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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선조10 - 위대한 성웅 이순신!!!
(63) 선조11 - 승전의 시작
(64) 선조12 - 비장의 전함 거북선(龜船)
(65) 선조13 - 이순신, 바다를 장악하다!
(66) 선조14 - 열혈남아 홍의장군 곽재우
(67) 선조15 - 반전의 토대
(68) 선조16 - 행주대첩
(69) 선조17 - 진주성 대학살
(70) 선조18 - 아 !!! 인육을 먹는 풍조라니
(71) 선조19 - 강화협상의 대 사기극
(72) 선조20 - 이순신을 제거하라!
(73) 선조21 - 이순신 제거되다!
(74) 선조22 - 명량해전(1)
(75) 선조23 - 명량해전(2)
(76) 선조24 - 별이 지다!
<조선왕조실록(62)> 선조 10
- 위대한 성웅 이순신!!!
100년에 걸친 실전으로 단련된 수십만의 최정예 군대, 최신식 조총으로 무장, 거기에 죽거나 이기거나만을 외치는 사무라이 정신, 무조건 도스께기(돌격)만 하는 이러한 전력을 소유한 토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명나라 정벌을 꿈꾸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 이었습니다.
히데요시의 계획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1.파죽지세로 밀어붙여 일단 조선 전역을 장악한다.
2.진격한 군대가 고립되지 않게 안전하게 군수 물자와 응원군을 보내준다.
3.어떻게? 서해를 통해 곧장 한양으로, 평양으로, 이른바 수륙병진 전략을 사용한다.
4.이리되면 조선은 항복할 것이고, 그런 다음 조선군을 보조군대, 즉 총알 받이로 삼고,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군수 기지로 하여 명을 친다.
이와 같은 전략은 조선 수군을 아예 유령 취급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실제로 조선이나 일본이나 모두 수군은 당연히 일본이 강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히데요시는 육군이 평양까지 진격했다는 보고를 받고, 곧바로 선조를 쳐 죽인 후 명나라를 칠 것인가, 아니면 명나라와 협상을 하여 조선의 일부만 먹을 것인가라는 즐겁고도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히데요시가 전혀 예측 못했던 니킥에 이은 미사일 하이킥이 솟아올라 히데요시의 턱을 강타하여 개박살 내는 일이 발생하였으니, 이는 바로 민족의 태양 성웅 이순신이었습니다.
이순신은 인종 원년인 1545년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나 흙수저 어린 시절을 보내고 철들 무렵에는 외가가 있는 아산으로 이사해 살았습니다.
32세에 무과에 급제한 이순신은 10여 년 간 승진과 파직을 거듭하며 제자리걸음을 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이순신이 승진을 위한 노력, 즉 "빽"쓰는 일을 혐오하고 멀리했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은 조정의 높은 대신들과 가까이 지낼 수 있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으나, 이를 부당거래로 보고 거절 하였는데, 이로 인해 이순신은 독불장군이라는 평을 받아 배척되기도 했지만, 반면에 소수 나마 이순신의 됨됨이에 탄복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이러한 소수의 긍정적 평가로 인해 왜란 발발 바로 전 해인 1591년 47세의 나이에 전라좌수사에 제수될 수 있었으니, 아직 조선이 망할 운명은 아니었나 봅니다.
이순신은 조정의 판단과는 달리 일본에 잡혀갔다 풀려나온 백성들의 증언, 상인들의 전언과 조선 내 왜인들의 동태 등을 근거로 왜군의 침략을 기정사실로 여겼습니다.
또한 독자적으로 왜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왜군의 전함은 빠르기는 하나 삼나무로 건조하여 견고하지 못하고, 조총으로 무장한데다 칼싸움에 능해 접근전에 강하나, 포는 별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순신은, 해전의 핵심은 '포격전'이고, 포격전은 대형을 어떻게 갖출 것인가에 달려있으며, 여기에 물길에 밝은 이점을 살려 유리한 곳에서 싸움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을 하였습니다.
아울러 전라좌수군이 무너진다면 서해를 이용한 바닷길과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역이 왜군에 넘어가게 되고, 그렇게 된다면, 조선은 계속 왜군에 맞서 싸울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을 간파하였습니다.
이순신은 위와 같은 형세 판단을 전제로, 배를 건조하고 포와 화약을 힘써 마련하는 한편, 실전과 같은 훈련을 거듭하였습니다. 그리고 비장의 이지스 전함 거북선도 차츰 모습을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두~둥~~
<조선왕조실록(63)> 선조 11
- 승전의 시작
왜군 침입이 이순신에게 알려진 것은 왜군 부산상륙 이틀 후인 4월 15일이었습니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적함대를 처음 대면하고는 그 규모와 위세에 눌려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을 친 후,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조정에 전라좌수군과 합세하여 싸운다면 이길 수 있다는 장계를 올렸습니다.
원균의 구원 요청에 이순신은 "각자 맡은 지역과 소임이 있으니. 함부로 쉽게 군사를 이동시킬 수 없다"며, 지원 요청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이은 선조의 명령서의 내용은 "원균이 여러 포구 에서 싸울 준비를 마쳤다고 하므로 전라좌수군과 경상 우수군이 힘을 합쳐 맞선다면 능히 왜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이순신이 출정을 위해 경상우수군의 상황을 파악 해보니 군사도 배도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어, 사실상 전라 좌수군의 힘만으로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어쨌든 1592년 5월 4일 이순신은 판옥선 24척을 필두로 여수 수영을 출발해 경상우수영 관할 포구에서 결진을 하니, 원균의 판옥선은 4대에 불과하였습니다.
5월 7일 점심쯤, 척후선이 적선 30척이 옥포 포구에 정박해 있고 왜군은 상륙하여 분탕질을 하고 있다는 보고를 해 왔습니다.
조선 수군은 소리 없이 포구로 접근을 하였고, 이를 발견한 왜군은 황급히 배로 돌아와 다가오는 조선 수군을 향해 조총을 난사하였습니다.
조선 수군은 넓게 진을 이루어 포위해 들어가다가 일제히 벼락같은 포격을 가하였습니다.
