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시에티카 신인상 당선작] 성백술 이영림
돌 외 2편 / 성백술
하루 종일 장맛비 퍼붓는 날.
베트남 처녀와 결혼한
양강재활용센터 고물장수 건욱이의
딸 돌잔치.
조촐한 저녁식사인 줄 알았는데
입구부터 차들이 즐비하다
들어오는 손님 나가는 손님들로
그야말로 봄날,
요즘 시세에 환갑, 칠순잔치
그냥 가족끼리 지낸다는데
어렵사리 마흔도 넘어
베트남까지 가서 데려온 어린 신부
귀여운 아기까지 쏙 낳아 길러주니
돌찬지가 결혼식보다 성대하다.
술 한잔 걸치고 바깥으로 나와
담배 한 대 피우는데
얼큰하게 취한 베트남맨 건욱이 왈
“형도 얼른 베트남 갔다 오시오.
요즘 차 한 대 값만 해도 천만 원이 넘는데
사람을 차에다 비기겠어요?
전 요즘 행복하다니께요. 정말로.”
장맛비는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데
전조등 앞으로 끊임없이 달려드는 빗방울
오늘도 술 취해 음주운전으로
밤길을 달려 산막리로 간다.
취업시장
허우대 육신 멍쩡한 놈이
하는 일 없이 방바닥 신세도 하루 이틀이지
먹고 뒹구는 일만큼이나 힘 드는 일도 없었다.
꽃피는 봄날 물오르는 계절의
그 무력한 세월
비빌 언덕 하나 없이 넓디넓은 바다 어디에도
실업자를 반겨주는 직장은 없었다.
무소속의 자유와 무노동의 편함이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되는
생계보장대책 없는 실업자 산업예비군
벌건 대낮에 뜬 거지 백수건달이 되어
거꾸로 도는 세상을 바라보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잉여인간인 나는
저임금 이윤착취의 볼모일 뿐이었다.
행여 노가다판 막일꾼이나
섣불리 담장 높은 공장에라도 취직하려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아래위를 훑어보며
전력을 캐고 저울질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기약도 없이 취업을 기다려야 하는
비 오는 날의 신세는 더욱 고달팠다.
때론 소주병을 까서 병나발을 불다가
신문이 다 닳도록 헤집어 읽어보기도 하지만
수없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들고
발가벗겨진 노예처럼 취업시장에 서면
나의 인생은 싸구려 상품이었다.
폐품이 되어 더 이상 못쓰게 될 때까지
가진 자들의 배부른 욕망을 채워주고
집 한 칸 마련하는 소박한 꿈속에서
평생을 저당 잡혀 살아가야 하는 나는
아아, 무산계급의 고등실업자였다.
산불감시원
어쩌다 나는 세상을 떠돌다
이 산골 구석에 들어와 살고 있는지
세상의 부귀영화 모든 영광이
서울에 있다는데 나는 어쩌자고
공공근로 비정규직 산불감시원이 되었는가.
세상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면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다던 친구의 말
아직도 귓가에 빙빙 맴도는데
가슴은 산막리 골짜기 물처럼 차갑기만 하다.
산불은 크게 시작되지 않는다.
작은 담배꽁초, 똥 묻은 휴지 조각, 라면봉지
논두렁 밭두렁 태우던 불씨 하나로
산기슭에 옮겨 붙으면 사나운 들짐승이 된다.
불길은 삽시간에 마른 낙엽을 태우고
불어오는 골바람을 타고 무서운 기세로
계곡과 능선을 건너뛴다.
상황 발생, 상황 발생…… 화염이 치솟고
산불감시원의 무전이 고막을 때리면
각 읍면사무소 군청 비상이 걸리고
소방차를 비롯한 온갖 차량들이
산기슭을 향해 파도처럼 밀려들 때
산불진화대원들 물통을 지고 산을 기어오르고
타타타타 소방 헬기가 불길을 향해 날아오른다.
모든 것이 검게 타버린 세월
시커멓게 죽어버린 나무들의 상처
고사목은 십자가처럼 서 있고
습기를 잃어 메마른 이파리들이 사그락거리지만
봄이면 까만 땅속 꼼지락꼼지락
다시 뿌리를 내리는 나무들
새싹을 내미는 작은 풀꽃들
다시 시작되는 생은 얼마나 황홀한 것인가.
