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2째단락
지난 시간에 이어 수행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풀어냅니다.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사는가?"
'내가 이해하는 만큼, 내가 아는 만큼의 내 세계가 있다.'
보인다.
'내가 아는 만큼 보고 느끼고.. '
똑같은 객관적인 세계는 없다. 그건 꿈에서만 가능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 틀린다. 같은 세상을 사는 게 절대 아니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
이게 바로 내 마음이다. 살아가는 '삶' 그것이다.
마음이 다 틀리니까 살아가는 방식이 바로 '마음'이다.
상대 행동이 마음을 보게 한다.
'영혼'은 따로 없다. 불교에서는 따로 없다.
우리가 실재 한다고 생각하닌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
내 안에 어디 있다! 생각하니.. ' 자꾸 '마음 닦는다' 는 표현을 쓰고 있다.
우리가 서로 다투고 하는 것도 지 마음대로 , 상황대로, 달라진다.
'내 마음대로' 옳고 그런것도 내가 분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분별하고 있다는 그 자체도 모르고 있다. 영원히 '옳다' 는 것은 없다.
분별, 망상이구나! 를 알고 있다면 거기 속지 않는다.
옳고 그름을 여의었고 싫다 좋다를 떠났다. 이것이 '중도'다.
부처님은 어떤말을 해도 '진리'다.
왜?
중도를 깨달았기 때문에!
중생은 부처님 가르침을 얘기해도 모른다. 거짓이다.
분별에 빠져 진실상을 모른다.
내가 아는 의식, 안의비설신의, 18계는 내 자의식들이 모여 있는 것들이다.
냄새 맡고, 보고, 귀로 들어도 알 수 있는 건 의식 세계가 형성되어 있다.
대상을 촉해서 의식이 형성되는 3사 화합, 즉 같은 의식 모인 바로 계(界),
모든 형상은 계에서 일어난다. 촉은 대상을 알아차리는 작업이다.
촉해서 취하고, 버리고... 이런 것들이 마음에 들고 안들고, 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한가지 예로 살펴보자,
의상대사와 원효대사의 당나라 유학가던 길에 마셨다는 '해골물'을 떠 올려 보자.
캄캄한 밤에 갈증을 느끼고 더듬거려 마셨던 '해골바가지 물'이 갈증앞에서 얼마나 '맛있는 물'
이었을까?
그러나 다음날 일어나 간밤에 들이킨 물이 '해골바가지 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어땠나!
바로 이것이다.
안계, 비계... 온갖게 다 작용해서 해골은' 더럽다' 는 인식이 들어 있다.
그러니 '욱!' 할 수 밖에..
그러나 반대로 식인종에게 어떤가? 반응은 바로 '진수성찬'이 될 수 있다.
밖에 뭐가 있는게 아니고 이미 내 안에 만들어진 '의식'이 작용한다.
모든 건 내 안에 (18계)식에 들어 있는 배우고, 학습하고 .. 쌓인 것들이 작동하여 밖에 있다고
의식 할 뿐! 이 의식을 통해 밖을 본다.
바로 '부쉬맨'에게 비행기가 새로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결론적으로 '내 생각을 통해 세상을 본다'는 얘기다.
심생즉종종법생 심멸즉종종법멸
(心生卽種種法生 心滅卽種種法滅)
마음이 일어나면 즉 온갖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멸하면 즉 온갖 법이 사라진다.
부처님께서 의식속에서 일어난 현상을 설명하신 것이다. (사념처)
그래서 부처님이 오온을 제일 먼저 얘기 하셨다.
지금까지 보고 느낀 것... 다 쌓여 있다.
보는 것도 이미 알고 있는 것만 본다. 모르는 걸 모른다. 보고도 못본다.
봐도 못본다.
산에 꽃을 보는 것가 같다.
수행도 마찬가지다. 아는 만큼 본다. 알면 가지가지 다 본다.
화를 내는 것도 안에 있는 조건들이 그 마음을 일으킨다.
안에 있는 요소들을 해결해야 된다.
또 하나 비유를 들어보자.
밖에 금덩어리가 있다!
보면 욕심이 일어난다. 의식을 통해 촉하는 것이다. 그럼 느낌이 온다. (이 느낌은 내 안에 있다.)
