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지 정대(孔明之正大)와 자방지 종용(子房之從容)
공명의 정대와 자방의 종용
'從容'(종용)은 원래 말이나 행동이 수선스럽지 않고 차분하며 침착한 상태를 뜻하며, 이는 '얌전히 따를 종(從)'과 '얼굴 용(容)'이 합쳐져 '얼굴빛을 따른다'는 의미로 확장된 것으로, 한국어에서는 '조용하다'의 어원이 되기도 했지만, 현재는 '고요하다', '차분하다', '침착하다'는 뜻으로 주로 쓰입니다.
주요 의미:
차분함/침착함: 어떤 상황에서도 평온하고 여유로운 태도나 성격.
고요함: 소리 없이 얌전하고 평온한 상태.
순종/따름 (원래 의미): '얌전히 따르다'는 뜻에서 유래. .
■ 慫慂(종용)은 '從容'(종용)과 발음은 같지만 뜻이 다르므로 주의할 것
예시:
從容有常(종용유상): 어떤 상황에도 안색이나 행동을 바꾸지 않고 자신의 소신대로 행동하는 것.
결론적으로 '從容'은 '조용하다'의 옛말로, 평온하고 침착한 상태를 나타내는 한자어입니다.
‘종용(從容)’과 같은 발음인 ‘慫慂’
‘권할 종(慫)’
‘권할 용(慂)’
두 글자는 모두 다 아래에 ‘마음 심(心)’이 붙어 있다.
‘心+從’의 구조로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 ‘얌전히 따르도록(從)’하고,
‘心+涌(샘솟을 용)’의 구조로서 마음으로부터 샘솟아(涌) 따르도록 한다
는 뜻이 합쳐진 단어가 바로 ‘慫慂’인 것이다.
그러므로 국어사전은 慫慂을 “잘 설명하고 달래어 따르도록 권함”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정대와 종용의 사전적 의미
정대(正大)는 ①아주 바르고 지극히 큼 ②공정하고 사심이 없음 ③언행이 바르고 의젓함 ④ 넓고 크며 규범적임 등의 용례로 쓰인다.
종용(從容)은 ①거동 ②느긋하고 한가한 모양 ③남의 일을 주선함 또는 교제함 ④서두르지 않음 등의 용례로 쓰인다.
현재 국어사전에서
정대는 ‘정대하다’의 어근으로 ‘바르고 당당하다’라는 의미로 쓰이고,
종용은 ‘종용하다’의 어근으로 ‘차분하고 들뜨지 않아 찬찬하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이를 종합해 볼 때
정대는 일을 처리함에 언행이 바르고 옳아서 사사로움이 없는 광명한 모습을 표현한 말이고,
종용은 일을 처리함에 여유롭고 침착해서 들뜨지 않은 조용한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지식인들은 공명의 정대와 자방의 종용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는 제자인 송애(松崖) 박여룡(朴汝龍, 1541~1611)과의 문답에서 자방의 종용과 공명의 정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문) 이연평(李延平)이 말하기를, “장량(張良)의 종용함이 제갈무후(諸葛武侯)보다 낫다.”라고 하였는데, 어느 점이 종용한 것입니까?
답) 일에 앞서서 작위(作爲)하지 않고 반드시 일이 오기를 기다린 후에 대응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종용한 점이다.
문) 무후(武侯)와 같이 정대(正大)하려면 장량은 어떻게 했어야 합니까?
답) 한성(韓成: 장량이 모신 한나라 왕)을 보필해서 진(秦)을 멸망시킬 수는 없었고 한성이 항우(項羽)에게 피살되었으니, 항우도 장량(張良)의 원수였다. 그래서 한고조(漢高祖)가 아니면 함께 원수를 갚을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한고조를 섬기면서 그가 한(韓)나라를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고 정직하게 말하는 것은 사세(事勢: 일의 형세) 역시 어려웠을 것이다.
율곡은 장량의 종용을 묻자 일에 앞서 작위하지 않고 일이 오기를 기다린 후에 대응하는 것을 종용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장량이 공명과 같이 정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자 장량이 한(漢)의 유방을 섬기면서 한(韓)을 위해 원수를 갚는다고 정직하게 말하기는 사세(事勢)에서 어려웠을 것이라 밝혔다.
이러한 율곡의 대답에서 자방의 종용은 일을 처리함에 앞서서 작위하지 않고 오기를 기다린 후에 대응하는 처세를 뜻하고, 공명의 정대는 일을 처리함에 정직하게 말하는 처세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송암(松巖) 이로(李魯, 1544~1598)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 1549~1598)에게 올린 계문에서
“궁리하고 계획하는 것은 자방(子房)의 종용함과 같고 군대를 부리는 것은 제갈공명의 정대함과 비슷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글은 이여송의 뛰어난 능력을 칭송하기 위해 자방의 종용과 공명의 정대를 예로 삼은 내용이다.