기약 없는 공공근로 비정규직 산불감시원
산 안개 자욱한 세상 가쁜 숨 헐떡이며
홀로 걷다 보면 떠나온 서울 길
타오르는 불길처럼 내내 어른거리는데
봉선화 57호, 57호, 여기 봉선화본부
감시원을 호출하는 무전기의 신호음 어지럽게 발길 재촉한다.
|당선소감|고통 속에 피는 꽃
나이 오십이 넘어, 지천명의 시기에 당선소감이란 걸 쓴다는 게 너무도 부끄럽다. 나이 스물 이전부터 글을 써 왔지만 나는 당선이라든가, 등단이라든가 하는 것들에 별 관심이 없었다. 한 시절 시인이 되고 싶었던 간절한 시기가 있었지만 세상은 어수선했고, 시보다는 늘 현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지독한 가난과 절망의 세월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이었고 그날그날 살아가기도 바쁜 밥버러지 같은 존재였다. 내가 시인이 되고 싶었을 때 나는 나의 첫사랑에게 마흔 살까지만 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니 지금의 나는 덤으로 사는 인생, 좋게 말하면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셈이다. 그동안 써온 시들을 읽어보면 낯 뜨겁고 부끄럽기 짝이 없다. 오래된 시들은 무슨 고리짝시대에 썼던 것들이라 시의성을 상실한 것들 투성이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더욱 열심히 쓰라는 채찍으로 알고 더더욱 분발해야겠다. 시를 쓰는데 늘상 내 팬이 되어주시던 형과 형수님, 나이 마흔이 넘은 동네 청년들과 이 기쁨을 함께해야겠다. 그리고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선후배 동문들에게도 민망함을 대신해 이 기쁜 소식을 알려야겠다. 새해 복을 많이 받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 여든이 훨씬 넘어서도 며느리 복이 없는 어머니 아버지께도 자랑 좀 해야겠다.
성백술 충북 영동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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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의 방 외 2편 이영림
한쪽이 비어야 한다
지그시 눌러보는 공간과 공간 사이
뜨거운 것들은 위로 오르려는 습성이 있어
불꽃은 활활 타오르며 날개를 가진다
비로소 새가 되는 것이다
희뿌연 연기와 회 덧칠에 갇힌 겨울은
몸을 뒤척여 온도를 만지기 시작했다
화덕은 공손하게 입안을 드러낸다
사각의 프레임이 벽에 걸려있다
테두리부터 고요해지는 건 사각입니다
비상하려면 뜨거움이 필요하지요, 불같은 것 말입니다
목구멍을 막는 포르말린 위로 신경다발이 외마디를 지른다
우리는 필요 없어요
과감하게 잘라낼 수밖에요
메케한 냄새 뒤로 감수성의 허연 뿌리가 뽑힌다
의사는 말없이 날아간 불을 기록한다
치 익 밥물 오르는 소리와
지글지글 찌개 끓는 소리가 궁벽의 공간에 가닿는다
내다버린 것들이 제자리로 갔을까
사각의 흔적을 두고 온 막다른 곳에
천공(天空)의 고요가 걸린다
저변이 뾰족한 곳은 침묵 같은 공간이다
하나를 버리고 또 다른 하나를 가지는 것은
타오르는 법칙 중의 하나이다
새하얀 쌀밥이 빈방에 구수하다
한달음에 올라가 버린 아궁이 벽에 날개가 덤으로 그려졌다
태양초의 온도
여름, 물관은 초록으로 보풀이 일었다, 한 겹 빙 두른다
관으로 스민 온도와 나간 온도로 색이 칠해진다, 절박한 오차로 물들어지는 계절들
초록은 서늘하게 치마를 끌며 어제를 말했다
나지막한 평화와 고마운 마음이
풋풋한 어린아이와도 같다
발길로 솎아진 밭길은 점점 분주하다
넓은 평수가 힘에 부쳐 태워가며 어깃장을 놓는다
올 여름은 빨랐기에 갈등은 더욱 진했다
바람으로 전해지는 간격이 두고두고 고랑에 일렁인다
여름이 지나 가을 오는 사이 높이가 도망갔다
팽팽한 차이가 깨어져 매운 냄새가 난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는 온도가 불쑥 발끝을 내밀고
견뎌온 시간은
뜨거운 체온으로 붉게 빙 두른다
스몄던 물기를 건드리면
누군가 숨겨두었던 간격이 통통 튀어나올 것 같다
매운맛을 풍겨 마구 뜀박질할 것 같다
한낮 물관 안은 여전히 캄캄하고
먼 광년 태양계에서 쏟아져나온 통각으로 열기 가득한 밭은
오래전부터 간직했던 꿈의 나라, 꿈의 이상향으로 널려진다
37. 5도로 살며시 올라가본다
손톱
자르지 못해 휘어지는 꿈이 저녁으로 내미는 얼굴
굽어진 등판에 반짝 한 종지의 빛깔로 고인 물꽃
어느새 간절함으로 늘어졌다
열 개의 스위치 모두 눌러보니 자판기처럼 떨어지는 향기