그동안 일본 수군의 기본적 전투 양식은 빠른 배를 이용해 적선에 접근하여 배에 올라탄 다음 백병전을 벌이는 것 이었습니다. 칼싸움에 도가 텄고 조총까지 갖추었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겠지요
그러나 왜군은 조선 수군의 예기치 못한 포격에 혼비백산 했고, 조선함대가 접근하자 백병전을 펼치고자 했으나, 조선 수군은 그동안 훈련한 그대로 더 두껍고 튼튼한 판옥선을 이용해 충돌 공격을 감행하여 왜선을 좌초시키는 한편 일본 배보다 높은 판옥선 갑판 위에서 화살공격을 퍼부으니, 왜군은 도저히 대적할 방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날 전투로 왜선 26척이 좌초되었고 수많은 왜군이 수장 되었으나, 조선군이 입은 피해는 겨우 부상 1명에 불과 했으니 실로 압도적인 승리였습니다.(옥포해전)
승리에 자신감을 얻은 조선 수군은 이어 합포에서 5척, 그 다음날에는 적진포에서 11척의 왜선을 깨트린 뒤 백성들 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개선하였습니다.
히데요시는 육군보다 더 강하다고 자부하던 일본 해군이 그들 입장에서는 “듣보잡”인 이순신에게 완패했다는 보고 를 받고 대노하여 장검으로 평소 가장 아끼던 분재를 난도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잘 알고 있다시피 이순신 장군이 구사한 용맹술의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64)> 선조 12
-조선의 이지스 전함 거북선(龜船)
이순신은 장졸들의 전공을 치하한 뒤 곧바로 전함을 수리 하고 화약과 화포를 제작하는 등 다음 전투를 위한 준비에 몰두하였다.
조선 수군과 백성들은 그동안 "이런다고 과연 우리가 왜군 을 이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옥포해전의 승리로 이순신을 믿고 따른다면 능히 왜군을 물리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5월 29일, 이순신 함대는 2차 출동에 나섰는데, 이 때는 비장의 전함 거북선이 함께 했다.
“거북선이 먼저 돌진하고 판옥선이 뒤따라 진격하여 연이어 지자·현자 총통을 쏘고, 포환과 화살과 돌을 빗발 치듯 우박 퍼붓 듯 하면 적의 사기가 쉽게 꺾이어 물에 빠져 죽기에 바쁘니 이것이 해전의 쉬운 점이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개전 이듬해인 1593년 조정에 보낸 보고서의 한 구절이다.
이지스 전함 귀선은 이지스 시스템을 탑재한 군함으로서 동시에 최고 200개의 목표를 탐지·추적하고, 그 중 24개의 목표를 함대함 하푼미사일과 함대공 SM6 미사일로 동시 에 공격하여 왜선을 5분만에 전멸시킬수가 있었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믿거나 말거나~^^*
어쨌든, 역사적인 사실은~이순신이 이 장계에서 자신 있게 언급했듯이 거북선과 판옥선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를 뒷받침한 가장 강력한 물적 토대 중 하나였다.
왜군들이 조선의 배로 뛰어들어 백병전을 시도하지 못하게 막고, 조선의 장기인 활쏘기와 화약무기 사격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본 갑판 위에 갑판을 한 층 더 높인 군함이 판옥선이고, 갑판 위에 아예 덮개를 씌운 군함이 거북선이다.
조선 수군은 어느 정도 적선과 떨어진 거리에서 화약무기로 승부는 가르는 것을 선호했지만,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대포를 쏘아 적함을 맞추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해상에서 사거리가 100미터가 넘는 경우 명중 정확도에 한계가 있었고,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쓰인 배가 거북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거북선은 판옥선보다 강한 방호력을 바탕으로 적선에 최대한 가깝게 접근해 코앞에서 명중탄을 날려 보낼 능력 이 있었고, 최선봉에서 인파이터처럼 돌격함으로써 후방의 판옥선이 적선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데도 도움이 됐으며, 적의 전투대형을 직접적으로 교란하는 데도 그만 이었다.
거북선은 판옥선의 가장 훌륭한 전투 파트너였던 셈 이었다. 거북선이 이처럼 초근거리로 접근해서 전투를 했다는 목격담은 일본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본측 기록인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는 1592년 7월10일 벌어진 안골포해전을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큰 배 중에 3척은 메꾸라 후네(盲船맹선:장님배) 인데, 석화시·봉화시·안고식 화살촉 등을 쏘며 오후 6시까지 번갈아 접근해 공격을 걸어와 망루로부터 복도, 방패까지 모조리 격파되고 말았다.
이러한 거북선은 태종실록에도 그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이런 것과 괸련해 거북선의 발명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나오고 있다.
두루 두루 종합해 보건대, 거북선은 이순신이 휘하의 사람들과 함께 조선 태종 때 존재했다던 거북선을 모티브로 실제 전투에 활용할 수 있도록 실전적으로 건조한 창조적 함선인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거북선은 나중에 건조 된 것까지 도합 5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운이 풍전등화인 상황에서 백성 모두에게 이길 수 있고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한 이순신 장군의 승전보는 당시 백성들에게 얼마나 반가운 소식이었을까~
<조선왕조실록(65)> 선조 13
- 이순신, 바다를 장악하다!
이순신이 2차 출동에 나선 5월 29일,
이 때에는 전라우수영 이억기 부대, 원균 부대와 합류해 판옥선만 50척이 넘는 데다 이지스함 거북선이 앞을 이끌었다.
조선 수군은 사천포에서 왜선 12척을 모두 격파하고, 이튿날 당포에서 20척의 왜선을 깨트렸다.
거북선을 선봉에 세운 조선 수군은 이어 당항포에서 26척, 율포에서 3척을 격파한 뒤 각 군영으로 복귀하였다.
이 싸움에서 원균은 싸움보다는 왜군의 수급 확보에 혈안 이 되었다 한다.(저기도 있다~ 건져 올려~~) 원균은 그렇게 확보한 수급과 함께 장계를 올려 선조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하여간..얍삽한 늠들은 어디 가도 있어.
웃전에 잘 보이는 짓 하는 늠들은 체질이여.
소신도 없고 딸랑딸랑♪
내가 아주 뎄다.뎄어.
한편, 거듭된 수군의 참패에 경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600명으로 5만의 조선 관군을 깨트린 용인 전투의 주인공 와키자까 야스하루를 해선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와키자까의 주특기는 사실 해전이었다. 와키자까는 “이순신? 누군지 모르지만 그대의 무운도 이제는 끝이라오”라고 호언을 하며, 합동작전을 펼치라는 히데요시의 명도 무시하고 이순신과의 일전을 서둘렀다.
