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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 속에 숨겨진 스승의 사랑
정년 은퇴 후 노화가 진행되면서 평소에 자주 사용하던 용어가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아서 당황하는 경우가 최근에는 자주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 어린 시절의 어떤 일들은 바로 어제 일어난 것과 같이 기억이 생생하다. 최근의 일은 잘 기억하지 못하면서 60년 전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은 지금도 생생하게 잘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나의 뇌가 저장하는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궁금하여 자료를 조사하여 보았다.
[일시적인 정보를 기억하는 단기기억은 뇌신경세포의 전기적인 신호로 저장된다. 이러한 단기기억이 강한 정서적 반응을 유발하는 기쁨, 즐거움, 슬픔, 놀람, 분노와 같은 감정의 기억들과 결합이 되면 뇌신경세포가 그물망과 같이 복잡하게 연결이 되면서 장기기억으로 전이된다.
단기기억이 장기기억으로 전이되는 것은 인간의 생존과 환경 적응에 필요한 정보를 오랫동안 기억하도록 진화한 뇌의 기능과 관련이 있다. 어떤 음식을 먹고 심한 배탈이 났을 때, 뇌는 그런 학습 경험을 장기기억 속에 저장하여 다음에는 그런 음식을 먹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기기억으로 저장된 것을 꺼내서 자주 재생하면 그때마다 뇌신경세포의 연결망이 새롭게 강화된다. 그래서 어릴 때 받았던 정서적인 충격은 성장하면서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 회상하며 기억력을 강화하기 때문에 노인이 되어서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5~6살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누나들은 모두 학교에 등교를 하고 나는 혼자서 마당에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용호야 나하고 시장 갈래?”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집 근처에 있는 시장에 갔는데 그날이 마침 풍기 장날이라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장을 보시면서 시장 가게에서 파는 삶은 밤고구마를 하나 사 주셨다.
집에 와서 그것을 먹어보니 정말 고구마가 삶은 밤같이 맛있었다. “아, 어머니께서 나를 사랑해서 내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내 마음을 아시고 맛있는 밤고구마를 사 주셨구나!” 라고 생각하니 무척 행복하였다. 어른이 되어서도 밤고구마만 보면 어린 시절의 어머니 사랑이 생각난다.
또 오래된 기억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다. 어느 여름날에 학교를 다녀온 후 마루에서 어머니와 함께 앉아 있었는데, 오전 12시경에 갑자기 아버지께서 대문을 열고 웃으시며 들어오셨다. 오늘 카메라에 필름을 넣었으니 사진을 찍자고 하시면서 안방에서 동생을 데리고 나오라는 것이었다.
1960년대 초에는 카메라가 귀한 고가품이어서 사진을 찍는 일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아버지께서 사진을 찍어 주신다고 하니 나는 신이 나서 어머니와 함께 안방에 들어갔다. 그해 5월에 태어난 신생아인 남동생은 곤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어머님이 잠자는 아기를 안고 밖으로 나오니 동생은 놀라서 깨면서 큰소리로 울기 시작하였다. 어머니는 웃으시면서 울고 있는 동생을 안고 있으니 아버지께서 사진을 찍기 시작하였다. 나는 어머니 옆에 서 있었지만 부모님이 같이 찍자는 말씀을 안 하셨다.
어색한 분위기를 피하기 위하여 나는 마치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고 싶은 것처럼 부엌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부엌에는 공동우물 샘에서 길어온 물이 큰 항아리에 담겨 있었다. 나는 물위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며 그릇으로 물을 떠서 몇 모금 마시면서 동생의 사진촬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사진촬영이 끝난 부모님의 대화 소리가 들리자 “이제 용호도 엄마 옆에 서라" 하시면서 함께 사진을 찍어주겠지~ 라고 기대를 하면서 얼른 부엌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나 부모님은 마치 내가 투명인간이라 보이지 않는 것처럼 아무런 관심도 표명하지 않으셔서 그대로 상황이 끝나버렸다.
