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6년 한국수필 05월호(통권 375호)
단종 복위를 통해 세우려던 나라 그리고 시
도종환 | 시인 · 전 문화체육부 장관
1.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과 수양대군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관람한 관객이 1천6백만을 넘어서면서 단종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영월의 장릉과 청령포를 찾는 이들이 엄청나게 늘어났고 세조를 질책하는 댓글이 쏟아지고 있다 한다. 온 국민이 500년 만에 단종의 장례를 다시 치르는 것 같다고 하는 이도 있다. 이 영화는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 만든 영화도 아니고, 스펙터클한 사극도 아니고, 전쟁 영화도 아니다. 단종의 죽음과 엄흥도라는 인물과 마을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왜 관객들이 몰리는 건지 흥행의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는 글이 많지 않다. 다만 단종의 죽음이 너무 마음 아프다, 단종이 불쌍하다, 단종을 지키려던 이들의 모습이 너무 애틋하고 안타깝다, 유해진의 연기가 실감 난다, 이런 이야기들은 일견 수긍이 가지만 그게 역대 최다 흥행을 불러온 이유라고 하기엔 어딘가 부족하다. 이 영화에는 세조가 등장하지 않는다. 단종을 죽인 지배권력의 상징으로 한명회가 나올 뿐이다.
한명회가 수양대군의 야욕에 불을 붙이며 권람 등과 모의하여 무사를 모은 것이 계유정난(1453년, 단종 1)의 시작이다. 수양대군은 제일 먼저 김종서를 찾아간다. 수양대군이 첫 번째 제거 대상으로 삼은 이는 김종서, 다음이 황보인이다. 이들은 국가 중대사에 정통한 관료들이다. 김종서는 1433년(세종 15) 함길도 관찰사로 부임한 후 1440년(세종 22) 형조판서로 임명되어 한양으로 돌아올 때까지 7년간 여진족과 대치하는 최전선에 있었다. 그는 6진을 개척한 큰 공을 세웠다. 황보인은 1440년(세종 22) 병조판서로서 평안 ․ 함길도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1452년(세종 32) 세종이 승하할 때까지 10년간 봄가을로 변방을 왕래하며 압록강과 두만강을 따라 행성을 축조했다. 그들은 국가에 헌신했고 국정 경험이 풍부한 관료였다. 그들은 세종의 전적인 신임을 받는 신하였다. 문종도 이들을 신뢰했고 중용했다. 문종은 세상을 뜨기 전 이들에게 세자를 부탁했다. 왕이 된 어린 단종은 이들에게 의존했다.
그러나 수양대군에게 이들은 제거 대상일 뿐이었다. 김종서의 집을 찾아가 임어을운을 시켜 철퇴로 김종서를 내리쳤고 아들 김승규가 놀라 그 위에 엎드리자 양정이 칼을 뽑아 김승규를 베었다. 그리고 시좌소에 머물던 단종을 찾아가 황보인 ․ 김종서 등이 모반을 공모하여 거사 날짜를 정하였다고 말하며 나머지 지당을 토벌해야 한다고 고한다. 그리고 의금부 도사를 시켜 군사 100명을 거느리고 안평대군을 체포했다. 10월 10일, 11일 이틀간에 걸친 유혈참극으로 김종서 부자 황보인, 이양, 조극관, 민신, 윤처공, 조번, 이명민, 원구 등이 모두 저자에 효수되었다. 계유년의 이 정변은 “사적 물리력을 동원해 공적 시스템을 무력화시킨 사건이었다”고 김순남은 말한다(김순남, 『폭군과 명군 사이』, 푸른역사, 2022).
아버지 세종은 예치로 나라를 다스리고자 했다. 유교적 윤리가 나라 곳곳에 번지는 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신하들과 경연에 참여하여 함께 토론하며 왕권과 신권이 균형을 이루는 국가를 만들어 왔다. 신하라고 해서 함부로 도륙하거나 폭력을 가하는 군주가 아니었다. 의정부와 육조에서 시스템으로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전심전력하도록 지원했고 재상을 중심으로 책임정치를 하도록 맡겼다. 그런 세종이 왕위에 있던 32년간 세종과 함께 나라를 이끌던 신하 중에 누구도 단종이 어리다고 권력을 교체해야 한다거나 자신이 권력의 전면에 나서서 집권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신하는 없었다. 수양대군은 아버지의 정치를 배반했다. 아버지가 이끌어온 정치체제를 무너뜨렸고 폭력으로 권력을 찬탈했다. 아버지와 함께 나라를 이끌어 온 중신들을 무참하게 죽였다. 그렇게 죽어간 김종서는 이런 시조를 남겼다.