일본 최고의 장수라는 자부심이 너무 강했던지, 와키자까 는 왜군의 연패에도 상대를 인정할 줄 모른 채 전공에만 눈이 멀어 서둘러 70여척의 전함을 이끌고 견내량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겨 놓고 싸우는 장수 이순신은 왜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 포위한 후 몰살시켜버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순신은 7월 4일, 이억기, 원균의 수군과 결진하여 한산도 앞바다에 진을 친후, 어영담의 5척 전함을 동원해 왜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 내는데 성공했다.
한산도 앞바다로 들어 온 와키자까의 왜군은 이순신이 미리 구상해 놓은 학익진에 걸려들었고,조선 수군은 특유 의 함포사격과 뒤이은 강력한 박치기, 그리고 정밀한 마무리 공격으로 59척의 왜선을 격침시켰으며, 일본 최고 의 장수라는 와키자까는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을 치기에 급급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한산대첩으로서,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란 3대 대첩'으로 불리운다.
조선 수군은 50여일 뒤 다시 출병하여 부산포를 공격해 적선 100척을 깨트리는 전과를 올리니, 이로써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조선의 바다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한산대첩으로 인해 해전을 포기하는 등 전쟁의 구도 자체를 변경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불패의 이순신은 조선 백성들에게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 받기에 이르렀다.
<조선왕조실록(66)> 선조 14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좆)광인효현숙경영정순헌철고순[조선 왕놈들]
- 열혈남아 홍의장군 곽재우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 사대부들은 의무는 적고(병역? 그런 거 난 몰라), 권리는 무한 (벼슬하여 백성 위에 군림하고, 땅 늘리고~)했다.그 많은 것을 누리던 사대부들은 왜적이 쳐들어왔다는 소문만 듣고는 대거 도망했고, 방어의 책임을 맡은 이들도 대부분 왜적의 모습만 보고는 도망을 쳤다. 이러한 때에 사대부의 명예를 지킨 이들이 있었으니, 이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격렬하게 싸운 의병장 들이다.
최초의 의병장 곽재우는 왜적이 부산에 상륙하고 열흘이 지난 뒤 경상도 의령에서 가산을 털어 의병을 모집한 열혈 남아이다.
의령은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왜적 보급로 상의 중요 지점이었는데, 곽재우는 게릴라전으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곽재우는 적의 보급 수송선단이 지나가는 강바닥에 말뚝을 박아두었다가 적선이 여기에 걸려 전복되는 사이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왜적의 수송선단을 괴멸시키는 등 임진왜란 의 방향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곽재우는 스타의식도 매우 뛰어났다.
그는 붉은 비단옷과 백마를 타고 스스로를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 붉은 옷을 입은 하늘이 내린 장군)’ 이라 부르면서 신출귀몰하게 게릴라전을 수행하였다.
또한 홍의장군이라는 명칭이 유명해지자 여럿에게 자신과 같은 차림을 하게 하고는 여기저기에 나타나도록 하여 왜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전술을 구사했다.
거듭된 승리로 어느덧 홍의장군 곽재우는 백성들에게는 희망의 이름으로, 적들에게는 공포의 이름으로 자리를 잡았다.
임진왜란 때 활약이 컸던 의병장으로는 곽재우 외에도 고경명, 조헌, 김천일, 김면, 정인홍, 정문부 등 상당수가 있었으며, 1593년(선조 26) 정월에 명나라 진영에 통보한 전국의 의병 총수는 관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만2600 여 명에 이르렀다.
의병이 관의 지휘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무질서했던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이정암은 황해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면서 8개 항목 의 군율을 스스로 정했는데, 그 내용은 “적진에 임하여 패하여 물러가는 자는 참수한다(臨賊退敗者斬), 민간에 폐를 끼치는 자는 참수한다(民間作幣者斬)”는 등 엄격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의병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무능한 관군 대신 지역과 백성을 지키기 위해 절대적 열세의 전력으로 목숨을 바쳐 왜적 과 싸웠으며, 임진왜란의 방향을 틀 정도로 큰 공을 세운 경우가 많았으나, 대부분 마지막에는 장렬히 전사하였다.
<조선왕조실록(67)> 선조 15
- 반전의 토대
전회에서 의병의 활약과 희생에 대해 살펴 보았지만, 안타깝게도 난리통에 모든 백성이 의병이 되어 왜적과 맞서 싸운 것은 아니다.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면서 왕자들을 곳곳에 파견해 백성들을 위무(위로하고 어루만져 달램)하고 근왕병을 모집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함경도로 떠난 임해군과 순화군을 그곳 백성들 중 일부가 붙잡아 왜군에게 넘기는 일이 발생했다.
이들이 그곳에서도 백성을 수탈하기에 바빴는데다, '조사의'의 난, '이시애'의 난 이후 이곳 백성들에 대한 차별이 커 원성이 컸고, 게다가 임금이 도망갔다는 소식에 이 지역 백성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한편, 의주에 도착한 선좆새끼는 언제든지 요동으로 도망갈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러나 명은 선조의 요동행 타진에, “부득이 오겠다면 인정 상 막지는 않겠으나, 그럴 경우라도 인원을 백명 이내로 하라”라는 싸늘한 답변을 하였다.
또한, 조선의 파병요청에도, 조선이 함락된 게 아니라 앞장서서 왜군의 길안내를 한다는 의심을 하여, 여러 경로를 거쳐 현황을 파악한 후 파병하는 것으로 방침을 정했다.
그런데 이즈음 조선은 자체의 역량으로 전쟁의 흐름을 바꿔가고 있었다.
즉, 이순신의 연이은 승전과 의병들의 분전으로 조선군의 사기가 올라가기 시작했고(우리도 이길 수 있다!), 권율, 김시민 등 유능한 장수들이 지휘를 맡게 된데다, 고려 말 그리고 세종 조에 개발에 힘쓴 천자총통 등 화약무기를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왜군과 싸움다운 싸움을 할 기반을 마련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조선의 저력이 발휘된 대표적인 싸움이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이다.
