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기지 개척 군자금 모집활동 독립운동기지 개척운동 선전활동 강화 1. 군자금 모집활동 1. 민용호의 군자금 모집계획 동남아지역에서 한국독립운동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인물은 강릉의병장 민용호閔龍鎬가 처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896년 의병들이 해산하자 일제와 지속적인 항전을 벌이기 위해 민용호는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기로 하였다. 의진이 해산된 이후 그는 1897년 원세개袁世凱를 만나 원조를 청하였으나 현실적으로 그 가능성이 없자, 홍콩으로 가고자 하다가 다시 원세개에게 원조를 받기 위해 홍콩행을 포기하였다. 그가 왜 홍콩으로 가고자 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시점에서는 홍콩에서 민영익閔泳翊을 만나 지원을 요청할 예정이 아니었는가 추측될 뿐이다. 주지하다시피 민영익은 1885년 4월 대원군의 귀환문제를 알아보기 위해 중국 상해와 홍콩을 왕래하면서 홍콩프랑스은행에 고종의 비자금 80만 원을 예치하고 있었으며, 1886년 6월경에는 천진天津에서 홍콩으로 거처를 옮겨 살고 있었다. 註1)그후 국내에 돌아온 후 민영익은 1887년 11월경 다시 홍콩으로 망명하여, 註2)상해와 홍콩을 오가면서 홍삼판매로 많은 재산을 축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민용호는 민영익을 만나 재정적 지원을 받기 위해 홍콩으로 가고자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에 있던 민용호는 1897년 8월 고종의 소환조칙을 받고 귀국한 후 주로 상무사商務社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01년 3월 다시 중국 각 지역을 돌아다녔다. 그의 문집인 『복재집復齋集』 「행장行狀」에 보면, 민용호는 중국에서 홍콩으로 베트남越南에 갔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 그는 중국에서 통킹만東京灣을 거쳐 하이둥海陽과 돈징頓定을 거쳐 중국 남부의 운남성雲南省과 귀주성貴州省등 여러 성을 둘러본 뒤 1902년 귀국하였다고 한다. 註3) 위와 같이 민용호의 「행장」에 의하면, 그는 홍콩과 베트남에 갔던 것이 확실하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은 어떠한 경로를 통해 베트남으로 들어갔을까? 1910년대 한국인들이 중국 남부의 운남성으로 가는 코스는 일반적으로 홍콩에서 배를 타고 들어갔다. 1916년 가을 운남육군강무학교雲南陸軍講武學校에 입학하기 위해 운남성 곤명昆明으로 갔던 이범석李範奭경우도 상해에서 홍콩으로 가서, 그곳에서 다시 베트남으로 가는 배를 타고 운남강무학교에 도착하였다. 註4)또한 김종진金宗鎭도 상해에서 배를 타고 복주福州·하문·산두를 거쳐 홍콩으로 가서 베트남의 하이퐁海防항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철도편으로 하노이河內를 경유하여 곤명에 도착하였다. 註5) 이와 같이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운남성의 군관학교에 가기 위해 동남아의 베트남을 꼭 경유해야만 했다. 운남강무학교로 가기 위해서는 중국 내륙으로 가는 것보다는 상해에서 먼저 선편으로 광주廣州와 홍콩을 경유 베트남 하이퐁항에 상륙하였다. 註6)그리고 열차편으로 운남성과 인접한 베트남의 라오냐老街에 이르러, 다시 2천여 리를 도보 혹은 말을 이용하여 곤명에 도착하였는데 대략 한 달 가량이 소요되었다. 註7) 민용호 이후 베트남과 관련을 맺은 독립운동가로는 임득산林得山이 있다. 그는 1912년 17세 때 중국 상해로 와서 3~4개월 간 머물렀으며, 그의 형을 따라 광주·베트남 등지를 시찰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장래 동남아지역에 대한 사업을 계획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註8) 2. 홍명희 등 군자금 모집활동 1) 중국혁명과 동남아지역과 관련성 싱가포르는 앞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동양의 십자로’였다. 싱가포르는 1824년 영국인 래플즈Thomas Stamford Raffles가 조호르Johore술탄으로부터 동인도회사에서 할양받은 후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교통과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싱가포르는 유럽과 인도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항로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남아와 중국의 상업이 발전할수록 번영을 구가하였다. 또한 싱가포르의 대부분은 중국계가 70%를 차지하고 있어 중국, 대만에 이어 제3의 중국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중국에서 오는 이민선의 귀착지이고 중국계 사람들이 밀집되어 있는 싱가포르는 20세기 초엽 강유위康有爲·손문 등 중국 내의 청조淸朝지지파와 혁명파들이 지원 을 호소하는 각축장이 되었다. 손문은 1900년부터 1910년까지 여덟 번이나 싱가포르를 방문하였으며, 1906년에는 YMCA를 조직하였고 일본에 거점을 둔 동맹회의 싱가포르 지부를 만드는 등 자신의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註9)이로 말미암아 손문은 싱가포르 중국계 사람들 사이에서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었으며 자신을 지지하는 부유한 중국 기업가들 다수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었다. 註10)이처럼 중국혁명의 진행과정에서 싱가포르는 혁명당의 중요한 해외거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중국대륙에 인접한 홍콩이 무장혁명 거사의 책동지였다면, 남양의 중심인 싱가포르는 혁명 경비의 모금처募金處이자 혁명선전물의 간행처刊行處였다고 할 수 있다. 1910년대 중국혁명의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던 싱가포르에 독립운동을 모색하기 위해 중국 상해에서 활동하던 일부 한국독립운동가들도 싱가포르로 거점을 옮기게 된다.
