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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트로트이 기원 -윤심덕 채규엽 -
우리의 전통가요를 사람들은 대개 "트로트(Trot)"라고 하는데, 이 트로트는 일본이 창안한 음악이며, 우리나라의 트로트는 그들 음악의 아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결론부터 말하면, 트로트는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 아니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두 나라에서 창작되어 불리어지기 시작한 음악이다. 서양 음악이 도입되면서, 서양 음악에 일본이나 한국 고유의 정서를 가미하여 새롭게 창작한 음악이 트로트다.
트로트라는 이름은 일본의 "엔까(演歌)"의 창시자로 알려진 고가마사오(古賀政男)가 붙인 이름이다. 그래서 트로트가 일본에서 건너온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트로트란 사전적인 의미로는 "(바쁜 걸음으로) 뛰다"는 의미를 갖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산보(散步)하다"는 의미로도 쓰이는 단어다.
현재의 트로트는 거의 대부분 4/4박자다. 그러나 일본 및 우리나라에 전파된 초창기의 서양 음악들은 대개 2/4박자의 행진곡(March) 또는 3/4박자의 왈츠(Waltz)다.
일본에 서양악이 처음 소개된 것은 1603년 에토 막부 이후 막번 체제의 봉건사회가 확립될 무렵, 서양 선교사들에 의한 가톨릭과 찬송가가 전파될 때이다.
1639년 가톨릭교도들에 의한 반란으로 탄압을 받기는 했어도, 민가에서는 카톨릭의 보급과 함께 찬송가와 서양 민요에 가사를 만들어 부르는 서양 악식이 지속되었다.
한편 이미 554년경에는 백제의 음악이 일본에 전해져, 일본의 생활 속에 깊숙이 영향을 미쳤고, 이 백제의 음악을 일본 사람들은 "구다라가꾸(久太良樂)"라고 불렀다.
엔까가 생겨나던 1920년경, 일본은 가깝게는 백제의 음악과 조선의 음악의 영향을 받고 있었고, 멀게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 세계열강의 음악과 맞닿아 있었다.
그래서 일본의 가요는 초기에 찬송가나 서양 민요에 가사만 바꿔 부르는 형태로 유행하다가, 서양 음악을 공부한 유학생들이 귀국하면서 창작가요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초창기 작품들은 대부분 행진곡 풍이거나(나중에 이것마저 일본은 "도죠 음악"이라며 일본 고유의 음악이라고 주장한다), 4분의 3박자로 구성된 비탄조의 왈츠(Waltz) 리듬이었다.
왜냐하면 찬송가가 그들 창작의 모델이었기 때문에 행진곡풍이거나 왈츠에서 크게 벗어날 수가 없었던데 기인한다.
우리의 가요 초창기 역시 작곡가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서양 찬송가나 민요 또는 일본 가요에 가사를 만들어 불렀다.
이와 같이 작곡가가 없었고 또 레코드조차 보급되기 전의 한국 가요 초창기에는, 스코틀랜드 민요 "Auld Lang Syne"에 가사를 붙여 "애국가"를 만들어 부른 것을 필두로, 다음과 같이 외국 음악에 가사를 붙여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영국 민요 "Comin' through the Rye"에 최남선 선생이 가사를 붙여 "경부 철도가(1905년)"를 만들어 부르는가 하면, "심청가"는 미국 민요 "클레멘타인"에, 윤심덕의 "사의 찬미"는 이바노비치 작곡의 "도나우강의 푸른 물결"에 가사를 붙인 것이다.
일본의 쇼까(唱歌)(이 때까지는 엔까가 없었다)에 우리 가사를 붙인 "장한몽가"나 "뎃또쇼까(鐵道唱歌)"에 가사를 붙인 "학도가(원래의 제목은 "청년경계가"였다)"등을 만들어 우리식으로 불렀다.
엔까의 기원은 고가마사오가 작곡한 "사께와 나미따까 다메이끼까(술은 눈물일까 탄식일까)"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의 트로트는 이 노래를 본 따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엔까의 아류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나라의 트로트가 고가마사오의 "사께와 나미따까 다메이끼까"를 본 따서 만들어 졌기 때문에 엔까의 아류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과연 옳은 것인가?