왜군은 이순신으로 인해 수로를 통한 호남 진출이 좌절 되자 육로를 통한 호남 진격의 일환으로 진주성을 치기로 했고, 이 싸움에서 김시민은 진주 백성들 그리고 곽재우 등 의병과 힘을 합쳐 장장 6일간의 전투 끝에 왜적을 크게 무찌르는 쾌거를 이루니, 이로써 조선의 혼이 살아날 토대 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68)> 선조 16
- 행주대첩
드디어 파병 결정을 한 명나라.
파병 결정 후 처음 조선으로 들어온 명나라 장수 조승훈은 왜군을 얕잡아 보고 평양성을 공격하였다가 명나라군 4천 5백, 조선군 3천을 잃는 대패를 하였다.
그 후 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온 이여송은 조선으로부터 전시 작전권을 인수한 후 조명 연합군을 이끌고 곧바로 평양성 공격에 나섰다.
사실, 전쟁 시작과 함께 패배를 모르며 북진을 계속 해 온 고니시의 제 1군은 이즈음 이순신으로 인해 서해 바다를 통한 증원과 군수품 지원이 막힌 데다 조선군과 의병의 반격으로 고립을 우려하고 있었다.
이러한 차에 조.명연합군이 물밀듯이 밀려오자 기세에 밀릴 수 밖에 없었고, 결국 평양성 점령 6개월 만에 왜군은 추위와 굶주림 속에 한양으로 퇴각하게 되었다.
평양성을 탈환한 이여송은 기세를 타고 남진을 계속했다.
한편, 한양에는 함경도의 가토 기요마사 부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왜군이 집결했고, 이들은 강하게 반격하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결론을 내린 후 4만의 병력을 총 동원해 벽제관에 진을 쳤다.
평양성에서 단맛을 본 이여송은 왜군을 일거에 칠 기세로 강하게 밀어붙였으나 왜군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결국 이여송은 대패를 하고 개성으로 도망을 가 버리고 말았다.
이즈음 광주 목사 권율은 왜군이 한양에 집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양의 왜군을 견제하고 향후 명나라 군대가 한양 을 칠 때를 대비해, 2-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행주산성 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벽제관 패배로 겁을 먹은 이여송은 개성에서 내려올 줄을 모르고 있었다.
왜군은 전략상 요충지인 행주산성에 주둔한 조선군이 영 신경이 쓰였던지 무려 3만의 군사를 동원해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권율은 산성 아래에 이중으로 목책을 설치하고 포진지를 구축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고, 곧 왜군은 해일처럼 몰려들었다.
그러나 미리 준비된 화포와 다연발 신기전, 그리고 죽음을 불사하는 병사와 군민의 대투혼에 권율 장군의 지략이 더 해진 불퇴전의 전투에서, 왜군은 일곱 차례에 걸쳐 대 공세 를 펼쳤으나 모두 무위로 끝나고, 결국 왜군은 한양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왜군은 행주산성에서의 패배로 요충지를 확보하지 못해 전체 전략 운용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반면에 조선은 왜군을 조선 땅에서 몰아낼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69)> 선조 17
- 조선판 킬링필드 진주성 대학살
벽제관 패배 이후 명나라 측은 싸움 보다는 강화(세력을 더 강하게 하는 것)에 무게를 두었다. 이러한 사정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는데, 행주싸움 패배로 전황이 여의치 않다고 여긴 히데요시는
“순차적으로 퇴각하되 명과 유리한 협상을 이루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왜군은 안전한 퇴각을 위해 명나라와 담판을 시도해 결국 고니시와 심유경이 만나 명나라가 두 명의 강화사를 왜군에 보내기로 했고, 왜군은 심유경과 강화사, 임해군과 순화군을 앞세우고 퇴각하기 시작했는데, 그 퇴각 행렬은 여유가 넘치는 나들이 같은 행군이었다.
권율은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하고자 했으나 명나라측은 이를 제지했고, 명나라 군대는 왜군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추격하는 시늉만 하였으며, 왜군은 결국 안전하게 남해안 왜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들에게 히데요시의 뜻밖의 명이 하달되니, 이는 “군사를 총 동원해 진주성을 쳐서 지난 날의 수모를 갚으라”는 것이었다.
왜군은 말이 10만이지 진짜로 10만의 대군으로 진주성을 공격하기로 했고, 진주성에는 진주목사 서예원과 관군, 김천일 의병, 최경희 의병, 충청병사 황진이 이끄는 군사, 고경명의 아들 고종후의 의병 등 대략 1만명이 집결했다.
명나라 측은 일본군의 진주성 공격 시도를 막고자 협상을 시도하다 실패하자 뒤로 물러나 앉아 '강 건너 불' 갤러리 모드를 취하였다.
선조는 진주성 싸움에서 조선 병사들의 몰살이 우려된다는 보고를 받고, 명나라 측에 지원을 요청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이때는 이미 진주성이 함락 당한지 열흘이 지난 후였다고 한다.
임금이라고 하는 짓이 노상 뒷북이나 치고~
이런 써글 늠의 임금을 뭐라 하냐면...
'최저 임금'이라고 하지..ㅋㅋㅋㅋ
10만의 일본군은 6월 22일 공격을 시작하였고, 조선군은 죽기로 싸워 버텼으나, 결국 공격 7일 만인 6월 29일 병사 들은 사실상 모두 몰살을 당하고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아이고~관세음보살~인샬라~아멘~~
진주성에 입성한 일본군은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수만명의 성 안 백성을 닥치는 대로 살육하니 백성들이 흘린 피가 사흘 밤낮을 흘러 강을 만들었다고 한다. (일본군의 자축연에 참여했던 논개 누나가 왜장을 끌어 안고 남강에 투신 했다는 이야기가 야사에 나오는데, 그 때가 바로 이 때 이다)
전쟁이 발발하고 피난길에 오른 선조의 위신은 선위(임금 의 자리를 물려줌) 주장하는 상소가 여러 차례 있을 정도로 땅에 떨어졌다.(왕조 시대에 선위 요구는 반역으로 목이 떨어질 일이다)
처음 위기에 마냥 몰릴 때는 요동으로 갈 수만 있다면 선위도 할 수 있다고 하던 선조는 상황이 호전되자 선위 문제를 오히려 왕권을 강화하는 방편으로 사용하는 꼼수를 부리기 에 이르렀다.
