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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야 할 때(롬13:11~14)
* 오늘 설교 제목은 ‘깨어야 할 때’이다. 깨다 혹은 깬다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가장 일상적으로 쓰는 의미는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이다. 바울도 오늘 본문에서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압니다”라면서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라고 강조한다. 잠에서 깨는 것은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 보통 ‘깨다’라는 말은 단순히 잠을 더 이상 자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일어난다는 말은 잠자리 밖으로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영어에서는 이를 ‘wake up’과 ‘get up’으로 구분한다. 아침에 아이들(특히 준오)을 깨울 때 “일어나라”고 하면 눈만 뜬 채 아까 일어났다고 우깁니다. 그건 깬 거지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해도 5분, 10분 더 있다 일어난다.
* 아마 저나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명종이 울리는 순간 잠에서 깨어나지만 그때 바로 아무 주저 없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준오처럼 5분, 10분 더 버티다 마지못해 일어나거나 다시 잠드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저는 6시에 일어나야 할 경우 자명종을 6시와 6시 10분, 20분, 30분 등 2~4번 맞춰 놓는다.
* 보통 처음이나 두 번째 알람에 일어나지만 정말 피곤한 경우에는 세 번째나 네 번째 알람까지 버티다 겨우 일어나는 경우도 가끔 있다. ‘깨는 시간’과 ‘일어나는 시간’이 같은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깨다’라는 말은 이외에도 어떤 것을 부수는 행위를 나타내기도 한다. 잠에서 깬다는 말도 따지고 보면 잠이라는 상태를 부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는 <데미안>의 유명한 구절에서처럼 ‘깨다’는 잠과 같은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한 행위이다. ‘깨다’의 수동태는 ‘깨지다’인데 이는 지다, 패배하다는 말의 속어처럼 쓰이기도 하지만 깨치다, 즉 깨우치다로 연결되기도 한다.
* 깨달은 사람은 잠과 같은 상태, 즉 고정관념이나 오랜 습관 등을 깨는 사람이다. 낡은 사고와 관념을 깨어버려야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라는 바울의 말은 깨달음을 얻어야 할 때가 되었다는 말의 은유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이 말이 오늘 설교의 제목이자 핵심이다.
* 정통/근본주의 기독교에서는 깨달음보다는 회개와 구원을 강조한다. 그것도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지하는 타력 구원을 강조한다. 이 경우 교인들이 할 일은 열심히 믿고 충성하는 것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라 불렸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에서 독생자로, 다시 하나님으로 격상되어 고백의 대상, 즉 케리그마로 선포된다.
* 그런데 기독교에는 그런 줄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케리그마화되기 이전의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들은 기독교의 또 다른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여기서 누가 수적으로 우세하고 열세하냐는 중요하지 않다. 진리는 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도 생전에 지배체제에 대해 절대적 열세였다.
* 역사적 예수를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그것을 따름으로 인한 삶의 변화이다. 이는 예수의 가르침으로 인한 깨달음, 즉 잠에서 깨는 행위와 그 깨달음으로 인한 변화, 즉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행위로 비유할 수 있다. 예수의 가르침 중 첫 번째는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 1:15)이다.
* 이를 마태복음은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4:17)”라고 변경(축소)한다. 이 두 복음서가 전하는 ‘회개’는 제가 강조하는 ‘메타노이아’이다. 이는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 다짐하는 정도가 아니라 가장 깊은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의 변화’ 즉 전면적인 의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에피스트로페’는 행동의 변화를 의미한다.
* 그런 전면적인 의식의 변화는 곧 깨달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런 전면적인 의식의 변화보다 아주 쉬운 길을 선호한다. 즉 예수처럼 살지 않아도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그래서 천당에 갈 수 있다)는 사영리 중심의 신앙을 받아들이고 고백한다. 깨닫기보다는 믿기를 선호한다는 말이다.
* 그런데 제대로 믿기 위해서는 제대로 깨달을 필요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많은 교회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데 정말 예수 믿고 구원받는 길이 그처럼 간단한 걸까. 그렇다면 왜 역사 속의 성인과 수도자들은 물론 현대의 신앙인들은 그저 믿기만 하면 될 것을 그토록 고뇌하며 몸부림치는 것일까.
