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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7장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
요13:10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잠언을 보면, 지혜로운 동물이 넷이 소개가 되는데, 개미와 사반과 메뚜기와 그리고 도마뱀입니다.
그런데 도마뱀은 위기에 처할 때, 꼬리를 스스로 자르고 도망가는데, 죄는 도마뱀 꼬리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었으나, 우리 몸에 꼬리를 남겼기 때문입니다. 도마뱀꼬리는 잘려도 살아 있어 움직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죄는 내 안에 남아 있어 도마뱀 꼬리같이 움직입니다. 이 죄를 관리하지 않으면, 이 죄가 나를 파멸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파리 한 마리가 향 기름을 망치듯이, 아픈 지체 하나가 온몸에 영향을 끼치듯이, 우리 안에 남겨진 죄가 우리를 파멸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모세는 그러므로 죄를 나병으로 묘사하였는데, 이원영 목사님은 하수구가 아무리 깨끗한 것 같아도, 작대기로 한 번 치면, 온갖 오물이 후루룩 올라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도 죄를 지으면, 하수구 찌꺼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립니다. 또한 꼭 교도소 갈 죄를 지은 사람만 죄인이 아닙니다. 율법의 기능은 영적이어서, 죄를 깨닫게 하고 사람을 탄식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 율법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옛날에 어떤 분이, 만일 하나님이 오셔서 마음을 까시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말씀을 들은 적이 있는데, 예수께서 오셔서 사람 속에 무엇이 있는 지 말씀하셨습니다.
막7:21~23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이것이 죄의 내재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주셨는데, 그것마저 무너지면 겉잡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율법주의는 나쁜 것입니다. 법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율법은 순기능이 있고, 역기능이 있습니다. 순기능은,
딤전1:8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만약 훈계와 율법이 사라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장에 법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 걸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사탄입니다. 그러면 무법천지가 됩니다. 만일 당장에 도로에 신호등이나 횡단보도 페인트를 다 지워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적으로 볼 때, 정말 율법을 잘 지켜보려고 지킬 때 알게 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거듭난 후에 생기는 것인 것 같습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나름 윤리 도덕적으로 살면 나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누가 육법전서를 태어나면서부터 평생에 항상 다 지킬 사람이 있습니까. 율법을 우리 중에 항상 완전히 다 지킬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중에 누가 기차와 마라톤 할 사람이 있습니까. 못합니다. 그것은 기계도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거듭나도 불가능합니다. 예레미야가 인간은 죄성이 표범 점박이 같아서 세탁으로도 없애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디모데전서에서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밝히신 것처럼, 피상적인 것을 너머,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그 겉으로 지킨 것뿐만 아니라, 그 속에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매일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율법을 영적이라고 바울이 말하는 것은, 율법이 피상적인 것을 너머 우리 안에 있는 깊은 죄를 고발하고, 찌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율법의 역기능은 온갖 탐심이 생기는 것인데,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고전15: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그럴 때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목적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법대로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법대로 살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을 탄식하게 만드는 것이 율법의 목적입니다.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탄식하는 인간 겸손한 인간이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찾을 때가 많습니다. 사람을 찾을 것이 아니라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안으로부터의 전환입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복음은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대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성경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율법으로 인함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신21:22~23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라
바울이 이것을 알게 되었는데,
갈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예수님은 율법에 의해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데, 대속물로 오셔서 우리 죄를 짊어지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정죄를 당하셨습니다.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왜 인가요. 그것은 인간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인간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율법 준수가 중요하지만, 그것이 율법의 목적이 아닙니다. 아무도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두더지 뿅망치 같아서, 아무리 권투로 잘 조준하여 때려 눕혀도 다시 벌떡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더라도 자동차로 치면 하이브리드 같이 되어 새 본성이 생겼으나, 여전히 도마뱀 꼬리같이 남은 죄는 내 안에서 벌떡 벌떡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계속 때려 눕혀야 하는데, 죄의 세력이 얼마나 질기고 가공할 세력인지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율법으로는 안 되는 것을 알고 계셨으므로, 약속을 처음부터 주셨는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죄가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경험적으로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는 예수님처럼 내가 죽고, 성령께서 역사하셔야만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두 남편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율법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죄를 고발하고 형벌을 가하는 무서운 남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를 영적으로 볼 때, 겉으로는 몰라도 속으로 얼마나 죄가 심각합니까. 예레미야는 표범가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선하고 거룩한 것이지만 무서운 남편인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볼 때, 예수님은 생각을 훈련시키셨는데, 죄가 얼마나 질깁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은 두 번째 남편으로 우리를 첫남편의 정죄로부터 그 정죄를 자신이 다 받으시고 우리를 풀려나게 하신 것입니다.