우리의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싱가포르와 처음 관련을 맺은 사람은 미주와 중국 등지에서 활동하던 장경張景·張鴻法이다. 장경은 1903년 9월 미국 남부 캘리포니아 패사디나Pesadena에서 대동교육회大同敎育會를 창설하고, 1907년 1월 ‘교육’을 ‘보국’으로 바꾸어 샌프란시스코에서 국민계몽과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를 조직한 인물이다. 대동보국회의 조직은 미주뿐만 아니라, 1907년 11월에는 중국 상해에도 지방연회가 설립되어 초기에는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상해에서 활동하던 한인들이 소수였기 때문에 활동의 한계가 있어 1909년 2월 장경은 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註11) 이후 다시 중국으로 건너온 장경은 1911년 안창호安昌浩·안정근安定根 과 함께 봉밀산에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기 위해 함께 간 적이 있었으며, 註12)노령 니콜리스크의 광동光東학교에 머물면서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열의를 보였다. 하지만 이 사업도 여의치 못하다고 판단하여 싱가포르에 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장경이 동남아지역을 생각한 것은 당시 동남아지역 중국계의 지원을 받고 있던 중국혁명파를 보고 싱가포르로 가게 되었다. 그가 언제 이곳으로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싱가포르 중국계와 협조를 통해 독립운동을 모색한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싱가포르에서 독립운동을 모색하고 있던 장경은 불행하게도 그곳에서 사망함으로써 더 이상 독립운동은 일어나지 못하였다.
註13) 1900년 이후 말레이반도에는 중국 청조의 전복과 공화국의 설립을 지향하는 손문 등의 혁명파 지도자들이 현지 중국계 사회에 혁명적 사상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06년 싱가포르를 방문한 손문은 동맹회 싱가포르 지부를 설립하고, 곧 이어 페낭Penag·말래카Malaca·페락Perak·느그리슴빌란Negri Sembilan·슬랑오Selangor·조호르Johore의 주요 도시에도 동맹회 지부를 조직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의 성공은 말라야의 화교사회에 화교민족주의를 고취시켰고, 1912년 동맹회를 포함한 5개의 혁명단체가 연합하여 북경 국민당 싱가포르 연락지부Singapore Communication Lodge of Kuomintang of Peking가 설립되었다. 註14) 2) 싱가포르에서 군자금 모집활동 앞장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아시아의 상업중심지였던 싱가포르에는 1910년대 한인 인삼상들이 많이 진출하고 있었다. 주로 동남아지역에 인삼판매를 목적으로 싱가포르에 인삼상들이 거주하게 되면서, 그곳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전해졌다.
인삼상인들이 전해준 소식은 중국 상해의 젊은 한인독립운동가를 자극하여 거처를 싱가포르로 옮기게 하였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싱가포르와 깊은 인연을 맺은 것은 장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국과 만주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홍명희洪命憙·정원택·김진용金晋鏞·金聖道·김덕진金德鎭4명에 의해서이다.
홍명희 등의 행로는 당시 함께 갔던 정원택이 남긴 『지산외유일지』이하 『일지』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일지』에 의하면 이들이 싱가포르 등 남양군도로 가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중국 광복 전후에 운동자금이 남양의 화교 중에서 많이 연출되었으므로 우리도 재원이 풍부한 남양에 광복운동의 자금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는지 답사” 註15)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로 보아 홍명희 등 4명이 싱가포르에 가게 된 이유는 당시 중국혁명에서 자극을 받아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항구적으로 마련하고자 하는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목적하에 싱가포르 이주계획은 홍명희가 처음 제창하고 나머지 3명이 동의하여 함께 가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싱가포르로 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상해에서 한인들을 돌봐주고 있었던 신규식申圭植의 도움이 매우 컸다.
홍명희 등의 싱가포르 행로는 정원택의 『일지』에 상세히 적혀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들 4명은 1914년 10월 6일음력상해를 떠나, 10일 홍콩에 도착하였으며, 14일 북브루네이의 산다칸Sandakan을 거쳐 중국인 양서영梁瑞榮상점에서 머물면서 싱가포르로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여비가 떨어져 김진용 혼자 싱가포르로 출발하고, 나머지 3명은 김진용이 보내온 여비를 받아 1915년 1월 2일 산다칸을 떠나,
3일 인도네시아의 쿠타Kuta, 求多항, 4일 아비阿非항을 거쳐, 5일 나부안納閩坡항에 도착하였다.
