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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각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삼성각(三聖閣) 편액
현등사 치성광여래 (경기도문화재자료 제 125호)
현등사 치성광여래도는 독성도와 함께 화계사에서 1861년에 조성되어 현등사에 봉안된 것으로 비단바탕에 진채색으로 그린 정사각형의 두루마리 그림입니다.
중앙의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상단은 동자, 이십팔숙 등을, 하단에는 칠원성군을 배치하여 하단에서 상단으로 올라갈수록 인물들을 작게 묘사하여 원근감을 주는 안정된 구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금어는 하운당 유기, 원하당 세원, 중봉당 명호 등이며, 편수로는 창엽으로 19세기 말경기도 일대를 주름잡던
불화승이 그린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징서정연하게 배치된 획일된 구도로서 생동감은 느낄수 없지만, 불화의 채색과 구도에서 19세기 중반 경기도 불화의 특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산신탱
현등사 독성탱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26호)
현등사 독성도는 세로 117.5㎝, 세로 139.5㎝인 정사각형에 가까운 두루마리 형태의 그림으로 1875년 삼각산 화계사에서 1875년에 상궁 장씨에 의해 순종과 왕비내외, 그리고 을해생 정씨를 위해 조성된 것입니다.
천태산을 배경으로 녹색의 원형두광을 진 늙은 비구가 소나무 아래 기암괴석 위에 앉아 있고, 그 주위를 꽃과 바위를 배치하였습니다
향 왼쪽에 작은 바위 위에는 붓이 꽂혀 있는 필통과 향로가 놓여 있고, 향우에는 만개된 연꽃이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이 독성도는 19세기 후반 불화에 많이 쓰이는 녹색과 청색이 주류를 이루고, 분홍색과 황토색을 부수적으로 사용하고 있어 전형적인 조선 말기의 구도와 채색을 보여줍니다.
세부 필치와 색채사용이 매우 잘된 작품으로 19세기 후반 독성도 연구의 기준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운악산현등사 범종
극락전 좌측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인 지장전이 서 있습니다.
지장전은 인간의 사후 세계를 관장하는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모시는 전각입니다
지장전
지장전(地藏殿) 편액
지장십왕도(경기도 문화유산자료 제12호)
크기는 가로 212.5cm 세로 151cm로, 지장보살이 중앙의 높은 대좌 위에 반가좌로 있으며, 발은 분홍색의 연화 봉오리가 받쳐 들고 있습니다. 이중원형광배를 두르고 오른손을 어깨 높이만큼 들었으며, 왼손은 무릎까지 내려 옷자락을 잡고 있습니다.
지장보살 무릎아래 좌우에 도명존자, 무독귀왕을 중심으로 각각 오존씩 시왕을 배치하고 시왕의 우측에는 판관, 우두, 마두, 선악동자 등의 권속들이 배치되었습니다. 무독귀왕은 합장을, 도명존자는 석장을 잡고 있습니다.
원래 극락전의 아미타회상도 좌우에 신중도와 함께 걸렸던 것으로 현재 지장전 청동지장보살좌상 뒤에 봉안되어 있습니다. 화기 부분이 잘라져 버렸지만, 사찰소장물품표에 의하면 아미타회상도와 같은 1759년에 조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지장보살좌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4호)
'현등사 청동 지장보살좌상'은 넓은 끈으로 질끈 동여맨 두건(頭巾)을 머리에 쓰고 오른손에 보배 구슬을 쥔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는 고려 시대의 전통을 이은 것입니다. 바닥면에는 이 불상을 만든 사연이 새겨져 있는데, 1790년 관허당(觀虚堂) 설훈(雪訓) 스님과 용봉당(龍堂) 경환(敬還) 스님이 지장암에 봉안하기 위하여 이 불상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불상을 만든 설훈, 경환 두 스님은 불상과 불화를 모두 다룰 수 있 었던 18세기 후반의 뛰어난 승려 장인으로, 서울과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불상과는 달리 신체 비례가 적절해 안정된 모습이며, 양 볼이 통통한 네모진 얼굴도 차분 하면서도 인자한 표정을 자아냅니다.
