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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6일~ 1월 31일
http://www.wbsi.kr/mbs/wbsfm/jsp/listen/listen.jsp?listNo=3512938&id=wbsfm_030400000000
제1절 일원상의 진리(一圓相-眞理)
일원(一圓)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며, 제불 제성의 심인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이며, 대소 유무(大小有無)에 분별이 없는 자리며,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며,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며, 언어 명상(言語名相)이 돈공(頓空)한 자리로서 공적 영지(空寂靈知)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十方三界)가 장중(掌中)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고, 진공 묘유의 조화는 우주 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無始曠劫)에 은현 자재(隱顯自在)하는 것이 곧 일원상의 진리니라.
* 총서편: 총론, 원론 - 교리와 교단의 방향을 전체적으로 정리
* 교의편: 각론
* 지식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문리가 터져야 한다.
-진리의 세계를 알아갈 때, 지식만 축적되어서는 진리 전체를 더우잡을 수 없고 부분부분의 지식으로 떨어질 수 있다.
-일원상의 진리를 주체하여 하나하나 연결시켜서 문리를 얻어가는 것에 중심을 두고 공부하자.
I. 일원상 상징의 의미
글로 말로 설명하기 전에 일원상을 그려 보이셨다.
① 깨달음의 궁극적 표현
-각(覺): 인간의 직관적 사고와 근원적 진리와의 만남
대종사님께서 20년간 수도고행하는 것이 직관적 사고를 하는 것,
그 직관적 사고가 근원적 진리와 마주쳤을 때 각이 일어난다.
-상징: 각의 내용을 표현의 최고 수단
-직관적 진리의 단련을 통해 자기가 알고자 하는 내용을 알아야 가야 한다.
이것을 하고 아는 것과 그냥 들어서 아는 것은 아는 정도가 다르다.
*의두: 넓은 공부- 대소유무의 이치와 시비이해의 일이며 모든 의문 나는 것을 다 의두로 걸어 하나하나 깨쳐가는 공부
성리: 깊은 공부- 우주만유의 본래이치와 자성자리를 꿰뚫어 가는 공부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어떻게 아는지 알 수 있다.
② 언어와 문자의 한계를 극복
- 언어(말)이나 문자(글), 행(실천)으로 깨달음의 전체 내용을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 금강경 “무유정법(無有定法) 명아뇩다라삼막삼보리(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 정한 바 법이 있지 않은 것을 아뇩다라삼막삼보리(무상정등정각심=무상대도)이라고 말한다.
강의하려고 준비를 해 왔는데 이렇게 정한 바 법이 있으면 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이 아니다.
정한 바 법이 없다는 대목을 “한즉언한 열즉언열 (寒卽言寒 熱卽言熱) 추우면 춥다 말하고 더우면 덥다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법을 설하는 것은 정법이 있어서 설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때의 상황에 맞게 설하는 것이다.
성현들이 법을 설함은 명경같이 맑은 성품자리에 비친 주위의 환경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 경수진풍불도시鏡水塵風不到時 응현무하조천應現無瑕照天地 :거울 같은 물에 티끌 바람이 이르지 않을 때에 응현하여 티 없이 천지를 비춘다.)
고정된 법을 만들어서 설하면 안 맞는다.
시(時때), 소(所장소), 위(위상황)에 맞게 반응하여 주는 것을 무유정법이라 하고 법문이라고 한다.
최초법어: 대각의 심경을 글로 표현한 것 (대종사 대각을 이루시고 그 심경을 시로써 읊으시되 [청풍월상시(淸風月上時)에 만상자연명(萬像自然明)이라.] -성리품1장)
vs 대종경: 제자와 문답, 상황이 대종사님의 명경자리에 비춰진 것을 말씀하신 것
-적실한 내용을 한없는 문자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 일정한 내용의 언어와 문자로는 한계가 있는데, 일원상의 상징으로 극복할 수 있다.