선조는 “나는 역사의 죄인이니 선위하겠소”라고 하면, 신하 들은 이를 말리는 척, 이런 밀땅이 계속 되다가 슬그머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선위의 뜻을 거두었다. 국무총리 함해 묵겠다고 눈이 멀어서 칼춤을 추어댄 이한구처럼 조선은 중심을 못 잡고 있었다.
백성들은 왜적의 칼과 굶주림에 그 반수가 죽어 나가는데 조정의 대신들은 선위 논쟁으로 소일했고, 재미를 붙인 병신 새끼 선조는 조금만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 '툭' 하면 선위 카드를 들고 나왔다.
내 생각에 선조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악이자 최저 임금이다.
네~이놈 선조야~그때 죽은 수 많은 조선의 백성들은 비록 말은 없지만, 그 날의 억울한 역사는 기록되어지고, 후세에 전해지고 있느니라~네~이놈~
<조선왕조실록(70)> 선조 18
- 아 !!! 인육을 먹는 풍조라니
일본군이 한양을 뜬 것은 4월이지만 선조는 환도(다시 옛 수도로 돌아옴)를 계속 미루다 10월에야 한양으로 돌아 왔다.(일찍 환도했다가 왜놈한테 디질까 봐 걱정했냐? 선조야?)
전쟁의 참화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참혹했다. 전쟁과 굶주림, 역병 등으로 죽은 백성들의 시체가 들판마다 수 없이 널려 있었고, 들개와 산 짐승들의 먹이가 되었다.
한양 도성 밖에는 도성 안에서 갖다 버린 시체들이 곳곳에 산을 이루었고, 농토는 황폐화되어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굶주림이 극에 달한 백성들 사이에는 인육을 먹는 풍조 까지 생겨났다.
다음은 선조 27년 1월, 사헌부가 아뢴 내용이다.
- 기근이 극도에 이르러 인육을 먹으면서도 전혀 괴이하게 여기지를 않았다. 길가에 쓰러져 있는 굶어 죽은 시체에 온전히 붙어 있는 살점이 없을 정도이며, 심지어는 산 사람을 도살해 내장과 골수까지 먹은 일도 있었다.
이건 뭐 조선판 고난의 행군도 아니고, 이 대목에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선조놈에게 또 욕을 안 할 수가 없다~ 얍삽한 인간아 인간아~와 사노?
사정이 이런데도 조정은 백성을 구제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데 힘을 기울이지 못했고, 군사 역량은 오히려 약화되었다.
명의 참전 이전에 이미 자력으로 전세를 반전시켰던 조선군, 목숨을 아끼지 않는 의병, 이 모든 것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조정의 무대책으로 이러한 자발성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 중 일부는 세력을 형성해 약탈을 하는가 하면 더러는 의병의 행세를 하기도 하고, 또한, 신망 높은 의병장 김덕령마저 약간의 오해가 있자 자세한 조사 도 없이 목을 쳐버리니, 의병활동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으며, 이 후 용력이 있는 자는 모두 숨어 버리고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게 되었다.
씰데 없이 나서지 말아야 하느니..--;
<조선왕조실록(71)> 선조 19
- 파탄이 난 적장들의 대 사기극
진주성 대학살을 벌인 일본군은 부산 인근 왜성으로 모두 들어갔고, 명나라 측은 진주성 대학살을 전혀 문제 삼지 않은 채 강화(힘을 더 강하고 튼튼하게 함)에 열을 올렸다. (명군이 조선에서 벌인 약탈,강간 등 만행은 왜군 못지 않았다)
조선 조정은 일본군의 진주성 대학살에 대한 보복은 생각 도 하지 못하고 그저 두 나라가 벌이는 강화 협상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강화 협상의 두 주인공인 명나라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는 죽이 잘 맞았고 형세판단도 현실적이었다. 즉, 심유경은 “남의 나라에 와서 목숨 걸고 계속 싸울 필요 가 어디에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했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 상태로 명나라 정복은 커녕 조선 지배도 어렵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 황제와 일본 히데요시의 강화 조건은 이 두 명의 생각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명나라 황제의 강화 조건은 히데요시가 항복하고, 즉시 철군하며, 영원히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히데요시의 강화 조건은 명나라가 황녀를 일왕의 후궁으로 보내고, 조선 4도를 일본이 지배하며,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이면 강화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미 강화 는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고, 양국에 강화를 전제로 한 보고 (강화를 위한 사실상의 허위보고)와 조치가 계속 이루어진 상태였으므로, 이제 와서 강화가 되지 않을 경우 심유경과 고니시의 목이 떨어질 판이었다.
이에 심유경과 고니시는 기상천외한 사기극을 벌이기로 모의하였다.
즉, 고니시가 히데요시의 항복문서를 가짜로 만들어 심유경에게 전달하고, 심유경은 명나라와 조선의 사신을 항복 사절인 것처럼 히데요시에게 보내는 등의 방법으로 양쪽을 속여 일단 강화를 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1월에 중국을 출발한 명나라 사신이 11월에 이르러 서야 겨우 부산에 도착할 정도로 나라 간의 연결 고리가 느슨하고, 그럴 듯한 통신수단도 없었기에,이런 사기극의 시도가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심유경과 고니시의 위와 같은 사기극은 히데요시의 면전에서 발각되었고, 불같이 화가 난 히데요시는 다시 조선침략을 결정했으며, 고니시의 목을 베는 대신, 고니시 에게 마지막 기회를 부여하였다.
에휴~ 예나 지금이나 왜놈에게 당하기만 하고, 부칸애들은 5차 핵실험 한다고 협박공갈이나 하고, 짱깨들은 안보주권 이니 뭐다해서 샤드 가지고 한반도를 섭정하려고 덤벼 들고~
우방 미국은 숫캐 뭐 자랑한다고~ B2, B52, 핵잠수함, 핵 항공모함, F22같은 전략자산무기들 동네 한바퀴 돌듯 폼만 잡고 가고, 괜히 한반도 정세에 우왁이나 놓고, 우리는 전시 작전권도 없고~
조선의 여.야당은 아직도 붕당이다, 패권이다하여 안보 법안 민생법안 하나 제대로 통과못하고~
일본놈들은 안보에는 여야 할 것 없이 똘똘뭉쳐 교과서 76%가 독도를 저거 꺼라고 빡빡 우기고~ 도대체 조선이 앞으로 몇 번을 더 망해야 천년 묵은 이 당파싸움을 그만 할지~ 참으로 아둔하다. 한 여자는 기왓집에서 배신의 정치 타령만 하고~참으로 한심한 나라~
88올림픽 때~노래가 생각난다.