* 제가 매주 주보에 싣는 백성호 기자의 글을 보면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믿는다’의 의미는 그리스어로 ‘피스티스(Pistis)’ 즉 ‘신뢰하다’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지난 주 주보에 실린 글이니 읽으신 분은 기억하실 것이다. 백 기자는 미국의 저명한 기독교 미래학자 레너드 스윗 박사에게 이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는데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믿는다’는 서로가 서로를 아는 걸 뜻한다. 남편이 아내를 알고, 아내가 남편을 알듯이 말이다. 그건 아주 ‘관계적’인 의미다. 그런데 많은 교회가 그걸 믿어야 하는 신앙의 원리로 바꾸어 버렸다. 사람들은 기독교 교리만 믿으면서 ‘믿는 사람(信者)’이라고 말한다. 예수를 믿는다의 뜻은 그런 게 아니다.”
* 많은 기독교인들이 삼위일체나 부활 등 예수에 대한 교리를 믿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에 대한 교리가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을 믿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믿음이고 그런 올바른 믿음은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깨달음이 있을 때에 가능해진다.
* “믿습니까” 하면 “믿습니다”라고 대답하고 그것이 예수를 영접해 구원으로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치는 방식으로는 도저히 그런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다. 2012년 3월 상원사에서 진부 가는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찻집에 들렀는데 평소 접할 기회가 별로 없는 불교 서적만 잔뜩 꽃혀 있기에 이것도 인연이다 싶어 책 한권을 골라 꼼꼼이 읽은 적이 있다.
* 그런데 선요, 고봉 원묘 화상이라는 분의 책인데 한 구절이 마음에 팍 하고 들어왔다. “믿음이 십 분이면 의심도 십 분이고, 의심이 십 분이면 깨달음도 십 분이다.” 금방 믿게 되면 금방 의심하게 되고, 의심하는 시간이 긴 만큼 깨달음의 시간도 길어진다는 말이다. 쉽게 믿고 쉽게 의심하는 것과 길게 의심하고 오래 믿는 것 중 어느 것이 바람직할까?
* 의심하지 말고 무조건 믿으라는 대다수 교회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주장이라 신선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믿음과 의심과 깨달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지 않고 무조건 믿으라는 강요는, 깨달음과 관계없이 무조건 외우라고 닦달하는 주입식 교육의 병폐일 뿐이다.
* 실제로 중세 기독교에서는 성경이나 교리에 대한 질문 자체가 금지되기도 했다. 지금도 대다수 현대 교회에서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성경으로 답할 수 있는 경우로 한정된다. 질문 또는 의심은 믿음의 부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는 교인들은 아멘으로 화답하는데 익숙하고 조금이나마 생각 있는 교인은 교회를 떠나거나 대안을 모색한다.
*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길이 꽃가마 타고 가는 비단길이라고 약속한 적이 없다. “언제나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요 15:4)거나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 10:38)면서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27)고 말했을 뿐이다.
* 그래서 바울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 2:19)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피스티스(Pistis)’ 즉 ‘신뢰하다’로 연결되는 믿음은 입으로만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행위를 통해 완성된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라면서 그 결과로 나타나는 변화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 바울은 먼저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권면한다. 오늘 주보를 보면 이 구절이 들어간 그림을 실었는데 영어로 armor of light라고 되어 있다. 현대영어성경에서는 이를 “be ready to live in the light”라고 번역하고 있다. “신앙(믿음) 안에서 살 준비를 하라”는 말이다. 훨씬 더 이해하기 쉬운 번역이다.
* 바울은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 즉 믿음 안에서 사는 사람은 밤이나 낮이나 항상 밝은 곳에서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호사한 연회와 술 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 등에 빠지는 것이다.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이 성령의 9가지 열매인 것처럼 이는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다.
* 14절의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라는 14절 역시 현대영어성경에서는 “여러분이 입는 옷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 하십시오(Let the Lord Jesus Christ be as near to you as the clothes you wear)”로 번역한다. 항상 입는 옷처럼 예수를 가까이 하며 그 길을 따르라는 말이다. 올해 우리 교회 표어와도 비슷한 의미이다.
* 지난 주일 밤차를 타고 수원까지 갔다. 2박3일 동안 세미나에 참석하고 큰딸까지 만나고 목요일에 돌아오면 바로 설교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산에 갈 시간이 없어 세미나 참석 전 수원과 의왕에 있는 산들을 오르기 위해서였다. 새벽 3시 45분에 수원에 도착해 화성까지 걸어가 성벽을 타고 걸은 후 광교산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 새벽이라 적막하기만 할 줄 알았던 수원역 앞에는 의외로 사람들이 많았다. 생각해보면 서울도 비슷했던 것 같다. 화성까지 걸어가는 동안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과 마주쳤다. 한 부류는 날이 저문 줄도 모르고 그때까지 술을 퍼먹은 사람들이었다. 다른 부류는 밤일을 마치고 돌아오거나 새벽일을 하러 나가는 사람들이었다.
