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앞마을 이야기
반변천의 앞에 위치한 마을
천전리는 반변천(半邊川)의 앞에 있다고 해서 ‘내앞’으로 불리며 안동군 임하내면에 속했으나, 1914년 현재의 천전 2리인 반시동 일부를 합하였고, 1931년 임하면에, 1995년 안동시에 편입되었고, 천전리는 1리와 2리로 되어 있는데, 천전 1리는 청계종택이 있는 마을이고, 천전 2리는 임하댐으로 들어가는 백운정 맞은편 왼쪽 산기슭 마을이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내앞 마을은 의성김씨(義城金氏) 청계파(靑溪派)의 동성 마을로 유명한 반촌마을이다. 의성김씨 청계파 입향조는 김만근(金萬謹)이다. 의성김씨 시조의 9대 손인 김거두(金居斗)와 아들인 김천(金洊)이 안동 풍산에서 방적동(邦適洞:율세동)으로 옮겼고, 김천의 증손인 김만근이 처가인 해주오씨(海州吳氏)가 사는 천전으로 오게 된 것이 그 내력이다. 김만근의 손자인 청계(靑溪)김진(金璡)의 다섯아들은 모두 과거에 합격하고 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청계 이후 수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여 학문적 전통을 이어갔을 뿐 아니라, 단호하게 실천궁행하는 가학적 풍모를 굳건하게 지켰다. 안동 최초의 근대학교인 협동학교를 건립하고, 일제 이후 수많은 애국지사와 사회운동가를 배출한 것은 그러한 가학적 전통의 발로인 것이다. 서녁(西惄)은 내앞의 서쪽 골짜기 마을이다. 이곳에 의성김씨 청계파의 대종택과 청계의 차남인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의 종택이 나란히 있다.
천전리에는 백운정 맞은편에 있는 ‘개호(開湖)’라 불리는 솔숲이 유명하다. 1605년의 대홍수로 유실된 것을 운천 김용의 발의로 다시 조성하였고 한다. 이 숲을 보호하기 위해 「개호금송완의(開湖禁松完議)」라는 문중 규약이 있다. 천전 2리의 장구날[長皐]은 마을 모양이 장고(長鼔)처럼 생겼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으로,야암(野庵)김임(金恁)의 야암정사(野庵精舍)가 있다.
빗골[雨谷]은 내앞 동쪽 골짜기다. 빗골에는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의 종택, 백인재(白忍齋) 김헌수(金憲壽)의 고택,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의 고택인 백하구려(白下舊廬) 등 많은 고가옥이 있다. 갑시골은 빗골의 국도 건너편 골짜기인데, 목암(牧庵) 김정기(金鼎基)가 건립한 목암정이 있다.
구목골[雲谷]은 내앞 북쪽에 있는 마을로 월탄(月灘) 김창석(金昌錫)이 1701년에 건립한 몽선각(夢仙閣)이 있다. 몽선각은 원래 임동면 망천리에 있었는데,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건한 것이다. 천전리에는 의성김씨 청계종택, 귀봉종택, 백하구려(白下舊廬), 목암정, 몽선각(夢仙閣)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은 누구인가?
“자가 형중이고, 호가 청계이다.” 라고 『종파보』에 기록되어 있다.
“부친께서는 홍치 13년 경신년(1500년) 2월 초 3일 정해일에 출생하여 만력 8년 경신년(1580년)윤 4월 23일 신유일에 타계하셨고, 이 해 7월 29일 갑신일에 장례를 지냈으니 향년이 81세였다. 좌의정 여흥 민제의 5대 손인 병절교위 세경의 여식을 아내로 맞았는데, 부친보다 34년 앞서서 타계하셨다. …… 부친은 태어나면서부터 재능이 뛰어났고, 용모가 출중하였다. 나의 증조부이신 진사공(김만근)께서 보시고는 기특하게 여겨 작을 소자를 가지고 문회를 열게 하면서 ‘이 아이는 반드시 우리 가문을 중흥시킬 것이고, 그 식견으로 이름을 날릴 것이다.’라 하셨다.
16살에 처음으로 큰고모부인 청도 권간 공을 스승으로 섬겨 시와 예를 배웠는데, 권공은 가문의 예법을 깊이 닦아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법도가 있었으며, 그 부추기고 인도하는 것이 효도하고 공경하는 도리가 아닌 것이 없었다. 부친께서는 자기를 비우고 겸손하게 받아들여서 마음으로 복종하여 힘써 행하지 않는것이 하나도 없었다. 몇년이 지나자 공부가 크게 진보하여 사람들이 크게 놀라워할 정도였다. 외조부께서 그의 뜻과 행동을 살피고 사위로 선택하셨다.
외조부의 아우님은 현량과를 거친 세정공이신데, 기묘년에 해침을 당한 이름 높은 유학자셨다. 부군께서는 또 그 분을 따라 배우셨으니, 당세의 여러 군자들의 학문의 단서를 섭력하셨다고 하겠다. 이로써 견문이 날로 넓어졌고, 문예 역시 통달하게 되었다.
