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 서정주는 할머니와 친밀감을 갖고 자주 교류하며 생활했다. 이 경험은 이후 서정주의 생애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그 양상은 초기 시뿐 아니라 서정주의 생전 마지막 시집인 『80소년 떠돌이의 詩』 에까지 드러난다.대체로 할머니로부터 들은 신화나 전래동화 등에서 모티프를 얻어 사용하여 전통적인 이미지를 연출하거나 때로는 할머니 자체의 존재를 시 내부에 등장시키기도 한다. 특히 할머니가 등장한 시를 통해 할머니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외할머니는 손자에게 옛이야기를 하는 등 전통적이고 온화한 이미지로 묘사된다. 서정주의 대표시 중 하나인「자화상」 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기퍼도 오지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뿐이었다. … 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도라오지않는다하는 外할아버지의 숯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눈이 나는 닮었다한다. ― 「자화상」 중
아버지가 종 노릇을 하느라 늦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자 대신 손자를 돌보는 외할머니와 서정주 본인을 ‘파뿌리같이 늙은할머니’ 와 ‘대추꽃’ 이라고 서술함으로써 서로를 더욱 대비되도록 꾀한 흔적이 보인다. 백발같이 허옇고 마른 파뿌리와 자그마한 대추꽃을 차례로 서술하여 외할머니와 자신의 이미지가 정반대임을 암시하였다. 또 돌아오지 않는다는 외할아버지와 닮았다고 서술하는 부분에서는 연민의 감정도 느껴진다. 서정주에 대한 할머니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횅하게 휘영청 밝은 달밤엔 꼬리 아홉 개달린 흰 암여우가 우리집 뒷골 세갈림길에서 재주를 휙하고 한번 넘으면 쉬는 숨결에서도 항시 좋은 향내가 나는 꽃보다도 더 이쁜 여자가 되어 사내들을 호리러 나온다고, 어느 달밤에 할머니가 눈웃음치며 말씀하셔서, … 아마 이것은 할머니가 못된여자를 조심하라는뜻으로 내나이 일곱 살때에 일찌감치 말씀해두신 것이겠다. ― 「일곱살때에 할머니에게서 드른 흰 암여우 이야기」 중
할머니가 어느 밤에 말씀하신 설화를 바탕으로 자신이 깨달은 교훈을 이야기한 시이다. 구미호 등 토속적인 존재를 등장시켜 더욱 향토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또 설화를 통해 손자에게 교훈을 주려 했다는 점에서 할머니의 전통적인 심성을 알 수 있다. 또 일곱 살에 할머니가 해주신 이야기를 여든 살이 될 때까지 기억한 점에서 할머니가 서정주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을지 가늠할 수 있다. 할머니의 손자 사랑이 느껴지는 시이다. 이외에도 「외할머니네 마당에 올라온 해일」,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등 할머니가 등장한 시가 여러 편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점은 서정주가 할머니에게 전통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이다. 위에 예시로 든 시 외에도 춘향전 등 전통 설화에 착안한 시가 여러 편 있다는 점에서 근거를 들 수 있다. 또 서정주 시의 특징 중 하나는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서정적인 느낌이 많이 난다는 것인데, 이는 유년시절 할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감성을 키우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결과 할머니는 서정주의 시 곳곳에서 여러 방면으로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유년시절 서정주가 할머니로부터 겪은 경험이 서정주에게 전통적이고 서정적인 의미로 다가와 그의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