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우닷 데디오스(9a)’와 벌인 보름간의 사투
해외 등반-스페인 코바 그란(Cova G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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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사람과 산
‘시우닷 데디오스(9a)’와 벌인 보름간의 사투
해외 등반-스페인 코바 그란(Cova Gran)
우리네 인생이나 클라이밍 배경에 흔히 ‘도전’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도전’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정면으로 맞섬, 어려운 일이나 기록경신에 맞섬이라 하지만 그 끝에는 성공과 실패가 공존할 것이다.
이 ‘도전’이라는 단어가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는 까닭은 비록 실패할지라도 그 한계점에서 사투를 벌일 수 있는 정신력과 과정이 아름답기 때문 아닐까? 이번 나의 도전도 불확실성에 대한 스스로의 한계 극복이었지만 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 있는 과정인지라 과감히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지난 수년 동안 믹스클라이밍 등반과 아이스클라이밍 대회에 집중했고 다시 나 자신의 암벽등반 최고 난이도 경신을 위해 1년 가까이 힘든 훈련을 하며 지난해 12월 중국 양수오에서 여러 개의 5.14급 바위를 등반했다.
그리고 이중 5.14c급 난이도까지 완등하면서 성공적으로 도전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나의 오랜 등반의 꿈인 5.14d(9a) 난이도를 위해서는 유럽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결코 쉬운 도전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귀국 후 여러 준비 과정을 가졌다. 꿈을 위해서는 일단 부딪혀 봐야 한다. 내가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어떻게 보완해야 하는지 알기에 지금 시기를 놓치지 말고 바로 도전해 보자는 다짐으로 여러 정보들을 수집하고, 아이스클라이밍 시즌이지만 암벽등반 훈련을 더욱 열심히 했던 터였다.
일단 등반 대상지를 세계 최고 루트들이 즐비한 스페인으로 정하고 세부 대상지를 선별했다. 현지 날씨와 기타 정보를 수집한 결과 ‘슈라나(Siurana)’, ‘마갈레프(Margalef)’, ‘싼타 린야(Santa linya)’, ‘올리아나(Oliana)’ 네 곳이 물망에 올랐다.
나의 도전 목표 난이도인 5.14d(9a) 루트가 있는 곳을 보니 공교롭게도 ‘올리아나’에는 루트가 없었고, 파트너 없는 혼자만의 원정이니 만큼 한 섹터에 여러 클라이머들이 모이는 곳을 선택해야 했는데 ‘슈라나’와 ‘마갈레프’는 여러 섹터들이 넓은 지역에 떨어져 있는 관계로 자일 파트너 구하기 어려웠다.
결국 큰 동굴 하나로 이뤄지고 몇 개의 9a 루트가 있는 ‘싼타 린야’로 최종 결정했다. 이곳을 등반한 국내 클라이머가 아무도 없는 관계로 기타 정보들은 내가 직접 수집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 또한 즐거운 원정의 과정이라 여기며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바르셀로나 공항에 내려 2시간이면 도착하는 ‘싼타 린야’는 산골짜기에 있는 마을 이름이고,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섹터 이름은 ‘코바 그란(Cova Gran)’이다.
마을에서 500m 아래에 있는 계곡으로 내려가면 주차장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도보로 3분이면 ‘코바 그란(Cova Gran)’에 도착한다. 뜻 그대로 ‘커다란 동굴’이다. 세계 여러 곳을 등반해 봤지만 한 섹터에 이렇게 많은 루트들이 있는 곳은 처음이었다. 이런 거대한 동굴 섹터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답고 웅장했다.
이곳 섹터의 베스트 등반 시즌은 11월부터 4월까지. 우리나라 겨울이 등반하기 좋은 계절이다. 루트 난이도를 보면 5.11d가 가장 쉽고, 5.12급이 15개, 5.13급이 29개, 5.14급이 40개, 5.15급이 3개, 그리고 프로젝트 루트로(9a급 이상) 현재 개척 중인 루트가 8개, 최고 난이도로 5.15b 루트가 있었다. 과연 세계 최고의 섹터다.
