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왜 성철 스님은 통곡하고 사도 바오로(바울)는 감사했을까?
<나는 지옥에 간다>
성철(1912~1993) 스님은 불교계의 큰 스승이다. 그는 마음 깊은 곳에 꽈리를 틀고 앉아 온갖 독을 내뿜는 번뇌의 뿌리를 끊어내기로 결심했다. 결혼하여 유복자가 있었던 그가 출가하여 선택한 수단은 엄청난 고행이었다. 번뇌가 육체에 거처를 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 강상봉은 아들이 그리워 먼 길을 눈물로 적시며 가야산을 찾아왔어도 그는 만나주지 않았다. 팔년 동안 앉아서만 잠을 자며 수행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를 실천하는 등 평생 철저한 고행으로 일관했다. 그는 그의 마음을 파고들어 사람 뿌리에 무엇이 들어앉아 있는지를 끝까지 파헤쳐 보았던 분이다.
그 힘겨운 세월에 그는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깨닫게 되었을까? 양효실이 쓴 「불구의 삶, 사랑의 말」에는 성철 스님의 마지막 말들이 기록되어 있다.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 동안 포교한 것은 헛것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죗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딸 필히와 54년을 단절하고 살았는데 임종 시에 찾게 되었다. 필히야 내가 잘못했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마지막 후회요 절규이다.
<성철은 구원자의 필요를, 바오로는 구원자를 발견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얻는 구원을 추구했던 철저한 고행자는 왜 감당 못할 죄짐에 눌려 신음을 토해내며 결국 절망하게 되었을까? 그는 마음의 골짜기를 헤매다 무엇을 발견했을까? 그는 마음속 깊이에서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뿌리 깊고 넓으며, 황폐하고, 오염되어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산을 마주친 것이다.
그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산은 수미산(70만 킬로미터 높이의 상상의 산)보다 높고 아수라보다 끔찍한 반역적 영적인 생물이었다. 육체의 전 영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옮길 수도, 넘을 수도 없는 이 거대한 산 깊숙이에는 사악한 영적 존재가 살고 있는데 성경은 그 존재를 ‘죄’라고 부른다. 이것을 성철 스님이 발견하고 경악했던 실체이다.
성철 스님은 독 기운을 뿜어내고 인간을 오염시키며 신음케 하는 사악한 영적 생물인 죄의 존재를 발견하고 절망한 것이다. 그는 그것 앞에 기겁하고 신음하며 한없이 무기력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이 죄의 존재를 처형하고 해방할 자, 곧 구원자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구원이 없다고 했다. 그는 사람에게 구원자가 필요함을 절실히 깨달은 것이다.
그 거대한 괴물 앞에 주저앉아 통곡하며 구원자의 필요를 절규한 사람은 성철 스님만은 아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은가? 사도 바오로도 같은 것을 발견하고 부르짖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도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로마7,18-20).
사람의 길을 엇나가게 하고,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되며, 사망으로 인간을 끝장내는 죄의 존재를 발견하고 바오로는 가슴을 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7,24). 성철 스님은 구원자가 없다고 했으나 사도 바오로는 구원자를 발견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7,25-8,1).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에서 우리를 구원할 자”(마태1,21)이시다. 구원자의 필요를 절실히 깨닫는 것, 마침내 구원자를 발견하고 감사하는 것, 죄의 목을 친 사랑과 공의의 십자가의 칼을 알게 되는 것, 나의 신음이 평안으로 잔잔해지는 것, 예수가 주는 구원이다.
죄의 세력에 종이 되어 세월 속에 쌓아놓은 죄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성철 스님은 죄를 처형하고 자신의 죗값을 치르실 자의 필요를, 사도 바오로는 죄를 사형시키고 자신의 죗값을 해결한 자를 발견했다.
<아이작 뉴톤, 역사에서 십자가를 발견하다>
뉴톤(Isaac Newton, 1643~1727)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물리학자이지만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 주석을 쓴 신학자였다. 그는 세상 역사를 미리 기록한 예언서 다니엘서를 철저히 연구하고 만유인력의 법칙보다 위대한 법칙을 발견했다. 세상에 오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 역사 위에 우뚝 세워진 십자가의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
이 위대한 과학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시기와 그리스도의 사명을 예언해 놓은 다니엘서 9:24-27절의 말씀이 역사에서 정확히 성취되었음을 확인하고 그 말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다니엘서의 이 구절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척추라고 갈파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과학의 발달에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교육에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도 아니다. 구원은 우주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인간 역사에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3,16). 뉴톤은 마침내 쉼을 얻을 수 있었다.
