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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 홍공 묘지명 병서〔校理洪公墓誌銘 幷序〕
공의 휘는 중휴(重休)요, 자는 미중(美仲)이다. 공의 선조는 풍산인(豐山人)이다. 고려 때 국자감 직학사를 지낸 휘 지경(之慶)이 바로 공의 비조(鼻祖)이다. 학사의 아들은 도첨의사인(都僉議舍人)을 지낸 휘 간(侃)인데, 직언을 하다 동래 현령(東萊縣令)으로 좌천되었다. 지금 세상에 유포되고 있는 《홍애집(洪厓集)》이 바로 그분이 남긴 책이라 한다. 사인의 아들은 밀직사(密直使)를 지낸 휘 유(侑)이고, 손자는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낸 휘 연(演)이니, 모두 높은 벼슬을 지냈다.
5대를 전하면 대사헌을 지내고 영의정에 증직된 휘 이상(履祥)인데, 공에게 고조가 되고 호는 모당(慕堂)이다. 고양(高陽)에 모당사(慕堂祠)가 있다. 증조는 남원 부사(南原府使)를 지내고 좌참찬에 증직된 탁()이고, 조부의 휘는 주천(柱天)으로 양성 현감(陽城縣監)을 지내고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선고의 휘는 만조(萬朝)로 돈녕부사(敦寧府事)를 지내고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삼조(三朝)에 걸쳐 두터운 명망이 있었으며 여덟 번 관찰사가 되어 세상의 추중을 받았다. 선비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봉사를 지내고 참의에 증직된 진(瑱)의 따님이다.
공은 현종(顯宗) 8년 정미년(1667) 8월 3일에 태어났다. 집안이 본디 청빈하고 검약해서 어릴 때 남루한 옷을 입었는데 여러 아이들과 어울리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또 어른을 따라 연회에 가게 되어 대부인이 공을 위해 다른 이의 화려한 옷을 빌려 오자, 공이 좋아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전에 입던 옷이 있으니 이 옷은 입고 싶지 않습니다.” 하니, 대부인이 강요하지 못했다.
기사년(1689, 숙종15)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1년이 지난 기묘년(1699)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경진년(1700)에 발탁되어 승문원 정자에 보직되었다가 저작, 박사로 승진하고 봉상시 직장을 겸하였으니, 규례였다. 임오년(1702)에 시강원 설서에 제수되었다. 수년간 10번 제수되었으나 모두 면직되었으니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서였다.
을유년(1705) 봄에 예조 좌랑으로 승진하였다가 얼마 후 병조로 옮겼다. 여름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시강원으로 들어가 문학이 되었다. 가을에 함경도의 고시관(考試官)에 차임되었다가 다시 정언을 역임했다. 다음 해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고, 또 영남(嶺南)의 경차관(敬差官)에 제수하는 명을 받았다. 미처 하직 인사도 드리지 않았는데 홍문관 수찬에 제수되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부수찬을 역임했다.
정해년(1707)에 다시 수찬에 제수되었다. 그때 오랫동안 비가 내려 나라에 선대 왕릉이 무너져 내리는 변고가 있었다. 조정은 음양가(陰陽家)의 구기(拘忌)를 채택하여 바로 봉축하지 않고 다만 풀을 엮어 둘러싸기로 논의하였다. 공이 상소하여 예가 아니라고 아뢰며, 친히 행차해서 능을 살펴 한편으로는 위안하는 도리를 다하고, 한편으로는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뜻을 보이시기를 청하였다. 당시의 재상이 여러 말을 해 가며 반격하고 또 대관을 사주하여 공이 청현직에 제수되는 것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임금이 옳지 않게 여겼다.
무자년(1708) 봄에 함경도 암행 어사에 차임되었다. 험지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변방의 방비를 자세히 살폈는데, 이 때문에 발바닥이 다 부르텄다. 나약한 아전과 교활한 장수들을 모두 쫓아내고 돌아오다가 남쪽 경계에 이르러 다 살펴보지 못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육진(六鎭)에 들어가 꼬치꼬치 캐어 실정을 알아낸 후에 마쳤다. 돌아올 때에 수염과 머리털이 하얗게 되었다.
경인년(1710, 숙종36)에 지제교에 선발되었다. 신묘년(1711) 여름에 수찬에 제수되었다. 상소하여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역사(役事)에 대해 논했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하였다. 또 도성의 성가퀴〔女堞〕를 보수하고 문루(門樓)를 설치하는 것은 모두 급선무가 아니라고 논했으며, 거자(擧子)가 과장에서 농간을 부린 일, 번신(藩臣)이 법을 어긴 일을 논했는데, 임금이 자못 채납(採納)하였다.
임진년(1712)에 수찬에 제수되었다. 그때 고(故) 판서 유혁연(柳赫然)과 이원정(李元禎)을 복관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당인(黨人)들이 다시 들고 일어나 의견을 고집하며 옥신각신하였다. 공이 상소하기를, “두 신하가 억울하게 죽은 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하였다. 다음 해에 헌납에 제수되어 다시 앞의 일을 논하니, 공을 못마땅해하던 자들이 이내 모두 공격하였으나 임금께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 후 체직되고 보덕에 제수되었다.
