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행행동
우주 공간에서 외부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방향전환을 하려면 자신의 신체 일부를 잘라내야 한다. 침을 뱉거나, 방귀를 뀌거나, 팔을 잘라서 던져야 한다. 지구에서는 중력의 도움을 받아 방향전환을 하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의사결정에는 지렛대가 쓰인다. 지렛대를 자기 내부에서 조달하면 점점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 자신의 절반을 지렛대로 사용하므로 한번 결정을 할때마다 가용자원이 반으로 감소한다. 고립된 지역은 우주공간과 같다. 뭐든 나빠진다. 섬 왜소화가 그러하다.
인간이 궁지에 몰리면 내부에서 지렛대를 생산하는 나쁜 결정을 한다. 결국 자기 자신을 적대하게 되는 것이 퇴행행동이다. 의사결정에는 대칭과 축의 구조가 필요하다. 유리한 지정학적 위치를 선점해야 한다. 높은 곳을 차지하고 낮은 곳을 바라보면 이긴다.
바둑은 포석 단계에 구조를 만들고 축구는 빌드업 단계에 구조를 만든다. 자신을 높은 곳에 두고 상대를 낮은 곳에 둔다. 사회에도 구조가 있고 마음에도 구조가 있다. 점점 좁아진다. 바둑을 둘수록 둘 자리가 줄고 골대 앞으로 갈수록 패스할 곳이 없어진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갈수록 좁아지므로 애초에 넓게 시작해야 하는 것이 긍정주의다. 나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 우주와, 진리와, 역사와, 천하와, 인류를 모두 나의 영역에 포함시켜야 좁아져도 숨 쉴 공간이 남는다. 나를 좁게 규정하므로 숨막혀 죽는다.
뽕짝이 나쁜 것은 좁기 때문이다. 음악의 여러 요소 중에 하나인 청승떨기 하나로 승부한다. 이발소 그림도 좁아져 있다. 관람객을 행복하게 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기 때문이다. 신파도 좁아진다. 관객을 울려야 하기 때문이다. 답을 정해놓고 있으면 좁아진다.
쇠창살에 갇힌 동물의 정형행동이 그렇다. 인간의 뇌는 안과 밖을 구분하지 못한다. 야생동물은 산과 강과 바람과 나무을 모두 자기 자신의 일부로 느낀다. 동물원에 갇히면 외부의 정보가 들어오지 않으므로 상처를 핥아대며 자기 내부에서 정보를 생산한다.
깔때기 아래쪽으로 내려간다. 자신을 결박한다. 좁은 틈바구니에서 대칭과 축을 만들고 피아를 구분하고 균형에 도달하려고 한다. 거기에 중독성이 있다. 술꾼은 술맛에서 아군과 적군을 찾고, 애연가는 담배맛에서, 정치중독자는 정치판에서 그것을 찾아낸다.
일본만화 맛의 달인에서 주인공 지로는 토마토를 요리하지 않고 화분 째로 들고온다. 직접 따먹는 맛이 최고의 맛이라고 우긴다. 얼핏 그럴 듯 하지만 이런 개소리에 넘어가면 곤란하다. 나중에는 먹지 않고 마음으로 먹는다는 이심전심 토마토 요리를 내온다.
말이 그럴듯해도 방향이 틀리면 단칼에 쳐내야 한다. 모든 나쁜 것도 한 가지 장점은 있지만 거기에 속으면 피곤하다. 갈수록 나빠지기 때문이다. 결벽증, 비건증, 강박증, 의심증은 좁은 틈바구니에서 산과 강과 항구와 도로를 만들어 쉽게 가려는 빌드업이다.
권투선수는 구석이 유리하다. 상대의 주먹이 전면에서만 날아오므로 피할 수 있다. 그러다 점점 코너로 몰려 빠져나가지 못하는 악순환의 덫에 걸린다. 모든 퇴행행동은 전체적으로 지지만 당장은 이기는 것이다. 이 순간만 모면하려고 쉬운 게임을 배정한다.
어린이는 약자다. 약자는 동정을 받는다. 주변의 동정심을 지렛대로 쓰는게 피해자 코스프레다. 윤석열은 피해자인 척 한다. 늙은 두목 침팬지는 늙은 암컷 침팬지들의 동정을 애걸한다. 동정을 구하려고 배를 드러내고 당바닥을 구르며 갓난 아기처럼 행동한다.
의사결정에는 지렛대가 쓰인다. 지렛대는 축과 대칭을 만들고 상대를 밀어내는 형태로 방향전환을 한다. 자기가 속한 집단 내부에서 밀어낼 상대를 만든다. 가족과 친구를 적대하고 결국 자신을 밀어낸다. 결벽증, 강박증, 비건증은 자기를 적대하는 행동이다.