삭풍은 나무 긋희 불고 명월은 눈속에 찬대
만리변성에 일장검 집고 서서
긴 파람 큰 한 소리에 거틸 거시 업세라
삭풍은 겨울에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이다. 북풍이 앙상한 나무 끝을 스치며 불고 있다는 건 화자가 처한 변방의 혹독하고 삼엄한 추위와 살벌한 분위기를 묘사한다. 여진족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어려운 처지와 위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어가 삭풍이다. 하늘에 뜬 명월이 눈으로 인해 더욱 차갑게 느껴지는 밤이다. 차가움과 삭막함이 더욱 강조된다. 만리변성은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국경의 성이다. 김종서가 개척한 함경도의 6진이며 나라를 지키는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곳임을 알게 한다. 한 자루 긴 칼을 집고 서 있는 장수는 김종서 자신일 것이다. 거기 서서 크게 지르는 함성은 혹독한 환경에 굴하지 않는 당당한 장수의 모습과 위용을 보여준다. 여진족에 맞서 국경을 지키는 장수의 웅장함과 기상을 느끼게 하는 시조다. 본래 김종서는 무인이 아니라 문신이다. 『고려사』를 편찬하기도 했다. 계유정난으로 김종서가 죽은 뒤 이 시조가 오래오래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현실 권력을 찬탈한 건 수양대군이지만 역사는 김종서의 편이라는 걸 이 시조는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수양대군은 난폭했다. 단종에게 왕위를 빼앗은 지 두 달 뒤 아버지 세종이 의정부에서 3의정이 의결하여 왕에게 아뢰게 하던 시스템을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6조에서 직접 왕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변경하려 했다. 그러자 6조의 판서들을 위시한 대부분이 전례를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예조참판 하위지는 주나라의 제도를 거론하며 옛 제도를 따르자고 했다. 그러자 세조는 하위지를 극렬하게 비난하며 그의 관을 벗기고 곤장을 치게 했다. 운성부원군 박종우가 말렸지만 세조는 광분하여 하위지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끌고 나가 의금부에 하옥했다. 국가 운영에 대한 논의를 하던 공론의 장에서 잘난 척하는 자는 목을 베겠다고 엄포하는 군주였다.
문종 임금 때 수양대군의 주도로 『병요』를 편찬한 적이 있었다. 수양은 그 사업에 참여한 인물의 벼슬 등급을 올려주자고 단종에게 청한 바 있었다. 당시 사헌집의(사헌부 종3품) 하위지도 그 대상자였는데 “집현전은 본래 책을 만드는 곳이고 자신은 서적을 자세히 살피며 점검하는 게 직분으로 다만 그 일을 했을 뿐이라며, 종실이 사사로이 공적인 그릇인 상작을 시행하며 은혜를 베푸는 것은 부당하다”고 발언했다. 하위지는 그런 관료였다. 심지어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장악한 수양에게 다른 마음먹지 말고 문종의 자손을 대대로 보필하라고 충고한 적도 있다. 그런 행위들이 수양대군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세조는 즉위 두 달 뒤 공신들과 잔치를 벌였다. 술 마시고 춤추고 놀았다. 창덕궁에서 1차를 하고 영응대군 집으로 가서 2차를 하고 돌아갈 때 이계전이 술이 과했으니 침실로 들어가시라고 조용히 아뢰었다. 세조는 “내 몸가짐은 내 마음대로 하는데 네가 어찌 나를 가르치려 하느냐?” 하면서 크게 화를 냈다. “네 직임을 파하고 홍달손으로 대신하겠다.” 하면서 이계전의 관을 벗기고 홍달손에게 명하여 머리채를 잡아 흔들며 호위무사를 불러 곤장을 치라고 했다. 이계전은 2품인 판서였다. 이계전은 머리를 땅에 대어 사죄하고 목 놓아 통곡했다. 그러자 세조가 다시 술을 권했다. 그러다 임영대군을 시켜 주먹으로 때리게 하고 다시 세조의 명에 따라 춤을 추게 했다. 그날 술자리는 밤 11시가 되어 끝났다. 관료에 대한 이런 폭력은 아버지 세종 때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유교 국가의 군주가 이렇게 난폭하고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조의 난폭함은 신하를 마구 대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사형을 결정할 때 먼저 의정부에 보고하는 법을 없애도록 했다. 의정부는 불가하다고 했으나 세조는 강경한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2. 단종 복위를 통해 다시 되찾고자 한 것
나 소자가 나라의 편안하지 못할 때를 당하여 어린 나이에 선왕의 대업을 이어받고 궁중 안에 깊이 거처하고 있으므로 내외의 모든 사무를 알 도리가 없으니, 흉한 무리가 소란을 일으켜 국가의 많은 사고를 유발하였다. 숙부 수양대군이 충의를 분발하여 나의 몸을 도우시면서 수많은 흉도를 능히 숙청하고 어려움을 크게 건지시었다. 종묘와 사직을 수호할 책임이 실상 우리 숙부에게 있는 것이다. 숙부는 선왕의 아우님으로서 일찍부터 덕망이 높았으며 국가에 큰 훈로가 있어 천명과 인심의 귀의하는 바가 되었다. 이에 무거운 짐을 풀어 우리 숙부에게 부탁하는 바이다
단종이 사정전에서 선포한 전위 교서다. 단종은 적장자의 적장자다. 문종이 적장자로 왕이 되었고 단종도 적장자로 왕이 되었다. 이런 정통성은 일찍이 없었다. 왕이 자진해서 자리를 내어주려고 할 리가 없다. 자신이 의지했던 신하들은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고 공신이라는 이들은 모두 수양대군의 사람들이었다. 단종을 옆에서 보필하던 신하들은 문종이 5년간 세자로서 세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 때도 같이 일했으며 세종을 가까이서 모시던 신하들이었다. 갑작스러운 문종의 승하로 어린 나이에 단종이 즉위했지만 덕 있는 군왕으로 자라게 하려고 생각했지 어리다고 국정을 농단하겠다고 생각한 신하는 없었다. 세종 임금이 32년간 나라를 운영하면서 정치적으로 안정된 유교 국가로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세조와 세조의 측근들만 조카가 어리기 때문에 자기들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종은 12세에 왕위에 올랐다. 조선왕조 472년, 27명의 왕이 있었는데 그중 14명이 10대에 왕이 되었다. 세조의 아들 예종도 18세에 즉위했고, 세조의 손자인 성종도 13세에 즉위했다. 예종이 1년 3개월 만에 죽었기 때문이다. 세조의 손자가 연산군인데 19세에 즉위했다. 명종도 12세, 숙종도 13세에 즉위했고 숙종은 즉위하면서 친정을 시작했다. 세조가 어린 조카를 내쫓고 왕이 되었지만 왕권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고 수긍하는 견해는 조선이라는 유교 국가의 통치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한 단견이다.