그 당시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셨던 이 RICOLET 카메라는 약 55년이 지난 후 고향집의 장롱 속에서 다시 발견되었다. “그때 왜 아버지께서 나는 사진을 찍어주지 않으셨을까?” 카메라만 보면 떠오르는 나의 질문이었다. 이런 궁금증은 어른이 되어서 나를 카메라에 유난히 집착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나를 사랑하신 부모님에 대한 기억에 이렇게 양면성이 있듯이, 나의 많은 은사님들에 대한 기억에도 양면성이 있었다. 그런데 특별히 나에게 많은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나의 기억 속에 감사한 마음으로 저장되어 있는 몇 분의 은사님들이 계신다. 지금도 그분들을 생각하면 이름과 얼굴과 음성이 생생하게 재생될 정도로 장기기억이 아주 강하게 저장 되어있다.
1960년대에는 전국적으로 중고등학교 입학시험 제도가 있어서 6학년 학생들은 중학교에 진학을 하려면 공부를 엄청 많이 해야 했다. 5학년 5반 담임 선생님이신 김병구 선생님은 5학년의 겨울방학이 시작되자 나에게 권영순 선생님을 과외 선생님으로 추천해 주셨다. 권영순 선생님은 풍기에서 생활하시면서 매일 자전거를 타고 약 3km 떨어진 봉현국민학교로 출퇴근을 하고 계셨다. 김병구 선생님의 추천으로 여학생 2명과 남학생 4명이 권영순 선생님 집에서 매일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하였다.
권영순 선생님은 기회 있을 때 마다 산에 있는 소나무와 바위를 예로 들면서 우리들에게 많은 인내심과 노력을 요구하셨다. 또한 시간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주기 위하여 선생님에게 인사를 할 때 '안녕'이라는 말 대신에 '시간'이라고 외치도록 가르치셨다. 선생님은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려가며 학습지도를 하셨기 때문에 다들 무서워하였지만, 난 그분의 정신력을 강조하시는 말씀은 다른 선생님들에게서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약간의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나의 태도가 권영순 선생님께는 좀 색다르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풍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권영순 선생님과 헤어 진지 약 4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어느 봄날에 갑자기 소천하신 어머님의 장례식을 마치고, 아버님과 함께 친척분들을 모시고 소백산 주변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는데, 갑자기 권영순 선생님이 친구분들과 함께 그 식당으로 들어오셨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권영순 선생님을 뵙게 되어서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권영순 선생님은 나를 보시며 “누구신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저는 강용호입니다.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하면서 가지고 있던 영남대학교의 명함을 드리니 한참을 쳐다보시다가 “아, 용호구나” 하면서 알아보셨다. 그렇게 짧은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해 12월 중순에 권영순 선생님은 내 명함에 있는 영남대학교 주소를 보시고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오셨다. 선생님께서는 “어릴 때부터 뭔가 좀 다르더니 영남대학교의 학장을 하고 있다니 참으로 대견하다.” 라는 뜻의 글을 첨부하셨다. 처음으로 권영순 선생님의 진솔하신 마음이 담긴 카드를 받아보니 나도 가슴이 뭉클하였다. 그래서 영남대학교 캠퍼스에 있는 문구점을 방문했다. 선생님께서 초등학교 때 '시간!' 이라는 구호를 외치도록 한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영남대학교의 로고가 새겨진 커다란 벽시계를 사서 우체국으로 가서 선생님 댁으로 발송하면서, 사모님과 함께 매일 소중한 '시간'을 알려주는 벽시계를 바라보시면서, 또 그 벽시계가 옛날의 어린 제자가 있는 영남대학교의 시계임을 보시면서, 기뻐하실 모습을 상상하였다. 그 시계선물을 받자마자 선생님은 놀라서 즉시 전화로 응답을 해 주셨다. “이렇게 멋진 선물을 보내줘서 고맙네!”… 스승의 마음은 제자가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는 작은 감사의 선물에도 감동의 물결이 크게 출렁이는 법이다.