1월 15일 나부안에서 배를 타고 19일 오후 3시에 최종 목적지인 싱가포르에 당도하였다.
싱가포르에 도착하자 곧바로 홍명희 등은 중국계가 경영하는 국민일보사國民日報社를 찾아가서 소개서를 교부하고 국민일보사 사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국민일보사는 싱가포르의 중국인가China Town에 있었는데, 그들은 신문사 3층에 큰 방 한 칸을 빌어 묵게 되었다. 註16)위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싱가포르는 중국혁명당의 중요한 해외거점이며 중국계가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곳이다. 따라서 싱가포르는 중국혁명 경비의 모금처이며 수많은 혁명선전물이 간행되고 있었다. 1904년 『도남일보圖南日報』를 시작으로 신해혁명 이전까지 혁명파의 신문으로는 『중흥일보中興日報』·『성주일보星洲日報』·『남교일보南橋日報』가 대표적이었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 중화민국 성립 이후 싱가포르에서 발간된 가장 중요한 혁명파 신문이 『국민일보』였다. 1914년에서 1919년까지 발간된 『국민일보』는 국민당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운영하는 신문이었다. 홍명희 등도 이 같은 연유로 국민일보사를 맨 처음 찾아가 그곳에 숙식을 정하였던 것이다. 1913년 여름 2차 혁명이 실패한 뒤 일본으로 망명한 손문은 혁명진영을 재정비하여 중화혁명당을 결성하고 기관지 『민국잡지民國雜誌』를 발행하였고, 세계 도처에서 10여 종의 혁명선전 신문을 발간하였다. 1914년에 발간된 『국민일보』도 싱가포르지역 혁명파들이 언론을 통해 반 원세개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발행한 신문 가운데 하나였다. 홍명희 등은 홍명희 등이 1915년 1월 싱가포르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할 때 거주하였던 곳 싱가포르에서 혁명파의 신문인 국민일보 사장 뇌철애雷鐵崖의 호의로 신문사 3층에 숙소를 정하고 약 2개월간 머물렀다. 홍명희 등은 처음부터 목적한 바와 같이 싱가포르를 비롯한 동남아 각 지역의 중국계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자 하였다. 그래서 김진용은 싱가포르 주변의 쿠알라룸푸르吉隆坡, Kuala Lumpur에 가서 중국인들과 교류하였으며, 김덕진은 홍콩으로 가는 등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사정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1915년 6월 13일부터 그동안 유숙하였던 국민일보사를 떠나 그곳에서 2km 정도 서쪽에 위치한 킴퐁마로金傍馬路, 현재 金榜路에 있는 양옥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홍명희 등은 이곳에서 2년 반 동안 머물면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홍명희 등이 싱가포르에 자리 잡으면서 이곳은 당시 동남아 각 지역에서 활동하던 한인들의 거점이 되었다. 특히 김진용은 싱가포르를 거점으로 홍콩·말레이지역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중국혁명파에 군자금을 전달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중국혁명파 인사들 인 손문·황흥黃興·이열균李烈鈞·진기미陳其美·백문위柏文尉·하해명何海鳴등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1913년 8월 중국 남경정부 총사령부總司令部고등고문장高等顧問長이 되어 상해와 남경 등지에서 활동을 한 인물이었다.
註17)김진용은 김영일金永一등과 상해에 이풍양행移豊洋行이라는 비밀기관을 만들어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집하고 있었으며, 註18)중국혁명파 인사들과 빈번히 교류하면서 1916년 3월 2일 홍콩에서 하해명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하해명은 중국혁명파의 중요 인사로 『대강보大江報』를 발행하여 원세개 정부를 공격하는 논설과 국내의 부조리 등을 고발하는 기사를 실었다. 註19) 중국혁명파 인사가 일본으로 도피하였을 때, 손문은 광동으로 들어와 군 정부를 조직하고 북벌을 추진하다가 일이 실패하여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에 하해명은 또 광동으로 들어와서 계속하여 군 정부 조직을 도모하고 북벌을 선포하자 김진용은 하해명과 교분이 매우 두터웠던 고로 기회를 살펴서 그를 원조코자 하였다. 동남아지역에서 중국혁명을 지원하는 세력들의 운동자금이 싱가포르에 있었던 김진용을 통해 하해명에게 전달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이에 대한 명확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김진용은 동남아지역 중국계의 자금을 모아 중국혁명파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이들 자금을 관리하면서 자신이 직접 말래카에서 사업도 경영하였다. 『일지』에 따르면 김진용은 “말래카 근처에 고무원을 사두었다는 일, 주석 광산에 투자한 일, 고무공장에 투자 운영하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김진용은 말레이반도의 주석 광산 이 19세기 중엽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대규모 주석광산에 대한 중국계 소유가 늘어나자 이곳에 투자하였던 것이다. 또한 20세기 초엽부터 말레이반도에는 영국자본이 소유하는 대규모 고무농장도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다. 고무산업이 호황을 이루자 중국계의 고무농장 개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김진용도 고무농장을 구입하였던 것이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김진용은 중국계 자금을 모아 이를 재투자하여 중국혁명 자금과 우리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활용하기 위해 광범위한 사업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싱가포르를 비롯한 말레이반도 전 지역에서 중국혁명파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증가하면서 대규모의 화교자본이 혁명운동에 흘러 들어갔다. 