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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16~21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보면 신성이 드러나는데,
신성을 볼 때, 예수님은 가히 사람이 따라갈 수 없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같이 살다보니, 예수님은 심지어 그림자도 없으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빛 자체이시기 때문이었다.
약1:17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구약을 보면, 하나님이 홍수 때 좌정하셨다는 표현이 있는데,
시29:10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다윗이 보니, 하나님은 흑암 속에 자신을 숨기시고, 그룹천사를 타고, 바람날개를 타고 다니시는 분이었는데, 그에게서 번개와 우레와 우박과 숯불이 내려오더라는 것이다. 허리케인이나 토네이도 같은 바람을 보면, 집 자동차도 날려버리는데, 하여간 다윗이 본 하나님의 모습은 빽빽한 구름과 흑암 속에 거하신 모습인데, 모세도 하나님을 시내산에서 뵐 때, 불이 그에게 있고, 사람이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분이었는데, 그에게서 번개와 숯불과 우레와 우박이 있으셨고, 백성들은 너무 무서워 벌벌 떨면서 모세 당신만 그 앞에 서라고 요구하였다. 누가 불과 친구 할 수 있는가. 불이 멀리서는 아름다워 보여도 가까이 하면 타버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속성은 감히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 안이 아니면, 사람은 하나님의 불에 타버릴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시18:8~14 그의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의 발 아래는 어두캄캄하도다 그룹을 타고 다니심이여 바람 날개를 타고 높이 솟아오르셨도다 그가 흑암을 그의 숨는 곳으로 삼으사 장막 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 그 앞에 광채로 말미암아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내시고 지존하신 이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을 내리시도다 그의 화살을 날려 그들을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그들을 깨뜨리셨도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어마어마한 무시무시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신약에서 사람이 되신 것이다. 곧 마리아의 태속에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인자 곧 사람의 아들, 곧 마리아의 아들로 나신 것이다. 이는 구약예언의 성취인데, 예수님을 여자의 후손이라고 창세기 3장에서부터 예언하셨는데, 죄인인 남자의 씨로 나지 아니하시고, 성령으로 잉태하시어 죄없으신 몸으로 나신 것이다. 그래도 마리아도 죄인인데 예수님이 어떻게 죄없는 몸이 되는가. 구약에서 나병환자가 죄인으로 비유할 수 있는데, 나병환자와 정상인하고 결혼하면, 정상인이 나온다고 한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은 죄를 소멸하는 거룩이다. 또한 인자는 구약에서 다니엘서나 에스겔서에서 사람의 아들같이 생긴 분이 하늘에서 희미하게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인자가 신약에서는 정확하게 마리아의 아들 곧 인자로 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안셀름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이유는 인간의 죄를 상쇄하기 위하여,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라고 하였다. 정말 그렇다.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은 죄짐을 지고, 십자가에서 영원한 제사 곧 대속 내 대신 자신의 몸으로 죄값을 치루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죄인이 받아야 할 심판을 자신의 몸으로 받으셨다. 그러므로 한 마디로, 마치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여 사람이 되셔서 죄인처럼 오신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참사람이자 참하나님이시니 신성이 그에게 있으셨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하늘과 땅과 바다의 물고기를 다스리라고 하셨는데, 바다를 아담이 어떻게 다스리는가. 아마도 죄 짓기 전의 사람의 몸은 물위를 걷는 몸이었는지도 모른다. 죄는 사람을 무겁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므로, 물 위를 걸으셨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런데 성도의 삶은 오늘 본문에서 바다 속에 있는 배와 같다. 넘실거리는 내 안의 죄의 바다, 내 밖의 죄의 바다, 또한 내 안의 낙심과 좌절의 바다, 포기의 바다, 세상의 부조리의 바다, 사탄의 광풍에 흔들리는 바다, 그리고 흔들리는 배,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다른 성경을 보면, 기도하러 산에 가시고, 제자들은 먼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는데, 오병이어의 인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줄 알고 피하신 것이다.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성경에서 물과 바다 바람은 좋은 의미로 쓰일 때도 있지만, 여기서는 나쁜 의미로 쓰였는데, 죄인 혹은 죽음이라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스펄전은 이 파도를 여러 가지로 해석하였는데,
첫 번째로 자신 속에 있는 죄의 파도이다.
죄는 무서운 파도같은 악이다. 주홍같은 죄가 내 안에 있는데, 자신의 부패함과 자신의 범죄로 인하여 자신과 타인들을 삼켜버리는 악으로 발전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사람의 심령을 상하고 낙담하게 만드는 파도이다. 우울증이나, 낙담 등이 그것이다.
세 번째로 어떤 파도는 자신이 무가치하다 파도이다. 살다보면,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다.
네 번째로 죽음이라는 파도이다. 죽음이라는 파도는 닥쳐봐야 안다. 대개 군대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화생방훈련을 받을 때, 죽는 줄 알았다.
다섯 번째로 내가 부패하고 어리석은 존재라는 것을 알고 그것에 압도당하였을 때의 파도이다. 사탄이 우리 마음에 파고들어 맹렬한 시험과 죄를 짓게 하는 충동을 주입할 때, 한 마디로 절대절망의 순간 같은 파도이다.
여섯 번째로 죄를 짓거나 신성모독을 하거나 세상의 희락을 쫓거나 하지 않았고, 죄를 미워하지만, 세상의 염려라는 파도이다. 예를 들면 돈이 없어서 삶을 부양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의 파도이다.
일곱 번째로 자신의 힘으로만 살려고 할 때 오는 피곤과 좌절의 파도이다. 제자들은 계속 노를 저었으나 지치고 말았다.