군주제는 종신제다. 죽을 때까지 왕위에 있으면서 나라를 다스리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왕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는다. 덕이 있는 군주로 성장하도록 스승을 두어 가르치고 다양한 수업을 받으며 나라 전체를 이끌어갈 지식과 무예를 연마한다. 왕이 되어서도 어전에서 경서를 읽고 공부하는 경연(經筵)에 빠짐없이 참여하며 신하들과 주요 국정 과제에 대해 토론하고 역사의 다양한 사례를 배우고 점검한다. 누구보다 많은 지식과 지혜를 갖추고 학문에 힘쓰게 한다. 그래야 덕치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따라서 어려서 즉위한다고 문제라고 생각하는 신하는 없었다.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즉위하면서 아버지가 만든 국가 시스템을 전면 부정하는 통치를 했다. 그 첫 번째가 6조 직계제의 부활이다.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왕이 측근들과 논의하며 직접 통치하겠다는 의미였다. 이 과정에서 신하들의 의견을 난폭하게 짓밟았다. 왕권과 신권의 균형을 이루는 통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군왕 중심의 통치권 강화에 몰입했고 거칠게 국정을 이끌었다. 난폭하게 신하를 다루며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는 정치를 폭정이라 한다. 폭정을 하는 군왕을 폭군이라 한다. 세종과 같이 국정을 이끌어 온 관료들이 볼 때 세조는 폭군이었다.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마키아벨리(1469~1527)의 말을 빌리면 야수의 정치를 하는 군주였다. 야수의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고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세조의 최측근이며 공신인 한명회 권람 홍윤성 등도 나라를 이끌어갈 균형감각과 실력을 갖춘 인물이 아니었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등은 세종대의 조선으로 정치가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폭군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질과도 의논하였으나 김질은 장인 정창손에게 고변하고 정창손이 세조에게 알리면서 이른바 단종 복위 운동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1456년(세조 2) 6월 7일 박팽년이 고문받다 옥중에서 죽었다. 세조는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유성원, 허조와 함께 시체를 수레에 묶어 찢고 목을 베어 효수했다. 재산은 몰수하고 자식들은 목을 졸라 죽였다. 어머니와 딸 처첩 손자 형제자매는 멀리 떨어진 고을의 노비로 보냈다. 6월 8일에는 성삼문, 이개, 하위지, 김문기, 성승, 유응부, 윤영손, 권자신, 박쟁, 송석동, 이휘 등을 능지처사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자식들은 모조리 목 졸라 죽였다. 성삼문 등이 수레에 팔다리가 묶인 채 갈기갈기 찢어지는 거열형을 백관이 둘러서서 보게 했다. 그리고 머리를 베어 3일 동안 저자에 걸어놓게 했다. 이런 잔혹한 형벌은 두 달 동안 계속되다 7월 12일에 끝이 났다. 이들은 이런 참혹한 몰락과 죽음 앞에서 의연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시로 남겼다.
擊鼓催人命 (격고최인명)
回頭日欲斜 (회두일욕사)
黃泉無一店 (황천무일점)
今夜宿誰家 (금야숙수가)
둥둥 울리는 북소리 목숨을 재촉하는데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는 지려 하는구나
황천길 가는 길엔 주막 하나 없다는데
오늘 밤은 누구네 집에서 묵어 갈까
성삼문의 절명시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동안 처형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마지막 운명을 생각한다. 북소리는 자신의 생을 마지막으로 몰아붙이는 소리다. 운명의 소리를 성삼문은 공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잠시 고개 돌려 뒤를 바라보니 지는 해가 보인다. 자기의 생도 저물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그는 이것이 먼 길을 떠나는 여행이라 생각한다. 분노나 절규 대신 담담하게 마지막 운명을 받아들인다. 후회나 자학 또는 자기 과시 이 모든 것이 배제된 절제와 침착함이 시 전면에 배어 있다. 그건 유자로서 당당한 선택을 했다는 평정심에서 비롯되었으리라. 그러나 황천으로 가는 길은 멀고 황량한 길이다. 잠시 쉬어갈 곳도 없는 고독한 길이다. 거기까지를 받아들이는 초연함이 있다. ‘오늘 밤에는 누구 집에서 쉬어갈까?’ 하고 물었지만 쉴 곳이 없는 죽음의 길이다.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정신을 이 시는 담고 있다. 고요해서 강렬한 절명시를 남기고 성삼문은 죽었다.