*금강경 7장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여래가 설법한 바가 있느냐.] 수보리 말씀하되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아는 바와 같아서는 정한 법이 있지 아니함을 이름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오며 또한 정한 법이 있지 아니함을 여래께서 가히 설하시나니, 어찌한 연고인가 하오면 여래께서 설하신 바 법은 다 가히 취할 수도 없으며 가히 설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며 법 아님도 아니니 어찌한 소이인가 하오면 일체 현성이 다 함이 없는 법으로써 차별이 있게 한 까닭이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아 如來- 有所說法耶아 須菩提 言하사대 如我解佛所說義컨댄 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며 亦無有定法如來可說이니 何以故오 如來所說法은 皆不可取며 不可說이며 非法이며 非非法이니 所以者何오 一切賢聖이 皆以無爲法으로 而有差別이니이다
③ 전달의 최고 수준
- 받아들일 때는 자기근기에 따라 각각 받아들인다. 전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
(ex, 대종사 탄생 백주년 기념 대회에서 대산종사님께서 대중에게 손 흔드시는 모습을 기뻐서 춤을 추셨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 아무리 전달을 잘 하려고 해도 언어와 문자, 행동으로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근기따라 다 달라진다. 왜곡되기 쉽다.
- 대종사님의 대각의 진리도 시대의 흐름, 장소, 사람의 근기에 따라 다르게 전달될 수 있다. 제대로 깨달음을 전달하기 위해 일원상의 상징을 사용하셨다.
II. 내용
1. 진리와 현실계과의 관계를 설명하심
: 일원(一圓)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며, 제불 제성의 심인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이며,
A. 일원(一圓)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며, : 진리와 우주와의 관계
-일원과 우주 만유는 본원의 관계이다.
-①교학에서 우주에 대한 설명이 확실하지 않았다. 개념정리가 제대로 되어야 한다.
-> 우주: 해남자(제자백가 중 한 사람) “사방상하왈우(四方上下 曰 宇) 왕고금래왈주(古往今來 曰 宙)”
우는 공간, 주는 시간이다.
공간에 시간이 들어가야 공간의 구실을 하게 된다. 우주의 허공공간에 봄여름가을겨울의 시간이 왕래를 하여 살아있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공간이 공간노릇을 잘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은 공간이 없으면 시간의 구실을 할 수 없다.
우주란 무한공간, 무한시간이다.
(집은 공간 만들라고 하는 것인데, 우주라는 큰 공간에다가 자기가 사는 작은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 무한 공간=한없는 공간=허공법계= 우
공간은 시간 때문에 살아나고, 시간은 공간이 있어서 시간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우주=우+주= 공간과 시간의 합체로 움직여 나가는 것
②만유: 개개물물,
많은 숫자의 만유가 무한공간 무한시간속에 존재하지만 그 근본은 본원자리, 일원상자리이다.
③본원:형상을 보지 말고 우주만유가 나타나는 것의 본래자리, 일원상자리
근본원리, 본원자리
나타나있는 형상자리만 보고, 근본자리는 못본다.
우주만유와 나와의 관계는 본원자리로 일원상의 진리에서 설명한다
이 자리를 알면 우주만유를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우주만유와 일원상의 관계는 본원이다.
B.제불 제성의 심인이며
-제불제성: 모든 부처, 모든 성인
심인: 마음도장 -> 도장은 언제나 똑같은 모양으로 찍힌다.
제불제성은 마음도장을 찍으면 일원상자리 그대로 나오기 때문에 심인이라 한다.
우리도 육근을 통해서 마음도장을 찍지만, 엉뚱하게 나온다.
중생과 표현을 분리했다.
C. 일체 중생의 본성이며
일체 중생의 심인은 틀리다. -> 일체 중생은 심인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성품이라고 하면 맞는 것이다.
일체 중생과 일원상의 관계는 본성이다.