원하는것은 무엇이든지 할수가 있고(돈으로만~)
뜻하는것은 무엇이든지 될수가 있는(빽으로만~)
아~우리~조선왕조~아~우리 조국
<조선왕조실록(72)> 선조 20
- 이순신을 제거하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 사기극을 벌인 고니시의 목을 베지 않는 대신, 고니시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 지난 원정의 실패는 바닷길과 호남을 장악하지 못한데 있다. 조선 수군을 박살 내고 호남을 장악하라. 그리고 조선 백성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신속히 남해안의 성으로 복귀 하라. 그러기를 여러 번 하다 보면 조선 왕이 강화를 애걸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왜군과 명군끼리 강화가 되어가던 차에 일본이 다시 침략을 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이다. 또 다시 조선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조선 수군 격퇴, 호남 점령이라는 양대 과제를 명 받은 일본군 장수들에게 이순신의 제거는 최우선의 공통 과제였다.
히데요시로부터 마지막 기회를 부여 받은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짜기에 골몰했고, 드디어 계책을 마련하였다.
조선 침략 당시 제1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제2선봉장, 가토 기요마사는 이웃한 지역의 영주들로서, 상인 출신인 고니시는 무장 출신인 가토를 "무식한 놈"으로, 가토는 고니시를 "얍삽한 놈"으로 치부하는 앙숙 관계였다.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조선에도 많이 전해져서, 가토는 전쟁 광인데 반해 고니시는 강화를 하고 싶어하므로, 고니시는 괜찮은 자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러나 고니시가 누구인가?
일본군 제1 선봉장으로 부산에 상륙하여 부산성, 동래성 에서 조선판 킬링필드를 연출한 살인마 중의 살인마가 바로 고니시 유키나가이다.
고니시는 가토와의 관계를 이용해 이순신을 제거하기로 하고, 평소 선이 닿아있던 간자 김응서에게 장계를 올리도록 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 고니시가 사람을 통해 전하기를,
“강화가 안 되는 것은 가토때문이니 가토를 제거하면 나의 한도 풀리고 귀국의 근심도 사라질 것이다. 모월 모일 가토가 가덕도에 정박할 것이니 잠복했다 기습해 처치하시오”라고 하더이다.
일본의 낚시밥을 덜컥 문 쪼다 선조는 곧 이순신에게 가덕도로 나아가 가토의 선단을 무찌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선조로부터 출정 명령을 받은 이순신은 일본군의 흉계를 단 번에 간파하고는 선조의 명을 들을 수 없다는 의사를 밝혔다.(그런데 사실은 이순신에게 가토를 치라는 명령을 내릴 당시 이미 가토는 군대를 이끌고 상륙한 상태였다)
<조선왕조실록(73)> 선조 21
-이순신 백의종군하다-
이순신이 일본군의 흉계를 간파하고 가덕도 출전을 거부 하던 그 때에 원균의 장계가 도달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신의 생각으로는 수백 척의 수군으로 바다를 질러나가 큰 바다에서 위력을 보이면 해전에서 이기지 못해 겁을 먹고 있는 가토는 필히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입니다."
선조는 이순신의 출정 불가론을 자신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간주하고 이순신을 제거하는 의견을 수차례 밝혔고, 조정은 선조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뭐 병신 중에도 이런 병신이 없다. 선조가 '지눈지찔' 을 해도 유분수다.
"이제는 이순신이 가토의 목을 베어 온다 해도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선조)
"이순신은 성품이 강하고 뜻을 굽힐 줄 모르는데, 무릇 장수는 뜻이 차고 기가 오르면 반드시 교만하기 마련이옵니다."(유성룡)
"위급할 때 장수를 바꿀 수 없사옵니다." (정탁)
뜻을 굽히지 않은 이순신은 곧 한양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게 되었고, 선조는 이순신을 죽이고자 했다.
그러나 정탁의 “군사상 문제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으니, 살리시어 후일에 대비하여야 합니다”라는 의견이 받아들여져, 다행히도 이순신은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백의종군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을 통제사로 임명한 조정은 수군이 강력하므로 출전만 하면 뭔가 될 것이라는 환상에 젖어 있었다.
조선의 수군이 강한 게 아니라,
이순신의 수군이 강한 것인 줄 모르고...
조선 수군은 안중에도 없던 이들이 이순신이 연승을 하자, 조선 수군이 원래부터 강군이었던 것으로 착각을 했던 것 이다.
선조와 조정은 원균에게 가덕도로 나아가 가토의 왜군을 칠 것을 명했으나, 휘하 장수들은 “불가능한 작전입니다. 장수가 전장에 있을 때에는 임금의 명도 받들지 않는 법입니다”라고 하며 출정을 반대했고, 원균 자신도 이 작전의 성공 가능성이 얼마나 적은지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제꾀에 제가 넘어간 원균, 출정을 거부할 명분이 없었고, 결국 그 동안 건조된 전선까지 총 동원된 최대 규모의 출전을 감행하였다.
원균은 척후선, 사전 정보도 없이 강행군을 거듭했고, 적선 몇 척이 보이면 유인선인지도 모르고 전력을 다해 쫓곤 하다가 지칠 대로 지쳐 7월 16일 새벽 칠천량에 정박했다.
이 때 1,000여 척의 일본 적선이 포위해 들어오니, 조선 수군은 싸움다운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무참히 전멸 했고, 원균은 육지로 도망가다 죽음을 맞이했다.
일본군이 유일하게 두려워했던 막강 조선 수군은 이렇게 칠천량 바다를 밝히며 사라져 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74)> 선조 22
- 명량해전(1)
백의종군의 길을 가던 이순신에게 어머니의 부고가 전해 졌다. 노모를 걱정하는 마음을 난중일기에 가득 채울 만큼 효자인 이순신.
그는 1597년 4월 19일자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일찍 집을 나서야겠기에 어머니의 빈소 앞에서 울며 하직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어서 죽는 것만 못하다.>
그리고 곧 그동안 애써 키운 분신과도 같은 자신의 수군이 모두 사라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며칠 뒤 이순신은 선조로부터 3도수군 통제사로 복귀 하라는 교서를 받고 곧바로 남해안으로 떠났다.