이들 자본은 싱가포르를 비롯한 말레이반도의 화교들이 소유한 주석광산이나 고무농장에서 나왔다. 당시 호황을 맞고 있던 주석광산과 고무농장에 김진용이 투자하여 그 이익금을 중국혁명에도 지원하고 한국독립운동의 자금으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김진용이 말레이반도에 구매하였다는 고무농장에 대해 『일지』에는 “6월 22일 단정檀庭·김진용, 벽초碧初·홍명희, 동성東醒·김덕진및 나정원택와 네 사람이 배를 타고 같이 가서 지난날 단정이 사두었던 고무원을 두루 보고 거기서 유숙하였다. 23일 싱가포르로 돌아왔다”라고 한다. 위의 내용으로 보아 김진용이 구입한 고무농장은 싱가포르에서 배를 타고 얼마가지 않는 곳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김진용이 고무농장을 어떤 자금으로 구입하여 어떻게 운영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17년 10월 18일 “연전부터 재배하던 고무원을 방매하니 대금이 2,200원이었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규모의 고무농장을 경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고무농장은 그가 귀국하기 위해 판매하였는데, 그후 고무농장 판매자금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동남아지역의 중국계 자본을 독립운동자금으로 끌어들일 목적으로 동남아로 간 홍명희 등 4명은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중국혁명파 지지 세 력들을 통해 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손문은 1906년 싱가포르를 동남아의 중심지역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중국계 청년들을 위한 중국인 청년회YMCA를 조직하였다. 그후 말레이반도의 중요도시에는 중국인 청년회가 조직되고 회관이 설립되었다. 이에 따라 홍명희 등 4명도 말레이반도 지역을 여행할 때 중국인 청년회관을 이용하였다. 예컨대 1916년 1월 25일 정원택이 쿠알라룸푸르에 갔을 때에도 청년회관에 머물렀으며, 1월 29일 말레이시아의 이포Ipoh, 怡堡항으로 갈 때도 역시 청년회관에 머물렀다. 홍명희 등 4명은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말레이반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현지의 중국계들과 접촉하였다. 또한 김덕진의 경우는 1916년 6월에는 자바섬까지 갔다. 그러나 그가 무슨 연유로 자바섬에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동남아 각 지역에 산재되어 있는 중국계들과 접촉을 통해 독립운동자금을 끌어들이려는 노력의 일환이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또 정원택도 1917년 1월 태국의 방콕에 가서 그곳에서 한인 인삼상인들을 만났는데, 이들이 방콕에 “올 때에 홍콩에서 겸곡謙谷박은식朴殷植선생이 저작한 『안중근전』을 백여 권이나 휴대하고 와서 판매하였다”고 한다. 이로 보아 인삼상인들도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일환으로 박은식의 『안중근전』을 판매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후 정원택은 방콕에서 중국계가 경영하는 국민일보사를 방문하고 독립운동자금 등의 도움을 요청하였던 것 같다. 정원택·홍명희·김진용·김덕진 등이 동남아 각 지역을 돌며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열중하던 1917년 9월 변영만卞榮晩이 유럽으로 가던 차에 싱가포르에 도착하여 같이 유숙하기도 하였다. 홍명희 등 4명은 1917년말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동남아지역에서의 활동을 정리하게 된다. 그 이유는 동남아지역에서 중국혁명의 열기가 식어가면서 중국계 자금을 끌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김진용은 말레이반도의 고무농장을 방매하였으며, 싱가포르에서 그동안 거주하였던 집과 가구를 팔고 활동을 정리하였던 것이다. 1917년 10월 27일 홍명희·김덕진·정원택·변영만은 싱가포르에서 상해로 출발하였다. 11월 3일 상해에서 홍명희·변영만이 하선을 하고, 정원택·김덕진은 일본 신호神戶로 떠났다. 이로써 싱가포르에서 3년여 동안 체류하면서 펼친 독립운동자금 모집활동은 막을 내리게 된다. 현재 『일지』 외에 이들의 구체적인 활동을 보여줄 수 있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홍명희 등 활동의 주역들은 중국혁명파와 인적으로 연계되어 있었고, 동남아지역 중국계와 광범위한 활동을 하였던 김진용이 중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註20)김진용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동경부립제일중학東京府立第一中學에서 공부를 하였다. 그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905년 11월 28일 자퇴하였다. 註21)그후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재일유학생단체인 대한학회에서 활동하였다. 왜냐하면 1908년 2월 대한학회 제1차 임원명단에 평의원評議員으로 그의 이름이 올라있으며, 그해 6월 제2차 임원명단에는 서기원書記員으로 활동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다. 註22)아마도 이즈음 홍명희가 동경에 유학하면서 김진용을 만난 것으로 추측된다. 