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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대 중종
● 본명: 이역, 성종의 둘째 아들
● 출생-사망; 1488 ~ 1544
● 재위기간: 1506년 9월~1544년 11월(38년 2개월)
● 주요 업적: 선대의 폐정 철폐를 위한 홍문관 강화, 조광조를 필두로 한 사림 세력 등용, 유교 이념의 근간인 향약을 전국적으로 전파, 조광조의 주장을 받아들여 현량과(賢良科) 실시, 삼포왜란, 사량진왜변 등 왜구의 침입과 북쪽 야인들의 공격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기 위해 임시회의기구인 비변사 설치, 소격서 혁파, 주자도감 설치,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일파 제거,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편찬, 영은문 건립, 백운동서원 건립
[제11대 중종실록]
[1. 연산군의 폐출과 진성대군의 등극]
갑자사화 후 연산군의 폭정은 더욱 노골화되고 있었다. 그 동안 자신의 행동에 제동을 걸던 세력이 모두 없어진 만큼 그가 못할 일은 없었다. 우선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신하는 모두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으며, 언론의 주축이 되던 사간원을 없애버렸고, 정치 논쟁을 금하기 위해 경연을 폐지시켰다. 학문을 싫어하고 학자를 배격하던 그는 조선 학문의 전당이라고 할 수 있는 성균관을 폐지하여 자신의 유흥장으로 만들었으며, 조선 불교의 산실인 원각사를 없애고 그곳에 장악원을 개칭하여 만든 연방원을 두고 기생들의 모임 장소로 사용하였다. 게다가 전국에 채청채홍사를 보내어 전국의 미녀들을 선발(이를 운평이라 한다)하고 그 중에서 뽑힌 기녀를 흥청(興淸)이라 하여 궁중에 불러들여 연회를 거들게 하였다.
또한 사냥을 즐기기 위해 도성을 기준으로 30리 내에 있는 민가를 철거하기도 했다.왕의 학정이 여기에 이르자 전국 각지에서 한글 투서가 날아들기 시작했는데, 연산군은 백성이 언문을 이용하여 왕을 욕되게 한다면서 훈민정음 사용을 금지하고, (언문구결) 등 한글 관계 서적을 불태웠다. 연산군의 행동이 이렇듯 광적인 양상을 띠면서 민생과 국정이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자,전국 각지에서 그를 축출 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거사계획을 가장 먼저 준비하던 사람은 성희안이었다. 성희안은 성종의 총애를 받던 인물로 학식이 깊고 치밀하며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종사관, 형조참판 등을 거쳐 1504년에는 이조참판 직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연산군이 망원정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을 때, 그의 방탕한 국정 운영을 비판하는 시를 지어 올렸다가 종9품부사용이라는 미관말직으로 좌천된 상태였다.
성희안이 가장 먼저 접근한 사람은 박원종이었다. 박원종은 한때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동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치면서 주로 국가의 재정 문제를 맡았던 인물이었다. 때문에 연산군의 사치 행각을 비판하는 간언을 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연산군의 미움을 사서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좌천되기도 했다. 하지만 곧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윤을 역임하고 1506년에는 경기도 관찰사로 있다가 다시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삭직되었다. 박원종이 연산군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은 그의 누이 박씨 부인 사건 때문이었다.
박원종의 누이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후실이었는데 인물이 절색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평소 그녀에 대해 흑심을 품고 있던 연산군은 마침내 큰어머니인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여 겁간하였는데, 이 때문에 박씨 부인은 자결하고 말았다. 이후로 박원종의연산군에 대한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결국 삭직되었던 것이다. 성희안은 박원종의 원한과 불만을 이용하여 군사력을 얻고자 했다. 그는 거사를 도모할 지략은 있었지만 군사력을 동원할 힘이 없었다. 하지만 박원종은 원래 무신 출신이었으므로 병력을 동원할 연줄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이들은 거사에 참여할 인물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당시 인망이 높았던 이조판서 유순정을 끌어들였으며, 연산군의 신임을 받고 있던 신윤무와 무장 출신 장정, 박문영 등의 호응을 얻어냈다. 거사일은 1506년 9월 연산군이 장단의 석벽으로 유람을 계획한 날로 잡았다. 하지만 연산군의 석벽 나들이는 갑작스럽게 취소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거사 계획은 일시 유보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때 호남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유빈, 이과 등이 거사를 알리는 격문을 보내오자 박원종, 성희안 등은 혹 선수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군사를 모아 예정일에 거사를 결행했다.
거사에 돌입한 반란군들은 먼저 진성대군에게 거사 사실을 통보하고, 신수근, 신수영형제와 임사홍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반란군들은 사전에 대궐로 진입하여 내응하기로 약조되어 있던 신윤무 등의 도움을 얻어 쉽게 궐내를 장악하였다. 거사에 성공하자 성희안 등은 성종의 계비이자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정현왕후 윤씨를 찾아가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하라는 교지를 내려줄 것을 간언한다. 정현왕후는 처음에는 이들의 청을 거절하다가 결국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 교동에 안치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튿날 진성대군이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함으로써 거사는 완결되었다.
사실 이 거사가 있기 전에 박원종이 신수근을 찾아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성대군의 장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신수근을 거사에 가담시켜 안전을 도모하려고 했던 것이다. 박원종이 신수근을 만난 것은 그를 끌어들일 의향보다는 그의 마음을 떠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만약 신수근이 거사에 호응한다면 무혈 입궐이 가능하다는 사실도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수근이 협조하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박원종은 마지막담판을 짓기 위해 그를 찾아갔던 것이다. 박원종은 신수근에게 누이와 딸 중 누가 더 중요하냐고 돌려서 물었다. 머리 회전이 빨랐던 신수근이 그 물음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신수근은 이 말을 듣고 버럭 화를 내며 '비록 임금이 포악하긴 하지만 세자가 총명하니 염려할 바가 못된다'고 못 박았다. 박원종은 신수근의 이 말을 듣고 거사 이전에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성희안, 박원종 등이 중심이 된 이 반정거사는 예상보다 쉽게 성공리에 끝났고, 이로써 12년 동안의 연산군과 궁중 세력의 독재 정치는 종식되었다. 학정은 끝나고 정치의 주도권은 훈구 세력에게 돌아갔다. 이는 곧 조선의 정치 형태가 성종 이전으로 되돌아간 것을 의미한다.
[2. 중종의 개혁 정책 실패와 정국의 혼란] (1488-1544, 재위 기간 1506년9월-1544년11월, 38년 2개월)
박원종 일파의 연산군 폐위 사건으로 중종은 왕위에 올랐지만 반정 공신 세력에 밀려 조정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들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 사림세력이자 급진 개혁론자였던 조광조를 끌어들인다. 하지만 조광조의 급진적 경향에 염증을 느낀 중종은 훈신, 척신 세력의 간언을 받아들여 그를 숙청시키고 만다. 이후 조선 조정은 훈신, 척신간의 치열한 권력 다툼이 전개되어 정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게 된다.
중종은 1488년 성종과 그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역, 자는 낙천이다. 1494년 진성대군에 봉해졌으며, 1506년 9월 박원종, 성희안 등이 연산군을 폐출하고 그를 옹위하자 조선 제11대 왕으로 등극했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였다. 중종은 등극한 뒤 가장 먼저 연산군의 폐정으로 말미암아 문란해진 나라 기강을 바로잡고 정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역점을 두었다. 왕의 자문을 담당하던 홍문관의 기능을 강화하고, 경연을 중시하여 정책 논쟁의 강도를 높였으며, 문신의 월과(月課)·춘추과시(春秋課試)·사가독서(賜暇讀書 )·전경(專經) 등을 엄중히 시행하여 문벌 세가들을 견제하려 하였다.
중종의 이 같은 정책은 왕도 정치를 앞세워 훈신과 척신들의 세력 팽창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인데 초기에는 거의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다. 이는 중종반정에 성공한 공신 세력의 힘이 너무 막강하여 왕의 입지가 미약한 데서 비롯된 결과였다. 게다가 공신들 대부분이 기득권을 누리려는 훈신 세력이었기 때문에 중종의 사림 성향의 왕도 정치 추구는 항상 그들의 저지와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조금씩 달라졌다. 중종 즉위 4년 후인 1510년 영의정직에 있던 박원종이 죽어 공신 세력의 위세가 많이 위축되었고, 한편에서는 반정 이후 지속된 개혁적 분위기가 사회에 확산되면서 정치도 새로워져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었다.
