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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주의 신학자, 김재준 목사(金在俊,1901~1987)
➀ 김재준의 약력
1901.9.26. 함경북도 경흥에서 출생, 호는 장공(長空)
1909. 경원 함양동 향동학교(소학교) 3학년 편입
1913. 회령간이농업학교 졸업(~1916)
1918. 장석연씨 장녀 장분녀와 결혼, 슬하에 3남3녀(정자,신자,혜원,은용,경용,관용)
1920. 옹기금융조합 근무
1920. YMCA영어학교 영어과 졸업(~1922)
1923. 함경북도 경흥 향동학교(소학교) 교사 재직
1924. 서울장로교연합사경회 김익두 목사 설교듣고 회심
1925. 감리교 명문사학 아오야마(靑山)학원(현,아오야마가쿠인대학) 신학과 졸업(~1928)
1928. 미국유학, 프린스톤신학교 입학
1929. 웨스턴신학교(현,피츠버그신학대학원) 구약학석사학위졸업(~1932)
1932. 평양 숭인(崇仁)상업학교 교목, 성서교사 재직
1932. 장로교단 신학연구지 신학지남(神學指南) 편집인 대리역
1935. 아빙돈단권성경주석사건에 연루되어 사과성명서 신학지남 게재
1936.8. 간도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 교목 재직
1937.5. “십자군” 창간(2년만에 중단, 1951년 속간 제36호까지 발간)
1939. 조선신학교(현,한신대학교) 설립,
1945. 경동교회 설립 담임목사(~1958.6.)
1949. 한신대학교 교수(~1961)
1952. 예수교장로회총회에서 제명
1953.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창립
1954.5. 한신대학교 부학장 취임
1958.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교 명예신학박사 학위수여
1959.9. 한신대학교 6대학장취임(~1962)
1963.1. 대한일보 논설위원(~1972)
1963.10. 한신대학교 명예학장 추대
1965. 한국기독교장로회 제50회 총회장
1966. 찬송가582장 어둔밤 마음에 잠겨 작사
1966.9. 한신학원, 한신대학교 이사장 역임(~1970.9.)
1969.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
1970. “제3일” 창간(~1974.5. 제45호까지 발간)
1972.3.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한국위원회 창립 초대 이사장
1973.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공동의장
1974.3. 캐나다선교활동(~1983)
1975. 한국민주화기독자 동지회 의장(~1979)
1975. 북미주 한국인권수호협의회 회장
1978. 북미주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위원장
1982. 한국민주통일촉진국민연합 고문
1983. 귀국
1987.1.19. 함석헌과 함께 “새해 머리에 국민에게 드리는 글” 유언
1987.1.27. 사망
2002.12.27.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저서 : 범용기(1983), 낙수(1953), 계시와 증언, 하늘과 땅의 해후, 인간이기에, 장공전집, 광야에 외치는 소리(1983), 요한계시록 주석(1968)
➁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
한국기독교장로회(1953,기장측)를 창설하고 조선신학교(1940,현,한신대학교)를 설립한 김재준(金在俊) 목사는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주의 신학자이며 호는 장공(長空)이었습니다. 1901년, 함경북도 경흥, 유학자 출신가정에서 출생한 김재준은 시와 문학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으며 사서삼경을 암송할 정도로 암기력이 대단하였습니다. 9세되던 해, 경원 함양동 향동학교(소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졸업한후, 13세때, 회령간이농업학교에 입학하여 16세때 졸업하였습니다. 향동학교 스승인 김희영 선생의 지원으로 회령군청 간접세과 임시 고원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여 18세때 장석연씨의 장녀 장분녀와 결혼한 김재준은 1920년, 옹기금융조합에 취업하여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향학열에 불타 있었던 김재준은 아내와 상의조차 하지 않은채 홀로 서울로 상경하였습니다. 김재준은 서울에서 시골과 전혀 다른 도시풍경을 바라보며 신선한 충격을 받았지만, 마음 한켠에 현재의 불안감, 불확실한 미래, 가장의 무책임감 등 갈등과 번민으로 자리를 잡지 못하였습니다.
1924년, 가을, 부흥강사 김익두 목사님을 초청한 “서울장로교회연합사경회”가 승동교회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예배당 안은 이미 여자들로 가득 채워져 들어갈 틈이 없었고 외부에도 광장과 담장위에까지 메워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인파에 놀란 김재준은 무슨일인가 해서 그곳으로 향하였다가 창세기 1장1절의 말씀으로 설교하는 김익두의 말씀을 듣고 회심하고 예수를 영접하여 기독교에 입신하였습니다. 그러나 고향 경흥읍교회 장학생으로 서울에 유학을 와 함께 방을 쓰고 있던 두 살 아래의 김영구의 죽음은 김재준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서 성령세례를 받은 경험으로 물세례를 쉽게 생각하였던 김재준은 승동교회 김영구 목사의 권유로 세례를 받았습니다.여전히 서울 생활에서 방황을 계속하던 김재준은 교회속에서도 안정적이지 못한채 일본출판 신앙서적을 탐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서울 “YMCA영어학교” 영어전수과3학년에 재학중 평생의 동지 정경옥을 만났습니다. 또한 송창근도 그곳에서 함께 만나게 되었습니다.