註23)그는 홍명희와 남양에서 함께 활동하고 귀국한 뒤, 1919년 4월 국내 13도 대표가 서울에서 모여 조직한 한성정부에서 평정관評政官18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註24)한성정부가 상해 임정으로 통 합된 이후 초기 임정에서 활동하였을 것으로 판단되나 자료상으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1920년대 일제의 정보자료에 홍콩에서 과격분자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홍콩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의열단원으로 부산경찰서를 폭파한 박재혁朴載赫도 한 때 싱가포르에 있었다. 그는 1918년 중국 상해를 거쳐 싱가포르로 가서 그곳의 남양무역회사에서 일하다가, 1920년 4월경 상해로 돌아와 김원봉의 의열단에 참여하였다. 이어 1920년 9월 부산경찰서 서장실에 폭탄을 던져 서장을 사망시키는 의열투쟁을 감행하였다. 박재혁이 무엇 때문에 싱가포르에 갔었던 가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송상도宋相燾의 『기려수필騎驢隨筆』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정사丁巳, 1917년6월 (곡물무역상-필자) 주인에게 청請하여 700여 원 자금을 얻어 상해上海로 들어갔고, 다음해 6월 집으로 돌아와 여러 달을 지내다가 또 상해 및 싱가포르新嘉坡로 가 무역에 종사하였다. 註25) 이 같은 『기려수필』의 기록을 통해 박재혁이 싱가포르에서 무역업에 종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인삼무역상들이 상해를 거쳐 싱가포르를 왕래하였던 사실에 비추어 그도 인삼무역에 종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 인삼무역상점은 단순한 영업점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거점이었고 박재혁이 싱가포르에서 인삼무역을 할 당시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1920년 상해에서 김원봉의 의열단에 참여하게 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3. 신채호의 군자금 모집계획과 활동 1) 1920년대 신채호의 아나키즘운동 1928년 5월 14일 조명하趙明河의거가 일어나기 직전 대만에서 신채호申采浩가 5월 8일 기륭基隆항 수상경찰서水上警察署에 피체되었다. 중국 북경北京에서 아나키즘 활동을 하고 있던 그가 난데없이 대만에 나타나서 수상경찰에 체포되었던 것이다. 그의 대만행은 대규모 위폐를 제조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자 하는 계획에 따른 것이다. 신채호를 비롯한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1920년대 북경과 상해에서 의열운동 단체를 조직하여, 일제의 밀정을 처단하거나 국내에 있는 일제의 식민기관을 파괴하기 위한 활동에 관계하고 있었다. 이 같은 의열활동을 하는 한편, 1920년대 중반에 접어들어 중국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 사이에서는 국제적인 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아시아 식민지·반식민지의 아나키스트들이 중국에서 많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중국인·일본인·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의 아나키스트들은 국제적 연대를 위한 기구를 조직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1927년 9월 중국인 서건黍健의 발의로 한국·일본·중국·대만·베트남·인도 6개국 대표자 120여 명이 북경에서 회합하여 무정부주의동방연맹 창립대회를 개최하였다. 註26) 이 대회에 한국측 대표로는 신채호를 비롯하여 이필현李弼鉉·李志永·이삼영李三永등이 함께 참석하였다. 신채호는 무정부주의동방연맹 창립대회의 결정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일환으로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 을 결성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이 같은 한인 무정부주의자 조직을 결성하고자 한 이유는 재중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였다.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은 1928년 4월 한국인 아나키스트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는 신채호가 작성한 「선언문」을 채택하는 한편, 잡지를 발행하여 아나키즘을 선전하고 일제 식민기관을 파괴할 것을 결의하였다.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목적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국체를 변혁하여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동시에 자유노동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신채호는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역량을 한 군데로 모으기 위하여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 창립을 주도하는 한편, 한국인 아나키스트대회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한국인 아나키스트대회에서는 잡지 발행과 일제 식민기관을 파괴할 것을 결의한 바 있는데, 이를 위해 북경 교외에 폭탄과 총기공장을 건설하고, 러시아·독일인 폭탄제조 기사를 초빙하여 무기를 제조하여 각국으로 보내어 대관 암살과 대건물 파괴를 도모하는 한편, 선전기관을 설치하고 선전문을 인쇄하여 세계 각국에 배부·발송하기로 결정하였다. 註27)그러나 문제는 운동자금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신채호는 북경 우무관리국郵務管理局외국위체계外國爲替係에 근무하는 대만 출신의 아나키스트 임병문林秉文과 협의하였다. 신채호와 임병문은 자금 마련을 위해 위조위체를 발행하여 이를 현금화시키기로 하였던 것이다. 신채호는 위와 같은 계획에 따라 위조위체를 발행하여 이를 운동자금으로 마련하고자 하였다. 