등반 길이는 20m에서 50m까지 다양했다. 등반 각도는 동굴이다 보니 120˚에서 160˚까지 극한 오버행. 지구력은 기본이고 강력한 파워가 필요한 섹터였다. 각도가 심한 관계로 자일 길이는 70m면 충분. 첫날 동굴 앞에 서서 등반할 것을 상상하니 뛰는 가슴을 멈출 수가 없었다.
먼저 주변 클라이머들과 인사를 나누고 쉬운 곳부터 등반을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간의 휴식을 가지고 미리 점찍어 둔 9a ‘Ciudad de Dios(시우닷 데디오스)’에 로프를 걸었다. ‘하나님의 도시’라는 뜻. 출발부터 130˚의 각도다.
초반 10m에 강력한 크럭스가 있고 중반 20m까지 어렵고 큰 동작들로 힘을 뺀 다음 마지막 30m에 또 한 번의 크럭스가 존재하는, 파워와 지구력 모두 필요한 루트다. 9a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는 루트임에 분명했다.
나의 경우 9a급 루트는 처음 등반해 본 것이라 그런지 5.14c(8c+)급과는 확실히 차원이 다른 등급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며 등반을 이어갔다. 결국 초반에 존재하는 이 루트의 최대 크럭스는 무브를 풀지 못했지만 나머지 부분들은 무브를 풀면서 마지막 완등고리에 로프를 걸 수 있었다. 무브 한 번 풀었을 뿐인데 벌써 손가락 피부가 벗겨지고 있었다.
며칠 동안 등반과 휴식을 하면서 등반한 결과 크럭스 무브를 해결했지만 그 강력한 무브들을 연결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며 9a 난이도의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육체적으로 한계점까지 등반하고 손가락 피부도 다 벗겨진 터라 이틀의 휴식을 가지기로 하고 스페인의 유명한 가우디성당을 둘러볼 겸 바르셀로나로 차를 몰았다.
공교롭게도 비가 오는 바람에 고대 성당은 운치를 더했다. 성당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시대를 앞서간 건축가 가우디를 향해 존경을 표했다. 나의 지금 이 도전을 누가 알아주지는 않겠지만 내 인생에서만큼은 큰 의미가 있는 것이기에 지금 당장 성공은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함으로써 후회 없는 도전이 되도록 하리라 다짐했다.
재충전하고 다시 찾은 코바 그란. 세계적 등반지임을 증명하듯 스페인의 에듀 마린, 노르웨이의 메그너스 미또, 미국의 다니엘 우드와 카이, 그리고 독일의 이름 모를 5.14급 클라이머들과 오스트리아의 청소년 국가대표 팀원 등 다국적 고난이도 클라이머들이 모여 각자의 루트에서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특히 5.15b급 등반을 직접 보는 것은 나도 처음이라 휴식시간이 즐겁기까지 했다.
모두 자신의 한계 난이도 루트에서 추락을 반복하면서 완등을 위한 도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리나라 젊은 클라이머들도 이런 곳에 와서 세계 정상급 클라이머들과 같이 등반하며 보고 배운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곳에는 10대 청소년들이 이따금씩 와서 기본 5.14급 등반을 하고, 그중 9a급 루트들을 등반하는 친구들도 있으니 국내 등반 폭이 얼마나 좁은지 절감하며 ‘이런 바위가 우리나라에 있으면 국내 클라이머들도 더 높은 목표를 가지고 등반할 수 있을 텐데’ 생각했다. 이런 바위들이 지천에 있는 이 나라가 부럽기까지 했다.
짧은 원정 기간이니 만큼 로프를 묶고 벽에 붙는 순간 목표한 루트 9a 시우닷 데디오스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면서 나의 등반을 계속 이어갔다. 이번 첫 원정에서 이 루트를 성공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걸 어떡하랴.
벌써 이 루트와 사투를 벌인지 보름, 피부는 이미 걸레(?)가 된 지 오래, 온몸이 지쳐갈 때 이곳을 떠날 때가 다가왔다. 그래도 ‘가능성’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이곳을 떠나니 절반의 성공이라고 믿고 남은 기간에는 그동안 붙어 보지 못한 다른 루트들을 등반하면서 코바 그란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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