특히 왼쪽 무릎 위에 드리운 옷자락을 크고 대담하게 접어 끝단을 힘 있는 지그재그 형으로 표현한 것은 오른쪽 어깨의 지그재그 모양 옷자락 처리와 함께 이 불상에서만 볼 수 있는 개성적인 표현입니다. 위아래로 벌어진 연꽃이 맞붙은 대좌도 원래 것입니다. 대담하고 세련된 표현기 법과 뛰어난 주조기술을 보여주는 18세기를 대표하는 청동불상입니다.
현등사 청동지장보살좌상은 전체 높이가 64.5cm로 조선 후기 제작된 보살상 가운데 소형에 속합니다. 동그란 얼굴에 눈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가 반쯤 뜬 눈, 화형의 귀거리를 단 늘어진 귀, 삼각형의 코, 살짝 미소를 머금은 입을 표현하였습니다.
대자대비전
보광전 서쪽 처마 아래는 관음전의 편액, 북쪽에는 한글로 대자대비전의 편액이 달려있습니다.
대자대비전 편액
극락전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전각으로 1984년 기와 교체시에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영조 22년(1746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조선 중기에 건립된 아름다운 건축물인데, 보광전이 앞을 가로막아서 답답한 느낌이 듭니다.
극락전 (보물 제2324호)
가평 현등사는 『봉선본말사지 현등사 운악현등사사적」 및 「현등사 만취당 성조기」 등의 기록을 통해 고 •려 후기 이전 창건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후 잦은 화재로 초기 전각은 소실되었으나, 현재의 가람 배치와 전각 구성은 영조 41년(1765년) 중창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 가운데 극락전은 사찰의 중심 불 전으로서 오늘날까지 그 원형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는 건축물입니다.
극락전은 1763년 화재 이후 1765년에 중건된 건물로, 상량묵서와 연륜연대 분석을 통해 주요 목부재가 건립 당시의 것임이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관련 문헌에 건립 계기와 과정, 참여 인물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 어 당시 중건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게 평가됩니다. 더불어 한국전 쟁 이후 경기 북부 지역에서 드물게 남아 있는 조선시대 불전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큽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계 불전으로, 외2출·내4출목 공포 구성과 절제된 제공 및 첨 차, 보와 공포의 결합 방식 등에서 조선 중후기 불전의 전형적인 수법을 잘 보여줍니다. 특히 중도리 보강을 위한 구조적 장치와 덧걸이 연목 기법은 기존 건축기술의 특징과 변화 양상을 함께 보여주는 사례로, 당시 건축 기술과 양식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학술적·예술적 의의가 큽니다.
이처럼, 가평 현등사 극락전은 조선 후기 불전의 전형적인 형식을 잘 유지하면서도, 독창적인 구조 기법 과 공간 연출을 보여주고, 건립 과정이 문헌과 실물 자료를 통해 명확히 확인된다는 점에서 역사적·학술 적·예술적 가치가 큽니다. 이러한 점을 종합할 때 국가지정문화유산(보물)으로서의 지정 가치가 충분합니다.
극락전(極樂殿) 편액
극락보전 법당 안에는 1759년(영조 35) 이전에 조성된 1.8m 높이의 아미타불좌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3호)과 아미타 후불탱화(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5호)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극락전에 단아하게 모셔진 아미타불
아미타불은 1759년(영조 35)에 조성된 높이 108cm의 좌상입니다.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극락전의 주불로 138cm의 중형불상으로 무표정한 얼굴, 불분명한 육계의 표현, 짧은목에 움츠린듯한 어깨,평판적인 가슴등에서 전형적인 조선후기의 불상입니다.
현등사 목조아미타좌상(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제183호)
현등사 극락전에 모셔져 있는 아미타 불상입니다. 오른손을 어깨 위로 들고, 왼손을 무릎에 둔 채 각각 엄지 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불 특유의 설법인(說法印) 손갖춤을 맺었습니다. 양손은 따로 만들어 끼워 넣었습니다.