을유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시고, 성균관에 유학하셨는데, 하서 김인후와 돈독한 우의를 다졌고, 당시의 명사들과 널리 교유하였다. …… 일찍이 과거 공부를 폐하고 부암(부암은 옛날 중국의 부설이 집을 지었던 땅인데, 임하에 혹 부암이라고 이름 붙여진 곳이 있는지 모르겠다)에 집을 짓고 가문을 이끌고 살았으며, 조석으로 부모님이 계신 곳에 가서 문안을 드렸는데, 강을 건너 왕래하면서도 아무리 비가 오고 바람이 몰아치더라도 그만두지 않았다. 혹시 타지에 갔다 오는 경우가 있더라도 돌아오면 반드시 먼저 부모가 계신 곳에 들른 연후에 물러나왔다.
항상 가세가 빈한하여 제대로 봉양할 수 없음을 한탄하였으며, 비록 콩물이나 나물죽이 있더라도 먼저 부모님께 보냈으며, 심부름하는 사람이 돌아와 ‘올렸습니다’라고 말하면 기뻐하셨다. 부암 곁에는 서당 1칸을 지어서 자제들과 마을의 어둑한 선비들을 모았는데, 학령을 세우고 과정을 엄히 하였다.”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지은 김진의 「행장」 속의 일절이다.
“집안 경영 중 가장 주력하였던 것은 5형제분의 교육이었지요. 늘 ‘의롭게 살다 죽으면 나는 너희들이 살아있는 것으로 알겠다. 비굴하게 산다면 살아도 죽은 것으로 알겠다.’ 그렇게 가르치셨다고 합니다.”라고 청계종택에서 만난 김명균은 말했다. 김진의 이런 훈도는 그 아드님들이 훌륭하게 자라나는데 촉매가 되었다.
“아들 극일(克一)은 가정 병오년에 문과로 등과하였다. 전 밀양부사이다. 둘째 수일은 을묘생원이다. 셋째 명일은 갑자 생원인데 일찍 죽었다. 넷째 성일은 융경 무신년에 문과로 등과하였다는데 의정부 사인 벼슬에 있다. 다섯째 복일은 경오년에 문과로 등과하였는데, 형조 좌랑이다.” 행장의 기록이다. 이 기록을 통해서, 김진의 다섯 아들은 모두 생원 이상의 시험에 통과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고, 그 중 셋은 문과 급제를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빈서원에서 5현자와 더불어 향사한다.”라고 『종파보』에 기록되어 있다.
김진의 큰 아들 김극일(金克一)은 자가 백순이고, 호가 약봉이다. 그는 1522년(중중 17)에 탄생하여 1585년(선조 18)에 타계하였다. 퇴계 이황에게 배웠으며, 가정병오문과 관은 내자시정에 이르렀다. 배위는 숙인 수안이씨이다. 김극일로부터 김복일까지 5형제는 모두 퇴계 이황으로부터 배웠다. 김극일은 아우 김수일의 아들 김철을 양자로 들였다. 이것은 『종파보』에서 보이는 최초의 양자 기록이다.
김철은 자가 심원이고, 호가 대박이다. 송석재사의 주인공이 바로 이분이다. 그는 화왕산성에서 의병으로 적을 섬멸하였다고 한다. 배위는 선산김씨이다. 김철의 큰아들은 시온이다. 김시온은 자가 이승이고, 호가 표은이다. 1598년(선조31 )에 출생하여 1669년(현종 10)에 타계하였다. 명나라 멸망 이후에는 조선의 임금을 통하여 연대를 표시하는 사례가 여러 족보에서 나타나는데, 여기 의성 김씨의 『종파보』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병자호란 후 와룡산에 은거하여 여러 번 참봉을 제수하였으나 일어나지 않았고, 기유년 유언으로 묘도비의 제명을 ‘숭정처사의 묘’라고 하였다.”라고 『종파보』에 기록이 있다. 김시온의 배위는 풍산 김씨이고, 후 배위는 영양남씨이다. 김시온의 큰아들은 김방렬이다. 김방렬의 큰아들은 김여중이고, 김여중의 큰아들은 김지택이며, 김지택의 큰아들은 김민행이다. 김민행은 자가 선백인데, 1673년에 출생하여 1737년에 타계하였다.
“공은 정대 통명, 신의로 이름이 높아서 1728년(영조 4) 이인좌 등이 거병하여 종실 탄을 추대하려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용와 유승현이 의병대장이 되어 안동에 의진을 펼 때 옥천 조덕린 등과 호응, 의진에 가세하였다.”김민행은 시원을 양자로 들였으며, 김시원도 계운을 양자로 얻었다. 김계운의 큰아들은 곤수이며, 김곤수의 큰아들은 진종이다. 김진종의 큰아들은 김형락이며, 김김형락의 양자는 병식이다. 김병식의 큰아들은 김형칠이며, 김형칠의 큰아들은 전 종손 김시우이다. 김시우는 자가 여룡이며, 1926년에 출생하여 1998년에 타계하였다. “선고는 연전 영문학부를 다니셨지요. 그 때부터 우리 가문이 구학문과 단절하게 되었지요.”라고 김명균이 말하였다. <출처:한국국학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