풍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영주중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영주에서는 같은 해에 영주여고에 입학한 누나와 함께 자취생활을 할 예정이어서 어머님이 도와주러 잠시 방문하셨다. 나는 입학식을 한날 밤에 방에서 자다가 연탄가스에 중독이 되었다. 몸이 추워서 깨어보니 비 내리는 마당에 있는 가마더미 위에 내가 누워 있었고, 동네 어른들 몇 분이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부엌에서 저녁 설거지와 마무리 정리를 하시느라 나보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던 어머님이 그날 옆에 계시지 아니하였으면 나의 운명은 거기에서 마침표를 찍었을 것이다.
나는 영주중학교 1학년때부터 3학년 졸업할 때까지 수학 선생님이셨던 김동석 선생님에게 은혜를 많이 받았다. 그때는 3년 후에 다시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쳐야 하기 때문에 김동석 선생님께 어려운 수학을 배우려는 학우들이 많았다. 김동석 선생님 밑에서 함께 공부하던 학우들은 영주고, 안동고, 양정고, 휘문고,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용산고 등으로 진학하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중학교 1학년때 교장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청운의 꿈'을 갖게 하려고 교내에 '청운탑'을 건립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중학교 친구들은 나중에 '청운회'라는 친목회를 조직하여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없는 우정을 보여주고 있다.
소백산 산골마을에서 자란 아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이라는 대도시로 진출하니 생활환경이 급변해서 그런지, 내가 다닌 용산고등학교에서 특별히 기억나는 선생님이 없어서 죄송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한양대학교에서는 화학공학과의 문세기 교수님이 4학년 12월의 마지막 수업시간에 제자들의 미래를 위하여 해 주신 한마디 말씀이 내 인생의 진로를 180도 바꾸어 놓았다.
문세기 교수님은 마지막 수업시간에 들어오셔서, “제군들은 이제 사회에 진출하게 되는데, 혹시 외국에 나가서 공부할 기회가 있으면, 최근에는 '유전공학'이 새롭게 떠오르는 학문이니 이 분야를 연구해 보길 바랍니다.”라고 조언을 해 주셨다. 나는 '유전공학'이라는 단어를 그때 처음 들어보았고 외국에 나가서 공부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관심을 갖지않았다.
대학교에서의 마지막 수업을 마치면 나는 대전연구단지에 있는 럭키(LG)중앙연구소에서 근무하도록 예정이 되어있었다. 내가 연구소에 도착해보니 그곳에 '유전공학연구실'이 있었다. 문세기 교수님이 말씀하시던 유전공학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어서 나는 유전공학연구실로 배정받기를 희망했지만 허락이 안되고 화학공정실로 배정을 받았다.
럭키(LG)중앙연구소가 설립된 지 3년 정도 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초빙해 오신 박사급 연구원이 몇 분 계셨고, 대부분 석사급 연구원들로 구성되었다. 학사급 연구원들도 몇 명이 있긴 했지만 연구원이라기 보다는 연구보조원 역할을 하고 있었다.
럭키주식회사의 신입사원 연수 때 전국을 다니며 각 지역의 공장을 방문하였었는데 대전에 있는 연구소가 제일 마음에 들어서 난 이곳을 지원했었다. 그러나 학사학위 소지자는 연구소에 오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학사급 연구원은 연구소에 필요한 인물이 아니니 계속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곳에 갈 곳도 없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산속의 꿩들이 대낮에도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날아 다니는 한적한 대덕연구단지에서 혼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었다. 회사가 제공한 연립주택에서 나랑 함께 기숙하고 있던 4명의 동료들은 모두 서울 집으로 가고 나만 혼자서 외롭게 빈방을 지키고 있었다. 방 청소를 하다가 룸메이트가 읽다가 던져 놓은 겉표지가 찢어진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 잡지 책이 눈에 띄었다. 심심하던 차에 그것을 펼쳐서 읽다 보니 아르헨티나의 어느 가톨릭 신부님이 쓴 글이 감동적이었다.