당시 임병문과 신채호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사이로 그들의 관계에 대해 유자명의 『회고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1924년에 북경에서 대만사람 임병문과 범본량范本樑을 알게 되었으며, 그들과 나는 무정부주의의 동지로 되어 서로 친밀하게 지내었다. 임병문은 그때 북평 우정국에서 일하고 있었고, 전문외前門外천주회관泉州會館에 기숙하고 있었다. 그때 생활이 곤란하여 임병문의 관계로 나도 천주회관에서 한동안 같이 있었기 때문에 단재 선생과 임병문도 서로 친하게 되었던 것이다. 註28) 이로 보아 신채호와 임병문 두 사람은 모두 아나키스트라는 공통점과 함께 한국과 대만이 같은 일제의 식민지 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의기가 투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들 두 사람은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결의사항을 실행하기 위해 우편위체郵便爲替를 위조하여 이를 현금으로 바꾸는 계획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임병문은 우편국원이기 때문에 화북물산공사華北物産公司의 이름으로 위체를 발행할 수 있었다. 우선 위조위체 2백 매 액면총계 6만 4천 원을 위조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대만·관동주 등 32개소의 우편국에 유치위체留置爲替로 발송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위조위체를 현금화하기 위해 임병문은 관동주 및 조선, 이필현은 일본, 신채호는 대만지역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2) 대만에서 위체교환 활동과 피체 대만에서 위체교환을 한다는 계획하에 위조된 위체를 대련大連·여순旅順·신의주·평양·서울·인천·하관下關, 기타 대만에 있는 우체국에 송부한 뒤 각지에서 현금으로 인출하고자 하였다. 임병문이 대련과 여순에서 4천원을 인출하여 조선 국내로 향하였으나, 이 같은 사실이 발각되어 1928년 4월 27일 피체되고 말았다. 신채호도 4월 25일 북경을 떠나 1928년 5월 8일경 책임액 1만 2천 원을 찾기 위해 일본 문사門司를 『대만일일신보』에 게재된 신채호 피체기사 거쳐 대만臺灣기륭基隆항으로 향하였다.
註29)당시 신채호의 위체교환 활동과 피체과정에 대해서는 대만 현지에서 발행되는 『대만일일신보臺灣日日申報』에 자세히 나와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대만일일신보』 1928년 5월 11일자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4월 23일 대북臺北우편국에 북경 화북물산공사에 있는 유문상劉文祥앞으로 4백 원의 우편위체 5매로 2천 원의 위조위체를 송부하였다. 이 때문에 동국同局에서는 곧바로 대북 남서南署에 통지하여 경계하였다. 그러나 24일 또 신죽국新竹局에 유맹원劉孟源앞으로 2천 원의 위조하는 것을 확문確聞하는 바에 의해 주범主犯은 신죽주 죽남두분장두분竹南頭分庄頭分임병문으로 임林은 지나支那·일본·인도·안남安南·조선·대만 6종족 백여 명에 의해 이루어진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의 비밀결사秘密結社를 조직하고, 그 선전음모宣傳陰謀의 비용을 얻기 위해 임이 우편국원이 되어 기화奇貨로써 화북공사 및 임병문 등의 진출에 대대적으로 우편위체를 위조하여 지나, 관동주關東州, 조선, 일본내지, 대만의 각지 우편국으로부터 수만원을 사취詐取한다고 하였다. 위의 기사내용에서 보면, 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임병문이 우편위체를 위조하여 각 지역으로 보냈고, 대만지역에도 1928년 4월 23일 북경 화북물산공사에 있는 유문상 앞으로 400원짜리 우편위체 5매 총 2천 원의 위체를 발송하였다. 그러나 대북우편국에서는 우편위체가 위조된 사실을 확인하고 대북 남경찰서에 위조위체가 발견되었음을 통지하였다. 그 다음날 다시 신죽주 우편국에서도 유맹원 앞으로 2천 원의 위조위체가 보내졌고 이를 발행한 사람이 대만인 임병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위와 같이 대만경찰에서는 이미 위조위체가 나돌아 다니는 것을 알고 범인을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이때 신채호가 대만에 위조위체를 현금화하려고 오게 된 것이다. 신채호가 대만에서 활동하다가 피체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대만일일신보』 1928년 5월 12일자에 자세히 보도되고 있다. 북경 화북물산공사 및 임병문 진출振出외국우편위체外國郵便爲替위조건僞造件의 일당으로 5월 8일 기륭 수상파출소의 여세상與世山형사에게
체포된 조선 충청남도 공주군 산내면山內面도리桃里에서 출생한 당시 지나 북경 복위공우復威公寓본명 신채호는 신수천申壽千, 신단申端, 신단재申丹齋등 3개의 호명號名을 가진자이다. 기보旣報한 도내島內각지 우편국에 진출한 위조위체 1만원을 수령하기 위해 해위체該爲替의 수취인 지나인 유문상劉文祥이라고 하여 모지門司에서 승선한 선객 명부에도 북경 전문내前門內안복호安福胡유문상과 동인同人소지所持의 명함도 똑같이 인쇄하여 당당히 승선하였다. 그러나 수배 중인 동형사同刑事에게 간파看破되어 상륙 후 곧바로 기륭우편국 위체계 창구에서 서명 날인하고 현금을 수취하는 것을 검거하였다. 그들 일당의 기획한 사건을 폭로된 것을 전혀 알지 못한 그는 기륭서 원산山元경부보警部補및 대북주臺北州보안과保安課에서 응원應援한 산하山下경부警部의 심문에 대하여도 자신은 지나인이기 때문에 북경어北京語는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북경어를 이해하는 지나인을 고용하여 담화談話한 바, 입을 다물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최후에는 필담筆談으로도 아무 것도 말하지 않겠다고 뿌리치고 관계관關係官을 수고하게 하여, 원산 경부보부터 ‘너희들은 조선인 신단재’ 등이라고 소리치면서 유치장에 넣었다. 동同경부보의 로 옆면을 때려 흉폭凶暴한 시늉을 발휘하여 마침내 숨기지 못하여, 9일 밤에 이르러 자백自白하였는데 동인同人은 한학漢學에 소양素養이 있고 25~26세경 경성京城에 있는 황성신문皇城新聞한문 논설기자로 일했던 당시 무정부주의의 사상을 받아, 후에 상해·북경·연해주·간도 등 각지를 돌며 동지를 규합하여 주의를 위해 활약해 왔다고 함.