수행해서 이걸 아아가는 것이다. 이게 중생의 세계다.
알아야 수행이 된다. 알아야 잘못 수행하고 있구나!를 안다. 그리고 알아야 참회가 된다.
수행은 결국 오온에 대해 올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철저하게 해체하고 분석해야 실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색즉시공 수즉시공, 행즉시공,식즉시공” 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조견오온개공이 된다. 그러면 ‘도일체고액’이다.
수행은 내 의도다. 내 의지로 ‘업’을 만든다.
말로만 ‘색즉시공’, 알면서도 수행을 하지 않는다.
알면서도 수행을 안하니 알고 짓는 죄가 더 크다.
부처님은 ‘열반을 성취하려면 오온을 통찰하라! ’ 하셨다.
모든 뿌리는 ‘나’라 했다.
그러니 거듭 말하지만 ‘나를 철저히 알아야 한다.
‘나’라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생사’가 해결된다.
‘오온’ 나라는 근거는 바로 이 다섯가지다.
‘색수상행식’ 5가지, 이게 ‘나’라고 하는 근거다.
색-몸, 내 몸, 몸을 통해 ‘나’를 찾는다.
수- 느낌, 감정으로 기분에 좋네, 나쁘네, 이때는 ‘느낌’이 나다
상- 이미지, 생각, 표상으로 대상을 보며 떠오르는 생각 ‘상’이 나다
행-의지작용으로 하고 싶다, 안하고 싶다 라는 의지, ‘행’이 나다
식-내가 뭘 한다는 의식, 인식, 이 ‘인식’이 나다.
몸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행하고, 인식하는 이것이 ‘내’라고 생각한다.
이런 걸 ‘수레’에 비유했다.
내가 아닌 색수상행식이 모여 ‘내’가 되었다.
그래서 ‘내가’ 없으니 오온개공이다.
오온이 없은 것이 아니다. 오온을 분해했을 때 ‘개공’을 알 수 있다.
‘허무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착오하지 마라!!
있다, 없다로 살아가는 게 중생이고 이것이 ‘무명’이다.
연기는 조건에 의해서 인연지어 있는 것이다.
독립적인 존재란 없다.
사람은 사람 아닌 요소가 모여 ‘사람’이 되었듯이
태어난 몸,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생사’가 생겨난다.
나의 과거, 괴로운 일, 겪어온 괴로움은 ‘나’만 겪어온 것이라 착각 하는데 다
‘지 생각’이다. ‘편안한 척’하며 살아가지만 말이다.
내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일어나는 ‘찰라생, 찰라멸’ 하는 이 생각만 알 수 있다.
내 생각만큼 세상이 보인다.
그 마음은 지금 이 순간(찰라)의 마음이다.
부처님께서 불교의 원리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삼법인은 무상,고,무아를 일컫는다.
법의 도장이라는 말이다. 불교인지 아닌지 판단 기준이다
북방불교에서는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열반적정)로,
남방불교에서는 3특상이라고 수행의 관점에서 봤다.
몸을 관찰한 것으로 오온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바로 ‘위빠사나’다.
부처님께서 ‘라훌라’에게 묻는다.
“색은 영원하가? 무상한가?”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자, 그럼 무상한 것은 즐거움인가?, 괴로움인가?”
“무상한 것은 괴로움입니다.(고)”
“무상하고 변하는 것 이것이 ‘나의 본성=자아”이다.
“이것이 ‘나’ 다”
이러한 무상,고를 수행을 통해 무아임을 철저히 통찰하면 조건 지어져 연기한 이 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 이것이 처음과 끝인 것이다.
부디 깨어나라! 수행하라! 그리고 바로 보라!
우리는 혼자만의 세상을 살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같이 살아 본 적이 없다.
내 의식속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 본 적이 없다.
다만 내 느낌과 의식을 통해 추측해 볼 뿐! (=망상)
내 마음이 갖고 있는 고통... 스르로 만든 것이다.
마음의 밭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이 마음을 봄의 정원으로 만들든지, 시베리아 벌판으로 만들든지..
각자의 몫이라는 걸 얘기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얘기를 늘어 놓은 것이다.
일화합장.
첫댓글 심생즉종종법생🙏
심멸즉종종법멸🙏
일체중생 행복하여 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