그 신부님은 어린 시절에 삼촌과 함께 해안 가까운 곳에 밤 낚시를 갔는데 고기 잡는데 신경을 쓰다 보니 자신들의 배가 해류를 따라 연안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아침에 해가 떠서 보니 자신들이 바다 한 가운데 있었고 어디로 가야 해안이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집에서 가져온 물이 한 병만 남게 되자 삼촌은 “이 물을 둘이 마시면 얼마 못 버틴다. 너 혼자 이것을 마시면 좀 더 오래 버틸 것이다. 혹시 네가 구출되면 내 가족을 잘 부탁한다” 라고 말하면서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사라져 버렸다.
혼자 남은 어린 조카는 기진맥진하여 마지막으로 애절하게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저를 구해 주시면 제 삶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그리고는 의식을 잃었다. 한참 후에 의식이 들고 보니 자신이 일본의 참치잡이 어선 갑판에 누워있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어보았더니, 선원들은 원래 이 지역은 배가 다니는 정규 항로가 아닌데, 자기들이 탐지한 참치 떼가 이리로 와서 그 뒤를 따르다가, 작은 배 위에 기절한 아이를 발견하고 구출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그 아이는 아르헨티나로 무사히 돌아가게 되었고, 배 위에서 자기가 약속한 대로 가톨릭 신부가 되었다는 실제 상황의 글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기독교의 하나님도 우리나라의 단군 신화처럼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르헨티나 아이의 이야기도 정말 극적인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지만, 그 당시 나의 심정은 망망한 바다위에 아무런 희망도 없이 혼자 배에 남은 아이와 같았기 때문에, 믿거나 말거나 그런 건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나도 한번 따라서 기도라도 해보자 라고 생각했다.
나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난 손해 날 것이 없었다. 밑져봐야 본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요한 산속의 빈방에 혼자 앉아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정말로 계신다면, 저를 미국에 보내주셔서 유전공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정말로 계시다는 것을 믿겠습니다.” 이렇게 딱 한 번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고는, 곧 괜히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후회를 하였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구소의 정밀화학 실험실에서는 하루면 화학반응이 끝나는 것을 화학공정실에서는 3층 높이의 건물을 뛰어다니며 쉬지 않고 일하더라도 최소한 일주일이 걸렸다. 그런 힘든 육체노동을 주말도 없이 거의 나 혼자서 매일 하다 보니 몸이 너무 힘들어서 집에 가면 도저히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아, 젊은 시절 미국 유학의 꿈은 결국 이렇게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지는구나” 하며 자포자기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한 해가 끝나갈 무렵인 12월 초에 기적 같은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
어느 겨울날 아침에 치약실험실에서 일하던 연구원이 갑자기 제2연구실 부장님이 나를 찾는다 하여 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처음으로 제2연구실에 들어가 보았다. 그곳은 생활용품을 개발하는 연구실이라서 들어서자마자 향긋한 향기가 나고 실험실도 무척 조용하고 깨끗하였다. 제2연구실 부장님 말씀이, 내가 속해 있는 4연구실에서 2연구실로 옮기고 싶은 마음은 없냐고 물으셨다. 왜 그러시냐고 물으니, 2연구실에 연구원이 필요하여 새해에 연구원 충원을 요청했더니 소장님께서 신규 인력채용은 곤란하시다며, 신입사원들 중에서 적당한 사람을 찾아보라고 지시하셨단다. 그래서 연구소에 들어온 신입사원 중에서 찾아보니 내가 가장 열심히 일하는 것 같다면서 다들 나를 추천했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괜히 잘못 대답하여 현재 4연구실 부장님의 심기만 불편하게 하고 2연구실로 이전도 못하면, 결국 나만 바보가 될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다시 물어보았다. 