수양산(首陽山)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恨)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採薇)도 하는것가
비록애 푸새앳 거신들 긔 뉘따헤 낫다니
수양산은 백이와 숙제가 은거하다 굶어 죽은 산이다. 여기서는 수양대군을 중의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백이와 숙제는 형제로서 주나라 무왕이 폭정을 일삼는 은나라 주왕을 치려고 할 때 무왕의 말고삐를 붙잡고 신하가 임금을 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지만 결국 듣지 않자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은거해 살며 고사리를 뜯어 먹다가 생을 마쳤다. 그 백이와 숙제를 원망한다. 그 푸성귀가 누구의 땅에서 낫느냐, 주나라 땅 아니냐고 비판한다. 절의를 상징하는 인물인 백이 숙제보다 자신의 절의가 더 굳세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성삼문은 수양대군으로부터 받은 녹봉을 하나도 쓰지 않고 그대로 쌓아두었다고 한다. 그렇게 독야청청하는 길을 선택한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어 있어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
이 시조는 『청구영언』에 실려 있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는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담은 언어다. 죽음을 불사하는 가정적 미래를 설정하고 있다. 봉래산은 여름 금강산이다. 여름 소나무로 살다 차고 흰 눈이 천지를 가득 덮었을 때도 홀로 푸르게 지조를 지키며 살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목숨과 지조를 바꾸는 강직한 기상을 ‘독야청청’은 담고 있다. 백설의 시간이 오면 나무들은 생존을 위해 이파리를 버린다. 푸른빛을 지니고 있으면 이파리는 얼어 죽는다. 그게 생존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수양대군이 권력을 찬탈해서 온 세상이 얼어붙어 있으면 거기 맞게 살아남을 선택을 해야 하는데 성삼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수양대군의 정변이 옳지 않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고난과 시련의 길인 독야청청을 선택하는 것이다. 난폭한 정치에 저항하며 몇 편의 저항시를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자신만 죽는 게 아니라 아내와 자식 아버지와 일가친척 삼족이 도륙되는 길을 선택했다. 그게 선비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박팽년도 두 편의 시조를 남기고 죽었다.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옥출곤강(玉出崑岡)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날쏘냐
아무리 사랑이 중타 한들 님님마다 좃츨야
금은 중국의 여수(麗水) 하천 모래 속에서 나고, 옥은 중국의 곤륜산 산등성이에서 난다고 한다. 귀한 보물은 좋은 곳에서 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모든 물과 산에서 금과 옥이 나는 게 아니라는 건 왕의 자리에 올랐다고 모든 왕이 다 훌륭한 왕은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무리 여필종부라 해도 님마다 좇아갈 수는 없다는 건 자신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임만을 섬기겠다는 것이다. 박팽년은 조정에 장계를 올릴 때 자신을 '신(臣)'이라 칭하지 않았다. 박팽년은 세조를 전하라고 부르지 않고 나리라고 불렀다. 박팽년은 세조의 회유를 거절했다.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삼족이 멸하는 길을 선택했다.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夜光) 명월(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옥중에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가면서 이 시를 남겼다. 검은 것은 검은 것이고 흰 것은 흰 것이라고 말하고자 했다. 까마귀가 눈비를 맞으면 일시적으로 흰 것처럼 보이지만 검다는 본색은 달라지지 않는다. 세조가 그렇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박팽년이 볼 때 당대는 어둠의 시대였다. 어둡다 해도 밝은 달은 빛을 잃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런 단심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게 세종과 함께 나라를 이끌어왔다는 자부심, 즉 유교 국가에서 정치하는 유자의 선비 정신이었다.
다른 사육신들도 충절을 담은 시조를 남겼다.