전체 높이가 138cm에 이르러 조선 후기에 제작된 불상 가운데 중형에 속하며, 상체를 약간 앞으로 내밀어 구부 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정수리와 머리 중앙에 있는 큼직한 상투 매듭 구슬, 사각형의 얼굴과 신체 구성, 상체를 뒤로 젖히고 머리를 약간 앞으로 내민 모습, 폭이 넓고 단순한 옷주름 형태 등에서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현등사 아미타설법도 (보물 제2310호)
‘가평 현등사 아미타설법도'는 화기(畵記)에 있는 기록을 통해 1759년(영조 35)이라는 제작 연대, 오관 등 의 제작자, 현등사라는 원봉안처 등을 명확히 알 수 있는 불화입니다. 비단 바탕에 채색으로 아미타여래가 극락에서 여러 권속에게 설법하는 장면을 표현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화면 중앙에 크게 배치한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보살, 나한, 팔금강, 팔부중 등 권속들을 짜임새 있게 배치하였습니다. 존상의 위계에 따라 채색과 크기를 달리 표현하고 주존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루게 배치하여 40여 존상이 함께 그려져 있음에도 안정감을 줍니다. 뿐만 아니라 문양 등 세부 표현의 섬세한 처리, 깔끔하고 힘이 있는 필선 등 수화승 오관의 뛰어난 역량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현존하는 18세기의 경기 지역 불화가 많지 않은데, 이 작품은 당시 경기 지역의 불화와 화승들의 화풍을 보여줄 뿐 아니라 18세기 불화의 흐름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무엇보다 서울·경기 지역의 아미타설법도 중에서 제작 시기가 가장 빠르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입니다.
대좌 위에 앉아 손갖춤(수인)을 취하고 설법하는 경건한 아미타여래
팔대보살
좌협시 관음보살, 문수보살
우협시 세지보살, 보현보살
사천왕상
북방 다문천왕, 동방 지국천왕
남방 증장천왕, 서방 광목천왕
현등사 지장시왕도(경기도 문화유산자료 제173호)
가평 현등사 지장시왕도의 크기는 길이 151cm, 폭 183cm입니다. 지장보살은 2겹의 윤광(潤光)[성인의 머리 부분을 둘러싼 환한 빛],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은 원형 두광을 지고 있습니다. 그 옆으로 십왕(王)과 판관(判 官), 사자(使者), 우두(牛頭), 마두(馬頭), 앙발(髮), 선악(善惡) 동자 등의 권속이 4단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단에는 홀(笏)을 든 판관과 옥졸[우두, 마두, 앙발], 본존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두루마리 1개를 문관 형의 판관이 각각 좌우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중단에는 판관과 선악동자, 상단 2줄에는 시왕과 동녀들이 배치 되어 있습니다.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사이의 위쪽 공간에는 작은 부처를 배치하였습니다.
위쪽에는 8폭 병풍이 있 는데 본존 쪽의 양끝 폭을 접어서 원근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병풍의 뒤쪽으로는 지장보살의 머리 위까지 도 식화된 구름 문양이 있습니다.
화기(記) 일부분이 확인되지 않지만 1830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등사신중도(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제193호)
현등사신중도는 조선후기 일반적인 크기로, 가로 122cm, 세로 123cm이며 화면을 2등분 하여 존상의 크기를 비슷하게 그려 존상의 위계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오른쪽에는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월천자와 복숭아와 병을 든 동자상을 배치하였습니다. 왼쪽 상단에 날개 깃이 올라간 투구를 쓴 위태천이 그려져 있는데, 얼굴은 이목구비가 명확하고, 코에 비하여 눈과 입이 작은 것이 특징입니다.
이 신중도는 화기(畵記)에 의해 관허당 설훈, 용봉당 경천의 작품임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현등사청동지 장보살좌상(懸燈寺靑銅地藏菩薩坐像)을 조각하여 동일한 승려에 의하여 불상과 불화가 제작된 예가 거 의 조사되지 않아 18세기 후반 불교미술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619년(광해군 11) 봉선사에서 조성된 동종이 있는데, 보물 제1793호로 지정된 이 동종은 임진왜란으로 봉선사의 법당이 소실되자, 광해군 때인 1613년에 다시 중수하는 과정에서 조성되었는데, 1950년 6.25 동란이 일어나자 말사인 현등사로 옮겨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 종의 몸체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이 종은 '만력 47년'인 1619년(광해군 11)에 천보(天寶) 스님 주도로 조성된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이 동종은 원래 현등사의 본사인 남양주 봉선사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인데, 일제강점기에 현재의 현등사로 옮겨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종은 73.5cm의 아담한 크기로, 종신(鍾身)을 여러 개의 구획선으로 나누고 그 안에 연잎무늬, 당초무늬, 파도무늬 등을 화려하게 새겨 넣어 장식성을 강조한 범종입니다. 두 마리 용이 서로 등을 맞대어 몸을 꼬아 만든 용뉴는 안정감을 주고, 두발을 힘차게 내딛어 천판을 들어 올리는 모습에서 역동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둥근 곡면을 이루는 천판에서부터 종의 입으로 내려오면서 조금씩 그 폭 을 넓힌 종의 형태도 아름답습니다.