* 개중에는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교회로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첫 번째 부류는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는지는 고사하고 잠자리에 들 때가 한참 지난 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두 번째 부류는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를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전자가 될 수도 있고 후자가 될 수도 있지만 후자가 되기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 깨어나야 할 때를 아는 사람이 눈을 뜨고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법이다. 깨어난 사람은 깨달은 사람이다. 깨달은 사람은 이전의 잘못된 습관과 관념, 행실을 헌옷 벗듯이 벗어버리고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새 옷을 입는 사람이다. 새 옷을 입게 되면 더러운 것이 묻거나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하듯 우리의 행실도 그러해야 할 것이라 믿는다.
* 지난주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뜬금없이 김정남이 암살됐다는 소식도 전해지고 이재용 삼성부회장이 결국 구속됐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렸다.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은 사필귀정이라 여겨지지만 김정남의 암살은 뭔가 의혹의 여지가 많은 것 같다. 처음에는 북의 소행이라더니 국제암살조직의 소행이거나 중국의 소행일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 이미 세상은 조금씩 바뀌고 있는데 아직도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박근혜와 최순실이 국정을 농단한 증거가 백일하에 드러났는데도 탄핵을 최대한 지연시키려 온갖 꼼수를 동원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부류들이다.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운동본부(탄기국)’은 어제 ‘국민저항본부’를 발족했다고 한다.
* 5월 광주항쟁의 진상이 밝혀진 뒤에도 북한특수부대의 개입 운운하던 이들은 박근혜의 실정을 비판하는 언론이 북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미 새 시대를 밝히는 새벽의 여명이 밝아지고 있는데 아직도 깨어날 때와 일어날 때를 구분하지 못한 채 허우적대고 있는 모습을 보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닌 것 같다.
* 손석희 사장은 지난 주 앵커브리핑에서 최근 개봉한 영화 <컨택트>를 소개했다. 지구에 온 외계생물체와의 소통임무를 맡게 된 언어학자가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살아온 두 생명체 간의 불가능해 보였던 소통을 성공시키는 영화다. 그런데 같은 문자와 언어를 쓰고 있는 우리들은 외계인들처럼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 여긴다.
* 물론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분명 한쪽이 정상이고 다른 한쪽은 심각할 정도의 비정상임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이런 상황이 진실의 문을 열기 위해 이미 깨어난 사람들과 아직 거짓의 문 안에 갇힌 채 깨어나지 않은 사람들 간의 대결이라고 생각한다. 참(진실)과 거짓, 빛과 어둠, 선과 악의 대결일 수도 있다.
* 물론 한쪽이 절대선이고 다른 쪽이 절대악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짓과 어둠, 악한 세력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지만 우리의 동족이고 이웃이다. 때문에 그들이 깊은 잠에서 깨어 무엇인 참(진실)이고 선인지 분간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은 먼저 깨어난 사람들의 몫일 수 있다. 참된 신앙인의 과제일 수도 있다.
*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깨어야 할 때’로 할까 ‘깨워야 할 때’로 할까 고민하다 본문의 내용에 맞춰 전자로 정했지만 후자 역시 필요한 부분이다. 먼저 깨어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깨울 수 있다. 우리는 깨어난 것으로만 만족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깨우는 역할도 수행해야 한다. 선각자들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 역할은 말이 아니라 삶의 변화로 이뤄진다.
* 예수는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오는 사람이라야 나에게 ‘합당’하다”고 말했다. 우리 스스로가 이전의 고정관념과 잘못된 습관, 행실에서 벗어나야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아직 잠들어 있는 이들을 깨워 그 길을 같이 가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전도이고 선교이다.
* 그 방법은 한두 가지로 정해져있지 않고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합당한 방식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 원칙은 분명하다. 미움이나 증오가 아니라 사랑과 연민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나는 아침에 준오를 깨울 때 사랑하는 마음으로 깨우지 미워하는 마음으로 깨우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누군가를 그렇게 깨워야 할 줄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