"창밖에 혔는 촛불 눌과 이별 하였관대 / 눈물을 흘리면서 속 타는 줄 모르는고 / 우리도 저 촛불 같아여 속 타는 줄 몰라라." ㅡ이개
"간밤에 불던 바람 눈서리 치단말가 / 낙락장송(落落長松)이 다 기울어 가노매라 /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엇 하리오." ㅡ유응부
"전원(田園)에 남은 흥(興)을 전나귀에 모두 싣고 / 계산(溪山) 익은 길로 흥치며 돌아와서 / 아이야 금서(琴書)를 다스려라 남은 해를 보내리라." ㅡ하위지
"벽해는 아스라이 땅끝에 망망하니 / 함께 가고파도 갈 수 없는 몸이기에 / 차디찬 눈보라 속을 견디어 머무르리." ㅡ김문기
이들은 대부분 집현전에서 일한 유능하고 실력 있는 신하들이었다. 박팽년은 집현전에서 세종과 18년간 일했다. 1444년 집현전 부수찬, 1446년 집현전 부교리, 1446년 집현전 교리, 1448년 집현전 직제학, 1449년 집현전 부제학으로 승진하며 집현전에서 일했고 문종 대에도 집현전에서 일했다. 성삼문도 집현전 학사를 역임했고, 하위지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에 들어가 일했으며, 집현전 직제학, 집현전 부제학을 역임했다. 이개, 유성원, 허조 모두 세종 대 집현전을 통해 성장한 인물들이었다. 세조가 보기에 집현전은 반역의 근거지요 원천이었다. 그해 6월 25일 부제학 이하 모든 관직을 없애고 집현전을 폐지해 버렸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복구시키지 않았다. 이는 유능한 인재를 키우지 않겠다는 것이고, 전문적 식견을 갖춘 학자들과의 숙의나 자문 없이 국가 정책을 추진할 것이라는 의미였다. 군왕이 알아서 결정하고 시행하겠다는 것이며 필요할 때마다 측근들과 의논하면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재임 기간 내내 즉흥적이고 원칙 없는 결정들이 난무하게 되었다.
단종 복위는 단종이 다시 왕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첫째 정통성 있는 임금의 복위를 말한다. 둘째 세종과 문종의 나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셋째 덕치의 군주 시대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넷째 예치의 국가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다섯째 왕권과 신권이 균형을 이루는 정치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단종의 복위는 사적 폭력에 의한 왕위 찬탈은 부당하다는 것, 폭정에 반대한다는 것, 폭군을 제거한다는 것, 야수의 정치는 안 된다는 것, 국왕 중심의 전횡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3. 단종의 죽음과 세조 시대를 거부하는 방식
사육신을 포함해 세종 대 나라를 함께 이끌던 신하들이 대거 참살된 뒤 상왕인 단종은 1457년(세조3) 1월 26일 창덕궁에서 나와 비어 있던 금성대군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6월 21일 단종의 장인인 송현수가 반역을 도모한다는 구실로 의금부에 하옥되면서 상왕을 노산군으로 내려 봉하고 영월로 보낸다는 교지를 발표했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이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 금성대군이 역모를 도모했다는 고변이 6월 27일 올라왔고 10월 9일 금성과 함께한 관련자들을 능지처사했다. 그리고 10월 21일 세조는 동생 금성대군을 사사하고 단종의 장인 송현수를 교형에 처했다. 그리고 노산군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세조실록에는 스스로 목매어서 죽었다고 했지만 숙종실록에는 사약을 가지고 온 왕방연이 주저하자 공생 하나가 자청하고 나서서 죽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단종이 승하한 후 보복이 두려워 아무도 시신을 거두지 않을 때 엄흥도가 “의를 행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달게 받겠다.”며 자식들과 함께 시신을 거두어 현재의 장릉 자리에 암장했다. 왕방연의 시조는 그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이 시조는 『청구영언』에 실려 있다. 세조실록에는 왕방연이란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세조실록 세조 3년 6월 21일 자 기록을 보면 첨지 중추원사 어득해(魚得海)에게 명하여 군사 50명을 주어 노산군을 영월로 호송하게 하였고 군자감정 김자행과 판내시부사 홍득경이 이를 따랐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숙종실록 25년 1월 2일 자에는 “단종대왕이 영월에 피하여 계실 적에 금부도사 왕방연이 고을에 도착하여 머뭇거리면서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정중에 입시하였을 때에 단종 대왕께서 관복을 갖추고 마루로 나아오시어 온 이유를 하문하셨으나, 왕방연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때 앞에서 늘 모시던 공생(貢生) 하나가 차마 하지 못할 일을 스스로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가, 즉시 아홉 구멍으로 피를 쏟고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따른다면 왕방연은 사약을 운반한 금부도사였다는 걸 알 수 있다. 돌아가는 길에 왕방연이 지었다는 시조의 내용이 오래 회자되는 것은 단종을 향한 마음이 “이 마음 둘 데 없어”와 “울어 밤길 예놋다”에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금부도사 왕방연도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단종을 죽게 만들고 난 뒤에 마음 둘 데 없는 심정이 이백 년 넘게 이어진 것이다. 231년이 지난 뒤 숙종 대에 이르러 복권되게 만든 마음이 이 마음일 것이다. 어린 단종, 죄 없는 단종의 죽음을 겪은 내 마음도 저 냇물 같아서 울면서 밤길을 간다는 이 슬픈 마음이 지금 1천6백만 관객의 마음 아닌가 싶다.
죽음으로 세조의 폭정에 저항한 이들이 있었고 살아서 세조를 거부한 이가 있었다. 그들을 생육신이라 부른다. 살아서 단종을 추모하며 평생 벼슬자리에 나아가지 않고 절개를 지켰다.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이 그들이다. 그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김시습(金時習)이다.
김시습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3일간 통곡했다. 그는 보던 책들을 모두 불사르고 스스로 머리를 깎아 승려가 되었으며,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김시습은 3세에 한시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5세에 『중용』과 『대학』을 익혔다고 한다.