점쟁이는 의사결정을 대행한다.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뭐라도 해야 마음이 편한데 부적을 써주고 기도를 해주고 루틴을 제공하니 마음이 안정된다. 급해서 지푸라기 잡는다고 자신에게 쉬운 목표를 주다가 외부와 연결이 차단되어 점점 나빠지는 것이다.
비건장애
우리나라는 사치품을 명품이라고 부르는 나라다. 장사치들이 수작을 부린 것이다. 부끄러운줄 모르고 말이다. 언어에는 프레임이 붙는다. 프레임이 걸리면 힘이 있다. 국힘이들은 이찍이니, 적폐청산이니, 차떼기니 이런 말을 싫어한다. 내란수괴라는 말도 싫어할 거다.
비건은 섭식장애다. 그게 강박장애의 일종이다. 강박장애는 신경증의 일종인데 비건증은 거식증, 폭식증, 이식증, 먹뱉증과 같다. 왜 병을 병이라고 하지 않을까? 언어는 당당해야 한다는 것이 공자의 정명사상이다. 교묘한 외래어로 포장하여 교언영색한다면 곤란하다.
비건증은 종교와 관련이 있으므로 종교차별 문제로 관대해진 측면도 있다. 종교는 끝없이 금제와 터부와 강박을 생산한다. 뭔가를 ‘하지마라’고 제약을 가해야 집단이 결속하기 때문이다. 겁을 줘서 집단을 조직하고 권력을 행사하려는 비뚤어진 권력의지가 숨어있다.
구조론의 관심은 자존감이다. 인간의 삶에 존엄과 비참 뿐이며 우리는 비참을 멀리하고 존엄을 지향해야 한다. 각종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똥이다. 이념이 어떻고 하지만 다 필요없다. 살펴보면 이념의 배후에 지정학이 도사리고 있다.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려는 것이다.
존엄은 인간이 집단이라는 깔때기의 중심으로 진입하려는 것이다. 비참은 깔때기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다. 강박증, 결벽증, 비건증, 의심증, 불안증은 금 밖으로 밀려나는 사람의 행동이다. 하는 일이 없거나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쓴다.
동물원에 갇힌 동물의 정형행동과 같다. 동물원에서 할 일이 없으니 자기 몸에 상처를 만들고 상처를 핥는다. 상처의 피는 자신의 내부에서 나지만 동물은 자신의 외부환경으로 인식한다. 야생동물이 숲과 바위와 나무를 찾듯이 자기 상처에 숲과 바위와 나무를 조성한다.
자기를 학대하여 얻는 고통에서 들판과 하늘과 구름과 강물과 먼지를 조달하려는 것이다. 비건증은 음식에서 구한다. 바둑의 포석은 바둑판 안에 산맥과 강과 도로를 만든다. 비건증은 음식에 고속도로와 철도와 공항을 만든다. 적군인 고기를 물리치고 개선식을 한다.
비건증은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의 자기 압박이다. 비건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성공한 사람에게 결벽증, 강박증 환자가 많듯이 비건증의 자기압박이 성공의 촉매제가 될 수 있다. 김건희, 나경원, 한동훈의 성형증도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는 수단으로 순기능이 있다.
가발, 키높이, 가슴뽕, 어깨뽕은 성형증의 변종이다. 성공한 사람에게 히스테리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자기를 끝없이 몰아쳐서 성공할 수 있다. 문제는 전투적 자기 차별 행동이다. 비건이 일반인을 적대하는 행동이 결국 자기 자신을 적대하는 결과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의식 깊은 곳에 퇴적되어 있다가 사고를 친다. 의사출신 흑인 나치 대선후보 벤 카슨이 대표적이다. 그의 인생은 증오로 가득차 있다. 흑인이므로 증오를 면책받는다. 비건은 공격수단이다. 그는 의사 주제에 백신을 부정하기도 했다. 결벽증은 공격수단이다.
더럽다는 말로 타인에 대한 적대행동을 정당화 하는 것이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가 그렇다. 쇠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하지만 타인을 공격할 의도를 숨긴 것이다. 외국인은 쇠고기를 먹으니까. 외국인과 접촉하지 못하게 인도인을 가두고 인질로 잡으려는 의도를 숨긴다.
불교는 원래 고기를 먹는데 한국 불교만 유독 고기를 부정하는 이유도 공격무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교 선비들이 시회를 열면서 접대를 요구하고 난동을 피우거나 절을 빼앗아 서원으로 바꾸었다. 비린내가 난다는 핑계로 선비를 절에서 축출할 의도를 숨긴 것이다.