이 종은 고려 후기 연복사종에서 비롯된 중국종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특히 종의 중심부를 세 개의 융기선으로 구획하고 천판에서 종의 입 사이에 다양한 무늬를 시문하였는데, 작은 마름모꼴의 연곽에 구슬 모양의 연꽃봉우리와, 천판의 내림연꽃이 중앙을 향해 보상화문처럼 말려든 형태, 그 위로 표현된 구슬무늬, 종복(鍾腹)에 크게 자리잡은 역동적인 연화당초무늬, 그리고 하대에 표현된 물거품이 일렁이는 파도무늬 등의 장식 문양은 1469년 작 남양주 봉선사 동종이나 흥천사명 동종, 그리고 1491년 작 합천 해인사 동종 등 조선전기의 왕실발원 범종의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원래 이 종을 소장했던 봉선사 또한 왕실의 원찰이었기 때문에, 이전에 만들어진 궁중양식 범종의 여러 가지 요소가 반영된 것으로 이해됩니다.
종의 배 부분에는 반듯한 해서체로 주종기를 돋을새김하였습니다. 주종기는 1619년(광해군 11)에 천보(天寶) 가 짓고 새기기까지 했으며, 종을 만들게 된 연유, 종 제작에 사용된 재료의 양과 무게, 발원하는 내용, 참여한 사람 등을 기록하였습니다. 주종장은 일반적으로 주종기를 작성한 천보로 보고 있는데, 그는 조선후기 승려 주종장(鑄匠) 가운데 유일하게 임진왜란 이전부터 활동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어, 임진왜란을 전후 한 시기의 승장의 계보나 범종의 양식 흐름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인물입니다.
이 종은 1619년에 조선 전기 궁중양식 범종의 전통을 계승하여 제작된 범종이며, 주조상태도 양호하고 역동적이고 생동감이 있는 무늬들을 조화롭게 배열하여 범종에 생명력을 불어 넣었습니다. 이 종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조선후기 범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입니다.
용뉴
연뢰
하대
현등사 동종 (보물 제1793호)
극락전 안에는 1619년(광해군 11) 봉선사에서 조성된 범종이 있습니다.
이 범종은 임진왜란으로 봉선사의 법당이 소실되자, 광해군 때인 1613년에 다시 중수하는 과정에서
조성되었는데, 1950년 6.25 동란이 일어나자 말사인 현등사로 옮겨온 것이라고 합니다.
종의 몸신에는 “봉선사종명병서 만력사십칠년기미사월십일일 화주 천보 근작 녹화 비구 현옥 정회 대원 영인(奉先寺鍾銘幷序 萬曆四十七年己未四月十一日 化主 天寶 謹作 綠化比丘 玄玉 正會 大元 塋仁)”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명문을 통해 이 범종이 '만력 47년'인 1619년(광해군 11)에 화주인 천보(天寶) 스님의 주도로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종무소 겸 요사채 기능을 담당하는 만취당
만취당 뒷쪽 추녀 아래에는 '대선급제사'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만취당(晩聚堂) 편액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송원 설정(松原 雪靖 1941~)스님의 글씨입니다.
관음전(觀音殿) 편액
현등사에서 맞이한 훤칠한 모습의 보광전(普光殿)
정면 5칸 측면 3칸의 ㄷ자형 구조의 보광전 건물입니다.
절 뒷편으로 험준한 운악산의 암봉들이 병풍처럼 둘러처져 있습니다.
보광전은 1982년에 시작하여 1988년에 완공하였으니 현등사는 폐허와 중창이 거듭된 파란만장한 역사를 갖고 있어 보는 이를 감동케 합니다.
보합태화루(保合太和樓) 편액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 1871~1936)의 글씨입니다.
보광전(普光殿) 편액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 1871~1936)의 글씨입니다.
