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마르코 2,14)
레위는 마태오의 다른 이름이고, 마태오복음서 9장 9절에는 마태오라고 기록되어 있다.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는 1600년경에 <성 마태오를 부르심>을 그리면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자기가 살고 있던 일상의 이야기로 서슴없이 전환시켰다.
그는 과거의 이야기와 남의 이야기를 그리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나를 어떻게 부르실까?
예수님께서는 잠재되어 있는 무한한 예술적 재능을 묻어든 채,
선술집에서 도박판에 휩쓸려 다니는 죄인인 나를 찾아오신 것이다.
돈밖에 모르는 나,
방탕과 폭력을 일삼는 나,
삶의 목적도 없이 흥청망청 살아가는 나에게 그분이 찾아오신 것이다.
마치 감옥과 같은 곳에서 무의미하게 살고 있는 나에게 그분이 오신 것이다.
그래서 그림의 배경은 열려진 창문으로 인해 창살이 있는 어두운 감옥 같다.
죄인 마태오를 부르시는 예수님께서는 빛과 함께 등장하신다.
구원의 빛이 도박판에도 임하는 것이다.
어둠을 가르는 한 줄기 구원의 빛이 죄인 마태오에게 쏟아지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 빛줄기를 따라 구원의 손길을 뻗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손이 미켈란젤로가 그린 <아담의 창조>에 나오는 아담의 손을 닮았다.
그는 이 그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제2의 아담’이라는 신학적 통찰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의 손이 아담의 손을 닮았다면,
베드로의 손은 하느님의 손을 닮았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마태오를 향해 구원의 손길을 뻗고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대변자가 되고 하느님의 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몸을 가리고 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죄인을 부르고 계시다.
그런데 교회의 부르심은 쉽고 편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발이 맨발인 이유는
교회의 부르심은 안정되게 살던 사람에게 맨발의 고된 삶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부르심에 대한 반응은 세 가지다.
첫 번째 반응은 무반응이다.
한 젊은이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동전을 세고 있다.
곁에 있는 노인은 젊은이가 돈을 세는 것을 안경 너머로 지켜보고 있다.
이들은 돈밖에 모른다.
두 번째 반응은 관심은 보이지만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
예수님 가까이 있는 젊은이는 다리를 벌린 채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호기심에 찬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지만 왼손은 칼을 잡으려 하고있다.
예수님과 권력 사이에서 권력을 선택한것이다.
밝은 빛 가운데 있는 젊은이는 마태오에게 어깨를 기댄 채 놀란 표정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서 사람에게 기대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반응은 마태오의 반응이다.
그는 구원의 빛을 듬뿍 받았다.
그의 시선은 예수님을 향했다.
그리고 예수님과 눈을 마주친 순간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말입니까, 저를 부르십니까?”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바라보아야 한다.
자기의 모습을 성찰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출처] 그림 읽어주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