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사용하는 맞춤법은 1933년에야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훈민정음 창제 당대에는 어떻게 글을 썼을까?
1. 당대 훈민정음 표기 문헌의 특징
1) 창제 직후 대표 문헌으로는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가 있음.
세종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자료들로 어떤 식으로 훈민정음을 표기하려 했는지 알 수 있음.
2) 용비어천가 표기상의 특징
- 훈민정음 반포 전에 완성되었음.
- 현대 표기법과는 달리 소리나는 대로 사용하였음 (연철표기, 이어적기라고도 함)
예. 현대 국어에서 도움이 → 도우미로 적는 것과 같음.
- 한자와 훈민정음을 섞어 쓴 국한문 혼용으로 한자에 한자음을 달지 않음.
3) 석보상절 표기상의 특징
- 세종의 명을 받은 수양대군이 간행하였음.
- 거의 대부분 <용비어천가>처럼 연철로 표기되었으나,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었음.
- '한국국종체'라는 표기법으로 한자를 먼저 크게 쓰고 한자의 우측 하단에 훈민정음으로 작게 주음하는 형식임.
- 당시에는 모음으로만 끝나도 'ㅇ'을 붙여 초성/중성/종성을 갖추어 적었는데 이때 'ㅇ'은 음가가 없었음.
이를 '동국정운식 한자음'표기라고 함. 현대 국어의 'ㅇ'의 역할을 하는 것은 옛이응임.
4) 월인천강지곡
- 세종대왕이 직접 쓴 책으로 수양대군이 간행한 <석보상절>과 많은 차이를 보임
- 각각의 형태를 알 수 있도록 '분철표기(끊어적기)'를 함.
체언의 경우 마지막 음절의 종성이 ㄴ, ㅁ, ㄹ, ㅇ, △인 경우,
용언 어간의 경우 마지막 음절의 종성이 ㄴ, ㅁ인 경우에만 분철표기를 함.
- 이외의 경우는 연철 표기를 함.
- 한자음 표기의 경우 <석보상절>이나 <월인석보>의 경우와 달리,
먼저 훈민정음을 크게 쓰고, 우측 하단에 한자를 작게 쓰는 '국주한종체' 표기법을 사용함.
- 또한 종성이 없는 한자음에 음가가 없는 'ㅇ'을 덧붙이지 않았음.
* 동국정운식 한자음
세종은 우리말을 쉽게 적는다는 목적 이외에도 당시 조선에서 통용되던 한자음을 중국의 '원음'에
가깝게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중국 음운학의 기본이 되는 <홍무정운>을 바탕으로 <동국정운>을 간행함.
<동국정운>은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던 한자음의 발음을 중국의 한자 원음에 가깝게 적은 책으로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의 한자음 표기는 모두 이를 표준으로 삼았음.
그러나 현실에서 통용되던 실제 한자음과는 거리가 있어 세조 이후(1485년)부터는 사용되지 않았음.
2. 문헌들 사이에 차이가 나타나는 원인
1)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면 종성부용초성, 8종성법에 대한 설명이 있음.
8종성법이란 종성에서는 'ㄱ, ㅇ, ㄷ, ㄴ, ㅂ, ㅁ, ㅅ, ㄹ'의 여덟 자만 소리가 나므로
이 8자만 사용해도 된다는 것임.
2) 8종성법은 <석보상절>, <월인석보>등 대부분의 15세기 '훈민정음' 표기 문헌에서 지켜졌음.
이러한 발음 위주의 표기법은 상당히 오래 지속됨.
3) 그러나 <용비어천가>를 보면 8종성법이 지켜지지 않은 경우도 있었음.
- ㄱ, ㄴ, ㄷ에서는 8종성법이 지켜지지 않고 단어의 원래 형태를 그대로 표기하고 있음.
3) <월인천강지곡>은 단어의 원래 형태를 그대로 표기하는 방법이 좀 더 철저하게 지켜짐.
3. 훈민정음 표기의 확대(15세기 후반~근대)
1) 한자를 모르는 일반 서민이 독자인 서책을 간행하는 경우, <용비어천가>와 같은 표기 방법을 유지할 수 없었음.
따라서 <석보상절>이나 <월인천강지곡>에는 한자가 없으며, 한 자 한 자 훈민정음을 부기하여 적음.
또는 한자를 아는 독자들을 위해 한자를 같이 제공해 주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2) <두시언해>는 중국 당나라 두보의 시 전편을 언해한 것으로 한자에 한자음 부기가 없었음.
이는 독자층이 일반 백성이 아닌 이미 한자에 능통한 사람, 즉 지배계층이기 때문임.
3) <금강경삼가해>는 종교적 내용을 다루었기 대문에 <석보상절>과 마찬가지로 한자음을 부기한 것으로 이해됨.
→ 서적 간행에 임하는 편찬자가 어떤 부류의 독자이기를 기대하느냐에 따라 표기상의 특징이 달라짐.
4)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경우도 있었음.
<백련초해>는 초학자 특히,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한시를 가르치기 위한 책인데
제시된 한자 또는 시를 제외하고 해설 부분이 오로지 '훈민정음'으로 표기되었다는 특징이 있음.
→ 이런 '훈민정음' 표기의 양상은 근대 국어 시기에 더욱 확대됨.
4. 근대 국어 시기의 특징 → 서민 문학의 확대
1) 소설과 사설시조 등이 출현 하였는데, 훈민정음 만으로 표기한 경우가 많았음.
이는 훈민정음의 보급이 확대되고 사용계층이 늘어났기 때문임.
여전히 국가의 공식 문서에는 한자만이 사용되었으나, 지배계층 역시 사적인 글에는
훈민정음이 주된 표기 수단이었음.
2) 이 시기 언해문의 표기 양상
- 훈민정음과 한자를 같이 쓰되, 한자음까지 부기한 경우
: 전 시대 <석보상절>, <월인석보> 등과 유사, 주로 부녀자들을 위해 국가에서 간행한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음.
- 훈민정음과 한자를 같이 쓰되, 한자음 부기를 하지 않은 경우
: <용비어천가>에서 볼 수 있듯이 극히 일부분에서 볼 수 있는 표기 양상임.
근데 국어 시기에는 <중간두시언해> 등에서만 볼 수 있음.
- 훈민정음만으로 표기한 경우
: 전 시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양상임. 근대 국어 후기로 갈 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짐.
<태상감응편원설언해>, <경신록언석>, <지장경언해> 등이 있음.
양반이나 왕의 사적인 글(편지 등)에서도 훈민정음이 사용된 것으로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