갑오년(1714, 숙종40)에 중학 교수(中學敎授)에 제수되고 다시 사간과 필선을 역임하였다. 다음 해 동학 교수(東學敎授)에 제수되었다. 종부시 정을 역임하고 수찬으로 옮겨졌다. 가을에 권 부인(權夫人)의 상을 당했다. 공은 이미 늙었는데도 흰머리에 최질(衰絰)을 착용하고 상례를 집행하며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때로 병으로 침상에 눕기도 하였다. 친히 전을 올릴 수 없으면 우러러보고 슬피 울부짖으면서 점점 쇠약해지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상을 마치고 나서 병이 심해져서 정유년(1717) 10월 27에 고종하였다. 처음에는 고양현(高陽縣) 숙인(淑人) 권씨의 묘역에 합장했다가, 18년 후인 갑인년(1734, 영조10) 가을에 충주(忠州)의 연원(連原) 갑좌(甲坐)의 산으로 이장하였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너그럽고 후했으며 모습은 성대하고 아름다운 수염을 가지고 있어 바라보면 의젓하고 점잖았다. 효성으로 부모를 섬기며 마음속으로 공경하고 사랑하는 모습이 얼굴에 드러났다. 상에 별미를 올리면 반드시 주방에 여유가 있는지 없는지를 물어보고 난 연후에야 먹었다. 돈녕공이 일찍이 심하게 병을 앓았는데 공이 의사를 맞이해 처방을 물어보면서 눈물이 줄줄 흘러 얼굴을 적셨으나, 곁에서 모실 적에는 근심하는 빛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어버이의 뜻을 상하게 할까 염려해서였다.
돈녕공은 봉직하는 데 전념하여 집안일을 모두 공에게 맡겼다. 공은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빠뜨리는 법이 없이 집안일을 잘 다스렸으며, 또한 터럭만큼도 사적으로 처자를 위해 쓰지 않았다. 공은 우애가 마음에서 우러나왔다. 백형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백형의 큰아들도 잇따라 죽었는데, 공이 아비를 여읜 아이와 과부가 된 식구를 유감이 없게 위문하고 돌보아 주니, 집안에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의지하고 중히 여겼다. 평소에 거처할 때에는 명도(名途)를 피했으며, 권세 있는 이들과 교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십수 년간 무릇 관직(館職)에 제수된 것이 35번인데 상소하여 사직한 것이 항상 많았으니, 담박하기가 이와 같았다. 다른 이를 대할 때는 남의 어려움을 자기의 어려움같이 여겨 도와주었다. 선비가 과거 공부를 하는데 형편이 궁하여 비용을 마련할 수 없으면 머물 곳을 마련해 주고 먹을 것을 주어 성취하도록 도와주었다. 의탁할 데 없는 이가 객사(客死)하였으면 관을 사서 염해서 장사 지내 주었으니 이런 것들은 대부분 칭술할 만하다.
무릇 백행은 효도를 근원으로 삼는데 믿음을 받기는 더욱 어렵다. 예전에 성인께서 민자건(閔子騫)을 칭하기를, “사람들이 그의 부모와 형제가 칭찬하는 말에 트집 잡지 못하는구나.” 했으니, 이의를 달지 못했음을 말한다. 내가 일찍이 공을 해후하고자 한 바람을 이루지 못했으나 명성은 들어 친밀하게 느끼고 있었다. 공이 죽었을 때 돈녕공이 제문을 짓기를, “너같이 효도하고 우애하는 이는 지금 세상에서 보기 어렵구나.” 하였으니, 이 한마디 말로도 충분하다. 이것을 가지고 공을 살펴보면 알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부인은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감사 흠(歆)의 딸이다. 딸 하나를 두었으니, 생원 심상관(沈尙觀)에게 시집갔다. 후 부인은 영월 엄씨(寧越嚴氏)로 목사 찬(纘)의 딸이다. 3남을 두었으니, 큰아들은 택보(澤輔)이고, 둘째 아들은 제보(濟輔)이고, 셋째 아들은 옥보(沃輔)이니 진사이다. 또 측실에서 난 딸이 있으니 군수 이득주(李得舟)의 첩이 되었다.
택보는 2남 2녀를 두었으니, 태한(台漢)과 삼한(參漢)이다. 제보는 행실이 돈독했는데 요절하였으며 양자는 아직 관례를 올리지 않았다. 옥보는 1남 3녀를 두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
효심을 미루어 충성을 바쳤으니 / 忠自孝移
임금을 섬김에 근원이 있었다네 / 事君有源
나아가서는 물러날 것을 잊지 않았고 / 進不忘退
오직 절조를 지키고 성품을 길렀다네 / 維厥守存
평이하면서 꿋꿋하고 곧으면서도 온화함을 잃지 않았으니 / 夷而介貞不失溫
후세에 넉넉함을 남겨 줄 수 있으리라 / 可以裕後昆
校理洪公墓誌銘 幷序
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 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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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충주시 연수동 : 충청북도 충주시의 중앙 북쪽에 위치한 동이다. 1914년 연원과 동수동에서 한 자씩을 따서 연수리라고 하였다. 연원은 찰방(察訪)이 있던 곳이고, 동수는 연원의 동쪽을 지키던 망대가 있었던 곳이다. 『여지도서』에 "이곳은 북변면 연원리 지역으로 충주관아로부터 북쪽으로 5리 거리에 위치한다."는 기사내용이 있다. 『조선지형도』에서도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 연수동은 1914년에 충주군 읍내면에 편입되었으며, 1956년에는 충주시에 속하였다. 연수초등학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