김시습의 정치사상은 민본주의였다. 정도전으로부터 최한기에 이르는 민본사상은 국가의 근본이 군주가 아니라 백성에게 있다는 것이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군주가 철학 있는 군주, 덕 있는 군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덕치를 할 수 있고 백성들의 삶이 안정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시습은 다양한 문학 장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경주 남산 용장사에 머무는 동안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를 창작했다. 『금오신화』에는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 5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작가의 심오한 인간 정신과 고도의 상상력이 어우러져 예술성이 높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김시습의 이런 소설은 한국소설의 출발점이며 후대 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데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
그는 15권의 방대한 분량에 이르는 한시를 창작하였다. 자연과 인간의 이야기를 포함해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표현한 폭넓은 시 세계를 보여준다. 세조의 공포정치에 벌벌 떨고 있을 때 거열형을 당한 사육신의 시신을 모아 노량진에 임시로 매장한 사람도 김시습이다. 양녕대군이 수재인 걸 알고 세조에게 그를 천거했으나 벼슬자리에 나아가는 걸 모두 거부했다. 하루는 억지로라도 끌고 간다며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스스로 똥통으로 들어가 “자, 이런데도 날 주상에게 데려갈 테냐?”라며 비웃었고 포졸들이 그냥 가버렸다고 한다.
한명회가 압구정에 정자를 짓고 그 기둥에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청춘부사직 백수와강호)”라고 시를 지어 새긴 걸 보고 “靑春亡社稷 白首汚江湖(청춘망사직 백수오강호)” 바꾸어버렸다. “젊어서는 사직을 보필하고 늙어서는 자연에 묻혀 쉰다.”라는 뜻인데 김시습은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자연을 더럽힌다.”라고 대차게 욕한 것이다.
세조의 폭압 정치가 이어지자 난언(亂言)이 난무했다. 사육신의 단종 복위 사건 이후 1456년(세조 2) 12월 전 예안 현감 정보가 잡혀 왔다. “성삼문의 행동이 옳았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정보는 장 100대를 맞고 죽임을 당했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1457년(세조 3) 9월 승려 의전이 고발당했다. 같은 승려인 혜명이 “민신의 난이 다시 있을 것이다. 가뭄이 심해 상왕을 세우려는 자가 있다.”라고 말했다고 고발했다. 민신은 계유정난 때 문종의 능을 감독하던 이였는데 세조가 보낸 사람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런 사람들이 다시 난을 일으킬 것이고 상왕인 단종을 복위시킬 것이라고 언급했다가 둘 다 목이 잘렸다. 상왕을 복위시킬 것이라는 말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였다. 1457년(세조 3) 10월 심희팔이 처형당했다. 심희팔은 세조가 없었다면 농사가 잘 되었을 것이고, 상왕을 복위시켰다면 벼락에 맞아 사람이 죽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1464년(세조 10) 1월 전영정의 노비 금이와 을참이 처형당했다. 주인인 전영정이 “김종서 부자가 죽었다 하더라도 혼이 남아 있어 반란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거짓으로 고발했다가 목이 잘렸다. 계유정난과 관련된 일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금기였다. 1466년(세조 12) 7월 사헌부 겸집 강우문이 참형을 당했다. 그 전해에 제주 분대 어사였던 강우문이 제주 안무사 복승리가 노산군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냈다고 고발해서 1년여에 걸쳐 옥사가 벌어졌는데 관련된 사람이 100여 명이나 되었다. 조사 결과 복승리의 무고가 밝혀졌지만 노산군을 거론한 강우문의 목이 잘렸다. 계유정난과 단종을 입에 올리는 건 죽음이 따르는 일이었다. 이런 금기의 날이 세조 재위 기간 내내 계속되었고 난언은 난무했다.