본원, 심인, 성품으로 명확하게 진리자리를 현실과 연결시켜 주는 부분이
“일원(一圓)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며, 제불 제성의 심인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이며” 이다.
심인자리까지 못가더라도 심인자리로 가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그 노력이 공부이고 일상생활 속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2. 일원상의 진리의 내용
: 대소 유무(大小有無)에 분별이 없는 자리며,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며,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며, 언어 명상(言語名相)이 돈공(頓空)한 자리로서
① 돈공頓空한 자리:진공
a.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다.
대: 본체, 소: 형형색색으로 나오는 형체, 유무: 변화
진리를 대소유무로 표현: 진공/묘유/조화
생각으로 대소유무를 분별하는 것이 끊어진 자리가 돈공한 자리이다.
분별성이 끊기가 어렵다.
잠자기 전에는 계속 분별성이 일어나고, 잠자도 꿈꾸면서 분별을 한다.
공부란 시시때때로 경계마다 상황마다 일어나는 분별성을 잠재우는 것이다.
대소유무 자리의 분별은 해도 좋지만 진리 본체에서는 해도 좋은 분별까지도 끊어야 한다.
b. 거래가 끊어진 자리
-시간과 장소에 따라 마음이 변하고 정착이 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마음 작용이다.
-생멸거래: 마음이 났다 없어졌다 왔다 갔다 하는 것
-생멸거래가 끊어졌다: 장소가 달라져도 그 마음이 그 마음
ex. 의두요목에서 도솔천에 떠나지 않고 왕궁가에 내렸다는 말씀은 도솔천에서의 마음과 왕궁가에서의 마음이 같다는 것이다. 보통사람은 달라진다. 도솔천은 좋고 왕궁가는 나쁘다는 것이 없다.
c.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
-인간의 모든 현실세계는 업의 차이
-인간의 사는 현실세계는 평등할 수 없고 차이가 있는데, 선악업보에 따른 것이다.
(줄때도 잘 줘야 한다. 아낌없이 줘야 한다. 육바라밀의 첫째가 보시인데, 하려면 잘 해야 한다.)
-본래자리에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 대평등
-차별있는 자리로 보지 말고 차별없는 본래자리로 보려고 하면 돈공한 자리에 합일해야 한다.
d. 언어명상이 돈공함
-말로 할 수 없고 생각으로도 할 수 없다.
생각으로 그 자리를 가자고 하면 오히려 그 자리에서 멀어진다.
돈공자리를 설명하는 예화~경봉스님(양산 통도사 극락암 당대의 선승)과의 문답
“극락에 길이 없는데 어찌 왔는가!”
“극락이 무엇이건대 길이 없습니까?”
“앞에는 한 점, 뒤는 두점이다.” 하시고 웃으셨다.
나중에 생각하니, “네 마음자리가 극락이다”는 말씀이셨다.
한 문답 끝에 바로 물었다.
“스님, 가끔 부산 신도집도 방문하십니까?”
“대학병원 원장이 어디 왕진 가나?”
“스님, 이 대학병원에는 의사가 몇 명이나 됩니까?”
“전삼삼 후삼삼이다. 원불교에는 의사가 몇 명이나 되나?”
“후삼삼 전삼삼입니다.”
(*금강경에 수보리와 부처님께서 대화할 때 항하에 있는 모래 수, 그 모래숫자만큼의 항하, 그 많은 항하에 있는 모래수, 그것이 얼마나 되는가 물으시는 대목이 있는데 중국의 ?선사가 송을 붙였는데 전삼삼 후삼삼이라 했다. 앞에도 셋 뒤에도 셋, 다 세면 하나라는 뜻이다.. 대종사님도 바다 속의 고기수를 다 샜다 하셨는데 그것도 다 하나이다.) *성리품 12장 : 대종사 영산으로부터 봉래 정사에 돌아오사 한 제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영산에서 윤선(輪船)으로 이 곳에 올 때에 바다 물을 보니 깊고 넓은지라 그 물을 낱낱이 되어 보았으며 고기 수도 낱낱이 헤어 보았노니, 그대도 혹 그 수를 알겠는가.] 하신데, 그 사람이 말씀 뜻을 짐작하지 못하니라.