에휴~ 우리 이순신 장군 사람도 좋지~
내 같으면 마~확~그냥~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임명하며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한다.
"출병을 독촉해 이런 일을 했으니, 이는 사람이 아니고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엥? 우리 장군님이 오죽 하면~ 이런 썩을~)
이순신은 보름 동안 연안 고을들을 샅샅이 훑어 흩어진 장수와 병사들을 불러 모았고, 군량과 무기들도 마련 했으며, 병사들도 백성들도 강한 의지를 보였다.
(장군님과 함께 라면! 어째 구호가 북조선 구호 같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칠천량 전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이 휘하의 함대를 이끌고 진영을 이탈함으로써 판옥선 열두 척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3도 수군통제사로 삼기는 했지만, 수군이 무너진 마당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여겨, 선조 는 이순신에게 수군을 파하고 육군에 복속하라는 명을 내렸다. (지랄도 가지가지 한다. 이런 게 임금이라고~)
이에 대한 이순신의 답변이 유명하다.
"임진년으로부터 5,6년 동안 적이 감히 충청, 전라도를 바로 찌르지 못하고, 퇴각에 까지 이르게 된 것은 우리 수군이 그 길목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선의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가벼히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신에게는 아직 열 두 척의 배가 남아있나이다. 미천한 신하 이순신은 죽지 않았나이다.}"
그 유명한 상유십이(尙有十二) 미신불사(微臣不死) 이다.
이순신은 왜적이 함대를 총동원해 남해를 접수하려 들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단 12척으로 얼마가 될지 모를 엄청난 규모의 일본군을 격퇴할 특단의 방안을 강구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순신은 벽파진에 진을 치고 왜군 함대를 불러들였다. 과거 한산도에 위풍당당하게 진영을 구축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초라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왜군은 열두 척에 불과한 조선 수군을 짓이겨 버림으로써 지난날의 수모를 한 번에 갚고자 했고, 이를 위해 300척의 배를 동원하였다.
왜군이 어란진에 도착하자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출사표를 던졌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이길 것이요, 살려고 한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또 한 사람이 길목을 막아 지켜도 능히 천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다.' 했는데, 이곳이 바로 그런 곳이다. 울둘목에서 적을 기다려 모조리 수장시키고야 말겠다."
바야흐로 명량해전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두둥~~♪
<조선왕조실록(75)> 선조 23
- 명량해전(2)
이순신의 판옥선은 한 척이 더해져 13척, 백성들의 어선 100여 척을 전선으로 위장해 후미에 배치 하였다.
왜군 함대는 물살이 순방향인 때를 선택해 급격한 조류를 타고 울둘목을 일거에 통과해 벽파진에 진을 친 조선수군을 박살내고자 하였다.
또한 설령 울둘목을 조선군이 막아선다 해도 빠른 조류를 타고 대규모 선단이 진격한다면 몇 척 안 되는 조선 수군이 견딜 수 없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함선이 많아도 해협이 좁아 한꺼번에 나아갈 수 있는 수는 제한될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이순신이 명량해협을 전장으로 선택한 첫 번째 이유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선 함대의 규모에 겁을 먹고 뒤로 빠지려는 휘하 장수들이었다.
이순신은 초요기(招搖旗 - 군사가 전진하거나 행진할 때에 대장이 장수들을 부르고 지휘하던 깃발)를 올려 장수를 부르고는 다음과 같이 독전하였다.
"군법에 의해 죽고 싶은가, 도망가서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울둘목에서는 적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으니 이곳만 죽기로 봉쇄한다면 승산이 우리에게 있다. 나와 함께 싸워 한 번이라도 패한 적이 있더냐?"
조선 함대는 역방향의 물살에도 견딜 수 있도록 배를 횡으로 세우고 특수 제작한 닻을 내려 물살을 버티어 냈다.
드디어 어란진에서 출발한 133여 척의 왜군 함대가 강한 순조의 물살을 타고 10-15대씩 대열을 이루어 울둘목을 최대한 빠르게 통과하기 위해 명량해협에 들어섰다.
그런데 조선 판옥선이 역방향의 물살을 당당히 견디며 배 를 고정시킨 채 우뚝 서 포격을 가하자 왜군은 몹시 당황하기 시작했다.
좁은 해협에 줄줄이 들어선 일본 함대는 조선 수군의 좋은 표적이 되고 말았다.
조선 수군이 왜선 선두를 함포로 두들기자 후미의 왜선이 순차적으로 추돌하였고, 이로 인해 왜선의 진영은 급격히 허물어졌다.
급한 순조(조수의 흐름)를 타고 빠르게 전진하려던 계획이 오히려 급한 순조로 인해 모두 무위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조선 수군이 울둘목을 가로막고 버티며 선두의 배를 집중 타격하는 방식으로 왜선과 대치하는 사이, 드디어 조류의 흐름이 왜군 쪽으로 바뀌었다.
왜군은 조류의 흐름이 바뀔 때까지 이곳에 발이 묶여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순신이 명랑해협을 전장으로 선택한 두 번째 이유이다.
비록 규모는 상대가 되지 않았으나, 가능한 모든 역량을 총 동원한 함포 사격에 빠른 조류와 강한 판옥선을 이용한 충돌 공격, 숨 돌릴 새 없이 몰아치는 자신감에 찬 거친 공격에 일본 수군은 견딜 재간이 없었고, 마침내 왜군은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명량해전에서 왜선 130여 척 중 30여 척이 격침 되었고, 60여척이 쓸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되었으며, 최소 1,800명의 왜군이 죽었고, 조선의 전선은 하나도 격침되지 않았으며 100여 명의 전사자만 발생했으니, 실로 세계에 유례가 없는 해전이었다.(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이 명랑 해전을 치른 후 “참으로 천행이었다”고 수 차례 적고 있다)
명량해전으로 인해 일본군의 수륙병진작전 이 모조리 무산 되었고,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분산되어 왜성을 쌓고 농성전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로써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은 계속 전쟁을 수행할 동력을 잃게 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76)> 선조 24
큰별이 지다!
정유년 2차 침략시 히데요시의 목표는 조선땅의 절반인 4도를 확보하는 것이었고, 히데요시는 이를 위해 조선인의 무자비한 살상을 공식적으로 지시하였다. 무자비한 살상으로 조선 국왕의 항복을 받고자 한 것이다.
