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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제후시대가 열리다(1)
신(申)나라는 백이(伯夷)의 후예에게 내린 나라다.
성은 강(姜).
주유왕 재위 당시 신후(申侯)의 이름을 밝힌 기록은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신후(申侯)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죽은 후에 붙이는 시호도 전해지지 않는다.
아마 소국인데다 곧 멸망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는 그냥 신후(申侯)라 부르겠다.
신(申)나라 후작이라는 뜻이다.
신후는 주왕실의 국구(國舅)이다.
구(舅)란 장인이란 뜻이다.
신후(申侯)의 딸이 주유왕의 왕후였기 때문에 국구로서 예우받았다.
소국의 제후였던 신후(申侯)는 자신의 딸이 왕후에 오른 이후 일약 주왕실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삼공의 반열에 오를 야심까지도 가졌다.
- 신(申)을 대국으로 키우리라.
처음에는 잘 나갔다.
각별히 정을 쏟았던 외손자 의구(宜臼)도 태자로 봉해졌다.
신후(申侯)의 주왕실에서의 지위는 다음 대까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포사(褒姒)가 등장하면서부터 일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태자 의구(宜臼)가 주유왕의 노여움을 사서 신(申)나라로 쫓겨온 것이 그 시발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궁성으로 돌아가겠지.'
그것이 실수였을까.
얼마 후 그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들었다.
- 왕후 강씨를 폐하고 대신 포사(褒姒)를 왕후에 봉하노라.
태자 의구(宜臼)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왕자 백복을 태자에 책봉하노라.
더욱이 자신의 딸인 강후(姜后)를 냉궁에 가두어 죄인 취급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신후(申侯)의 눈꼬리가 날카롭게 치켜올라갔다.
"조정 대신들은 무엇하는 자들이란 말인가?"
신후는 일갈(一喝)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호경으로 쳐들어가 주왕실을 짓밟아버리고 싶었다.
아니, 실제로 그는 군사를 끌어모았다.
병차(兵車) 2백승(乘)이 성밖에 정렬했다.
삽시간에 신나라 전역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그때 신후(申侯)를 일깨워준 사람이 있었다.
대부 여장(呂章)이었다.
"비록 포악무도하다고는 하지만 천자(天子)는 천자입니다."
그 무렵만 해도 천자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천자를 공격한다는 것은 만천하의 공적(公敵)이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후세에 길이길이 대역죄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므로 감정대로 군사를 일으켰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당한다, 라는 것이 여장(呂章)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였다.
"하지만 이대로 참고 있을 수만은 없질 않은가?"
"왕실에서 먼저 우리를 공격한다면 그땐 당연히 군대를 동원하여 방어해야겠지요."
"왕실에서 먼저 우리를 공격하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
"제게 어떤 생각이 있는데, 주공께서 한번 시행해보겠습니까?"
"말해보시오. 왕을 응징하고 냉궁에 갇혀 있는 강후(姜后)를 구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내 간을 꺼내서라도 씹어 먹겠소."
"그렇다면 됐습니다. 주공께서는 먼저 왕에게 글을 올려 폐후를 다시 왕후로 봉하게 하고 폐서인(廢庶人)된 태자 또한 다시 동궁에 봉하도록 청하십시오."
"왕이 상소 따위에 마음을 바꿀거라면 애초에 이런 일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오. 오히려 화를 내며 우리 신(申)나라를 치려들 것이 분명하오."
"바로 그것입니다. 주공께서 글을 올리면 왕은 크게 노해 반드시 우리 신(申)나라를 치려들 것입니다. 그때 주공께서 군대를 내시면 이는 방어하는 군대이므로 아무도 주공을 비난하지 않을 것이요, 오히려 주변 제후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군대의 힘으로 왕의 군대를 제압할 수 있을까?"
"우리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하지만 견융(犬戎)의 힘을 빌린다면 왕성을 점령하고 왕후도 구해낼 수가 있습니다."
견융(犬戎)은 지금의 감숙성과 섬서성 일대에 세력을 펼치고 있는 융족(戎族)중의 한 부족이다.
서융(西戎)이라고도 한다.
주선왕(周宣王) 초기에는 그다지 강성하지 않았으나 시일이 지나면서 만만치 않은 세력을 펼치고 있는 유목민족이었다.
여산에 봉수대를 설치한 것도 바로 이 견융(犬戎)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견융의 도움을......?"
신후(申侯)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아무리 주유왕에 대한 분노가 크다 하더라도 적대 관계에 있는 견융(犬戎)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질 않겠는가.
"주공께서 염려하시는 바는 알겠습니다만, 견융(犬戎)은 목축을 하며 생활하는 부족입니다. 그들이 비록 강성하다고는 하지만 아직 호경을 차지할 만큼 강하지도 않고, 농경문화에 익숙하지도 않습니다."
"왕성을 점령한 후에 금은보화를 내주면 아무 미련없이 돌아갈 것이 틀림없습니다."
"....................."