보광전에 걸려 있는 운악산현등사(雲岳山縣燈寺) 편액
백의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신 보광전 대방
수월관음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8호)
하얀 옷을 걸친 고운 모습의 백의관세음보살 뒤로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가 걸려있습니다. 비단에 그려진 세로 174.5cm, 가로 210.5cm 크기의 탱화로 2011년 보존 수리 과정에서 발견된 '관음원문(觀音願文)'을 통해 탱화의 숨겨진 정보를 알게 되었습니다.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가 일찍 승하한 아들 헌종(宗, 재위 1831~1849)의 극락왕생과 며느리 2명의 수명장수를 빌고자 1850년 상궁들을 현등사로 보내 탱화를 조성하고 불상을 중수했는데, 원문에는 '해수관음탱'이라 나와있어 '해수관음(海水觀音)'이 조선 말 관세음보살 누님의 별칭으로 많이 쓰였음을 알려줍니다.
이곳 관음도는 화면 구성과 도상에서 매우 이색적입니다. 암좌(巌座)에 왼쪽 무릎을 세우고 편안히 앉아있는 관세음보살 옆에 괴석과 정병이 있고, 정병에 꽂혀있는 버들가지에 관음조(觀音鳥) 2마리가 있습니다. 정병은 편병(扁甁) 형태로 몸통에는 팔괘가 태극 문양 둘레로 있는데, 19세기 수월관음도에 다양한 형태의 정병이 나타나나 이런 모습은 희귀합니다. 특히 정병의 긴 목에는 '관심수(觀心水)'란 명문이 있는데, 이는 관세음보살의 마음이 담긴 깨끗한 물을 뜻할 것입니다.
화면은 수파 위를 가로지르며 걸쳐있는 구름으로 상단과 하단을 나누고 있으며, 구름 위에는 사천왕이 일렬로 자리해 있는데. 사천왕이 관음도에 출현하는 예는 거의 없습니다. 그림 상단에는 관세음보살을 둘러싸고 있는 대원광 바깥으로 백의관세음 형상을 한 화신(化身)들이 있으니 이들은 중생 구제를 위해 여러 방편으로 현신하는 관세음을 상징합니다.
화면 밑에는 바다의 물결 위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합장하고 있으며, 화면 좌우로 특이하게도 사해(四海) 용왕이 등장해 화염보주와 홀, 용뿔 등을 들고 있습니다. 용왕들은 선재동자보다 더 크게 그려졌으며, 선재의 천의 표현 또한 색다릅니다.
퇴은당 유경과 송암당 태원, 월하당 세원, 창엽 등이 제작했으며, 그들은 1861년 북한산(삼각산) 화계사(華溪寺) 탱화 조성에도 참여한 바 있습니다.
요사채
현등사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제63호)
높이 3.7m의 일반형 석탑으로 높직한 지대석 위에 2층 기단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층 기단은 불상의 대좌와 같이 하대석·중대석·상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하대석의 판내에 연화문(蓮花文)과 장방형의 액(額)이 공통적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중대석에는 측면 기둥인 우주(隅柱)와 가운데 기둥인 탱주(撑柱)가 표현되었습니다. 상층기단의 면석(面石)에는 양 우주와 탱주가 있는데, 기둥의 사이에는 장방형의 액을 모각하였고, 그 위에 옥개석(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은 돌) 형태의 갑석(甲石)을 놓았습니다. 상륜부는 3층 옥개석 위 3단의 받침이 있고 하나의 석재로 된 복발(覆鉢)·연주문(連珠文)·보륜(寶輪)·보주(寶珠)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현등사삼층석탑의 특징은 대좌 또는 수미단 형태의 기단과 상층기단으로 구분하고 있는 옥개석 형태의 갑석입니다. 전반적으로 안정감이 드는 작품으로, 특이한 모습의 기단부, 지붕돌의 부드러운 처 마곡선 등 각 부분의 양식들이 고려 시대 후기 양식을 반영합니다. 그런데 '성화6년(세조 15년, 1470)'에 현 등사 탑을 개조한 기록이 음각된 사리구가 석탑 내부에서 발견되면서, 함허대사의 중창 시기(1411년, 태종 11)에 석탑이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등사의 오랜 역사를 웅변하는 3층석탑.