고가마사오 이전에도 1920년경부터 1930년까지 약 10여년간 일본에서는 서양 음악의 악식을 기초로 하고 동양적인 요소를 가미한 신가요들이 여러 작곡자들에 의해 6/8, 3/4, 2/4, 4/4 박자 등 다양한 박자의 노래가 만들어져 불려 졌을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세계 각국의 민요를 번안해서 부르는 것도 유행이었다.
이 시기의 일본의 신식 가요(이것을 통틀어 만약 엔까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면, 엔까)는 세계 각국의 민요와 가요 형식의 가장 중요한 모델인 찬송가, 그리고 마치(March) 리듬의 쇼카(唱歌) 및 행진곡 그리고 일본 민요인 부시(節)가 합성된 모습이었음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1930년경 고가마사오가 일본 가요계에 진출하면서부터 보다 동양적인 요소(굳이 이것을 일본적인 요소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고가마사오는 우리나라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자랐다고 전해지는데(선린상고를 졸업했다), 이때 한국의 경기창, 남도창, 그리고 서도창이나 민간 속요들을 상당수 알고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한국의 민요적인 요소가 고가마사오 자신의 작품뿐만 아니라 여러 가수들의 창법에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건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여기서 고가마사오는 그 이전 다른 작곡가들이 리듬 형태에 이름을 붙이지 못하던 틀을 깨고 자신의 음악에 "폭스 트로트(Fox Trot)"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폭스 트로트란 1914~1917년경 미국에서 태어난 보통 템포 정도의 래그타임곡이나 재즈 템포의 4/4 박자 곡으로 추는 사교댄스의 스텝 또는 그 연주 리듬을 말하는데. 1917년경 가장 보편적인 댄스음악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때는 댄스음악의 대명사처럼 불리기도 했다.
원래는 동물들의 걷는 속도에서 비롯된 이름인데, 고가마사오는 여기서 힌트를 얻어 폭스 트로트로 표기하다가, "사께와 나미따까 다메이끼까"를 발표하면서부터 폭스를 떼어버리고 트로트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폭스 트로트라는 이름의 춤곡은 후에 오늘날 사교댄스의 큰 지류인 "지터벅"(흔히 일본식으로 "지루박"이라고 불린다)과 "자이브"로 발전하여, 전 세계에 보급되어 각광을 받게 된다.
미국에서 유행하는 모든 음악은 "콜럼비아"나 "빅타" 레코드사를 통해 바로 바로 일본으로 수입되었고, 이 형식을 빌려 일본의 가요들이 만들어졌는데, 일본의 레코드 역사가 시작되자마자 위에서 언급한 폭스 트로트뿐만 아니라, 모든 재즈, 폴카(Polka), 마치(March), 왈츠(Waltz), 그리고 라틴 리듬까지 등장하고 있는 것이 그 실제적인 예이다.
이때까지는 엔까의 형식을 가진 노래가 아니라 서양곡에 가사를 따로 붙여 노래한 번안곡이거나, 일본의 민속음악인 부시(節) 형식의 노래들이 대부분이었다.
본격적인 엔까 형식이라고 볼 수 있는 노래는 1921년에 발표된 나까야마 신요우(中山晉平) 작곡의 "센도꼬우따(船頭小唄)"이다.
이 노래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1923년까지 "가레루 스스끼"라는 제목으로 일본 전역에 유행했다. 그러나 이후 1930년까지는 이렇다 할 노래가 발표되지 않았다.
1922∼1930년 사이에 일본 가수의 노래가 거의 발표되지 않은 대신, 일본의 닛지꾸(日蓄)회사, 콜럼비아, 빅타레코드 등은 우리나라 가수들의 노래를 대거 취입시켰다.