인간은 구원자를 발견하고 죄짐을 예수님께 내려놓기 전에는 결코 쉼을 얻을 수 없다. 사람은 스스로는 마음의 쉼을 얻을 수 없다. 죄짐과 인생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분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발견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11,28).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쉬게 할 수 있다. 사람은 예수 안에서만 숨이 안정을 찾는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사람은 옛사람이 있고 새사람이 있다. 옛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다. 새 사람은 옛사람이 죽고 예수님과 함께 믿음으로 부활한 사람이다. 십자가는 2,000년 전에 세워졌으나 나의 옛사람은 2,000년 전에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나의 새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부활했다.
예수님이 이 폐할 수 없는 사건을 십자가로 이루어 놓으시고 법칙으로 확증해 놓으셨다. 사도 바오로는 이 진리를 발견하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2,20).
그렇다. 십자가는 죽음으로의 초청이다. 사망의 종으로 살다가 무덤 속에 영멸 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나를 그분의 운명과 묶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셨다. 이제 나는 운명이 바뀐 새로운 사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
그것은 우주 안에서 일어난 법적이고 불가역적인 역사적 사실이다. 그 역사적 사건을 알고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바오로는 말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10,10). 그런데 왜 십자가 사건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일이 필요할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사건으로 출애굽하여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으나 그들의 마음은 이집트를 떠나지 못하고 그 땅을 그리워했다. 그것이 옛사람의 환영(幻影)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실제가 그렇다. 종살이 때는 하느님을 향해 통곡하더니 자유를 얻었는데 종의 때를 그리워한다. 거기에 무지와 속임이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죄의 세력에서 나를 법적으로 해방시켰으나 나의 옛사람은 이미 망한 죄의 나라를 떠나지 못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하여 법적으로 해방되어 자유했으나 마음은 출애굽하지 못했다. 해방은 되었으나 일제의 잔재가 살아남아 영향을 미치는 것과 비슷하다. 일제는 법적으로, 공식적으로 망했으나 그것이 남긴 그림자는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는가.
새사람이 옛사람의 세상에서 사는 것이 그것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차원의 영적인 실행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이 나를 해방시켰음을 마음에 믿어야 해방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입으로 끊임없이 시인해야 옛사람의 환영이 힘을 잃는다. 그것은 힘든 광야의 경험이다.
이미 몸이 나온 애굽을 마음까지 나오는 과정이 광야의 경험이다. 마음이 있는 곳에 존재가 있다. 마음과 입의 결단을 통하여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이것이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두 가지를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는 이유다. 예수의 은혜로 채워진 새사람이 예수의 은혜가 없는 옛사람의 상태를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옛사람의 영향이 강하다. 옛사람을 지배하는 죄의 유령이 새사람인 우리를 현혹하여 불신을 조장한다. 십자가의 사건은 없다고 속삭인다. 죄의 나라에서 살자고 마음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놓지 않는다. 이것이 옛사람의 환영이 새사람에게 하는 일이다. 옛사람은 뱀의 홀리는 눈으로 새사람의 눈길을 빼앗아 뱀의 독을 주입하여 죽게 할 수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옛사람은 환영이며 죄의 나라는 망했음을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 나는 죗값이 치러진 용서받은 죄인으로 해방된 새사람임을 입으로 시인해야 한다. 결코 정죄함이 없게 하신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은혜 외에는 구원과 해방과 자유의 길이 없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8,1). 이것이 십자가가 확증한 법적이고, 우주적이며, 역사적이고, 불가역적인,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나를 지배해온 죄란 놈이 처형된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의 죄가 흰 눈처럼 용서되었음을 감사해야 한다. 값없이 제공된 무한한 희생의 십자가가 주는 은혜와 해방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매일의 결단은 성령의 역사를 자유롭고 풍성하게 하여 나의 마음에 해방과 구원의 확증이 성령의 불로 새겨지게 한다. 나의 믿음과 시인이 없으면 성령이 역사할 수 없다.
알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