신채호는 1928년 5월 8일 위조위체 1만 원을 현금으로 교환하기 위해 ‘유문상’이라는 중국인으로 위장하고 일본 문사를 거쳐 대만의 기륭항에 도착하였다. 그는 기륭항에 도착하자 곧바로 기륭우편국에 가서 위체를 현금으로 교환하던 중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찰에 피체되었다. 신채호는 체포과정에서 강경하게 저항하였지만 기륭수상경찰서로 연행되어 경찰의 심문에도 완강히 저항하면서 중국인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신채호라는 것이 밝혀져 어쩔 수없이 자백을 하게 되었다. 이상에서 볼 때, 1928년 4월 23일 대만의 대북우편국에서 유문상에게 발급된 위조 우편위체가 발견되었고, 그 다음날 신죽주 우편국에서도 위조위체를 유맹원에게 발급하는 등 대중臺中·대남臺南·기륭·고웅高雄등의 우편국에도 가짜 위체를 발급하였다. 이에 대만경찰은 위조위체범을 검거하기 위해 비밀리에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註30)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신채호는 일본 신호神戶를 거쳐 문사에서 항춘환恒春丸에 승선하여 대만 기륭항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註31)그는 중국인 유문상과 유맹원으로 행세하면서 명함도 중국인 이름으로 만들었다. 신채호는 기륭항에 도착하자마자 기륭우편국으로 가서 위체를 현금화하려고 할 때 대만 수상경찰서에 피체되고 말았다. 註32) 신채호가 피체되어 취조를 받던 기륭수상결찰서의 현재 모습 ‘국제위체위조사건’으로 체포된 사람은 한국인 신채호·이필현·이경원李鏡元, 대만인 임병문, 중국인 양길경楊吉慶등 5명이었다.
임병문은 1928년 4월 피체되어 경찰의 심문을 받던 중인 그해 8월 옥사하였고, 양길경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이미 중국대륙에서부터 신채호의 행적을 파악하고 있던 일제당국은 대만경찰에 신채호의 출발일자와 탑승 선박명을 타전하였고, 기륭항에 도착하자 그를 미행하고 있다가 기륭우편국에서 체포한 것이다. 기륭수상경찰서로 연행된 신채호는 중국 대련으로 압송되어 그곳 영전둔嶺田屯감옥에 있다가 대련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대련으로 호송된 이후 7개월 동안 감옥에서 미결수로 지내며 일제경찰의 심문을 받았다. 1928년 12월 13일 제1회 공판이 열렸고, 공판 중에 신채호가 관련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는 마적에게 살해된 일제 밀정 ‘김천우金天友사건’과 함께 다루어지게 되면서 치안유지법위반, 유가증권위조행사, 살인 및 시체유기’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대련지방법원에서 공판이 연기되면서 신채호는 2년 여의 지리한 미 결감 생활 끝에 대련지방법원에서 1930년 4월 28일 마침내 선고판결을 받았다. 그 결과 신채호는 징역 10년, 이종원은 무기, 이필현은 사형이 선고되었다.
註33)이에 따라 신채호는 여순의 관동형무소關東刑務所로 이감되었고, 5월 9일 최종심 언도공판에서도 역시 10년형이 확정되었다. 신채호는 여순감옥에서 수형생활 중 1936년 2월 16일 갑자기 뇌일혈로 의식을 잃고 회복이 어려운 지경까지 이르러 마침내 위급환자로 병감病監에 옮겨졌다. 그리고 그해 2월 21일 오후 4시 57세를 일기로 옥중 순국하였다.