"사의 찬미"의 윤심덕을 비롯해, "낙화유수(김서정 작사/작곡)"의 이정숙과 "봄노래 부르자(김서정 작사/작곡)"의 채규엽 및 "세 동무"의 채동원, 그리고 "암로(暗路)"의 김연실 등이 대표적인 가수였다. 이들은 1926∼1930년에 취입한 가수들이다.
오늘날 엔까의 비조(鼻祖)로 삼는 고가마사오의 1931년 작품 "사께와 나미따까 다메이끼까"가 발표되기 한 해전까지, 이미 우리나라의 가수들은 우리나라 작곡가가 작곡한 신식가요(유행가)를 레코드로 발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트로트와 일본의 엔까는 같은 시기에 같은 궤적을 따라 일란성 쌍둥이와 같이 흡사한 모양으로 태동하고 또 발전해 온 것이다.
이런 역사를 바라본다면, 우리나라의 트로트를 "뽕짝" 운운하며 일본 엔까의 아류 음악이기 때문에 거짓 음악이고 따라서 말살돼야 한다는 주장이 얼마나 허황하고 터무니없는 억지에 불과한지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더구나 엔까를 구성하는 큰 축이라고 할 수 있는 트로트라는 용어조차 미국의 폭스 트로트에서 따온 것이었다.
고가마사오는 그 후 오늘날의 엔까로 자리 잡을 때까지 일대 질풍노도와 같은 기세로 히트곡을 양산해 낸다.
일본의 정신이자 일본의 역사라고 추앙받는 가수 미소라히바리, 기따시마사부로(北島三郞)로부터 미야꼬하루미 및 호소가와다까시에 이르기까지, 실로 일본 가요사의 금자탑을 이룬 수많은 가수들은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고가마사오의 영향을 받지 않은 가수가 없고, 그래서 고가마사오를 엔까의 대부로 부르는 것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일본에 고가마사오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우리나라 트로트의 대부 손목인, 전수린, 김교성, 박시춘이 있다.
엔까의 대부로 불리며 1931년 "사께와 나미따까 다메이끼까"를 발표하면서 두각을 나타낸 고가마사오의 이 곡은 사실은 그가 우리나라에 있을 때 들었던 이현경 작사, 전수린 작곡의 "고요한 장안"을 표절한 것이다.
고가마사오가 우리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절친했던 작곡가 전수린과 포옹까지 나누며 반가워했다는데, 전수린과 고가마사오는 과연 어떤 사이였을까 궁금해진다.
일단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작곡가 전수린과 고가마사오는 상당한 교우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전수린은 1907년 개성 출생이며 어렸을 때부터 호수돈 여학교 교장 루츠 부인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고 어린 나이에 동요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15세 때 송도고보를 중퇴한 전수린은 서울로 올라가 연악회(硏樂會)를 주도하고 있던 홍난파와 함께 활동하다가 우리나라 작곡가 최초로 빅타에 전속되어 "황성옛터"와 "고요한 장안"을 발표하여 일약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다.
서울에서 활약하던 전수린이 어떤 경로로 고가마사오와 조우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지만, 전수린이 일본에 가면 서로 만나고, 고가마사오가 우리나라에 오면 더없이 반갑게 맞은 것으로 보아 상당한 교분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두 사람의 이런 관계는 서로의 음악에 대한 정보를 나누게 되고 따라서 미래지향적인 노선 또한 닮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짐작된다.
1932년 가수 이애리수가 전수린 작곡의 "고요한 장안"을 "원정(怨情)"이라는 곡명으로 일본어판으로 발표하자, 일본 박문관(博文館)에서 출판하는 잡지 "신청년"에서 고가마사오의 "사께와 나미따까 다메이끼까"가 전수린의 "고요한 장안(원정)"을 표절했다고 비난했다.
두 곡의 악보를 비교해 보니, 내가 보기에도 두 곡은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흡사했다.
일본의 음악 평론가 모리(森一也)는 당시 고가마사오가 조선에 살고 있을 때 들었던 전수린의 멜로디에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 사실은 일본의 유행가와 한국의 유행가가 닭과 계란의 관계처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태동하고 성장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가능성 위에서 전수린을 기폭제로해서 1932년에는 가히 우리나라 작곡가의 절정시대가 개막된다.