여덟 번째로 내가 너무 죄로 굳어 있어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하고 애통하지 못하여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파도이다.
아홉 번째로 태양은 가고 잔치는 끝났다는 느낌의 허무의 파도이다. 엘리야도 그러했고 모세도 그러한 적이 있었다.
열 번째로 지나친 비관의 파도이다. 나는 지금은 몰라도 결국 나중에는 믿음을 상실하고 멸망하고 말거야, 나는 영원히 박살나서 끝나고 말거야. 나는 내 본성이 너무 비열하고 부패해서 끝까지 참을 수 없고, 내가 비록 한 달 동안 믿음을 지킨다 할지라도 평생 믿음을 지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할거야 라는 파도이다.
열한 번째로 자신은 이래저래 살았어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생각의 파도이다.
열두 번째로 남들의 시선이나 환경이라는 파도이다.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예수님의 행동은, 초자연적이면서, 상징적이고, 또한 믿음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다니실 때, 그림자도 없고, 자연현상에 거하셨으나, 자연을 초월한 반자연이 아닌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셨다. 이는 인자의 신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적으로 볼 때도 그러한데, 죄라는 바다, 낙심과 좌절의 바다, 포기의 바다, 여러 가지 세상 염려의 바다, 사탄의 광풍의 바다, 죽음이라는 바다, 자신의 무력함에 의한 자기노력의 바다, 여러 가지 두려움의 바다, 상처의 바다 등을 나열한 것처럼 이러한 파도가 사람 속에 있다. 예수 믿기 전에는 그런 파도에 휩쓸려 살았다. 그런데 예수 믿은 후에는 이제 바다 가운데 섬이 생긴 것처럼, 또는 배를 탄 것처럼 되었다. 그러나 성도의 삶이 항상 순탄한 항해를 하는 것은 아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죄의 여러 가지 파도를 맞이할 수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열심히 노를 저을 수밖에 없고, 지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은 그 바다 위를 걸어오셨다. 이는 자신의 신성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셨지만, 이 일은 죄와 세상과 사탄의 파도에 대한 상징적인 예수님의 제스처이다.
스펄전은 이런 각종 파도에 대해서 처방은 한 가지라고 말한다. 우선 예수님을 유령처럼 보지 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문제보다 환경보다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제자들은 파도를 헤치며 노를 젓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이 죄의 파도를 이길 수 있는가. 그런데 예수께서 오심으로 파도를 뚫고 목적지에 이르게 되었다.
스펄전은 죄의 파도에 대해서, 세상의 파도에 대해서, 내 주홍 같은 죄의 파도보다도, 십자가에서 속죄 희생으로 내 죄가 정결하게 씻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물론 파도 같은 죄에 대해서 슬퍼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하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책을 없애버리신 사실을 망각할 정도로 죄에 대해서 슬퍼하며 애통해 하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 스펄전은 내가 죄로 인하여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파도에 대해서도, 예수께서 십자가로 보여주신 사랑, 우리의 실패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통하여 나를 사랑하시는 분의 사실을 바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사람이 죄로 인하여 타락하였으나, 그렇다고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일한 소중한 존재로 여긴다.
또한 죽음의 파도에 대해서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
내 자신이 부패하고 속임수적이고 어리석은 존재라는 것을 발견하고 완전히 압도당할 때 사단이 마음에 파고들어 맹렬한 시험과 죄짓게 만드는 충동을 주입하는 파도가 몰아칠 때도, 예수께서 도우실 수 없다고 상상할 정도의 파도가 있을 때에도, 그리고 죄의 극단적인 경우에 빠지지 않았을 때에만 구원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때에도, 주님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것이다. 어떤 목사님은 이럴 때는 기도도 나오지 않는데, 이럴 때는 하나님께 주여,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라고. 도와주세요. 단순하게 기도하라고 하였다.
염려의 파도가 올 때에도, 예를 들어 내가 만일 100만원이 없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분명히 섭리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100만원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소유하신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다.
자신의 힘만으로 소진되어 아무 무동력으로 가는 배처럼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맡기는 것이다.
내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여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하더라도, 내가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더 크시다는 것을 기억하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태양은 가고 잔치는 끝났다는 허무의 파도가 있을 때, 그때에도 하나님을 예수님을 바라보며 신실하심을 믿어야 한다. 외적인 것 아무것도 바라보지 말고, 오직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피흘리신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중보기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한다.
나는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언젠가 믿음을 상실하고 멸망하고 말거야, 나는 죄가 너무 비열하고 부패해 있어서 끝까지 참을 수 없고 영원히 박살나서 멸망당하고 말거야 라고 생각할 때도, 그것은 환경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필요하다면 영원토록 여러분을 지키실 수 있다.
내가 이래도 저래도 하나님의 자녀는 아닌 것 같다는 파도에 대해서도, 만일 그대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고 싶으면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한다. 있는 그대로 오십시오. 오직 그분에게만 나가십시오. 그분에게 졸라대십시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다른 피난처가 없다. 주님 나를 박대하시면 나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으나 사나 당신만 붙잡겠습니다.
남들의 시선과 환경의 파도가 넘실거릴 때,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 스펄전은 제1원인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제2원인인 환경을 바라볼 때, 두려움에 빠진다고 말한다. 윌리엄 거널은 순전함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거짓의 물결 속에서도 정직 곧 자신의 순전함을 지키고, 나를 보고 계시는 왕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세상 가운데 역사하시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전능하신 주님을 바라보자.
사43:1~7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힌하여 주었노라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아멘.
그러므로 모든 상황 속에서 제자들처럼 노젓는 일을 멈추지 말고, 순전함을 지키고 예수님을 바라보자.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