개혁에 대한 목소리는 대개 갑자사화로 정치 일선에서 밀려났던 사림을 위주로 형성되었다. 당시 사림의 대표적인 인물은 조광조(趙光祖, 1482년 8월 23일/음력 8월 10일 ~ 1520년 1월 10일/1519년 음력 12월 20일) 였다. 그는 무오사화로 유배 중이던 김굉필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1510년 사미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한 인물로서 당시 급진 개혁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중종은 공신 세력을 견제할 방도를 모색하던 끝에 1515년 급기야 조광조를 정치 일선으로 끌어들인다. 엄격한 도학 사상가인 조광조를 앞세운 중종은 그때부터 도학적 사상에 근거한 철인 군주 정치를 표방하며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공신 세력을 견제하는 동시에 철저한 유교 정치를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조광조의 주장에 따라 중종은 민간에 유교적 도덕관을 심기 위해 여씨향약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여씨향약>은 원래 송나라 학자 여대충의 저작이었는데 후에 주희가 첨삭하고 주석한 <주자증손 여씨향약>이 널리 유포되었다. 이는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한 일종의 민간자치 규율이었다. 또한 과거제가 인재를 등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면서 사림들의 천거에 의해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천거 등용제인 현량과가 실시되어 신진사류 28명이 요직에 배치되었다.
조광조의 이 같은 정책은 이른바 사림파를 중심으로 한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 이상 정치를 행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조광조 일파의 개혁 정책은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해서 훈구 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더군다나 조광조 일파가 도학적 정치이념을 내세워 임금에게까지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자 중종 역시 조광조의 급진적 경향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중종의 이런 심중을 헤아린 훈구파의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은 1519년의 반정 공신 위훈삭제 사건을 계기로 조광조 일파를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여 국정을 어지럽히니 죄를 밝혀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계를 올렸다. 조광조 일파의 지나친 도학적 언행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이들 훈신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조광조, 김정, 김식 등 신진 사림 세력을 숙청하였는데, 이를 기묘사화라 한다.
이로써 조광조를 통한 4년 동안의 중종의 개혁 정치는 종말을 고하였다. 이후 심정 등 훈구파의 전횡이 자행되면서 중종 중반기 이후에는 정치적 혼란이 거듭되었으며, 각종 옥사 등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1521년 기묘사화의 여파로 심정, 남곤의 일파인 송사련의 신사무옥이 일어나 안처겸 등의 사림파가 다시 숙청되었다. 1542년에는 심정, 남곤 등에게 쫓겨났다가 기묘사화 이후에 정계에 다시 복귀하였던 권신 김안로가 파직되고, 이듬해 3월에는 윤세창 등의 모역 사건이 일어나는가 하면, 1527년에는 김안로의 아들 김희가 심정, 유자광을 제거하고자 일으킨 동궁의 작서의 변[灼鼠의 變] ]이 일어나 관련도 없는 경빈 박씨와 복성군이 쫓겨나 죽었다.
이렇듯 정국의 혼란이 가속화되던 중에도 1531년에는 그 동안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김안로가 다시 집권하게 되자 정계는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으로 변했다. 이에 중종의 외척 윤원로 형제가 등장하여 김안로와 대립하게 되자 정계는 훈신과 척신 사이의 정권 쟁탈전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정국의 불안은 국방 정책에서도 많은 혼란을 야기 시켰다. 성종, 연산군 대에만 해도 비교적 잠잠하던 왜구들이 대마도의 지원을 받아 세력권을 넓혀 나가더니 기어코 폭동을 일으켜 한때 제포, 부산포를 함락시키고 웅천을 공격하는 등 삼포왜란이 일어나 경상도 해안 일대가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 난으로 조선과 일본의 통교가 중단되었으나, 일본의 아시카기막부의 간청에 의하여 1512년 임신조약을 체결하였다. 임신조약 후 조선은 종래 쓰시마에서 보내던 무역선인 세견선과 그에 대한 응답으로 조선 조정에서 보내던 세사미두를 반감하는 동시에, 상주하던 왜인들의 삼포 거주를 엄금하고 제포 하나만을 개항하는 등 왜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왜인들의 변란은 자주 일어났다. 1522년 5월에는 추자도 왜변, 동래염장 왜변 등이 있었고, 1529년에는 전라도 왜변, 1544년에는 사량진 왜변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 사량진 왜변으로 조선은 왜인들의 내왕을 완전히 금지시켰다. 한편 북방에서는 야인들의 내침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1512년 그들은 갑산, 창성 등지를 침입하여 인마를 살상했는데, 이를 계기로 조정에서는 4군 지대에 거주하는 야인들의 퇴거를 권유하고, 6진 지대에 순변사를 파견하는 동시에 의주산성을 수축하여 북방 방어벽을 형성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야인들의 4군, 6진 지역에 대한 노략질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만포첨사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와 같이 남쪽에서는 왜구가, 북방에서는 야인이 극성을 떨자 조정은 왕권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정로위를 설치하는 한편, 왜구에 대응하기 위해 외침에 대비한 임시 합좌회의 기관인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비변사는 이후 영구적인 합좌기관으로 발전하여 군사적 기능뿐 아니라 정치 기관의 성격도 띠게 되었다. 그리고 이 밖에도 무술을 가르치는 무학과를 설치하였으며 편조전이나 벽력포 등의 무기를 제작하여 국방력 강화에 노력하였으나, 정치적 불안으로 군사 기강이
무너져 그다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사회면에서는 조광조의 개혁 정치의 여파로 유교주의적 도덕 윤리가 더욱 정착되어갔다. 미신을 타파한다는 이유로 도교적 요소가 강한 소격서를 폐지하고, 불교의 도승제도를 철폐했으며, 도성 안의 무당들을 단속하는 한편 절을 새롭게 짓지 못하도록 했다.
이런 일련의 유교적 조치에 이어 향약을 실시하여 유교주의적 향촌 질서를 조성하기도 했다. 한때 조광조 일파가 숙청되자 이런 양상은 주춤하는 듯했지만, 그 뒤 다시 강력하게 추진되어 <소학>, <이륜행실>, <속삼강행실도> 등의 책을 간행하여 민간에 유포하고 교화하였으며,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는 안향의 영전을 모신 백운동서원을 세워 유교 정신의 고착에 더욱 주력하였다. 문화면에서는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많은 편찬 사업이 전개되었다. 1516년에는 주자도감을
설치하여 많은 동활자를 주조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각종 서책이 편찬되었다. 최세진, 신용개, 이행 등을 중심으로 <사성통해>, <속동문선>, <신동국여지승람> 등이 편찬간행 되었으며, 1536년에는 찬집청이 설치되어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서적들을 찬수 또는 번역하기도 했다.
경제면에서는 저하와 동전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도량형의 통일을 꾀하였다. 또한 의복, 음식, 혼인 등과 관련된 사치를 금지하였으며, 신임 관리자들에 대한 환영 배례를 금하는 등 민생 안정을 위한 노력을 가하였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은 정치적 혼란과 국방의 불안 탓으로 별로 효과를 올리지 못했다.