갈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대신 율법의 형벌을 받으므로 죽으심으로 율법의 정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둘째남편은 아내의 위치로 내려오셔서, 첫째 남편의 정죄를 다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이로서 성도는 첫째남편과의 관계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법이 그 사람에게 아무런 효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과 자신과 동일시하셨는데, 사람이 되셔서 태어나면서부터 정결예식을 받으시고,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율법 아래 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구원은 죄로부터 구원, 죽음으로부터의 구원, 그리고 율법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율법은 가시입니다. 잘 할려고 하면 할수록 찔리고 아프고 긁힙니다.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육신이 문제입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죄를 깊게 들어가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자유를 주려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갈5: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전체를 어떻게 다 지킵니까. 그것도 항상. 불가능합니다.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성도는 엄밀하게 말하면, 율법에 대해서 예수님과 함께 믿음으로 죽은 것입니다. 그것은 나는 엄밀하게 말하면, 율법이 맞구나. 나는 엄밀하게 볼 때,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는 죄인이구나. 이 때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탄식이 나옵니다.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그런데 거듭나기 전에는,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죄의 정욕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하면서, 청개구리같이 그러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거듭난 후에도 내재된 죄로 인하여 있는 것 같습니다.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우리 성도들은, 둘째 남편이 첫째 남편이 고발하는 죄 값을 다 갚았으므로, 이제 첫째 남편 율법에서 벗어났고, 둘째 남편과 함께 살고 내 힘이 아니라, 기도로 살아야 합니다.
갈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런데 사실 첫째 남편 율법이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내가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롬3:9; 19~20 을 볼 때 그리스도인이 되어도 거듭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도마뱀 꼬리 나병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볼 때, 산상수훈을 볼 때, 심령이 가난하게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 율법의 목적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거듭나기 전에는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이 분명히 있었고, 거듭난 후에도 어떤 것은 탄식이 올라옵니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볼 때, 계명이 죄를 고발하니 내 안에서 죄는 세력 인격이기 때문에, 죄를 더 키운 꼴이 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어떤 것은 아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나은 것이 있습니다.
엡5:3~4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어떤 것은 오히려 호기심을 갖게 하여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예방적 차원에서나, 치리 차원에서 알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역기능으로 갈 때는 사람 속에 있는 죄의 세력이 커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명을 따라 대신 죽어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완전히 그것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볼 때, 율법을 생각하면 할수록 형벌이 걱정될 뿐입니다. 교도소에 있는 죄인들만 죄인이 아닙니다. 생각으로 마음으로 죄를 지을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심령과 생각의 훈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 문제는 내 안의 죄입니다. 육신이 약합니다.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병원으로 치면 CT같은 것입니다. 모세가 원장인데, 죄값은 사망입니다. 정신차리세요! 그러다가 죽어요. 그러므로 이런저런 죄를 짓지 마시고 이런 저런 것을 하시고 이런 저런 것을 조심하십시오. 그러나 그것으로는 한계가 있고요. 반드시 예수라는 의원을 찾아가십시오. 인도를 받습니다. 또는 율법은 교통신호 또는 교통경찰입니다. 빨간 신호등일 때 어떤 사람이 길을 건너면 교통경찰이 여보세요. 길 건너지 마세요. 스톱! 그러나 사탄은 율법을 통해서 걸렸구나 죄 지었지. 죽어라.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여기서 ‘내가’는 분명히 거듭난 후 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성도는 차로 치면, 하이브리드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고는, 거듭나기 전이든 후이든 결코 율법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루터는 성도는 의인이자 죄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구약에서 금으로 싸 매임을 받았어도 썩을 나무인 것처럼, 예수 안에서도 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늘 죄의 본성이 드러날 때마다 내가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인식하고 쳐서 기도로 복종시켜야 합니다. 성경은 사람의 베일을 벗깁니다. 왜? 위대한 제사장 사사 왕 선지자들도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었으나, 살인과 간음을 저질렀고 한 동안 죄 중에 살았습니다. 우리도 조심하지 않으면 그럴 수 있습니다.