고려 후기 작품으로 높이는 3.7m에 나름 화려한 모습이며 원래는 5층이었으나 2층과 지붕돌은 없어진 상태입니다.
탑에서 나온 사리기에 세종대왕의 왕자인 영응대군의 딸이 아버지를 위해 탑을 고쳐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왕실과 관련이 깊음을 알수 있습니다.
가평 하판리 지진탑(경기도 문화유산자료 제17호)
'가평 하판리 지진탑'은 현등사 삼층석탑 아래 별도의 공간에 있습니다. 현등사는 고려 희종 때 보조국사가 이 곳을 지나다가 석등 불빛을 보고 폐허로 있던 절터에 사찰을 중창했는데, 이때 땅의 기운을 진정시키고자 탑을 세웠다고 전합니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지진탑(地鎭塔)으로 불렸고, 보조국사의 이름을 따 보조국사탑(普照國師塔)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지진탑은 원래 3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기단(基壇) 일부와 탑 신(塔身)의 1층 부재가 없어져 본래의 모습과 달라졌습니다. 가장 하단에 있는 지대석에는 2단의 괴임대가 마련되었고, 네 귀퉁이의 합각(合角)이 뚜렷합니다. 기단의 갑석(甲石)은 2매의 판석으로 아래쪽에 부연(副椽)과 위쪽에 각형 2단 받침을 조성하였고 네 귀퉁이의 합각선이 뚜렷합니다. 탑신석(塔身石)과 옥개석(屋蓋 石,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은 돌)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구성되었습니다. 탑신석에는 각각 양 우주(隅柱)를 표현했고, 면석에는 여래상으로 추정되는 인물 좌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옥개석의 하단에는 옥개받침이 있습니다. 2층이 4단, 3층이 3단으로 상층으로 갈수록 수가 줄어드는 형식을 보입니다.
낙수면의 경 사가 비교적 완만하고, 추녀는 수평으로 흐르다 끝에서 급하게 반전(反轉)되었습니다. 각 층 옥개석의 위에는 탑신을 받기 위한 각형 1단의 받침이 있습니다. 상륜부는 노반석(露盤石)만이 남아있는데, 지름 5cm의 찰주공 (擦柱孔)이 있습니다. 옥개석 표현의 형식화와 탑신석 여래상 조각의 양식적 후퇴 등을 통해 고려 중기에 건립 된 석탑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108계단
정면, 측면 각 1칸에, 사모지붕의 정자 모양으로 된 이 불이문은 현등사 길이 제대로 정비되기 전에는 현등사로 들어가는 출입문이었들 듯 합니다.
불이문'(不二門) 이라는 편액
글씨가 참 예술적입니다. 역시 '백이(白易)'라는 분의 글씨입니다.
민영환 암각서가 있는 폭포바위.
구한말 궁내부대신이던 민영환(閔泳煥, 1861~1905) 선생이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탄식하던 곳으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민선생이 자결한 후에 1906년 나세환 외 12인의 의지로 바위에 "閔泳煥"이라 새겨 놓았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질 않습니다.
뒷쪽에는 '한북제일지장극락도량(漢北第一地藏極樂道場)'이란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말미에 '백이'(白易)라는 관지가 있는데, 어느 분이신지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편액의 의미는 '한강 이북에서 제일가는 지장극락 사찰'이라는 것입니다.
한글을 세로로 쓴 '운악산현등사' 편액
조계종 제25교구사찰 봉선사 주지를 역임한 운허 용하(耘虛 龍夏 1892~1980) 스님의 생전 필체를 집자한 것입니다.
한글서체의 편액이 친근하고 편안하게 다가옵니다.
불교 경전 한글화 사업에 평생을 바친 승려인 운하 용하스님의 덕분입니다.
1961년 최초로 한글판 '불교사전'을 편찬하였으며, 대장경의 한글 번역을 위하여 1964년 동국대에 역경원을 개원하여 역경원장을 역임하면서 팔만대장경을 번역하는 불사를 시작하였으며, 운허스님의 뜻이 계승되어 2001년 마침내 한글대장경이 완간되었다고 합니다.
일주문 옆에서 만난 삼충단(三忠壇)
일제때 끝까지 항거하다가 순직한 조병세(1827~1905), 최익현(1833~1906), 민영환(1861~1905) 세 분을 모시는 제단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