이 밖에 1530년부터 시작된 서양의 세면포 무역이 지배층의 의복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 것도 특이할 만한 사실이다. 또한 농업 관련 기술도 발달하였는데, 관천기목륜, 간의혼상을 새로 만들어 비치하고, 1534년에는 명나라에 기술자를 파견하여 이두석, 정청의조작법과 훈금술을 습득해 오도록 했다. 1536년에는 창덕궁 내에 보루각을 설치해 누각에관한 일을 보고하게 했으며, 1538년에는 천문, 지리 등에 관한 서적을 명나라에서 구입하여 이 분야에 대한 연구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각 방면의 진흥 정책들은 정치적 혼란에 영향을 받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는 곧 중종의 개혁 정치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인재활용의 미숙함과 뚜렷한 정치 철학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중종은 조광조 같은 급진 개혁파를 등용하여 단시일에 사회 개혁을 단행하고 정치 혁신을 도모하려 했으나, 이는 당시의 상황에서는 무리한 조치였다. 개혁이 급진전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왕 자신이 개혁의 방향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가지고 있어야 했는데 왕은 조광조를 뒤따라가기에 급급했고, 마침내는 조광조의 지나친 도학적 언행에 염증을 느껴 훈구파에 의한 그의 제거에 동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는 조광조 입장에서 보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꼴이 된 것으로 개혁을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 못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비록 조광조가 급진적인 성향을 보였다 하더라도 중종은 일정 수준에서 개혁의 강도를조절하고, 다른 한편으로 훈구 대신들의 입지를 마련해주는 정치적 능력을 발휘했어야 했다. 그는 자신의 부왕인 성종의 정치 형태를 모범으로 삼아 균형 정치를 통한 조선의 영화기를 희망하고 있었지만 성종만큼 뛰어난 정치력을 소유하지는 못했다.38년 2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왕위에 머물렀던 중종은 1544년 11월 14일 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그 다음날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는 계비 장경왕후를 비롯 총 10명의 부인에게서 20명의 자녀를 얻었다. 그의 능호는 정릉으로 현재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3. 중종의 가족들]
#제11대 중종의 가계도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차남으로 태어난 중종(진성대군, 1488-1544)은 원래 신수근의 딸 단경왕후 신씨와 결혼했으나, 반정이 성공하여 등극한 뒤에는 공신들의 반대로 그녀를 폐위시켜야 했다. 그 후 2명의 황후와 7명의 후궁을 두게 되었는데 그들에게서 총 9남 11녀의 자녀를 얻었다.
첫 번째 부인 단경왕후 신씨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으며
두 번째 부인 장경왕후 윤씨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제12대 인종이고 딸은 효혜공주이다.
세 번째 부인 문정왕후 윤씨와의 사이에서는 1남 4녀를 낳았으며 아들은 제13대 명종(경원대군)이며, 의혜공주, 효순공주, 경현공주, 인순공주가 있었다.
네 번째 부인 경빈 박씨와의 사이에는 1남 2녀가 있었으며 아들은 복성군, 딸은 혜순옹주, 혜정옹주이다.
다섯 번째 부인 희빈 홍씨와는 2남이 있으며 첫째는 금원군, 둘째는 봉성군이다.
여섯 번째 부인 창빈 안씨와는 2남 1녀이며 영양군, 덕흥대원군(선조 아버지), 정신옹주이다.
일곱 번째 부인 숙의 홍씨와의 사이에 해안군이 있고,
여덟 번째 부인 숙의 이씨와은 덕양군이 있다.
아홉 번째 부인 숙원 이씨와의 사이에는 2녀가 있는데 첫 째가 정순옹주, 둘 째가 효정옹주이다.
열 번째 부인 숙원 김씨와의 사이에 숙정옹주가 있다.
아래에 중종의 가족 중 세 왕후의 삶을 약술한다. 인종과 명종, 덕흥대원군 등은 각각 해당왕조에서 다루기로 한다.
단경왕후 신씨(1487-1557)
단경왕후 신씨는 익창부원군 신수근의 딸이며, 연산군의 비 신씨의 외질녀이다. 그녀는1487년에 태어나 1499년 12세의 나이로 진성대군과 가례를 올렸다. 1506년 진성대군이 왕으로 추대되자 왕비에 올랐으나, 고모가 연산군의 비이고 아버지가 연산군의 매부라는 이유로 폐위되었다. 반정 세력들은 신씨가 왕후가 될 경우 그녀가 죽은 아버지 신수근의 원수를 갚을 것을 염려하여 중종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신씨를 폐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결국 중종도 공신들의 힘에 밀려 그녀를 폐위하고 말았다.
그녀는 처음에 하성위 정현조의 집으로 쫓겨났다가 본가로 돌아갔는데, 1515년 장경왕후윤씨가 죽었을 때 한때 그녀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도 했으나 이행, 권민수 등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신씨의 폐위와 관련해서는 치마바위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공신들의 압력에 못 이겨 신씨를 폐위하긴 했지만 그녀에 대한 중종의 애정은 남달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중종은 그녀가보고 싶으면 자주 높은 누각에 올라가 그녀의 본가가 있는 쪽을 바라보곤 했다. 신씨의 집에서는 그 사실을 전해 듣고 중종의 애틋한 그리움의 정을 달래기 위해 집 뒷동산에 있는 바위 위에다 신씨가 궁중에 있을 때 즐겨 입던 분홍색 치마를 펼쳐놓았다. 왕은 바위에 펼쳐진 그 치마를 바라보며 신씨를 보고픈 마음을 삭히곤 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치마바위 전설을 남긴 신씨는 홀로 자식도 없이 외롭게 한 평생을 보내다가 1557년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영조 때 복위되어 단경왕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녀의 능호는 온릉으로 현재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에 있다.
장경왕후 윤씨(1491-1515)
장경왕후 윤씨는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로 1491년 호방현 사제에서 태어나 고모인 월산대군의 부인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1506년 중종의 후궁이 되어 숙의에 봉해지고, 1507년 중종 비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후 1515년 세자(인종)를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엿새 만에 25세를 일기로 경복궁 별전에서 죽었다. 소생으로는 인종 이외에 효혜공주가 있다. 능호는 희릉으로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문정왕후 윤씨(1501-1565)
문정왕후 윤씨는 영돈녕부사 윤지임의 딸로 1501년에 태어났다. 1517년 왕비에 책봉되었으며,1545년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동생인 윤원형에게 정권을 쥐게 하고 인종의 외척 윤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을 죽이고 윤원로를 귀양 보내기도 했다. 그 녀는 성질이 독하고 질투가 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인종 집권시에는 툭하면 인종을 찾아가 '우리 모자(그녀와 명종)를 언제 쯤 죽일 거냐'고 하면서 괴롭혔다고 한다.
일설에는 인종이 그녀가 건네준 독이 든 떡을 먹고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명종을 대신해 섭정을 펼칠 때에는 왕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었으며, 수렴청정에서 손을 뗀 뒤에도 명종의 정사 운영에 지나친 간섭을 해 조정을 뒤흔들어 놓기도 했다. 심지어는 왕이 자신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매질을 하거나 독설을 쏟아 놓기도 했다. 그녀의 이런 지나친 집권욕은 결국 명종 대의 혼란을 가중 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녀는 불교의 부흥을 꾀하기도 했는데, 1550년에 선교 양종을 부활시키고 폐지되었던 승과, 도첩제 등을 다시 실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승려 보우를 총애하여 병조판서 직에 제수하는 바람에 대신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명종은 그녀의 이런 지나친 정권욕에 불만을 품고 한때 을사사화 때 죽은 선비들을 신원하고 신진 사림 세력들을 등용시켜 외척 세력을 견제하려 했으나 번번이 그녀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듯 조선 조정을 패권 다툼의 장으로 몰아갔던 희대의 악후 문정왕후는 1565년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녀의 소생은 명종을 비롯, 의혜공주, 효순공주, 경현공주, 인순공주 등1남 4녀이며, 능은 태릉으로 현재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다.