저는 이곳으로 오고 싶다 해도 우리 부장님이 허락 하시겠습니까? 하니, 2연구실 부장님 말씀이 그 점은 염려하지 말라며, 소장님이 본인만 동의한다면 누구든지 책임지고 인사이동을 시켜 주겠다고 약속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본의 아니게 육체 노동을 하는 제4연구실에서 정신 노동을 하는 제2연구실로 이전을 하였다. 제2연구실에서는 퇴근 후에 몸이 피곤하지 않으니 본격적으로 미국 유학준비를 시작할 수 있었다. 연구소 내에서 부서간 인사이동은 이전에는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나에게만 발생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단순히 극적인 우연의 일치였을까? 그렇다면 아르헨티나의 신부 이야기도 단순히 극적인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었다. 그때부터 나의 생각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후에도 나에게는 극적인 우연의 일치가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마치 나는 어항 속에 있는 물고기인데, 누군가 어항 밖에서 나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내가 곤경에 처하면 슬쩍 주변 환경을 터치하여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도움의 손길 덕분에, 나는 연구소에 입사한지 2년만에 사표를 내고, 드디어 꿈에서도 그리워하던 미국 유학을 가게 되었다. “밑져 봐야 본전이다”라는 심정으로, "혹시나?" 하며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이렇게 현실이 된 것이 놀라웠다.
1984년 1월 1일 저녁에 미국으로 출국하려고 김포국제공항으로 갔다. 김포국제공항은 초등학교 4학년 때 한국은행에 다니시던 외삼촌께서 독일로 파견 나가실 때 아버지께서 나를 데리고 오신 적이 있었다. 공항에는 초등학생인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나온 두 누님들과 부모님과 함께 나의 약혼녀와 어머님도 함께 배웅을 나왔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이별을 안타까워하는 사랑하는 나의 약혼녀를 보니, 지금 내가 무작정 미국으로 가는 것이 과연 잘하는 것일까? 알지 못하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순간 ‘지(知)와 사랑’의 주인공 ‘골드문트’의 갈등이 생각났다.
사실은 나의 약혼녀도 정말 극적인 우연의 일치로 만나서 서로 사귀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혼자서 유학을 가는 것도 불안한데 결혼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어느 여름날에 대전 부근의 금강휴게소에서 데이트를 하다가, 나의 힘든 마음을 알고 있는 듯한 천국의 음성을 듣는 정말 신비한 체험을 하였다.
사도 바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듯이, 나도 어떤 남성의 음성이 강한 전파 메시지로 나의 뇌를 스치고 지나갔다. 얼마나 강하게 스치고 지나갔으면 그때의 음성이 아직도 나의 장기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런 신비한 체험을 하고 난 후,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나는 미국으로 떠나기 한달 전인 11월에 약혼식을 서두르게 되었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난 뒤 드러난 사실이지만, 그때의 약혼식은 내가 박사과정에 입학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연구소에서 2년동안 적금을 들고 고생하며 미국에 도착한 곳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교가 아니라 등록금과 생활비가 가장 적게 드는 Texas Tech University (TTU) 이었다. 그곳에서 Fred Senatore 교수님을 만났다.
Fred Senatore 교수님은 New Jersey 주의 Rutgers University에서 인공혈액(Artificial Blood)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TTU 화학공학과에 임용되신 신임 조교수이셨다. Fred Senatore 교수님에게 특별하게 감사한 것은, 본인의 연구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연구비가 많은 다른 원로교수님에게 부탁하여, 한국이라는 가난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인 나의 생활비를 지원해 주셨다.
