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05유정독서
이들을 위하여
분노(憤怒)의 주먹을 쥐다가도 결국은 자기 가슴이나 치며 애통해 하는 무력자(無力者)들을 위하여, 지하실(地下室)처럼 어두운 병실(病室)에서 오월(五月)의 푸른 잎을 기다리는 환자(患者)들을 위하여, 눈물 없이는 한술의 밥숟가락을 뜨지 못하는 헐벗은 사람들을 위하여, 위선(僞善)에 지치고 허위(虛僞)의 지식(知識)에 하품을 하고 사는 권태자(倦怠者)를 위하여, 돈이나 권력(權力)보다 더 소중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의 뒷전을 좇아가는 소시민(小市民)들을 위하여, 폭력(暴力)을 거부(拒否)하며 불의(不義)를 향해서 ‘아니’라고 고개를 흔드는 사람들을 위하여, 요한처럼 광야(曠野)에서 홀로 외치는 예언자들을 위하여, 쓰레기터에 살면서도 아름다운 것을 참으로 아름다운 것을 목마르게 갈구하는 미(美)의 순교자(殉敎者)들을 위하여, 무기고(武器庫)나 식량창고(食糧倉庫)보다는 영혼의 언어(言語)가 담긴 한 줄의 시(詩)를 더 두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개를 개라 부르고 구름을 구름이라고 명백하게 부를 줄 아는 대중(大衆)들을 위하여, 텅 빈 공허가 깔려 있는 월급(月給) 봉투와 아내의 시장(市場) 바구니 속에서도 내일의 꿈을 찾는 사람들을 위하여, 민들레와 진달래와 도라지, 박꽃, 냉이꽃들이 매연(煤煙) 속에서 시들어 가는 것을 고향(故鄕)처럼 지켜보고 있는 이들을 위하여, 오늘보다는 내일을 위해 허리띠를 조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나날이 무거워지는 저금통장처럼 자기 머릿속에 지식(知識)을 축적해 가려는 사람들을 위하여, 사람들이 다 기진맥진하여 절망(絶望)의 흙구덩이 속에 무릎을 꿇을 때 뜻밖에 나타난 기병대(騎兵隊)의 그 나팔수 같은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고 또한 미래(未來)의 입법자(立法者), 심야(深夜)에서도 눈 뜬 불침번(不寢番), 도굴자(盜掘者)를 막는 묘지(墓地)의 파수꾼, 소돔성(城)의 롯과, 칠백의총(七百義塚)에 묻힌 의병(義兵) ─ 이렇게 남과 다른 생(生)을 살고자 하는 이웃들을 위하여─
우리는 역사(歷史)의 새로운 언어(言語)와 문법(文法)을 만들어 가는 이 작은 잡지(雜誌)를 펴낸다.
그리하여 상처(傷處)진 자(者)에게는 붕대와 같은 언어(言語)가 될 것이며, 폐(肺)를 앓고 있는 자에게는 신선(新鮮)한 초원(草原)의 바람 같은 언어가 될 것이며, 역사(歷史)와 생(生을) 배반(背反)하는 자들에게는 창(槍)끝 같은 도전(挑戰)의 언어, 불의 언어가 될 것이다. 종(鐘)의 언어가 될 것이다. 지루한 밤이 가고 새벽이 어떻게 오는가를 알려주는 종(鐘)의 언어가 될 것이다.
지은이: 이어령, 『문학사상』 1972. 10
<낙화>
이 형기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북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을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가을 사랑>
문 정희
가을은
올 때마다
내게 사랑을 하나씩 가르쳐 주었다.
어쩌다 맞는 소슬 바람 한 점에도 깜짝깜짝하고
막다른 가을을 지나 찬바람이 불면 그칠 만도 할 일인데
오늘도 그건 그대로여서 어수선 하여도 매년 그러했던 거여서
이 가을 또 한 사랑 비우겠지
은행나무 가로수에 햇볕이 떨어진다.
가을볕이라서 떨어지는 별만큼 낙엽이 쌓인다.
쌓인 만큼 그리움도 그렇게 쌓이겠지만
*추신:
한가위가 지났습니다. 가을이 성큼, 옆으로 다가왔습니다.
온통 초록으로 그득하던 산하는 이제 서서히 단풍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거울 앞에 서면 어떤 색의 립스틱을 발라야 할지, 외출할 때에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멈칫거릴 때가 많아졌습니다.
아침 저녁 일교차가 심합니다. 부디 감기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목요일(10월 5일.14:00), 유정독서 모임은 김유정문학열차에서 진행됩니다.
이 날짜에는 김유정의 수필 < 조선의 짚시>, <밤이 조금만 짧았더먼>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후에는 한국의 수필문학사를 더듬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요일, 김유정문학열차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