이에 일본군은 한강 이남까지 갔다가 다시 남하하면서 무자비한 살육을 감행하였고 그 징표로 일본에 보낸 조선인의 코가 산을 이룰 지경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명량에서 이순신에게 패했다는 소식과 명나라의 2차 파병 소식이 전해져 왔고, 여기에 예상치도 않게 히데요시가 병으로 죽기에 이르자, 일본군은 철수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명나라 군대도 이번에는 도망치는 일본군을 제대로 박살 내자는 의지를 불살랐으나(사기극 주범 심유경의 죽음도 고려한 것임), 울산성, 사천성, 순천 왜교성 싸움에서 조명 연합군은 모조리 참패하고 말았다.
이에 명군은 다시 일본군의 철수를 용인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군도 명군에게 뇌물을 보내는 등 작업을 통해 안전 철수를 보장 받았으며, 선조도 일본군의 철수를 용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병신~끝까지 지랄을 해요~
그러나 이들에게 큰 문제가 발생했으니, 이는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은 명군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결코 적을 살려 보낼 수 없다”며 강경하게 길목을 지켰고, 결국 사천성의 일본 해선이 고니시군을 구원하기 위해 출동할 수 밖에 없게 되자, 이순신은 노량 앞바다에 진을 치고 일본군을 모조리 수장시킬 준비를 하였다.
드디어 노량 앞바다에서 최후의 싸움이 벌어졌고, 조선 수군은 몇 배의 왜적을 크게 무찔렀으나 눈 먼 총탄이 이순신의 가슴을 파고 들고 말았다.
ㅠㅠ(싸움이 급하다.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
싸움은 대승으로 끝났으나, 승리의 환호성은 이내 통곡으로 바뀌었고, 오래지 않아 그 통곡은 남도 전역을 뒤덮었다.
1598년, 7년에 걸친 전쟁이 끝났다.
일개 장수로서 완벽하게 전쟁에 대비했고, 임금과 신하들 그리고 다른 장수들이 도망가기 급급할 때 함대를 이끌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고 23회에 걸쳐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이끌어 낸 이순신!
그토록 무섭고 강력한 일본군이 이순신이라는 이름만 듣고도 두려움에 떨었고, 부하들은 물론이고 백성들에게까지 진심으로 존경을 받았던 무장 이순신!
실로 큰 별이 졌다.(노량에서 전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은 선조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리라 보는 관점이 많다)
인구 3분의 1 가량이 줄고 농경지의 반이 소실 되었으며, 인육을 먹는 극단의 풍조까지 생길 정도로 측정 불가의 고초를 준 왜란이 종결되었으나, 백성을 보호할 책임과 의무를 가진 선조는 대국민 사과는 커녕 논공행상에 있어서 마저 후안무치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나라를 보전한 공을 명나라에 돌리는가 하면, 자신을 호종(보호하며 따라 다님)한 자에게는 엄청난 선물을 주었다. 반면에 조국 수호에 소중한 목숨과 가산을 바친 의병장들과 백성들을 애써 무시했고, 장수들에 대한 평가도 불공정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 수록 그들의 고귀한 정신과 활약상은 점점 더 빛을 발해 오늘을 사는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있으니, 이것이 역사의 교훈이라 하겠다.
그 당시의 전란으로 인구가 1/3로 줄었고, 당시 인구가 500만이었다니, 그 중에 300여 만명이 넘게 죽임을 당 했다는 말이다.
여자는 안죽이고 남자만 죽였다는 가정으로 따져보면 남자의 5/6가 죽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전대미문의 홀로코스트에 그 후 우리가 대비책을 세운 것 은 하나도 없다. 그저 아직도 일본을 미워하고 깔보고 우습게 보는 유전적 원한 외에는~
그러다 한일합병으로 나라마저 먹히고~
우리에게는 나쁜 일본이지만 당시 제국주의가 횡행하던 시절의 일본의 행위는 국제사회에서 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들의 밥이 된 우리가 빙신이었지
아직도 실제적 힘이 없는 상태에서 위안부 문제, 갸들의 역사교과서 문제를 외교적 전략으로 지그시 누르지 못하고 전 국민의 공분만 크게 하며 국제사회에서 볼 때는 패자 코스프레만 반복하고 있다.
한국이 유엔 인권회의 의장국으로 선출 되었으니 전쟁범죄 의 여성인권문제로 부각시켜 그들의 파렴치함을 전세계가 손가락질하게 분위기를 만들어서 그들 스스로 사과하게 만드는~~~ 그 정도는 되어야 일본이 조금 움직일 뿐~~
독도를 타겟으로 다시금 침략 본성을 드러내는 일본보다 우리가 나은 것은 무엇일까? 자문해 본다.
극일의 길을 찾아야하는데 국토도 3.8배 크고, 인구도 2.5배 많고 경제, 군사력면에서도 비교 자체가 안되고~ 마음만 먹으면 핵폭탄 몇 백개 만들 분량의 플류토늄도 보유하고, 당장 항공모함 건조할 수도 있는....밉지만 이미 벅찬 나라.통일이나 되야 맞짱 뜰까.
통일이 되도 노상 저짓꺼리 이상으로 반복할 텐데..에휴 ㅜㅜ
그저 지진으로 바닷속으로 가라앉기만을 천년만년 기다려??!
대책없는 반일만 앞세울 것이 아니라 극일의 비책을 강구 하는 제2의 이순신 장군님은 어느 곳에 계실런가~~~
아~~ 이 아침~
가슴이 쓰리도록 슬프다.
패자에게 복수심이 사라짐은 또 다른 패배의 운명을 예고 할 뿐이다!
지금 당장의 주적은 북한이다. 300미리 방사포가 마하7의 속도로 저고도로 날아와 계룡대를 때리면 현재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다.
또한 우리가 킬체인으로 북한을 선제공격하는데 필요한 시간은 25분, 근데 북한의 고체연료 미사일은 10분~15분 이면 발사가 가능하다고 한다. 수조원이들어간 킬체인이 무능화가 되는 순간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여야는 안보대책은 커녕 제 밥그릇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국민은 뒷전이라는 뜻이지.
우리의 여야는 전선에서 국군이 죽어나가는 6.25때도 부산에서 지지고 볶는 당쟁을 했다. 미래가 아주 뻔히 보이는 코리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