Fred Senatore 교수님은 미국국립보건원(NIH)에서 3년짜리 연구프로젝트를 지원받아서 나의 생활비를 계속적으로 지원해 주시면서도 나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요구를 전혀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내가 어떤 질문을 하거나 지원을 요청하면 그런 것들은 금방 잘 해결해 주셨다. Rutgers University에서 박사과정 학생시절에 본인의 지도교수님이 그렇게 모든 것을 스스로 찾아서 해결해 나가는 교육을 시켰다면서 나에게도 그렇게 지도를 하셨다. 이런 훈련과정은 생소해서 다소 난감했지만 졸업 후 나중에 내가 영남대학교에 와서 스스로 새로운 연구과제를 개발하며 추진해 가는 과정에서 정말로 큰 힘이 되었다.
Fred Senatore 교수님은 내가 박사학위를 받고 졸업을 하자, Texas에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MD Anderson Cancer Center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강력하게 추천해 주셨다. 그 덕분에 난 그곳에서 말로만 듣던 바이러스 유전자를 편집하는 유전공학 기술을 충분히 실습할 수 있었다.
Fred Senatore 교수님은 학생 시절에 의사가 되고 싶다는 본인의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교수직을 그만두고 TTU 의과대학 1학년으로 입학을 하여 4년 뒤에 졸업을 하시면서 결국 의사가 되셨다. 그후 Texas를 떠나서 지금도 Harvard Medical School과 Food and Drug Association (FDA) 정부기관에서 활동을 하고 계신다.
MD Anderson Cancer Center에서 유전공학에 대한 연구경험을 하고, 나는 Texas를 벗어나 일리노이 대학교(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화학공학과에 계시는 Douglas Lauffenbuger 교수님 연구실로 들어가게 되었다.
Douglas Lauffenbuger 교수님은 인체 호르몬이 동물세포의 증식에 미치는 영향을 수학방정식을 이용하여 컴퓨터로 시뮬레이션 하며 특정한 효과를 예측하는 아주 특이한 연구를 하고 계셨다. 암연구소에서 근무한 나의 연구경험이 교수님 연구실에 필요하여 기꺼이 나를 받아 주셨다.
Douglas Lauffenbuger 교수님의 장점은 아주 소박하시면서도 제자들에게 매우 자상하시어 대학원 학생들을 마치 아버지 같이 대하는 모습이었다. 많은 박사과정 학생들과 함께 집에서 싸온 샌드위치로 점심도 같이 하시고, 매주 목요일 오후에는 농구도 같이 하시고, 성경공부도 같이 하시고,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도 해주시고, 날씨가 더우면 반바지 차림으로 학교에 나타나기도 하셨다.
학생들에게만 자상하신 것이 아니라 교수님 집을 방문해 보니 두 딸들에게도, 아내에게도, 무척이나 자상하셨다. 그러면서 또 틈나는 대로 연구도 하시고, 저서도 집필하시고, 정말 1분 1초를 아껴 사용하시는 엄청난 에너지의 소유자이셨다. Fred Senatore 교수님에게서 배운 '스스로 문제점을 찾아 해결하는 방법'을 Douglas Lauffenbuger 교수님 연구실에서 적용했더니, 교수님은 시키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잘 한다고 무척 좋아하셨다.
일리노이에서 일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미국 체류비자가 만기 되는 시점이 도래하였다. 그래서 미국내에서 직장을 얻기 위하여 노력한 결과 Douglas Lauffenbuger 교수님의 강력한 추천 덕분에 뉴욕주에 있는 Brookhaven National Laboratory에서 연구소 직원으로 채용하겠다는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도 영남대학교 응용미생물학과 교수 공채에 최종 합격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결국 난 8년간의 불안한 미국생활을 끝내고 안전한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을 선택했다.
1992년 1월에 Douglas Lauffenbuger 교수님에게 가서 한국의 영남대학교에 교수로 채용됐다고 연락이 와서 귀국하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나에게 그럼 2월분 급여도 줄까? 물으시는 것이었다. 2월에는 일도 하지 않았는데 한 달치 급여를 보너스로 주시겠다는 뜻이었다.