[4. 신진 사림의 재등장과 조광조 일파의 개혁 정치]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하고 훈구파의 과대한 세력 팽창을 막기 위하여 신진 사림 세력을 다시 등용한다. 이는 성종의 균형 정치를 모방한 것으로서 사림파를 근위 세력으로 양성하여 왕의 입지를 높이고 조정의 힘을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하려는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중종이 끌어들인 사림파의 거두는 조광조였다. 조광조는 김굉필 문하에서 수학한 정통적인 도학자로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림학자들 사이에서 추앙받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조광조가 김굉필을 만난 것은 17세 때였다. 지방 관리로 나갔던 아버지를 따라 희천에 갔다가 무오사화로 인해 그곳에 유배 중이던 김굉필을 처음 대하게 되었다. 김굉필은 순천으로 이배되기 전까지 2년 동안 그에게 철저한 도학주의적 실천 사상을 가르쳤다. 조광조는 김굉필의 도학적 탁견에 매료되어 미친 사람처럼 학문에 빠져들었고, 그 결과 젊은 나이에 사림파의 영수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는 무오사화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리학을 꺼리고 있을 때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성리학에 심취한 조광조를 보고 '미친 놈'이라거나, 화를 잉태하고 있는 놈이라 해서 '화태'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성리학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욕하는 모든 친구들과의 교류도 끊은 채, 철두철미한 도학적 실천 운동에 주력했다. 의관을 단정히 한 것은 물론이고, 행동에서도 절제와 절도를 분명히 했고, 언어생활에도 규범을 두어 어기는 일이 없었다. 그는 이러한 실천 운동이 익숙해지자 드디어 세상으로 나왔다. 그래서 29세가 되던 1510년 사미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그 해에 성균관에 입학했다. 그리고 1515년 성균관 유생 200명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의 추천으로 조지서(造紙署) 사지(司紙)라는 관직에 임용되고, 그 해 가을 증광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전적, 감찰, 예조좌랑을 역임하게 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조광조는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4년 동안 중종은 조광조를 앞세워 급진적인 개혁 정치를 펼쳐나갔다. 조광조는 중종에게 성리학을 민간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철저한 도학 사상에 입각한 왕도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조광조의 의견을 수렴한 중종은 그를 정언에 앉혀 언론을 통해 훈구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조광조에 대한 중종의 신임은 단순히 신하와 임금 사이를 넘어 동지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중종은 조광조의 분명한 사리 판단과 절도 있는 행동, 그리고 눈치를 살피지 않는 직언을 좋아하여 그 자신도 도학 정치의 실현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중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조광조는 우선 훈구 세력들에 대해 포문을 열었다. 그 역시 김종직과 마찬가지로 훈구 세력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의와 타협한 모리배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훈구세력의 척결이 곧 정치 개혁의 기초가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조정은 어느새 반정 공신파와 신진 사림의 대립 양상을 띠게 되었으며, 1517년 조광조는 드디어 그 동안 형성한 세력을 기반으로 중종과 함께 본격적인 개혁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첫번째 개혁 작업은 향약의 실시였다. 향약은 성리학적 이상 사회, 즉 중국의 하, 은, 주 삼대에 걸친 이상 사회를 민간 속에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향약은 지방의 자치를 설정한 민간 규약으로 유학적 도덕관의 실천과 도학적 생활을 몸에 익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백성을 성리학적 규범으로 교화시켜 왕도 정치의 기반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개혁 작업은 현량과의 도입이었다. 조광조는 종래의 과거 제도가 본질적인 모순으로 인해 학업을 모두 시험 준비에만 한정하도록 하는 폐단을 노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개개인의 인품과 덕행을 판단할 수 없게 한다면서 이를 폐지하고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사람을 천거하는 제도를 통해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천거 제도가 바로 현량과였다.
조광조가 신광한, 이희민, 신용개, 안당 등의 찬성을 얻어 추진한 현량과는 훈구파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쳤지만 중종의 지원에 힘입어 1519년 전격 실시되었다. 현량과는 중앙에서는 성균관을 비롯한 삼사와 육조에 천거권을 주고, 지방에서는 유향소에서 천거하여 수령과 관찰사를 거쳐 예조에 전보하도록 했다. 천거 근거로는 성품, 기국, 재능, 학식, 행실과 행적, 지조, 생활 태도와 현실 대응 의식 등 일곱 가지 항목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천거된 사람은 전정에 모여 왕이 참석한 자리에서 시험을 치른 뒤에 선발되었다. 그래서 후보자 120명 가운데 현량과를 통해 급제한 사람은 28명인데, 그들의 천거사항을 종합해 보면 학식과 행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이들 28명의 연고지를 살펴보면 경상도 5명, 강원도 1명, 그외 1명 등 7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21명은 모두 기호지방 출신이었다. 그들은 조광조의 추종자들로 학맥 또는 인맥으로 연결되어 강한 연대 의식을 지닌 신진 사림파였다.향약과 현량과 실시 이외에도 조광조는 전통적인 인습과 구태의연한 제도를 혁파하고 궁중여악을 폐지했으며 내수사의 고리대금업을 중지시키기도 했다. 또한 성리학적 윤리질서와 통치 질서를 세우기 위한 주자의 <가례>와 <삼강행실>을 보급하고 이교적 이념이 담긴 기신재, 소격서 등을 없애고 <소학> 교육을 장려하여 유교 사회의 질서를 세우려고 하였다. 하지만 조광조의 이 같은 일련의 개혁 정치는 너무나 과격하고 성급하게 실시된 나머지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성리학적 왕도 정치 실현의 전초 기지이자 사림 세력의 정치적 기반이 될 것으로 예상했던 향약은 실시 초기부터 난관에 부딪치고 있었다. 당시 실시되었던 향약은 전통과 조화된 자치적인 것이 아니라 이상에 치우친 당국자들에 의해 선도되는 관 주도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조광조 자신도 지적하였듯이 향약의 실시를 관에서 철저히 규제하고 강제하였던 것은 향약의 근본 취지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이런 강제성은 오히려 민간의 반발을 사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다음 문제는 비록 향약이 유포되긴 했으나 이를 지도하고 이끌 만한 인재가 양성되지 않았다는데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방의 자치가 가속화되고 향약이 절대적인 규범으로 자리할 경우, 역으로 관리들의 통치력이 약화되어 민간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향약의 실시에 따른 이 같은 문제들은 조광조 자신의 지적처럼 너무 급작스럽게 민간에 유포하려 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조광조는 관이 주도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민간 주도의 향약을 위해 보완책을 마련하려 했으나 기묘사화의 발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향약 이외에 현량과에서도 부작용이 나타났다.
현량과 실시를 통해 등용된 인물이 한결같이 조광조를 추종하는 신진 사림파였기에 등용 기준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훈구파의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림 세력의 힘이 강화됨에 따라 조광조의 개혁 방향이 더욱 극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런 극단적인 개혁 성향은 마침내 중종의 정치 행위에까지 간섭하게 되어 왕을 철저하게 성리학적 규범에 맞춰 생활하도록 강권하게 되었다. 때문에 중종은 점차 조광조의 경직된 도학사상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압박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 압박은 마침내 중종 초기에 형성된 정국공신이 너무 많다는 비판으로 치달았다. 이는 사림파가 훈구 세력 축출을 위해 벌인 정면대결이었다. 그 때문에 조정에는 일대 파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사림 세력이이길 경우 조정은 완전히 사림파에 의해 장악될 판국이었다. 이는 중종 자신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중종은 사림, 훈구 어느 쪽도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림은 중종을 압박하며 자신들의 의지대로 밀어붙였고 결국 중종이 밀리고 말았다. 훈구 대신들의 막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의 훈작을 삭탈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훈구 세력은 더 이상 사림파의 급진적 성향을 두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중종에게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조직해 조정을 문란케 하고 있다고 탄핵했다. 마침 무서운 기세로 세력권을 팽창하고 있는 사림에게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훈신들의 탄핵을 받아들여 대대적인 사림파 숙청 작업을 감행하였다. 이것이 곧 기묘사화다. 이로써 4년 동안의 조광조의 개혁 정치는 막을 내리고 말았지만 그의 도학적 왕도 정치는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개혁 작업에 대한 평가는 후대의 명재상 이율곡의<석담일기>에 잘 드러나고 있다. 율곡은 이 책에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림파의 정치적실패의 원인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를 다스릴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 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하였다."
이처럼 후대의 학자들은 그의 사상보다는 미숙한 정치력과 극단적인 개혁성을 비판하고 있다. 이는 후세 사람들이 그의 사상은 따르되 그의 극단적인 개혁성은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광조의 개혁 정치는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의 개혁 방향만은 옳게 평가되어 명종 대를 거쳐 선조 대에는 사림이 정치 세력의 중심이 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5. 기묘사화와 사림 세력의 후퇴]
현량과를 통해 도학정치 구현의 터전을 마련한 조광조 일파는 마침내 본격적인 훈신 제거 작업에 돌입하게 된다. 이 때문에 훈구 세력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고, 마침내 1519년에 이른바 반정 공신 위훈 삭제 사건을 계기로 그 반발이 폭발하고 말았다. 조광조는 반정 공신에 올라 있는 신하들 가운데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들의 공신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광조의 이런 주장이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니었다. 반정 초기에 대사헌 이계명 등이 원종 공신이 많아 외람되므로 그 진위를 밝힐 것을 주장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이계명의 주장은 반정 공신들에 의해 묵살되고 말았다.