->경봉스님의 말씀이 돈공한 자리이다.
② 광명의 위력(-> 대적광전): 묘유
- 다 빈 그 자리에 영지가 들어있어야 한다.
일원상의 진리에 光광, 밝은 빛이 가득찼다. 돈공한 자리에 영지의 광명이 꽉 찬다.
그 광명을 따라 대소유무의 분별이 나타나고 선악업보에 차별이 나타난다.
광명은 비추어 보는 위력이다.
암실기심暗室欺心이라도 신목神目은 여전如電이니라.(어두운 방안에서 마음을 속여도 귀신의 눈은 번개와 같다.) -> 일원상의 진리의 광명의 위력이 일체유정물의 마음작용을 하나하나 다 비추어본다.
->방편, 손이 많은 부처, 눈이 많은 부처(천수천안부처)를 상징으로 만들었다.
마음작용을 보시고 차별, 선악업보의 차별을 만들어 낸다.
그 사람의 마음작용은 그 사람에게 준다.
- 광명의 위력이 세 가지(대소유무, 선악업보, 언어명상)로 나타내는데 생멸거래는 빠졌다.
-> 생멸거래가 나타나는 것은 진공묘유의 조화자리로 나타난다.
- 어두움에서는 구별이 안되지만 밝으면 다 구별된다.
③ 기(氣): 조화
- 그 빈 자리에 광명뿐아니라 기가 꽉 차있다. : 대조화
- 조화: 진공 가운데 묘유가 있고 조화가 있다.
- 작용: “무시광겁에 은현자재한다”
무시광겁-> 무시무종無始無終(vs 기독교:유시유종-시작은 창조, 끝은 말세)
: 무한시간에 작용하여 우주를 변화시킨다. -> 무한동력
* 족탈불급(足脫不及): 맨발로 뛰어도 따라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능력, 역량, 재주 등이 아주 모자라 남을 따르지 못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은현자재(隱現自在)~ 4대(지수화풍) 흩어지는 것이 은隱, 모이면 현現라고 하는데 기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운동선수가 운동하는 것, 강의하는 것 모두 일원상 진리의 기의 작용 중 일부를 활용하는 것이다.
일원상의 진리는 비고 밝고 바르다. 진리의 기의 작용은 바른데, 사람에게 들어오면 바르지 않게 작용할 수도 있다.
일원상 진리의 기의 작용은 정확하다. 한없는 조화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
이 세가지를 알면 눈치 볼 필요가 없다.
사람의 눈은 눈치를 봐서 피할 수 있지만, 진리의 눈은 피할 수 없다. 눈치를 안 보고 사는 것은 떳떳하고 멋지게 사는 것이다.
눈치를 보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살기 위해서는 진리의 세 가지 측면을 잘 알아야 한다.
‘진공은 언젠가는 묘유로 나타나서’가 아니라 ‘진공은 언제나 묘유로 나타난다’ ; 진공즉묘유, 묘유즉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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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삼 후삼삼
이 법문은 벽암록에 실려 있는 법문으로 문수보살께서
무착 문희선사에게 일러주신 법문이다.
무착 문희선사께서 대력 766~779에 오대산에 들어가 화엄사에 머물면서 문수보살님을 친견하기 위해서 기도 하던 중 금강굴 앞에 으르러 어떤 남루한 영감님을 만나 그를 따라 절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두 분이 나란히 앉아 문답을 나누었다.
먼저 영감님이 묻기를
남방에서는 불법을 어떻게 행하는가?
말세에 계행이나 지키면서 중노릇 합니다.
