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불에 떨어진 지렁이
글. 김광원
햇볕이 쨍쨍 쏟아지던 여름날의 그 순간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때 난 난생 처음 본 그 광경에 깜짝 놀랐다.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교정의 시멘트 길을 따라 혼자 걷고 있는데, 제법 큰 지렁이 한 마리가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이럴 수가, 지렁이가 뛰다니. 기껏해야 밟으면 ‘꿈틀’한다는 게 지렁이 아니던가. 그러나 분명 지렁이는 내 눈 앞에서 위아래로 요동 치고 있었다. 자기의 기다란 키만큼이나 높이 뛰어올랐다. 이것을 목격한 순간, 지렁이가 뛰는 이유가 금세 이해됐다.
한여름 햇살에 시멘트 포장길이 엄청 뜨겁게 달궈져 있었던 것이다. ‘아~ 그렇구나. 잔디밭에 있다가 시멘트 길로 떨어져 나온 이 지렁이가 지금 무척 뜨거워하는구나. 갑자기 지옥불 용광로에 떨어진 지렁이는 엄청 큰 자극을 받아 반사적으로 사력을 다해 공중으로 솟구쳤구나.’ 그 모습을 본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지렁이를 바로 손으로 집어 올릴 용기는 없었다. 주변에서 나뭇가지를 찾아 겨우 풀밭에 던져 구출해 줬다.
내가 본 또 다른 지렁이 얘기다.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 옆에 그리 높지 않은 산이 있다. 그곳에는 수돗물을 저장해서 내려 보내는 배수지가 있다. 그 배수지를 향해 나 있는 산길(도로)도 역시 시멘트 길이다. 배수지 공사가 끝나고 그 산길이 처음 열리던 무렵의 일이다.
긴 가뭄 끝에 단비가 쏟아지고, 온 천하가 단비의 기쁨에 취해 있던 저녁. 난 저녁 산책을 할 겸 시멘트 포장길에 올랐다. 오르다 보니 웬 지렁이가 이리도 많이 나와 있는지. 크고 작은 지렁이들이 시멘트 길에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긴 가뭄 끝에 내린 단비라 온몸으로 환호하며 한 판 축제를 벌이는 중이었다. 나는 지렁이들이 발밑에 깔릴까 봐 발도 선뜻 내밀지 못하고 조심조심 그 길을 걸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갑자기 뜨거워진 시멘트 길을 벗어나지 못한 지렁이들이 도로 위에서 그대로 말라죽은 것이다. 지렁이들은 점점 말라비틀어지고 붉은 줄 흔적만 남긴 채 사라졌다. 비가 올 때마다 반복되던 그 일은 이제 다시 볼 수 없다. 산길이 생긴 지 20여 년, 그 산길 양쪽 주변에 살던 지렁이는 거의 다 사라져 버렸고, 나의 마음이 아플 일도 아예 없어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라도 홀로 살아갈 수는 없다. ‘너’의 눈을 통해 ‘나’의 모습이 비춰진다. 내 삶은 너를 통해 확인된다. 인류 역시 이 자연생태계에서 독불장군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미물들도 함께 모여 자연을 이루고, 우리는 그 자연의 품, 큰 어머니의 품에 안겨 살아가는 것이다.
지렁이. 펄쩍펄쩍 뛰어오르던 그 지렁이를 난 잊을 수가 없다. 영문도 모르고 지옥 불구덩이에 떨어진 그 지렁이를 통해, 난 지렁이도 뛰어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출처 : 월간원광(http://www.m-wonkwa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