4. 세조의 난폭함과 전무후무한 연석(宴席) 정치
세조는 경연 중에 대노하여 신하들을 폭행하거나 죽이는 때가 있었다. 1461년(세조 7) 1월 21일 경복궁 취로정에서 병서와 『장자』, 『노자』 등의 강독이 있었다. 불교의 가르침을 두고 논란이 있었는데 성균관 대사성 서강의 태도가 세조의 심기를 거슬렀다. 세조는 “이런 인물이 하위지 같은 무리이다.”라고 비난하며 장 30여 대를 때리게 했다. 왜 자기에게 불경했는지 이유를 묻다가 장 10대를 더 때리고 후원에 결박했다가 일주일 후 1월 28일 목을 졸라 죽였다. 서강은 집현전 출신으로 성균관 대사성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1466년(세조 12) 4월 21일 『동국통감』을 편찬하는 당상관과 낭관을 경복궁 화위당으로 불러 편찬 사목을 강론하게 했다. 이때 왕족의 교육을 맡아 보던 김종련에게 질문을 하였는데 김종련이 자기 의견을 고집했다. 넉 달 뒤 8월 29일 『논어』를 강독하는 자리에서 주자의 태극설을 두고 논하다가 세조의 심기를 거슬렸다. 세조는 김종련을 기둥에 묶어 사금파리를 깔아놓은 자리에 무릎을 꿇게 하고 무거운 돌을 그 위에 얹어서 압슬형에 처했다.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군왕이 아니라 공론을 이끄는 유자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유자는 유학을 공부한 선비다. 왕이 아니라 공론을 이끄는 선비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건 자신을 능멸하고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받아들여 김종련과 그의 자손들을 왕실 재정관리를 맡아보는 내수소의 종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하니 경연에서 철학과 경서를 논하고 정치적 경륜을 쌓아가는 일은 불가능했다. 경연이 경서를 읽으며 깊이 있는 논의를 하기보다는 국왕의 심기만 살피는 자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세조는 국왕을 공부시키려 드는 이런 자리가 신하들이 잘난 체하는 자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대신 술자리를 만드는 걸 좋아했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세조 재위 13년간 연회에 대한 기록이 467회 등장한다. 세종은 재위 32년간 총 91번의 연회를 열었다고 한다. 세조가 얼마나 많은 술자리를 열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세조는 주로 최측근 공신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일종의 연석(宴席)정치를 펼친 것이다. 세조는 임금의 학문 수양을 위한 경연(經筵)은 싫어하고 술자리를 경연(慶宴)이라 부르게 했다. 자신이 베푼 경사스런 잔치라는 말이다. 세조는 사관을 배제한 채 같은 편끼리 모여 서로를 치하하고 격려하고 단합하는 술자리를 만들었다. 여기서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고 후사를 부탁하며 인사를 논의했다. 자신의 정치적 의도를 관철하기 위한 장으로 술자리를 활용한 것이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찾아볼 수 없는 세조만의 독특한 국정 운영이었다. 그런데 이런 술자리가 너무 잦다 보니 불경과 무례가 난무했다. 1458년(세조 4) 9월 17일 정인지는 주사를 부렸다. 세조를 ‘너’라고 부르며 삿대질했다. 그러나 세조는 허물없는 친구 사이였던 옛 시절을 잊지 못해 일어난 것이라 변명해 주고 죽이지 않았다. 살인과 폭력, 횡령과 수탈과 온갖 패악질로 살인마 정승이란 소리를 듣던 홍윤성이 삼촌을 죽이고 암매장한 일로 숙모가 세조에게 탄원하였는데 술자리에서 세조가 “자중하지 않으면 숙부를 죽인 죄를 물어 극형에 처하겠다.”라고 꾸짖었는데 홍윤성은 “주상께서는 조카를 죽이지 않았느냐.”라고 되받았고 세조는 “배짱이 남다르다.”라며 웃고 말았다고 한다.
계유정난 때 김종서의 아들 승규를 칼로 베어 혁혁한 공을 세운 내금위 무사 양정은 정난공신 2등, 좌익공신 2등으로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세조는 1466년(세조 12) 6월 8일 평안도 도절제사로 일하고 돌아온 그를 위해 술자리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술에 취해 임금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다고 최호원 안효례를 옥에 가두게 했다. 그러자 양정이 세조에게 힘들게 살지 말고 왕위에 오른 지 오래 되었으니 물러나라고 했다. 그로부터 4일 후 양정은 도성문 밖에서 머리가 잘렸다.
5. 종교적 절대 군주를 꿈꾸던 세조
세조는 호불군주였다. 불경 편찬에도 적극 참여했다. 불교 서적을 번역하고 궁내 불사를 거행했다. 맏아들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법석을 여러 차례 베풀었고 『월인석보』를 간행했다. 1464년(세조 10)에는 원각사를 건립했다. 현재 탑골 공원 자리에 원각사를 짓기 위해 군사 2,100여 명이 근방 인가 200여 채를 모두 철거했다. 청기와 8만 장이 들었고 구리 4만 근을 사용해 큰 종을 주조했다. 1462년(세조 8) 11월 5일 오대산 상원사에 거동할 때 관음보살이 모습을 드러내는 신기한 일이 있었다고 하며 그 뒤로 신하들이 감히 바라볼 수조차 없는 차원의 존재로 자신을 설정하려 했다. 그 뒤로 여기저기서 사리가 쏟아져 나오고 신비한 샘이 솟아오르고 강녕전 양쪽 모서리에 상서로운 서기가 비추는 등 기이한 이적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피부병이 있는 세조가 상원사를 찾았는데 거기서 한 소년이 등을 밀어주자 씻은 듯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때 세조는 “꼬마야, 너 어디 가서 왕의 등을 밀어주었다고 말하지 말거라.”라고 말했는데, 소년 역시 “당신도 어디 가서 문수보살이 등을 밀어주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세조실록에는 이와 관련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이런 소문은 세조가 부처님의 가피를 입은 존재라는 걸 떠올리게 한다. 세조는 정치적 최고 권력을 넘어 종교적 절대자가 엄호하는 존재가 되고 싶어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세조는 관료들과 계유정난을 일으킨 동료가 아니라 신기한 일과 상서로운 일이 계속되는 군주 이상의 존재, 초월적 존재가 되고 싶어 했다. 강맹경은 이런 세조에게 찬양의 글을 지어 바쳤다.