여기서 송암의 견해, 즉 이여송이 종용과 정대를 갖춘 인물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면
종용은 궁리ㆍ계획하는 행위의 내용이고
정대는 군대를 부리는 행위의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입재(立齋) 강재항(姜再恒, 1689~1756)은 “연평이 ‘자방은 무후의 정대만 못하고, 무후는 자방의 종용만 못하다’고 말했다.”라는 내용을 밝히면서 “종용하기 때문에 알선하는 것이 수고롭지 않았고, 정대하기 때문에 일을 처리하는 것이 광명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결과적으로 자방은 종용하기 때문에 일의 알선을 쉽게 할 수 있었고, 공명은 정대하기 때문에 일의 처리에 밝고 투명했다는 것이다.
공명의 정대와 자방의 종용에 대한 이들의 논의는 대체로 일 처리에서 드러나는 제갈공명과 장자방의 모습 또는 태도를 말한다.
자방의 종용과 공명의 정대는 공적인 업무의 수행, 즉 총괄과 조정의 공무 과정에서 그들이 정치적인 목적의 실현이나 사회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취했던 일련의 정책 기조라 할 수 있다.
자방의 종용함과 공명의 정대함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경우를 정사의 기록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지』를 통해 우리한테 익히 알려진 ‘읍참마속(泣斬馬謖)’이란 유명한 고사성어는 공명의 엄정한 법 집행과 공평무사 정신을 대변한다.
227년 제갈공명은 출사표를 올리고 북벌(北伐: 조조의 위나라를 정벌)을 시작한다. 당시 제갈공명은 부하 마속(馬謖)에게 전력상의 요충지인 가정(街亭)을 지키기 위해 위나라 장합(張郃)과 싸우라는 전술을 내린다. 그러나 마속은 상황판단 착오로 명령을 어기고 산 정상에 진을 쳤다가 위나라 군대에 포위당해 대패했다. 한중으로 후퇴한 제갈공명은 마속을 군령 위반의 책임을 물어 참수형에 처했다.
읍참마속은 제갈공명이 국가의 법질서와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 울면서 마속의 목을 베었다는 일화이다. 이것은 제갈공명의 공정무사(公正無私: 공평하고 정직하며 사사로움이 없다)한 일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의 정대한 업무처리와 정직한 마음가짐을 가장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건으로 이해된다.
진수는 제갈공명에 대해 “촉나라 경내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고 아꼈으며, 형법과 정치가 비록 엄격하였으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다. 이것은 마음을 공평하게 쓰고 상주고 벌주는 것을 분명하게 했기 때문이다.”라고 평하였다.
제갈공명은 국가의 형법과 정치를 운용할 때 상벌의 기준과 공사의 원칙이 이처럼 분명하였으므로 처사에 사사로움이 없고 광명정대(光明正大)했었다.
장자방은 한신, 소하와 함께 한나라의 개국공신으로 한초삼걸(漢初三傑)이라 불린다. 유방에게 있어 한신은 천재적인 무장이고, 소하는 병참과 행정의 달인이고, 장량은 전쟁의 전략과 전술을 수립하는 작전참모이다.
그러므로 유방이 패공(沛公)이 되고 나서 벌인 모든 일은 장량의 계책을 따른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장자방의 계책에서 ‘홍문연(鴻門宴)’은 그의 종용함이 돋보였던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기원전 207년 유방은 패권의 경쟁자인 항우가 마련한 홍문(鴻門)의 연회에 참석하게 된다. 당시 항우의 책사인 범증(范增)은 항장(項莊)에게 검무(劍舞)를 추는 척하면서 유방을 죽이라고 지시한다.
항장이 검무를 추기 시작하자 이들의 계획을 간파한 장량은 연회장 밖에 나가 칼과 방패로 중무장한 번쾌(樊噲)를 불러들였다. 이때 갑자기 뛰어 들어온 번쾌를 보고 놀란 항우에게 장자방은 번쾌를 소개한다.
유방은 그 혼란한 틈을 타서 연회장을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장자방은 유방이 자신의 진영에 도착할 즈음하여 항우에게 패공[유방]이 만취해 예를 갖추기 힘들어 자신이 대신 선물과 인사를 올린다고 사과하며 사건을 마무리했다.
장자방은 홍문연과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당황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계책을 세워 당면한 현실의 국면을 조용히 타개해 나갔다.
장자방이 천하통일을 위해 추진했던 크고 작은 일과 계책들은 모두 조용함을 바탕으로 했다.
그러므로 그는 ‘장막 안에서 천 리 밖의 승부를 결정’짓는 능력을 발휘하여 한의 창업이라는 역사적 공적을 이루어 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