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안에서라도 죽을 때까지는 죄의 세력에 끼인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죄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첫째 남편은 계속 죄에 대하여 고발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예수가 아니면 이 율법의 정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율법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갈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성도라면, 믿음으로 율법이라는 남편의 정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예수를 믿어야 하며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의 고발과 형벌에서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예수께 돌아와 죄인의 비참을 고백하고 그분을 영접해야 합니다. 또한 성령을 구하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롬8:1~6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따라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거듭났어도, 죄의 몸이 있습니다.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엄밀히 보면 내가 못 다스립니다.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여기서 ‘나’는 예수 안에서 새사람의 실존을 말합니다. 새로운 나는 자기 힘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요? 선을 알아도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 왜요? 한계가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몰라도, 내 속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죄가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 내 힘으로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죄악에 사로잡힐 때는 선을 알면서도 악을 행합니다.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인격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가 웅크리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죄는 악을 먹고 자랍니다. 호세아에 의하면 죄를 밭갈아 열매를 먹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내 안에서 실존하며 죄의 몸이 있으며 인격체입니다. 마치 잘린 도마뱀 꼬리 같습니다. 궁극적으로 예수 안에서 죽은 것이지만, 죽을 때까지 도마뱀 꼬리같이 붙어있습니다. 그러나 관리하지 않으면 나병같이 또는 하수구 찌꺼기같이 될 수 있습니다.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싸운다는 말은 분사로 쓰여있습니다. 전쟁 중입니다. 죽을 때까지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진정한 안식은 주께로 갈 때라고 하였습니다. 그때까지 내 안에서 죄 짓고 싶은 마음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싸웁니다. 예수님조차도 십자가 앞에서 이 잔을 옮기시옵소서 하셨는데, 또한 성도가 은혜만 아니라 고난도 받는 것이 있다고 하였는데, 고난 중에 있을 때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마비상태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인간실존의 비참입니다. 말년의 바울의 고백입니다. 사도바울의 말입니다. 두 본성이 싸우니 사망의 몸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바울도 내가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께 가길 원한다고 하면서도 육신에 교회를 위한 고난을 채우노라 하고,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은혜만 받는 것이 아니라 고난도 받는다고 하였는데, 예수님의 모습을 볼 때도 고난 받는 모습이 있는데, 하물며 죄인인 우리이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의로운 고난보다는 죄로 인한 신음으로 인한 고난이 더 많을 것입니다.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성도 속에는 도마뱀 꼬리같이 남은 아담 안의 죄의 본성과 예수 그리스도 안의 본성이 충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볼 때,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므로, 예수께서 십자가로 죄와 율법에 대하여 승리하셨고 부활하시므로 죽음을 이기셨으므로, 성도는 예수 안에서 이긴 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예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의 본성이 항상 첫 남편에게 정죄를 당하는데, 아무리 깨끗하게 하려고 해도 율법이 예리한 눈빛으로 티를 발견하여 고발하면, 영락없이 죄인인데, 그런 것이 우리 내면에 한 두 개가 아니고, 그러나 바울이 보니 그것 때문에 나를 사랑하사 자기 자신을 버리신 둘째 남편 예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갈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 성경은 거듭남 후에 그러나 영과 혼과 몸이 온전하게 되도록 성령을 따라 살라고 말합니다. 어떤 분들이 보니, 성령을 따라 살지 않으면 비참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죄에 넘어지니까요. 그러므로 바울은 8장에서 믿음을 너머 영을 따라 살라고 말합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갈5:16~18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롬8:5~6 육신을 따라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그러나 항상 성령을 따라 삽니까. 세족식을 생각할 때, 발을 씻는 것도 예수님께서 씻겨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발이 얼마나 자주 더러울 때가 많습니까. 상대적으로는 모르겠으나 죄를 안 짓고 사는 성도가 있습니까. 작던 크던 죄를 안 짓는 성도는 없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죄를 깨닫게 해주시고 오셔서 씻겨 주시고 성도가 다시 깨끗하게 걸어다니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13:14~17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도 이 일을 하십니다.
히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