1923년, 함경북도 경흥 향동학교(소학교) 교사로 재직중 1925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김재준은 감리교 미션스쿨인 명문사학 “아오야마(靑山)학원”(현,아오야마가쿠인대학) 신학과 청강생으로 입학하였습니다. 아오야마학원은 메이지 시대 미국 감리교선교사들이 설립한 조치대학, 릿쿄대학과 함께 3대 미션스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에게 봉사하며 사회에 이바지하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을 목표로 설립되어 감리교의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아오야마학원에서 김재준은 송창근 목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 자유, 학원 자유, 사상의 자유 등 래디컬(Radical)한 자유주의 신학교로 아오야마학원을 흔히 “유니온신학교 출장소”라고 불렀습니다. 김재준은 칼 바르트의 사상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졸업논문 또한 “바르트의 초월론”으로 아오야마학원의 자유주의보다 다소 보수적인 경향을 갖는 바르트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를 계획하였습니다. 한서와 일본고문헌과 유럽기독교에 대하여 지적수준이 광범위한 “히야네야스사다” 교수와 동양적 문화감각이 탁월한 “벳쇼카이노스께” 교수로부터 김재준은 영향을 받고 송창근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아오야마학원을 졸업한 송창근의 뒤를 이어 김재준 역시 졸업후 1928년, “프린스톤신학교”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급진적인 자유주의 아오야마학원에서 그와 정반대의 전통적 보수주의 프린스톤을 선택한 김재준은 보수주의자로 알려진 “메이첸”(Grasham Machen) 교수의 영향을 받으며 중도의 길을 모색하였습니다. 프린스톤에서 1년을 공부한 김재준은 1929년, 송창근이 수학중인 피츠버그의 “웨스턴신학교”로 전학을 하였습니다. 프린스톤이 다소 보수적인 우편에 서 있다면 웨스턴은 보수적인 좌편에 서 있는 학교로 김재준이 찾는 아오야마학원과 프린스톤의 중간지대에 있는 학교라고 보아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김재준은 웨스턴신학교(현,피츠버그신학대학원)에서 구약학을 전공으로 학습하였고 히브리어 특별상을 받을 정도로 탁월한 성적을 보여 주었습니다. 김재준은 구약학학사(S.T.B.)와 석사과정(S.T.M.)을 졸업하고 1932년, 귀국하였습니다. 같은 시기 송창근은 덴버신학교와 아일리프대학 공동학위프로그램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경직 또한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1932년, 김재준은 “평양숭인상업학교”의 성서교사 겸 교목에 선임되었습니다. 송창근 목사는 귀국후 평양 “산정현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고, 남궁혁 목사는 신학지남(神學指南)의 편집장으로서 김재준을 특별기고가로 채용하였습니다. 김재준의 평양생활은 교회환경적인 측면과 학문재탐구영역 차원에서 좋은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김재준은 귀국후 소선지서에 매료되어 소선지서 연구에 몰입하였습니다. 김재준에게서 역사란 자주적, 창조적 이상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언자는 불의로 가득찬 세상에 정의를 외치는 자였습니다. 예언자들은 교회의 경계를 넘어 세상의 정치, 경제, 종교, 교육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표면적으로 김재준의 사상은 네덜란드의 수상이며 화란개혁주의자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의 영역주권과 일맥상통하는 바 가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정경옥 목사의 주장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카이퍼는 네덜란드의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미국의 “벤저민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와 함께 “세계3대 캘빈주의 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카이퍼는 일반은총의 영역이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으므로 불신자와 기독교인의 협력이 요구되고, 기독교의 영향력은 문화, 정치, 경제, 사회 등 일반은총의 모든 분야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김재준은 반선교사상, 반정통주의를 기반으로 진보적인 조선신학교 설립, 칼 바르트의 사상전개라는 목적을 정하였습니다. 김재준은 선교사들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였습니다. 신학적 융통성을 가진 감리교에 비하여 장로교에 대한 거부감은 “정통주의 신학은 신신학보다 더 교묘하게 위장된 실제적 인본주의”라고 비판할 만큼 강한 이념적 성향을 나타내었습니다.(새사람11호,1946) 김재준은 프린스톤신학교와 맥코믹 신학교 출신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교회를 지나치게 보수적 성향으로 견인하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획일화로 정통주의가 마치 진리인 것으로 대변하고 진보주의와 중도주의는 이단시 하는 경향이 한국기독교 내에 뿌리깊게 작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선교사들이 주도하면서 한국교회는 미국선교사의 사상적 수직관계로 변질하였다고 김재준은 확신하고 한국적인 진보주의 기독교를 설립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김재준은 “한국장로교회의 신학교육이 근시안적이고 의식적인 식민정책이었으며 결국 자기교만이었다”고 지적하였습니다.