(防牌, 旁牌) 로, 望樓(적이나 주위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높이 지은 다락집), 노(물을 헤쳐 배를 나아가게 하는 기구), 상앗대(배질을 할 때 쓰는 긴 막대).
※浦灘里: 충주시 동량면 법정리동의 하나. 한수면 서북쪽에 위치했었으며 청풍군 수하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개(浦)앞에 여울이 있었으므로 개여울, 가여울 또는 浦灘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포탄리(浦灘里)라하고 堤川郡 水下面 지역이 되었다가 1929년 10월14일 한수면에 편입되었다.
※南漢江은 강원도 남부의 태백산 일대에서 발원하여 강원도 영월을 지나 본 충북으로 유입하는 하천이다. 단양군 영춘면에서 南流하여 석벽을 지나 도담삼봉과 玉筍峰을 지나 北西流 하여 제천시 청풍면에 이르고, 이후 西流하여 浦灘 등을 거쳐, 충주 일대에서 北流하는 달천과 합류한다. 이후 北西쪽으로 흘러 충주의 靑龍津을 지나 여주로 유입한다.
※桐江과 梧江에 대해: 東江이란 강 이름으로 적합지 않을 뿐더러 강물은 동쪽만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동, 서, 남, 북을 흐르는 강물의 성격상 桐江이 맞는 이름이다. 동강과 오동나무(梧桐)와는 관련이 있다. 梧桐자 중 桐 자를 써서 桐江이라고 하게 된 것은 梧자로 하면 梧江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겨난 桐江은 영월에서 이름은 사라지지만 강물은 남한강(충주) 여주를 거쳐 서울을 지나 서해로 간다.
※대개 桐江을 영월에서 처음 보거나 강으로 가는 사람들이 東江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동강상류를 가기 위해 신동읍 예미리 유문동 동강 입구에 다다르면 【桐江】이라는 제대로 된 안내판을 보게 된다. 혹자들은 東江인줄 알았더니 桐江이구나 생각하지만 원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東江은 桐江과 다른 이름으로서 桐江에 속해 있는 영월강인 셈이다. 이는 同音異義字 표기 방법으로 동강이라고 말하되 東江, 桐江이라고 구별하여 써야 한다.
乃乘氷渡此江 又有黃江村落 而權氏舊基云 暮抵西倉 卽淸風地也 留宿 自瑟音之於此 五十里 有同宿一旅 丹陽德葛岸 金姓人也 以峽中地窄人多 水土亦不利 將營野外 居地云
곧 빙판을 타고 이 강을 건너니 또 黃江村이 있는데, 權氏들이 살던 지역이라 한다. 날이 저물어 西倉에 이르렀는데, 즉 청풍의 땅이다. 이곳에서 밤을 지내니 瑟音에서 여기까지 50리 이고 丹陽의 德葛岸(덕갈안)에 사는 여행객 金씨와 합숙하였다. 산골짜기의 지형이 狹窄(협착)하여 사람들은 많으나, 기후와 풍토가 좋지 못해 營內에서 떨어진 들 밖에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是夜 次寒碧樓 樓韻詩曰
이날 어둑어둑해지는 밤에 寒碧樓(한벽루)의 樓의 이름 韻을 따서 시를 지어 읊기를,
※寒碧樓: 1317년(고려 충숙왕 4)에 청풍현 출신의 승려인 淸恭이 王師가 되자 청풍현을 군으로 승격하였는데,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객사 동쪽에 지었다고 전한다. 그 뒤 1397년(태조 6)에 청풍군수 鄭守弘이 수리하였다. 傳하는 重修記에는 崇禎甲戌郡守權璥改刱(비롯할 창)이라고 하여 1634년(인조 12)에 권경이 다시 건립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모습에는 이 때의 양식이 대체로 남아 있다. 1870년(고종 7)과 1900년에도 수리하였고, 1972년에 홍수로 무너진 것을 1975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淸風太守邑寒碧 淸風의 太守가 邑에 寒碧樓를 세웠고,
山人樓江上五更 山 사람이 樓의 강가에 와서 새벽에 樓에 오르네!
月居然數百秋是 달빛이 이곳에 머물기를 수백 년이나 흘렀는데,
樓卽杜谷洪先生 이 樓閣은 곧 杜谷 洪先生이,
曾留杖屨地也 일찍이 머물던 곳이었는데!
步其韻而感慕焉 시를 읊으며 걸으니 사모하는 마음이 더하네!
※杜谷 洪宇定: 添附5) 참조. 杖屨: 지팡이와 신. 이름난 사람이 머무른 자취를 이르는 말. 屨신 구
自此店去樓 未滿數十里 而以足繭 故未遂一賞之願也
이 주막에서 누각까지 數十里가 채 되지 않으나, 발이 부르터서 한 번 즐기며 감상해 보겠다는 소원을 다하질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