모든 종교적 터부행동에는 권력의지, 차별의지, 자기학대의 의지가 숨어 있다. 남을 괴롭히지 못하므로 무생물을 괴롭히는 것이다. 자기를 구조의 깔때기 속으로 밀어넣는 짓이다. 탈출에 필요한 것은 자존감이다. 자존감은 내가 남보다 더 잘났다는 우월주의가 아니다.
자존감은 나를 존중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기 내부의 관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내 안의 항상성, 균형감각, 안정성을 중시하는 것이다. 사회 속에서 내가 해야할 역할이 있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사회에 소속감을 느끼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자존감이 부족하면 사회에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하는데 그게 관종행동이다. 윤서인증이다. 음모론, 광신도, 터부, 주술에 집착한다. 강박, 결벽, 비건, 의심, 불안, 페미증, 마초증은 사회에 불필요한 트러블을 일으켜 자기 존재를 사회에 알리는 행동이다.
원시인 아기는 가족들이 나를 혼자 남겨놓고 다른 동굴로 이동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가지고 있다. 버려질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강한 인상을 줘서 나를 잊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다른 동굴로 이주하더라도 나를 잊어먹지마, 나를 꼭 데려가라고. 각인을 시켜야 한다.
자기를 사회라는 깔때기의 중심부로 계속 밀어넣는다. 채식만 하면 체중이 줄고 체중이 줄면 체온이 낮아지고, 체온이 낮아지면 면역성이 떨어지고 면역성이 떨어지면 질병에 걸리고 수명이 짧아진다. 비건이 칼로리 부족을 탄수화물로 보충하면 혈당 스파이크가 온다.
서양인에 비해 췌장이 작은 한국인은 특히 혈당조절을 잘 못하는 체질이므로 미국인과 달리 비만이 더 해롭다. 젊은이는 채식을 해도 괜찮은데 소화흡수력이 떨어지는 60대부터 급격히 건강이 나빠진다. 비건행동을 꼭 해야 하는 사람은 단백질 보충제를 먹어줘야 한다.
칼로리 부족을 탄수화물로 채우면 혈관 속에 많아진 포도당이 산화되어 독성물질을 생산하여 모세혈관 벽을 뚫는다. 손상된 모세혈관을 콜레스테롤이 치료하는 과정에 콜레스테롤이 너무 두껍게 도포되어 모세혈관이 막힌다. 모세혈관이 막히면 신체 말단부가 썩는다.
노인은 소화흡수력이 떨어지므로 삶은 돼지고기를 먹어야 한다. 육식도 좋지 않은데 원래 인간이 육식할 때는 하루 한 끼를 먹었다. 육식 위주로 생활하려면 하루 한 끼, 혹은 며칠에 한 끼를 먹어야 하는데 현대인은 원시인과 달리 할 일이 많아서 그렇게 살 수는 없다.
원시인이 사냥을 하면 배 터지게 먹고 며칠을 굶는 것은 기본이다. 들개는 일주일 정도는 기본으로 굶는다. 고양이도 며칠 정도는 안 먹어도 멀쩡하다. 현대인의 생활방식은 고기 야채 탄수화물을 고루 먹을 수 밖에 없게 되어 있다. 현대인은 하루 2식으로 줄여야 한다.
하루 세끼는 자연스러운 인체 활동과 맞지 않다. 어린이는 많이 먹어야 하지만 성인은 하루 두 끼를 먹어야 몸이 정상화 된다. 문제는 탄수화물 위주로 식사하면 아침에 배가 고프다는 점이다. 결국 세 끼를 다 먹게 되고 거기다 콜라를 마시면 비만을 피하기가 어렵다.
태국 스님은 하루 한 끼를 먹는데 48퍼센트가 비만이고 42퍼센트가 고혈압이라고 한다. 콜라를 마셔서 그렇다고. 채식 위주로 하루 한 끼를 먹으면 배가 고프고 고픈 배를 콜라로 달래면 돼지가 된다. 스님이 고기를 먹어야 배가 든든해서 콜라를 줄일 수 있다는 말이다.
디너, 브랙퍼스트, 런치라는 말에 게르만족이 하루 한 끼를 먹은 흔적이 남아 있다.
디너 - 원래 오후 3시가 예배 시간이다. 예배 이후 하루 한 끼 정식을 먹는다.
브랙퍼스트 - 브랙은 부스러기다. 어제 먹다 남은 빵 부스러기를 먹는데 간식이지 식사가 아니다. 런치 - noon은 nine이다. 옛날에는 오후 3시가 9시였으므로 오후 3시를 눈(9)이라고 했다. 눈에 예배를 보면 애프터눈이다. 교황이 시계를 바꿔서 지금은 12시가 눈이다. 눈에 예배를 보고 밥을 먹는 습관이 런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