조광조는 훈구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우선 공신들의 세력을 위축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과거의 반정 공신 시비를 다시 꺼낸 것이다. 반정 공신의 위훈을 삭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조광조는 성희안, 유자광 등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성희안에 대해서는 반정을 하지도 않았는데 공신으로 책록 되었다고 했고, 유자광에 대해서는 척족들의 권력과 부귀를 위하여 반정하였으므로 이러한 류의 반정은 소인배들이나 꾀하는 일이라고 비난했다.
조광조의 이런 위훈 삭제 주장에 대해 중종은 반정 공신은 한번 정한 것이니 수정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조광조의 설득은 집요했다. 즉, 반정 공신들의 대다수가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위해 거사를 도모한 자들이므로 이들이 계속 공신으로 머물러 있는 한 조정은 끝없이 이익과 권력만 추구하는 소인배들에 의해 점유당할 것이고, 따라서 이런 현실을 타파하지 않으면 국가를 유지하기가 곤란하다는 주장이었다.조광조의 강력한 설득에 중종도 지쳐가고 있었다. 개혁이라는 대의명분을 앞세운 조광조의 논리를 중종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조광조는 위훈 삭제의 실천 대안을 간단하게 제시했다. 우선 반정 공신 2,3등 중 일부를3,4등으로 개정하고, 4등 50여 명은 모두 공도 없이 녹을 받아먹고 있으므로 삭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러한 실천 대안은 받아 들여져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전체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되는 76명의 훈작이 삭탈 일보 직전에 놓이게 되었다.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훈구 세력들은 강하게 반발하기 시작했고, 중종도 조광조의 급진적인개혁 정치에 염증을 내고 있던 터였다. 현실적으로 정치 원로의 자리를 굳히고 있는 공신 세력을 일거에 몰아내려고 하는 것은 자칫 조정에 엄청난 파란을 몰고 올 수 있다는 판단을 한 중종은 더 이상 조광조의 급진적인 행동을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중종의 이런 내면을 잘 읽고 있던 훈구 세력은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한 계략을 짜고 실행하였다. 조광조를 몰아내는 데 앞장선 사람은 사림파로부터 소인배로 비난받던 남곤과 공신자격을 박탈 당한 심정, 그리고 한때 조광조의 탄핵을 받아 실권 할 지경에 처했던 희빈 홍씨의 아버지 홍경주 등이었다. 이들은 경빈 박씨 등 후궁을 이용해 중종에게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고하면서 조광조가 왕권을 넘보고 있음을 피력했다. 그리고 궁중에 있는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 이라고 쓰고 벌레가 그것을 갉아먹게 한 다음 궁녀를 시켜 왕에게 바치도록 하였다. 주초는 조를 분리한 글자이므로 '조씨(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는 뜻이었다.
이는 비록 미신에 불과했지만 조광조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몹시 불쾌해 했다.한편 홍경주와 남곤, 김전, 이장곤, 고형산, 심정 등은 밤에 은밀히 왕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붕당을 조성하여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여 국정을 어지럽히고 있기에 이를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상소를 했다. 이들의 상소가 있자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한 일단의 사림 세력을 치죄하도록 했다. 그 결과 조광조, 김정, 김구, 김식, 윤자임, 박세희, 박훈 등이 투옥되었다. 이들이 투옥되자 남곤, 홍경주 등의 훈구 세력들은 그들을 당장에 처벌해야 한다고 했으나 이장곤, 안당, 정광필 등이 반대하였고, 성균관 유생 1천여 명은 광화문에 모여 조광조 등의 무죄를 호소하였다.
치죄 결과 조광조는 능주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훈구파인 김전, 남곤, 이유청 등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에 임명되자 곧 사사되었다. 김정, 기준, 한충, 김식 등도 귀양 갔다가 사형되거나 자결했으며, 그밖에 김구, 박세희, 박훈, 홍언필, 이자, 유인숙 등 수십 명이 귀양길에 올랐다. 아울러 이들을 두둔한 안당과 심안국, 김정국 형제 등은 파직되었다. 이 사화가 일어난 해가 기묘년이었으므로 이를 기묘사화라 하고, 이때 희생된 조신들을 기묘명현이라고 한다. 이 사화는 1515년 폐비 신씨 복위 문제와 관련해 일어난 조신들 간의 알력이 발생한 이후, 조광조 일파가 도의론을 앞세워 사장파를 소인배로 취급하여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자 감정 대립이 심해졌고 여기에다 삭훈 사건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사건이다. 그러나 기묘사화는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 정치에 위기를 느낀 훈구 세력이 지나친 도학적 요구에 염증을 느낀 중종과 모의하고 벌인 일종의 친위 쿠데타적 성격이 짙다.
대개 조광조의 왕도 정치 실패의 원인을 정치 이념의 진보성과 실현 방법의 과격성에서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원인은 당시의 정치 체제가 왕도 정치를 실현할 만큼 성숙되지 못한 것에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것은 중종이 분명한 왕도 정치 이념에 입각한 성숙된 판단을 하지 못하고 기묘사화와 같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과, 조광조의 개혁정치가 실패로 돌아간 뒤에 오히려 성리학이 학문적으로 더 발전했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숲 속의 대학자 서경덕(1489-1546)
서경덕은 지방의 하층 관리직인 수의부위로 있던 서호번의 아들이며, 자는 가구, 호는 화담이다. 그의 어머니가 공자의 사당에 들어가는 태몽을 꾸고 그를 낳았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며, 19세 때 선교랑 이계종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고, 평생을 은둔생활을 하며 학문을 즐기다가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별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는 영특하였으나 가계가 빈곤하여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다가 14세가 되어서야 비로서 처음으로 유학 경전인 <상서>를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대단히 사색적이었던 모양이다. 그가(상서)를 공부할 때 서당의 훈장은'선생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홀로 깊이 생각하여 15일 만에 알아내고 말았으니 너는 <상서>를 사색으로 깨우친 것이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였다. 또 어느 날 어머니가 밭에 나가 푸성귀를 좀 뜯어오라고 하자, 그는 광주리의 반도 차지 않을 정도의 푸성귀만 가지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푸성귀를 제대로 뜯지 못한 연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새가 땅에서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하루 종일 그 이유만 생각하다가 그만 푸성귀 뜯는 일을 잊어버렸습니다.‘
<화담집> 서문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그의 엉뚱한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향후 그가 전개해나가는 독특한 학문 수행 방법의 모태를 확인할 수 있다.이 같은 그의 학문 수행 방법은 <연보>에 전해지고 있는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선생이 18세가 되었을 때 (대학)의 '격물치지'장을 읽다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눈물을 흘리면서 중얼거렸다. '학문을 하는데 먼저 격물을 하지 않는다면 책은 읽어서 어디에 써먹겠는가.' 그 뒤부터는 세상의 모든 사물들 이름을 다 쓰더니 풀을 발라 벽에 붙여놓고 날마다 그것을 하나하나 규명해내는 것을 일로 삼았다."
이 기록은 그가 얼마나 실험적이고 과학적인 인간인가를 잘 드러내고 있으며, 또한 평생을 두고 일구었던 유물론적 주기철학의 방법론이 무엇이었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그는 이 같은 학습 방법과 지나친 독서와 사색 탓으로 과로에 지쳐 다시는 책을 손에 잡을 수 없을 만큼 몸을 상했고, 이 때문에 21세 때에는 어쩔 수 없이 학업을 포기하고 1년여 동안 전국의 명산을 돌아다니며 건강을 회복하는 데 주력해야만 했다.