자신이 손해를 보면서도 남에게 친절한 배려를 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크리스찬이 아니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그런 예상치 못한 특별한 배려와 사랑에 너무나 감사하여 한국에 와서도 교수님에게 간혹 소식을 전하였다. 내가 영남대학교로 오는 해에 Douglas Lauffenbuger 교수님은 MIT 대학교의 생물공학과 학과장(Biological Engineering Head)으로 가셔서 지금도 세계적 수준의 우수한 제자들을 양성하고 계신다.
이 글을 쓰면서 지나간 나의 과거를 어린시절부터 천천히 회상해 보았다. 그동안 보이지 않는 손길로 나를 이끌어 주신 부모님의 헌신적인 보살핌과 여러 은사님들의 가르침 속에 숨겨진 진실한 사랑을 되새기면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항상 나를 지켜보고 계시지만,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나를 지극히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나의 아름다운 과거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의 연속이었다.
"왜? 왜 당신은 나를 그토록 사랑하셨나요?"
혹시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뵙게 된다면 꼭 물어보고 싶은 나의 질문이다.
지나간 모든 것이 이토록 아름다운 나의 인생이었듯이,
앞으로 다가오는 모든 것도 아름다운 나의 인생이 될 것이다.
2024년 6월 6일
첫댓글 @ 흥미진진하게 재미있는 소설 읽듯이 읽었습니다. 감동 받았습니다.
@ 사진 이야기만 나오면 기억나는 장기기억이 있습니다. 고교(마산고) 졸업식(74.2) 날, 아버지가 장사 일로 시골에서 마산으로 오셨다가 학교로 찾아오셔서 정문 앞에서 만났습니다(일부러 오신 것이 아니고, 마산에 오신 김에 잠시 학교로 찾아오신 것임). 정문 앞에 사진사들이 여러 명 있어서, 아버지한테 사진 한 장 찍자고 하니, "씰 데 없는 데 돈 씰라쿠나." 라고 하시며 앞장서 휘익 걸어가시는 바람에 사진을 못 찍었습니다.
@ 약혼녀와의 러브스토리 2막이 빠졌군요. 당연히 그 얘기가 나올거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 감사하옵니다.^^
@ 졸업식 사진을 못찍어서 섭섭하신 마음이 저와 비슷하네요.^^
@ 또 '배우자 동행' 이라는 글을 쓰라고 할까봐 남겨뒀습니다.^^
교수님, 글 잘 읽었습니다. 치밀한 분석으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정신없이' 따라가게 합니다. 독자의 성장 과정도 돌아보게 하지요. 기저에 깔린 생에 대한 외경(신앙심이라고 하나요?). 교수님을 알게 되는 글입니다. 그리고 연탄까스 '난리'에서 살아나셔서 감사합니다. '배우자 동행'이라는 원고 청탁이 들어올까봐 남겨두었다는 말씀은 '더욱' 눈에 띕니다. 감사합니다.
편집위원장님의 '사제 동행' 이라는 놀라운 기획력과 엄청난 추진력 덕분에 그동안 깊게 숨어있던 제 기억들이 집단적으로 뇌를 탈출하여 세상으로 나가는 소중한 기회를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어릴 때 소백산 자락에서 부모님으로 부터 받은 유전자를 활성화시켜가며 8년간 미국에서 교수님의 사랑을 담북받으시며 첨단유전공학을 선진화시켜오신점 높히 평가드리며 강박사의 탁월한 정신력을 높히 추앙드리게 된기회를 주심에 감사히 읽어보게 되었음에 감사드립키
니다 도명기올림
아구우 도명기 회장님, 너무 과한 칭찬입니다. 감사합니다.
99번째로 카페회원 등록에 성공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강용호 교수님: 걸어오신 길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홍교수님의 자서전 '산 넘고 물 건너'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서 저도 그렇게 써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