1926~1936년, 10여년 사이에 데뷔한 작곡가들을 살펴보면, 우리 가요가 과연 독창적인 것인가 아니면 일본 엔까를 표절하고 있는가를 금새 알 수 있다.
1927년 홍난파와 함께 경성방송 개국과 더불어 관현악단을 창설했던 "찔레꽃", "직녀성" 등의 대작을 남긴 김교성이 1932년 빅타레코드에 전속되었고, 또 김정구의 친형이면서 배우, 가수, 작곡가를 겸한 천재 작곡가 김용환이 1932년 폴리돌에 전속되었다.
또한 일본 "무사시노 음악학교를 졸업한 우리나라 서양음악의 선구자이자 피아니스트였던 "홍도야 울지 마라" "처녀총각" 등을 남긴 김준영이 이 시기에 데뷔한다.
휘문고보를 졸업한 바이올린니스트 문호월은 "노들강변", 이난영의 "봄맞이", 남인수의 "천리타향"을 남겼고, 일본음악학교를 졸업한 손목인은 고복수의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 등의 주옥같은 선율을 남겼다.
일생동안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신라의 달밤", "삼다도 소식" 등 수많은 히트곡을 양산한 우리나라 최고의 작곡가 박시춘이 데뷔한 시기도 이 때이다.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불리는 이재호는 일본의 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고 20세에 오케레코드에 전속되어 이후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등 불후의 명작을 쏟아낸다.
홍난파도 이 시기에 데뷔하는데, 안옥경의 "여인의 호소", 이규남의 "유랑의 나그네" 등을 발표하지만, 그는 가곡분야에서 더 두각을 나타내어 "성불사의 밤", "봉선화" 등의 주옥같은 음악을 남겼다.
우리나라에 대중음악이 전파된 경로는 한 줄기는 외국에서 직접적인 경로를 통해 교류를 하며 들어왔고, 다른 한 줄기는 일본을 통해 우회적으로 들어왔을 뿐, 우리의 트로트가 일본 엔까의 아류인 것은 결코 아니다.
위의 내용은 다른 분이 쓴 글(그 분의 이름을 잊어버렸다)을 간추려서 옮긴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도 적지 않은데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서 그 내용을 거의 가미하지 못했다.
인터넷을 통하여 초창기에 활동했던 우리나라 작곡가들에 대한 자료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다수의 왈츠곡을 남긴 김서정이나 트로트 히트곡을 다수 남긴 전기현과 같은 초창기 작곡가에 대한 기록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고가마사오와 같은 해에 태어나 "찔레꽃", "직녀성"을 비롯하여 후기의 "울고 넘는 박달재"에 이르기까지 주옥같은 히트곡들을 남긴 김교성(1904~1961)에 관한 자료도 거의 없었다.
박시춘, 김교성, 이재호, 손목인 등의 곡들을 보면, 일부의 초창기 곡들이 일본의 음악과 유사하기는 하나, 대부분의 곡들이 일본의 엔까와는 완전히 다른 독창성을 가지고 있고, 그 수준도 아주 높다.
엔까의 대부인 고가마사오와 우리나라 초창기 작곡가 중 몇 사람의 약력을 아래에서 소개하고 글을 마친다.
* 고가마사오(古賀政男), 1904~1978
후꾸오까현(福岡縣)에서 출생하였다. 서울의 선린상고를 거쳐 메이지(明治)대학을 나왔다. 1928년 처녀작 "그림자를 그리며"를 발표하고, 1931년부터는 여러 레코드회사의 전속 작곡가로 있으면서 많은 히트곡을 냈다.
소년시절을 한국에서 보내 한국 민요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또 작곡가 전수린(全壽麟)과도 교우관계가 있어 대표작의 하나인 "술은 눈물일까 탄식일까"는 전수린의 곡인 "고요한 장안"을 모방한 것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 전수린(全壽麟), 1907~1984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니면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송도고보(松都高普)에 들어가서는 호수돈여학교(好壽敦女學校) 교장 루츠 부인으로부터 바이올린 개인지도를 받았다.