이후 그는 31세 때 조광조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에 응시하도록 수석으로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개성 화담에 서재를 세우고 학문 연구와 교육에만 매달렸다. 1531년 어머니의 간청으로43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며, 1544년(인종 즉위년) 김안국 등이 후릉 참봉에 추천하였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렀다. 그가 이처럼 은거생활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은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중엽은 사회가 심한 혼란기에 있었고, 정치적으로 사림과 훈척 세력의 대립이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관료와 지주 계급은 토지 겸병과 사치 행각을 일삼았고, 이로 인해 농민들은 계속해서 토지를 상실해갔다. 또한 통치 계급 내부에서도 토지와 정권을 위한 대대적인 유혈 투쟁이 전개되어 사림들이 대거 숙청되는 4대 사화가 일어난 것도 바로 서경덕이 살았던 이 50년 동안이었다.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불안은 결코 그를 불행으로 몰고 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사회에 나가지 않고 은둔을 고집한 덕분에 많은 학문적 업적을 쌓을 수 있었고, 학문 수행의 결과물인<화담집> 같은 저작들은 조선 성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만년에는 천하의 명기이자 시인인 황진이와 함께 자연을 향유하면서도 선비로서의 인격을 잃지 않는 고고한 학자로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와 황진이, 박연폭포를 일러 송도삼절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는 조선의 많은 성리학자들 중에 스승이 없는 특이한 인물로, 겨우 서당에서 한문을 깨우치는 정도의 교육밖에 받지 못했다. 그의 스승은 자연과 책뿐이었다. 그 때문에 서경덕은 아주 독특하고 진귀한 학문적 업적을 일궈낼 수 있었다.그의 학문적 요체는 물질에 대한 끊임없는 사색에 있었다. 그는 물질의 힘이 영원하다고 믿었으며, 물질의 분리는 단순이 형체의 분리이지 힘의 분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곧 서구 물리학에서 말하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비교되고 있다. 그는 심지어는 죽음조차도 생물에 일시적으로 머물러 있던 기(에너지)가 우주의 기에 환원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생사일여를 주장함으로써 우주와 인간, 우주와 만물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이론을 정립시켰던 것이다. 그의 이 같은 독특한 학문과 사상은 이황과 이이 같은 학자들에 의해 그 독창성을 인정받아 조선 기철학의 중심으로 자리하게 된다.
그는 1546년(명종 1년) 58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 후 1575년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1585년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개성의 숭양서원, 화곡서원 등지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화담집>이 있는데, 이 책에서 '원이기', '이기설', '태허설', '귀신사생론' 등의 글을 통해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밝히고 있다.
시대를 앞선 여성 시인 황진이
황진이에 대한 확실한 생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서경덕, 벽계수 등과 교류한 것으로 봐서 중종 때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본명은 진, 기명은 명월이며 개성 출신이다. 그녀의 전기에 대해서 상고할 수 있는 직접적인 사료는 없기에 간접 사료인 야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야사에 전해지고 있는 그녀에 대한 기록은 분량은 많지만 각양각색으로 다른 이야기라 내용의 신빙성이 적은 것이 흠이다.
신비화시킨 흔적이 많고 전해 내려오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보태진 경우도 있어 그 허실을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 기록들에 따르면 그녀는 황진사라는 양반과 진씨 성을 가진 현금이라는 여인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말도 있고, 맹인의 딸로 태어났다는 말도 있다. 이 두 내용 중 황진사의 서녀로 다룬 기록이 숫자적으로 더 우세하지만 그녀가 기녀로 살았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맹인의 딸로 태어났다는 설이 더 유력시되고 있다. 그녀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지만 양반집 딸 못지않게 학문을 익히고 예의범절을 배운 것으로 봐서는 물질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여덟 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열 살 때 벌써 한문 고전을 읽어내고 한시를 지을 정도로 재능을 보였으며, 서화에도 능하고 가야금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이렇듯 아름답고 뛰어난 규수로 자란 그녀가 기생이 된 이유를 야사는 동네 총각 하나가 그녀를 연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은 사건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인물이 출중하기로 소문난 황진이를 연모하던 순진한 한 젊은이가 그녀에게 속마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혼자서 속앓이만 하다가 그만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를 지켜보다 못한 젊은이의 어머니가 황진이의 어머니 진씨를 찾아와 자신의 아들을 사위로 맞아 달라고 간청을 하지만 진씨는 이 애원을 냉정하게 거절하고 딸에게는 일체 말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젊은이는 마침내 상사병으로 죽고 말았다. 나중에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된 황진이는 스스로 기생이 될 것을 결심하고 기생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기계에 투신한 지 오래지 않아 명성을 얻게 되어 서울에까지 그녀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게 되었다.
용모가 출중하고 노래, 춤, 악기, 한시 등에 두루 능했기 때문에 당시 선비들은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을 대단한 자랑거리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와 당대의 내노라 하는 선비들에 대한 많은 일화들이 남게 되었다.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10년 동안의 면벽 수도에서 파계시키는가 하면, 호기로 이름을 떨치던 벽계수라는 왕족의 콧대를 꺾어놓기도 하고, 당대 최고의 은둔학자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서경덕을 유혹하는 데 실패하고 오히려 그의 학문과 고고한 인품에 매료되어 사제 관계를 맺기도 한다.
그녀는 많은 선비들과 이 같은 관계를 즐기면서 전국을 유람하기도 했고, 그 가운데 수많은 시들을 남기기도 했다. <해동가요>와 <청구영언>에 '청산리 벽계수야', '동짓달 기나긴 밤을'등 주옥같은 시편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마흔 전후에 죽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죽기 전에 자기가 죽거든 관을 짜지 말고 개미, 까마귀, 솔개의 먹이가 되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말은 세상의 여자들에게 교훈이 되게끔 하기 위해 한 말이라고 하지만황진이의 자유스런 삶을 생각해보면 그것이 오히려 그녀 자신의 시적 근성을 잘 표현한 것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죽은 후에 개성 근처의 장단에 묻어주었다. 지금도 장단 판교리에는 황진이의 무덤이 있으며, 그녀가 살던 입우물 고개에는 약수가 나오고 있다.
[7. (중종실록) 편찬 경위]
<중종실록>은 총 105권 10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506년 9월부터 1544년 11월까지 중종재위 38년 2개월 동안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원래 명칭은<중종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실록>이다.이 책의 편찬 작업은 1545년 2월 대간의 건의에 따라 실록청을 설치하고 당상과 낭관을 결정하여 착수하려 했지만 순조로운 진행을 보지 못하고, 같은 해 7월 인종이 재위 9개월 만에 죽음에 따라 중단되었다. 명종이 즉위한 후 1546년 가을에야 비로소 춘추관에 실록청을 설치하고 <인종실록>과 함께 편찬에 착수하게 되었는데 이때에도 기묘사화와 관련하여 총재관이 자신의 해임을 신청하는 바람에 어려움에 봉착했다.
실록편찬 총재관으로 임명된 우의정 정순붕이 이듬해 2월 사직할 뜻을 밝혔는데, 그 이유는 기묘사화 이후의 사실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고 시비가 그치지 않아 편찬관들 사이에 의견 대립이 심하게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시심연원이 총재관으로 임명되었지만 그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이기로 바뀌어야 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어렵사리 편찬 작업을 진척시킨 끝에 1550년 10월에 완성을 보았고, 이듬해 3월 <인종실록>과 함께 최종 마무리 작업을 끝낸 뒤 사초의 세초와 실록 봉안이 이루어졌다.편찬 작업에 참여한 사람은 감춘추관사 총재관을 맡았던 정순붕, 심연원, 이기 등이었고, 지춘추관사는 윤개 등 12인, 동지춘추관사는 박수량 등 25인, 편수관은 심통원 등 45인, 기주잠은 유관 등 17인, 기관사는 정순우 등 37인이었으며, 총 134인이 편찬 작업에 참여했다.그 러나 <중종실록>은 완성 이후에도 사실의 공정성을 의심받았기 때문에 <연려실기술>에서는 기묘사화에 대한 기록이 당시의 실상과 많은 차이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냐하면 기묘사화 때 사관들이 비밀 정사에 전혀 입시하지 못하여 훈구 세력들에 의해 사실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중종 이후의 일반적인 견해였기 때문이다.
#중종 시대의 세계 약사
중종 시대의 유럽은 1517년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로마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며 95개조 항조문을 발표하면서 종교혁명이 본격화되었고, 이 때문에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은 종교전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영향을 적게 받은 스페인, 포르투칼 등은 남아메리카, 인도, 인도네시아 등을 침략하여 제국주의 시대를 열고 있었다. 이 시기에 폴란드의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1543년)을 주장했으며, 마젤란은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고, 스페인의 로욜라는 예수회를 창립해 반종교개혁을 일으킨다. 한편 영국의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를 발표하고, 네델란드의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을 편찬했다.