절에는 몇 사람이나 모여 사는가?
혹은 삼백도 모이고 오백도 모여 삽니다.
이어 무착스님이 질문하기를
이곳에는 불법이 어떠합니까?
범인과 성인이 같이 살고 용과 뱀이 섞여 살지
도량은 얼마나 됩니까?
동서가 팔 천리요 남북이 구만리라
그럼 대중은 몇 명이나 모여 삽니까?
앞에도 삼삼 뒤에도 삼삼이니라.
노인이 모를 이야기만 하는지라 무착스님은 이해 할 수가 없어 문답을 중단하고 노인과 작별인사를 드리면서 다시 물었다.
오탁악세에 머무는 중생이 선근이 없사오니 어떻게 하면 해탈할 수 있겠나이까?
노인이 게송으로 답 하였다.
若人靜座一須臾 약인정좌일수유
勝造恒沙七寶塔 승조항사칠보탑
寶塔畢竟碎微塵 보탑필경쇄미진
一念爭心成正覺 일념쟁심성정각
누구나 잠깐 동안 앉아 선을 닦으면
강가 모래같이 많은 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수승하리라.
보탑은 끝내 무너져 티끌이 되거니와
한생각 깨끗한 마음은 부처를 이루는도다.
도량을 빠져나와 균제 동자에게 물었다.
문수보살 계시는 금강굴이 어디있는가?
하니 균제 돌아보며 이곳이 반야사라고 대답함으로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그렇게 장엄하게 있었던 도량에는 절도 노인도 균제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서야 무착스님은 정신이 번쩍 들고 그곳으로 향하여 무수히 절을 하면서 상을 떨쳐버리지 못해 문수보살과 대화를 나누고도 문수를 알아보지 못한 어리석음에 눈물을 흘리고 게송을 남겼다.
槨周沙界聖伽藍 곽주사계성가람
滿目文殊接話談 만목문수접화담
言下不知開何印 언하부지개하인
廻頭只見聚山巖 회두지견취산암
시방세계 두루 성스러운 절
눈에 가득히 문수와 말을 나누었네
당시는 무슨 뜻을 열어 보이는지 알지 못해 나왔는데
머리를 돌려서 바라다보니 산과 바위뿐이어라
그 뒤 무착스님은 전산산 후삼삼이란 화두를 들고 3년 동안 정진한 끝에 범인과 성인이 함께 살고
용과 뱀이 섞여 산다는 말씀을 크게 깨닫고 나니 본래 촌보도 옮기지 않은 그 자리에서 문수가 눈에 가득하고 청산이 그대로가 적정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명심보감 천명편- 현제수훈왈 玄帝垂訓曰, 인간사어人間私語라도 천청天聽은 약뢰若雷하고 암실기심暗室欺心이라도 신목神目은 여전如電이니라. : 현제가 훈계를 내려 말하기를, "인간의 사사로운 말이라도 하늘이 듣는 것은 우뢰와 같고, 어두운 방안에서 마음을 속여도 귀신의 눈은 번개와 같다."
* 천수천안관음(Sahasrabhuja-avalokitesvara)은 몸에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갖춘 관음보살로 보통 천수관음이라고 부른다. 변화관음이 흔히 갖는 다면다비(多面多臂)의 모습을 발전시킨 것이다. ‘천이’라는 것은 무한의 수를 나타낸다고 보아 관음의 자비력을 최대한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천수천안경 千手千眼經)≫에 의하면 이 보살은 “과거세에서 미래세의 일체 중생을 구제한다는 대비심다라니(大悲心陀羅尼)를 듣고 환회하며,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안락하게 하기 위하여 몸에 천수천안이 생겨나게 하라.”고 원하여 천수천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소원에 의하여 천수관음은 천 개의 자비로운 눈으로 중생을 응시하고 천 개의 자비로운 손으로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무한한 자비로움으로 인해 대비관음(大悲觀音)이라고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