거룩하다! 우리 임금이시여, 공덕이 성하고 크시니, 높고 넓음이 하늘과 더불어 위대하시도다. (.....) 큰 위신(威神) 나타내어 상서를 내렸도다. 그 상서 무엇인가? 백호(白毫)의 광채로다. 그 서기가 어떠한가? 하늘에 빛나도다. (.....) 우리 왕은 매우 신령하시도다. 누가 그대를 미혹하게 하였는가? 왕이 그대의 껍질을 깨뜨릴 것이다. 누가 그대의 마음을 살렸는가? 왕이 그대를 도왔도다. (김순남, 『폭군과 명군 사이』 272 ~ 273쪽에서 인용)
세조가 불사를 많이 하거나 불경을 간행하는 일이 많아지자 승려가 많이 동원되었다. 동원된 승려는 군역을 피하거나 조세를 낼 수가 사찰로 도망친 백성들이었다. 이들은 불사에 동원된 후 도첩을 받아 승려가 되었다. 1462년(세조 8) 4월 4일 기록에 따르면 그 수가 6만 3천 명 이상이었다.
부처가 이렇게 세조를 이렇게 도와주고 있다고 하는데도 세조의 건강은 1468년(세조 14) 7월부터 눈에 띄게 나빠졌다. 세조는 8월 6일부터 본격적으로 투병에 들어갔다. 그러다 8월 18일 밤 몰래 옷을 벗어 버리고 머리를 풀어헤치고는 흰 것을 머리에 이어 귀매(鬼魅) 모양을 했다. 그리고 막대기를 잡고서 후원의 깊고 후미진 숲속에 엎드려 있었다. 사람이 오자 갑자기 일어나 놀라게 하는 등 평시와 다른 언행을 보였다.
현대 의학의 관점으로 보면 정신 착란과 섬망증 또는 중증 우울증이 동반된 환각으로 볼 수 있다. 그렇게 불교에 의지했고 부처의 가피와 이적이 계속되는 초월적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런 증상이 나타났을까.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죄책감, 아버지가 길러낸 수많은 신하를 재위 내내 셀 수 없이 죽인 트라우마가 평생 그를 괴롭힌 것으로 보인다. 세조는 만성 피부질환을 앓았다. 그건 만성 화농성 피부염 또는 결핵성 피부병일 것으로 추정한다. 단순한 종기 수준을 넘어 온몸에 고름이 잡히고 진물이 나는 증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피부병으로 인한 통증이 심했고 수면 부족과 기력 저하가 뇌 기능에 장애를 가져왔거나 신체 상태가 극도로 악화 되었을 때 나타나는 정신적 혼란 상태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세조는 아들 예종에게 왕위를 넘긴 다음 날 1468년(세조 14) 음력 9월 8일 생을 마감했다. 향년 52세 재위 14년째였다. 예종은 둘째 아들이다. 첫째 아들은 20세에 죽고 둘째인 아들이 18세에 즉위했다. 그리고 1년 3개월이 지난 1469년 11월 28일 죽었다. 그리고 13세의 어린 성종이 즉위했다. 업연이 되풀이된 것이다. 세조가 죽자 세조와 정변을 같이 일으켰던 동지이자 친구이며 신하인 이들이 권신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쥔 시대가 되고 만 것이다. 제2의 수양대군, 제2의 한명희가 있었다면 어린 성종은 어떻게 되었을까. 13세는 너무 어려 나라를 맡길 수 없으니 내가 임금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수양대군 같은 자가 나타나 성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하려 했다면 세조는 뭐라고 했을까. 한명회는 두 딸을 왕비로 만들었다. 그런데 두 딸 모두 일찍 죽었다. 그래서 어린 성종이 새로 왕비 윤씨를 받아들였는데 폐비가 되었고 그 소생인 아들이 연산군이다. 이 과정에 관여했던 한명회는 연산군에게 부관참시를 당했다. 16명의 비빈과 후궁에게 48명의 자녀를 생산하며 왕으로서 누릴 것을 다 누리며 살던 성종이 37세에 죽고, 그 뒤에 세조의 증손 연산군이 폭군이 되어 쫓겨나는 것까지 지켜보던 단종비 정순왕후는 1521년 82세에 정업원에서 세상을 떴다. 백성들은 누구 편이었을까. 당대 여성들이 정순왕후를 지키기 위해 여성들만의 시장을 만들고 동망봉에서 통곡할 때 같이 울어주면서 그 세월을 살았다. 작가들은 단종과 단종비 그리고 사육신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사후에 많은 소설과 시를 계속 창작했고 영화와 드라마를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1천6백만 관객이 단종을 안타까워하며 영화를 보고 영월을 찾고 있다. 문학은 권력의 편에 서야 할까, 권력에 맞서다 피 흘리며 죽어간 자의 편에 서야 할까. 누구의 편에 서야 할까.
도종환
청주 출생. 시집 『접시꽃 당신』 『부드러운 직선』 『해안으로 가는 길』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사월 바다』 『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등. 수상 : 정지용 문학상, 윤동주 상, 백석문학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