조선왕조 제11대 중종
연산군 폐출거사의 불씨
거사 계획을 가장 먼저 준비하던 사람은 성희안이었다. 성희안은 성종의 총애를 받던 인물로 학식이 깊고 치밀하 며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종사관, 형조참판 등을 거쳐 1504년에는 이조참판직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연산군이 망원정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을 때, 그의 방탕한 국정 운영을 비판하는 시를 지어 올렸다가 종9품 부사 용이라는 미관말직으로 좌천된 상태였다. 성희안이 가장 먼저 접근한 사람은 박원종이었다. 박원종은 한때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동부승지, 좌부승지를 거 치면서 주로 국가의 재정 문제를 맡았던 인물이었다. 때문에 연산군의 사치 행각을 비판하는 간언을 하기도 했는 데, 이 과정에서 연산군의 미움을 사서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좌천되기도 했다. 하지만 곧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윤 을 역임하고 1506년에는 경기도 관찰사로 있다가 다시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삭직되었다. 박원종이 연산군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은 그의 누이 박씨부인 사건 때문이었다. 박원종의 누이는 성종의 형인 월 산대군의 후실이었는데 인물이 절색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평소 그녀에 대해 흑심을 품고 있던 연산군은 마침내 큰어머니인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여 겁간하였는데, 이 때문에 박씨부인은 자결하고 말았다. 이 후로 박원종의 연 산군에 대한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결국 삭직 되었던 것이다. 성희안은 박원종의 원한과 불만을 이용하여 군사력을 얻고자 했다. 그는 거사를 도모할 지략은 있었지만 군사력 을 동원할 힘이 없었다. 하지만 박원종은 원래 무신 출신이었으므로 병력을 동원할 연줄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이들은 거사에 참여할 인물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당시 인망이 높았던 이조판서 유순정을 끌어들였으 며, 연산군의 신임을 받고 있던 신윤무와 무장 출신 장정, 박문영 등의 호응을 얻어냈다. 거사일은 1506년 9월 연 산군이 장단의 석벽으로 유람을 계획한 날로 잡았다. 하지만 연산군의 석벽 나들이는 갑작스럽게 취소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거사 계획은 일시 유보하기로 되어있었는데, 그 때 호남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유빈, 이과 등이 거 사를 알리는 격문을 보내오자 박원종, 성희안 등은 혹 선수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군사를 모아 예정일에 거사를 결행했다.
거사 성공
거사에 돌입한 반란군들은 먼저 진성대군에게 거사 사실을 통보하고, 신수근, 신수영 형제와 임사홍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반란군들은 사전에 대궐로 진입하여 내응하기로 약조되어 있던 신윤무 등의 도움을 얻어 쉽게 궐내를 장악하였다. 거사에 성공하자 성희안 등은 성종의 계비이자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정현왕후 윤씨를 찾아가 연산군을 폐하고 진 성대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하라는 교지를 내려줄 것을 간언한다. 정현왕후는 처음에는 이들의 청을 거절하 다가 결국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 교동에 안치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튿날 진성대군이 근정전 에서 즉위식을 거행함으로써 거사는 완결되었다.
개혁정치의 종말
중종은 공신 세력을 견제할 방도를 모색하던 끝에 1515년 급기야 조광조를 정치 일선으로 끌어들인다. 엄격한 도 학 사상가인 조광조를 앞세운 중종은 그 때부터 도학적 사상에 근거한 철인 군주 정치를 표방하며 조정을 장악하 고 있던 공신 세력을 견제하는 동시에 철저한 유교 정치를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조광조의 주장에 따라 중종은 민간에 유교적 도덕관을 심기 위해 여씨향약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여씨향약' 은 원래 송나라 학자 여대충의 저작이었는데 후에 주희가 첨삭하고 주석한 '주자증손 여씨향약'이 널리 유포되었 다. 이는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한 일종의 민간 자치 규율이었다. 또한 과거제가 인재를 등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면서 사림들의 천거에 의해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천거 등용제인 현량과가 실시되어 신진 사류 28명이 요직에 배치되었다.
조광조의 이같은 정책은 이른바 사림파를 중심으로 한 지치주의적 이상 정치를 행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조광조 일파의 개혁 정책은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해서 훈구 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더 군다나 조광조 일파가 도학적 정치 이념을 내세워 임금에게까지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자 중종 역시 조광조의 급진적 경향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중종의 이런 심중을 헤아린 훈구파의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은 1519년의 반정 공신 위훈 삭제사건을 계기로 조 광조 일파를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여 국정을 어지럽히니 죄를 밝혀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계를 올렸다. 조광조 일파의 지나친 도학적 언행에 염증을 느끼고 있 던 중종은 이들 훈신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조광조, 김정, 김식 등 신진 사림 세력을 숙청하였는데, 이를 기묘사화라 한다. 이로써 조광조를 통한 4년 동안의 중종의 개혁 정치는 종말을 고하였다.
여러가지 사건들
1521년 기묘사화의 여파로 심정, 남곤의 일파인 송사련의 신사무옥이 일어나 안처겸 등의 사림파가 다시 숙청되었다. 1524년에 는 심정, 남곤 등에게 쫓겨났다가 기묘사화 이후에 정계에 다시 복귀하였던 권신 김안로가 파직되고, 이듬해 3월 에는 윤세창 등의 모역 사건이 일어나는가 하면, 1527년에는 김안로의 아들 김희가 심정, 유자광을 제거하고자 일으킨 동궁의 작서의 변이 일어나 관련도 없는 경빈 박씨와 복성군이 쫓겨나 죽었다. 이렇듯 정국의 혼란이 가속화되던 중에도 1531년에는 그동안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김안로가 다시 집권하게 되자 정계는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으로 변했다. 이에 중종의 외척 윤원로 형제가 등장하여 김안로와 대립하 게 되자 정계는 훈신과 척신 사이의 정권 쟁탈전으로 이어졌다.
국방정책▷ 삼포왜란이 일어나 경상도 해안 일대가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 난으로 조선과 일본의 통교가 중단되었으나, 일본의 아시카기 막부의 간청에 의하여 1512년 임신조약을 체결하였다. 임신조약 후 조선 은 종래 쓰시마에서 보내던 무역선인 세견선과 그에 대한 응답으로 조선 조정에서 보내던 세사미두를 반감하는 동시에, 상주하던 왜인들의 삼포 거주를 엄금하고 제포 하나만을 개항하는 등 왜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왜인들의 변란은 자주 일어났다. 1522년 5월에는 추자도 왜변, 동래염 장 왜변 등이 있었고, 1529년에는 전라도 왜변, 1544년에는 사량진 왜변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 사량진 왜변으로 조선은 왜인들의 내왕을 완전히 금지시켰다.
북방상황▷ 1512년 북방의 야인들은 갑산, 창성 등지를 침입하여 인마를 살상 했는데, 이를 계기로 조정에서는 4군 지대에 거주하는 야인들의 퇴거를 권유하고, 6진 지대에 순변사를 파견하는 동시에 의주산성을 수축하여 북방 방어벽을 형성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야인들의 4군, 6진 지역에 대한 노략질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만포첨사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사회면▷ 조광조의 개혁 정치의 여파로 유교주의적 도덕 윤리가 더욱 정착되어갔다. 미신을 타파한다는 이 유로 도교적 요소가 강한 소격서를 폐지하고, 불교의 도승제도를 철폐했으며, 도성 안의 무당들을 단속하는 한편절을 새롭게 짓지 못하도록 했다. 이런 일련의 유교적 조치에 이어 향약을 실시하여 유교주의적 향촌 질서를 조성하기도 했다. 한 때 조광조 일파 가 숙청되자 이런 양상은 주춤하는 듯 했지만, 그 뒤 다시 강력하게 추진되어 '소학', '이륜행실', '속삼강행실 도' 등의 책을 간행하여 민간에 유포하고 교화하였으며,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는 안향의 영전을 모신 백운동서원 을 세워 유교 정신의 고착에 더욱 주력하였다.
문화면▷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많은 편찬 사업이 전개되었다. 1516년에는 주자도감을 설치하여 많은 동 활자를 주조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각종 서책이 편찬되었다. 최세진, 신용개, 이행 등을 중심으로 '사성통해', '속동문선', '신동국여지승람' 등이 편찬 간행되었으며, 1536년에는 찬집청이 설치되어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서 적들을 찬수 또는 번역하기도 했다.