그 후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 15세 때 상경하여 얼마동안 홍난파(洪蘭坡)가 주도한 연악회(硏樂會)에 몸담고 있다가 23세 때 무용가 조택원(趙澤元)의 권유로 동방예술단에 들어가 막간쇼 등에서 반주를 담당하였다.
1931년 시에론레코드사가 발족하자 "한숨고개"로 가요계에 데뷔하고, 1932년 빅터레코드회사로 옮겨서는 가수 이애리수(李愛利秀)와 콤비가 되어 "황성옛터", "고요한 장안" 등을 발표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고요한 장안"은 뒤에 "아다나사께(仇情)"라는 곡명으로 일본에서도 불러 히트하였다. 이어 "무정", "갈대꽃", "알뜰한 당신", "나는 열일곱 살이에요", "낙화암" 등을 발표하였다.
* 박시춘(朴是春), 1913~1996
경남 밀양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박순동(朴順東)이며, 부유한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일본 유학시절 중학생 신분으로 순회공연단을 따라다니며 트럼펫, 바이올린, 색소폰, 기타 등 다양한 악기의 연주방법을 익혔다.
"몬테카를로의 갓난이", "어둠 속에 피는 꽃" 등을 발표하며 작곡가로 데뷔했다. 1931년 남인수가 부른 "애수의 소야곡"이 히트하면서 OK레코드사 전속 작곡가로 발탁되었다.
대중문화계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고, 1982년 대중가요 창작인으로는 최초로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았다. 주요작품으로는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전선야곡",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럭키 서울" 등이 있다.
* 이재호(李在鎬), 1914~1960
본명은 이삼동(李三童)이다. 경남 진주 출생으로, 어려서 형에게 트럼펫을 배우고 일본으로 건너가 고등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였다.
귀국 후 처음에는 OK레코드사에서 무적인(霧笛人)이라는 필명으로 작사, 작곡을 해오다가 곧 태평레코드로 옮겨 이재호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개시하였다.
가수 백년설(白年雪)과의 콤비로 1938년 "북방여로", 1939년 "나그네 설움"을 비롯하여, "대지의 항구", "번지 없는 주막", "산 팔자 물 팔자", "고향설", "어머님 사랑" 등의 히트곡을 내놓았다.
이어 "불효자는 웁니다", "망향초 사랑" 등으로 인기를 모으고, 이후 태평연주단을 이끌고 국내는 물론 만주 일대까지 순회 공연하여 이름을 떨쳤다.
지병인 결핵의 악화로 광복 후는 잠시 고향에 내려가 중학 음악교사를 지내다가 6·25 전쟁 이후 다시 작곡활동을 시작하여, "아네모네 탄식", "무영탑 사랑", "물레방아 도는 내력", "단장의 미아리고개", "산유화" 등의 히트곡을 내놓았다.
* 손목인(孫牧人), 1913~1999
본명은 손득렬(孫得烈)이다. 경남 진주 출생으로,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도꾜제국음악학교에서 피아노 연주를 공부하던 중 OK레코드사 사장인 이철의 눈에 띄었는데, 첫 작품인 "타향살이"(원제 "타향")가 크게 인기를 끌어 단숨에 주목받는 신예 작곡가로 떠올랐다.
일제 강점기 한국인의 떠돌이 정서를 잘 대변한 노래로 꼽히는 고복수 노래의 "타향살이" 외에 이난영이 불러 높은 인기를 누린 "목포의 눈물"이 특히 유명하며, 그 외에도 "청노새 탄식", "아내의 노래", "아빠의 청춘" 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했다.
이난영과 고복수, 남인수, 장세정, 김정구 등이 손목인이 작곡한 노래로 인기를 모았다.
광복 후에는 "아내의 노래", "슈사인 보이" 등을 히트시켰으며, 일본 영화 음악계에서 활동한 것을 시작으로 영화 음악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말년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 생활하였고, 1987년 화관 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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