(1960.기독교사상,한국교회의 신학운동) 1901년, 평양신학교 설립이후 장로교 선교사들은 기독교 5대 근본교리, 즉, “동정녀 탄생, 대속의 죽음, 육체적 부활, 재림, 성경의 절대무오”를 절대화 하여 교역자와 신자의 신앙을 심판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김재준은 정경옥과 같은 사조로 기독교를 바라보았습니다. “신앙은 보수, 신학은 자유”라는 기준으로 예언자적 외침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한국교회 성경무오사상을 성경우상숭배”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 신학교들이 성경의 권위와 성경의 무오성에 관하여 자유로운 시각을 열었을때 그것을 뒷받침하는 모든 기독교리들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습니다.(헤롤드 린셀) 김재준의 이같은 성경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결국 신학지남에서 퇴출되는 순간을 맞이 하였습니다. 1935년, “아빙돈(Abingdon)단권성경주석사건”에 휘말린 김재준은 송창근, 한경직, 채필근 목사와 함께 감리교선교 50주년 기념 성경주석에서 요나서를 제외한 12소선지서의 번역출판을 맡았습니다. 아빙돈 단권성경주석은 역사비평학적 입장과 양식사적 입장에서 기록한 주석으로 다양한 해석과 견해를 모두 포함하였습니다. 벨하우젠의 문서비평, 궁겔의 구전, 알브라이트의 성서고고학과 역사와 신학과 전승사 등 현대주의를 총 망라하는 감리교적 진보주의 성향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1934년 12월, 장로회 노회에서는 아빙돈단권성경주석(한성도서출판)을 이단서로 규정하였고, 1935년, 제24회 총회(정인과 총회장)는 번역과 집필에 관여한 장로교 목사들을 전원 소환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김재준은 송창근, 한경직과 함께 신학지남에 사과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1936년8월, 간도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 교목으로 사역지를 옮긴 김재준은 이곳에서 제자인 강원용(姜元龍,기장측목사)과 안병무(安炳茂,민중신학자)를 만났습니다. 1937년 5월, 김재준은 “십자군”을 창간(2년만에 중단, 1951년 속간 제36호까지 발간)하여 사회운동에 접근하는 기독교상을 견인하려 하였습니다. 1935년 이후,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문제로 또다시 양립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국교회는 굶주림과 질병과 빈곤보다 더 잔인한 시험대위에 올려져 있었습니다. 일본제국의 총칼앞에서 무릎을 꿇고 1938년, 제27회 총회장 홍택기 목사를 비롯하여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습니다. 그러나 개별적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한 보수주의자들은 주기철 목사와 같이 순교자의 길을 걸아가야만 했습니다. 평양신학교는 폐교되었고,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철수를 서둘러야 했습니다.중국 간도에 있었던 김재준은 1939년, 한국신학대학교의 전신인 “조선신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1945년, “경동교회”를 설립하고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으며, 1949년에는 한신대학교 교수에 임명되었습니다. 김재준의 현대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에 대하여 경고를 중단한 1952년, 제37회 총회(김재석목사)는 김재준에 대한 제명을 결정하였습니다. 1953년, 김재준은 예수교장로회로부터 독립하여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측)를 창립하였습니다. 1954년 5월, 한신대학교 부학장에 취임하였고, 1958년,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1959년, 한신대학교 6대학장에 취임하여 1962년까지 부임하였으며, 1963년 1월, 대한일보 논설위원과 한신대학교 명예학장에 추대되었습니다. 1965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제50회 총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66년, 찬송가 582장, “어둔밤 마음에 잠겨”를 작사하였습니다. 그해, 한신학원 이사장에 취임하여 1970년까지 근무하였으며, 1969년 3월,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장으로서 사회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1970년, “제3일“을 창간하여 1974년 5월까지 45호를 발간하였습니다. 김재준 목사는 그후에도 한국의 인권상황과 사회문제에 참여하여 진보주의 기독교적 사관에서 국가와 사회를 개혁하려고 노력하였으며 1987년 1월27일, 87세의 일기로 마감하였습니다.
김재준 목사는 진보적 아오야마(靑山)학원 사상, 정통보수주의적 프린스톤신학교 사상, 중도주의적 웨스턴신학교 사상, 그리고 칼 바르트의 영향으로 새로운 한국적 신학을 개척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김재준은 보수주의 기독교가 한국사회에 일어난 여러 가지 사태에 대하여 눈을 감은 것에 대하여 분노하였습니다. 김재준은 선지자적 외침을 통하여 빈곤과 서민과 민중들의 삶을 지키고 싶어하였습니다. 사회적 기독교를 통하여 민중의 구원을 달성하려 하였던 김재준 목사의 삶은 분명 한국사회의 민주적 발전에 기여한 바가 있었습니다. 또한 진보주의 기독교를 한국토양에 정착시킴으로서 보수주의를 늘 긴장시키는 한 축으로 작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