경제면▷ 저화와 동전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도량형의 통일을 꾀하였다. 또한 의복, 음식, 혼인 등과 관련 된 사치를 금지하였으며, 신임 관리자들에 대한 환영 배례를 금하는 등 민생 안정을 위한 노력을 가하였다. 하지 만 이런 노력들은 정치적 혼란과 국방의 불안 탓으로 별로 효과를 올리지 못했다.
이 밖에 1530년부터 시작된 서양의 세면포 무역이 지배층의 의복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 것도 특이할 만 한 사실이다. 또한 농업 관련 기술도 발달하였는데, 관천기목륜, 간의혼상을 새로 만들어 비치하고, 1534년에는 명나라에 기술자를 파견하여 이두석, 정청의 조작법과 훈금술을 습득해 오도록 했다. 1536년에는 창덕궁 내에 보 루각을 설치해 누각에 관한 일을 보고하게 했으며, 1538년에는 천문, 지리 등에 관한 서적을 명나라에서 구입하 여 이 분야에 대한 연구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각 방면의 진흥 정책들은 정치적 혼란에 영향을 받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는 곧 중종의 개혁 정치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인재 활용의 미숙함과 뚜렷한 정치 철학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조광조일파의 개혁작업
향약의 실시▷ 향약은 성리학적 이상 사회, 즉 중국의 하, 은, 주 삼대에 걸친 이상 사회 를 민간 속에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향약은 지방의 자치를 설정한 민간 규약으로 유학적 도덕관의 실 천과 도학적 생활을 몸에 익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백성을 성리학적 규범으로 교화시켜 왕 도 정치의 기반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현량과의 도입▷ 조광조는 종래의 과거 제도가 본질적인 모순으로 인해 학업을 모두 시 험 준비에만 한정하도록 하는 폐단을 노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개개인의 인품과 덕행을 판단할 수 없게 한다면서 이를 폐지하고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사람을 천거하는 제도를 통해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천거 제 도가 바로 현량과였다. 조광조가 신광한, 이희민, 신용개, 안당 등의 찬성을 얻어 추진한 현량과는 훈구파의 엄청 난 반대에 부딪쳤지만 중종의 지원에 힘입어 1519년 전격 실시되었다. 현량과는 중앙에서는 성균관을 비롯한 삼사 와 육조에 천거권을 주고, 지방에서는 유향소에서 천거하여 수령과 관찰사를 거쳐 예조에 전보하도록 했다. 천거 근거로는 성품, 기국, 재능, 학식, 행실과 행적, 지조, 생활 태도와 현실 대응 의식 등 일곱가지 항목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천거된 사람은 전정에 모여 왕이 참석한 자리에서 시험을 치른 뒤에 선발되었다. 그래서 후보자 120명 가운데 현량과를 통해 급제한 사람은 28명인데, 그들의 천거 사항을 종합해 보면 학식과 행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이들 28명의 연고지를 살펴보면 경상도 5명, 강원도 1명, 그 외 1명 등 7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21명은 모두 기호지방 출신이었다. 그들은 조광조의 추종자들로 학맥 또는 인맥으로 연결되어 강한 연대 의식을 지닌 신진 사림파였다.
이밖에도, 전통적인 인습과 구태의연한 제도를 혁파하고 궁중 여악을 폐지했으며 내 수사의 고리대금업을 중지시키기도 했다. 또한 성리학적 윤리 질서와 통치 질서를 세우기 위한 주자의 '가례'와 ' 삼강행실'을 보급하고 이교적 이념이 담긴 기신재, 소격서 등을 없애고 '소학' 교육을 장려하여 유교 사회의 질서를 세우려고 하였다. 하지만 조광조의 이같은 일련의 개혁 정치는 너무나 과격하고 성급하게 실시된 나머지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개혁의 실패와 후대의 평가
그의 개혁 작업에 대한 평가는 후대의 명재상 이율곡의 '석담일기'에 잘 드러나고 있다. 율곡은 이 책에 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림파의 정치적 실패의 원인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를 다스릴 재주를 타고 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 일선 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하였다." 이처럼 후대의 학자들은 그의 사상보다는 미숙한 정치력과 극단적인 개혁성을 비판하고 있다. 이는 후세 사람들 이 그의 사상은 따르되 그의 극단적인 개혁성은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광조의 개혁 정치는 비록 실패 로 돌아갔지만 그의 개혁 방향만은 옳게 평가되어 명종 대를 거쳐 선조 대에는 사림이 정치 세력의 중심이 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단경왕후 신씨
단경왕후 신씨는 익창부원군 신수근의 딸이며, 연산군의 비 신씨의 외질녀이다. 그녀는 1487년에 태어나 1499년 12세의 나이로 진성대군과 가례를 올렸다. 1506년 진성대군이 왕으로 추대되자 왕비에 올랐으나, 고모가 연산군의 비이고 아버지가 연산군의 매부라는 이유로 폐위되었다. 반정 세력들은 신씨가 왕후가 될 경우 그녀가 죽은 아버지 신수근의 원수를 갚을 것을 염려하여 중종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신씨를 폐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결국 중종도 공신들의 힘에 밀려 그녀를 폐위하고 말았다. 그녀는 처음에 하성위 정현조의 집으로 쫓겨났다가 본가로 돌아갔는데, 1515년 장경왕후 윤씨가 죽었을 때 한 때 그녀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도 했으나, 이행, 권민수 등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신씨의 폐위와 관련해서는 치마바위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공신들의 압력에 못이겨 신씨를 폐위하긴 했지만 그녀에 대한 중종의 애정은 남달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중종은 그녀가 보고 싶으면 자주 높은 누각에 올라가 그녀 의 본가가 있는 쪽을 바라보곤 했다. 신씨의 집에서는 그 사실을 전해듣고 중종의 애틋한 그리움의 정을 달래기 위해 집 뒷동산에 있는 바위 위에다 신씨가 궁중에 있을 때 즐겨 입던 분홍색 치마를 펼쳐 놓았다. 왕은 바위에 펼쳐진 그 치마를 바라보며 신씨를 보고픈 마음을 삭히곤 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치마바위 전설을 남긴 신씨는 홀로 자식도 없이 외롭게 한 평생을 보내다가 1557년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영조 때 복위되어 단경왕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녀의 능호는 온릉으로 현재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에 있다.
장경왕후 윤씨
장경왕후 윤씨는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로 1491년 호방현 사제에서 태어나 고모인 원산대군의 부인에 의하여 양육 되었다. 1506년 중종의 후궁이 되어 숙의에 봉해지고 1507년 중종 비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후 1515년 세자(인종)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엿새 만에 25세를 일기로 경복궁 별전에서 죽었다. 소생으로는 인 종 이외에 효혜공주가 있다. 능호는 희릉으로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문정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는 영돈녕부사 윤지임의 딸로 1501년에 태어났다. 1517년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545년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동생인 윤원형에게 정권을 쥐게 하고 인종의 외척 윤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을 죽이고 윤원로를 귀양보내기도 했다. 그녀는 성질이 독하고 질투가 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인종 집권 시에는 툭하면 인종을 찾아가 '우리 모자(그녀와 명종)을 언제쯤 죽일거냐'고 하면서 괴롭혔다고 한다. 일설에는 인종이 그녀가 건네준 독이 든 떡을 먹고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명종을 대신해 섭정을 펼칠 때에는 왕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었으며, 수렴청정에서 손을 뗀 뒤에도 명종의 정사 운영에 지나친 간섭을 해 조정을 뒤흔들어 놓기도 했다. 심지어는 왕이 자신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매질을 하거나 독설을 쏟아놓기도 했다.
그녀의 이런 지나친 집권욕은 결국 명종 대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녀는 불교의 부흥을 꾀하기도 했는데, 1550년에 선교 양종을 부활시키고 폐지되었던 승과, 도첩제 등을 다시 실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승려 보우를 총애하여 병조판서직에 제수하는 바람에 대신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명종은 그녀의 이런 지나친 정권욕에 불만을 품고 한 때 을사사화 때 죽은 선비들을 신원하고 신진 사림 세력들 을 등용시켜 외척 세력을 견제하려 했으나 번번이 그녀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듯 조선 조정을 패권 다툼의 장으로 몰아갔던 희대의 악후 문정왕후는 1565년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녀의 소생은 명종을 비롯, 의혜공주, 효순공주, 경현공주, 인순공주 등 1남 4녀이며, 능은 태릉으로 현재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