가둔 공간만큼 가득하기에
두고 온 시간만큼 자를 수 없다
오래된 스위치 한세월 지독히도 간직하여
벽처럼 딱딱해진 얼굴들은
화려한 꽃 분홍으로 물 칠하여 오늘도 줄기줄기 불그레하다
침을 뱉는 알전구와 별 풍선은 잔가지를 타고 조용히 흘러내린다
멀리 지붕 위에 흰 눈이 쌓여
하늘을 뚫고 나온 둥근 선 손목으로 떨어진다
희미한 기억 구부러져 홑겹으로 비틀대는 골목길에
브이를 그린 발바닥이 맨바닥에 드러누워 오늘 밤을 잠잔다
까만 화환이 블링블링 공중에 떠다닌다
바람 타올라 연기로 뒤덮이다
어두운 과녁은 어쩌지 못해 온통 검은색으로 칠한다
|당선소감|결코 거창하거나 들뜨지 않은 마음으로
얼었다 녹았다 합니다. 시에 갇혀버린 시간들이 조금 시리기도 했습니다. 발끝이 얼얼하여 쭈뼛거리기도 하였지요. 이제 조금씩 녹는 시간, 베란다의 제라늄과 선인장이 구부러진 등을 기우뚱합니다. 아마도 푸슬푸슬해진 것 같습니다. 먼 곳에서 온 빛은 마치 시간표처럼 빽빽하게 줄을 그어 어쩔 수 없이 부드러워질 수밖에요. 무작정 표를 따라가보는 것도 재미있는 방식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이제 겨우 첫 발을 내디뎌 열심히 시작해보려 합니다. 결코 거창하거나 들뜨지 않은 마음으로 오랜 시간을 수식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저를 격려해주신 교수님들과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 그리고 저에게 길을 내어주신 『시에티카』 선생님들께 두 손 모아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이영림 경북 영덕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전문가 과정 수료.
|심사평|보다 정진하여 자신만의 시세계를 구축하기를
신인상 작품공모에 투고된 작품을 읽을 때마다 아쉽게 느껴지는 점이 많다. 이번 『시에티카』 신인상에 투고된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시를 이루는 형식이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투고자가 많았다. 어떤 시는 행만 갈라보았지 산문만도 못한 시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시는 운문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좌판 위에 물건을 나열해놓고 버젓하게 시라고 한다. 최소한 시의 기본은 갖추고 투고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시는 시 나름대로 언어의 조탁이 이루어져야 한다. 뿐만 아니라 시적 대상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형식과 내용을 형상화시킬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비유와 상징을 통해 언어를 객관화시켜야 할 필요가 따른다. 즉 자신이 쓰고자 하는 시적 대상을 직접적인 감정의 토로가 아니라 육화된 언어를 통해 시적 묘사를 이루어야 한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다. 이번에 응모한 100여 명의 응모자, 그리고 1,000여 편의 작품 중에서 이상과 같은 점을 고려 10여 명의 작품이 본선에 올라졌다. 이들 가운데 성백술 씨의 「돌」 외 2편 , 이영림 씨의 「사랑니의 방」 외2편을 당선작으로 내놓는다. 이들 작품은 나름대로 시적 조건을 충족시키면서 자신만의 개성을 엿볼 수 있는 점을 들어 당선작으로 뽑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시편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뚜렷한 시적 요소가 있다. 전자는 삶의 무게에서 오는 긴장감을 어떻게 쓰면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후자 역시 시적 대상을 자아의 시적 상상력으로 보다 더 치밀하게 포용할 수 있는 방법론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아무쪼록 두 분의 당선자는 보다 정진하여 자신만의 시세계를 통해 한국 시단에 우뚝 서길 기대해본다.
심사위원/김석환(시인, 명지대 교수) 양문규(시인, 본지 발행인) 이성천(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반년간지 『시에티카』 2014년 · 상반기 제1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