"지금 조정에는 어진 신하들이 다 떠나고 간신들만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이럴 때 호경으로 들어가 간신들을 내치고 왕후를 구출하고 태자를 복귀시키면, 이는 바로 주왕실을 구출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주공의 공적은 성탕(成湯)을 도운 이윤(伊尹)이나 주문왕을 도운 태공망(太公望)의 공적에 필적할 수있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습니다."
이윤(伊尹)이나 태공망(太公望)은 모두 뛰어난 지략가로 폭군 걸왕과 주왕을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들이다. 오늘날까지도 가장 훌륭한 보좌역의 상징으로 평가받고 있다.
- 바로 그러한 사람에 필적할 수 있다.
달콤한 유혹이었다.
신후(申侯)는 그 유혹에 마음이 끌렸다.
"그대 계책에 따르리라."
여장(呂章)이 일러준 수순에 따라 붓을 들어 상소문을 올렸다.
옛날 걸왕(桀王)은 말희를 사랑하다가 하나라를 망쳤고, 주왕(紂王)은 달기를 총애하다가 은나라를 말아먹었습니다.
이제 왕께서 포사를 익애(溺愛)하여 적자를 폐하고 서계(庶系)를 세웠으니, 이는 부부의 의(義)에 어긋나며 부자의 정을 끊으심입니다.
걸왕(桀王), 주왕(紂王)의 일이 어찌 옛날의 일에만 해당하고 오늘에는 적용되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왕께서는 즉시 잘못된 조처를 바로잡고 나라를 망치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신후(申侯)의 상소문은 이내 주유왕에게 전해졌다.
글을 읽어 본 주유왕(周幽王)의 얼굴은 노기로 끓어 올랐다.
자신의 포사(褒姒)에 대한 사랑을 말희와 달기로 비교한 것도 비교한 것이니와 강후를 복위시키지 않으면 주왕실을 멸망시키겠다는 협박성이 짙은 글이 아닌가.
"이놈이 나를 깔보아도 너무 깔보는구나!"
금방이라도 궁중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 기세였다.
괵석보(虢石父)가 그런 주유왕의 옆에서 더욱 부채질을 하였다.
"신후(申侯)는 본래 외손자인 의구(宜臼)가 추방되었을 때부터 원한을 품어온 자입니다. 이는 반역이나 다름없습니다."
"신후(申侯)를 어찌 처리해야 좋겠는가?"
"마땅히 왕사군(王師君)을 일으켜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이대로 놔두어서는 왕실의 체통이 말이 아닐 것입니다."
"좋소. 그대가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신후를 잡아오라!"
모든 것이 여장(呂章)이 헤아린 바대로 되었다.
호경에 잠복해 있던 첩자들은 이 사실을 즉각 신후에게로 알렸다.
"이제는 속히 견융의 융주(戎主, 군주)에게 서신을 보내어 군사를 일으키라 하십시오. 궁성에 있는 재물을 모두 내주겠다면 융주는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이 여장(呂章)의 계책대로 되어가는 것을 본 신후는 이제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게 되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뒤였다.
신나라 힘만으로는 왕사군에 대항할 수가 없다.
전쟁에 능한 견융(犬戎)에게 도움을 청하는길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수레에 금과 비단을 싣고 사신을 견융으로 보냈다.
증(繒)나라와 서이족(西夷族)에게도 원군을 요청했다.
증나라는 하왕조의 후예에게 분봉한 나라로 산동성 서쪽 지대에 위치해 있었다.
서이족(西夷族)은 주왕실의 봉국은 아니었으나 백이의 후손으로서 강족의 일족이었으므로 신(申)나라와는 같은 혈통이었다.
- 왕실을 안정시킨다.
신후(申侯)의 움직임은 신속했다.
삽시간에 신, 견융, 증, 서이의 연합군이 형성되었다.
신(申)나라는 지금의 남양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남쪽에서부터 밀고 올라갔고, 견융(犬戎)은 북쪽이므로 낙수(洛水)를 따라 내려오다가 오늘날의 동천(銅川)가도로 접어들었고, 증(繒)나라와 서이(西夷)족은 동쪽에서부터 황하를 끼고 호경을 향해 쳐들어왔다.
명분은 왕사군에 대한 방어였지만, 실제로는 급습이었다.
- 호경을 함몰시켜 강후를 구출한 후 의구(宜臼)를 다시 태자에 봉하면 우리의 목적은 달성된다.
그 외의 행동은 일체 금한다.
신후(申侯)는 남양가도를 따라 북상하는 중에 다시 한 번 연합군의 목적을 각 장수들에게 상기시켰다.
이렇듯 그가 조심하는 것은 주왕실에 대한 대역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중원 각 제후들에게 명확히 인식시켜주기 위해서였다.
4개국 연합군 중 군사력이 가장 강한 것은 견융(犬戎)이었다.
견융의 융주(戎主)는 잘 훈련된 융병(戎兵) 1만 5천 명을 3대로 나누어 호호탕탕(浩浩蕩蕩) 남하하기 시작했다.
우선봉은 패정, 좌서농은 만야속, 중군은 융주 자신이 맡았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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