註34) 비록 위조위체를 통해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려는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독립운동가들에게 군자금 모금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다양한 군자금 모금에 대한 안목을 크게 넓히는데도 이바지하였다. 또한 ‘국제위체위조사건’은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독립운동가들이 얼마나 열성적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로서 의미를 지닌다. [註 1]노대환, 「민영익의 삶과 정치활동」, 『한국사상사학』 18, 한국사상사학회, 2002, 484쪽.☞ [註 2]송병기 역, 『국역 윤치호일기』 1,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2001, 465쪽.☞ [註 3]박민영, 『대한제국기 의병연구』, 한울아카데미, 1998, 85~91쪽 ; 『강북일기』, 187~188쪽 ; 『復齋集』, 「行狀」, 309쪽.☞ [註 4]이범석, 『우둥불』, 사상사, 1971, 474~475쪽.☞ [註 5]이을규, 『是也 金宗鎭 先生傳』, 1963, 17~18쪽.☞ [註 6]한상도, 『한국독립운동과 중국군관학교』, 문학과지성사, 1994, 126쪽.☞ [註 7]현룡순·리정문·허룡구 편저, 『조선족 백년 사화』 1, 료녕인민출판사, 1985, 151쪽.☞ [註 8]최우강, 「故林得山同志 약력」, 『앞길』 제36기, 1945년 8월 29일자.☞ [註 9]박은경, 「다수민사회로서의 싱가포르 화인」, 『동남아의 화인사회』, 전통과현대, 2000, 345쪽.☞ [註 10]조너선 D. 스펜스 지음(김희교 옮김), 『현대중국을 찾아서』 1, 이산, 1999, 311쪽.☞ [註 11]최기영, 「미주 대동보국회의 국권회복운동」, 『한국근대계몽운동연구』, 일조각, 1997, 248쪽.☞ [註 12]「蜂密山에 관한 정보 진달의 건 : 1911. 3. 22」,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2)』 ; 「3月 11日 以降 浦潮斯德地方 朝鮮人 動靜」 : 1911. 3. 24」(일본외교사료관자료).☞ [註 13]방사겸, 『방사겸 평생일기』,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6, 102쪽.☞ [註 14]오명석, 「말레이시아 화인사회 : 다종족국가 내에서의 공존과 갈등」, 『동남아의 화인사회』, 전통과현대, 2000, 249쪽.☞ [註 15]정원택, 「志山外遊日誌」, 388쪽.☞ [註 16]홍명희 등이 국민일보사를 찾아갈 당시의 주소는 ‘29 Duxton Hill(達士頓山 29호)’이었고, 그곳의 舊址는 현재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으나 주소는 그대로 남아있다(국가보훈처·독립기념관,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실태조사보고서-동남아지역-』 Ⅳ, 2006, 68~69쪽).☞ [註 17]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金晋庸-〉안창호(상해 ; 1913. 8. 20) 편지」, 『도산안창호전집』 2, 2000, 78~82쪽.☞ [註 18]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金永一-〉안창호·崔正益(상해 ; 1913. 8. 20) 편지」, 『도산안창호전집』 2, 63~65쪽.☞ [註 19]민두기, 『신해혁명사』, 민음사, 1994, 175쪽.☞ [註 20]金晋庸(1889~1958)의 본명은 金聖道이며, 호는 檀庭이다. 서울 출신이며, 동남아 각지에서 독립운동 자금모집과 외교활동을 하다가 1946년 귀국했으며 사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註 21]김기주, 『한말 재일한국류학생의 민족운동』, 느티나무, 1993, 134쪽.☞ [註 22]김기주, 『한말 재일한국류학생의 민족운동』, 59~60쪽.☞ [註 23]강영주, 『벽초 홍명희 연구』, 창작과 비평사, 1999, 107쪽.☞ [註 24]우남이승만문서편찬위원회, 『우남이승만문서(동문편)』 4,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1998, 26~29쪽.☞ [註 25]송상도, 『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1955, 295쪽.☞ [註 26]『동아일보』 1929년 10월 8일 「무정부동방연맹 신채호사건 공판」 ; 『조선일보』 1928년 12월 28일 「독일기사 雇聘 폭탄공장 설치」.☞ [註 27]『조선일보』 1928년 12월 28일 「독일기사 雇聘 폭탄공장 설치」.☞ [註 28]유자명, 『한 혁명자의 회억록』,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9, 179~180쪽.☞ [註 29]『조선일보』 1928년 12월 28일 「중국인으로 변장한 신채호 基隆서 피체」.☞ [註 30]『대만일일신보』 1928년 5월 12일 「爲宣傳陰謀費 僞造郵便爲替」.☞ [註 31]『조선일보』 1928년 12월 28일 「중국인으로 변장한 신채호 基隆서 피착」.☞ [註 32]『대만일일신보』 1928년 5월 12일 「宣傳無政府主義之鮮人逮捕詳報」.☞ [註 33]『중외일보』 1930년 4월 14일 「신채호 십년은 李弼鉉에 사형 언도」.☞ [註 34]『동아일보』 1936년 2월 23일 「危篤던 단재신채호 재작일 옥중에서 영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