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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올림픽 유치 - 88올림픽
1). 자료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 : 1980년대>
- 80년 11월 30일 전두환의 지시로 IOC에 올림픽 유치신청서를 제출했고 12월 2일 접수했다. 81년 1월 6일 KOC는 올림픽 유치계획을 위한 실무반을 편성했다. 하지만 경쟁국 일본의 방해와 불안한 국내정세로 올림픽 유치는 사실상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였다./모두가 올핌픽 유치를 포기한 것처럼 보이던 순간 (.....) 올핌픽 유치작전의 총수는 유학성이었다. 전두환과의 독대 이후 전두환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유학성은 사표까지 써놓은 채 안기부 내에 테스크 포스팀을 구성해놓고 올핌픽 유치작전의 모든 계획을 입안하고 진행했다.(2권 59쪽)
-(열세 예상을 딛고 유치에 성공한 요인에 관한 분석- 고광헌) “국제적인 스포츠용품 생산과 유통구조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국제 스포츠독점자본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판매전략에 유리한 도시가 올림픽을 개최해야 한다. 따라서 서울은 나고야보다 경쟁이 쉬운 곳일 수밖에 없으며, 나고야가 개최지가 될 경우 세계적인 수준에 있는 일본의 스포츠독점자본과의 경쟁에서 탈락할 위험이 커짐으로 서울을 지원한 것이다. 이들 스포츠 메이커들은 개최지가 결정된 그곳 시장을 파고드는 것은 물론 인위적으로 특정도시에서 올림픽이 개최되도록 유도까지 하는 것이다.”(2권 63쪽)
- 서울이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의 개최도시로 선정된 직후부터 전두환 정권에게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은 스포츠 행사가 아니라 정치 그 자체였다. 아니 ‘전가의 보도’였다. ‘86, 88’은 마법의 주문이 되었다. 서울올림픽의 유치를 보도한 <조선일보> 81년 10월 2일자가 주장했듯이, 올림픽은 ‘민족우수성 과시, 국제적 위치 입증, 세계 속의 한국부각’의 기회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반민주적이고 억압적인 조치들이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2권 65쪽)
-‘팔유팔파’의 정신에 부응하기 위해 MBC는 81년 12월 5일 기구조직을 개편해 종전의 체육부를 보도국으로 분리해 국단위의 스포츠국으로 승격시켰으며, 이어 ‘국내외 빅게임을 위성중계로 빠짐없이 방송했다.’ 물론 KBS에서도 이와 같은 변화가 이루어졌다. TV 스포츠프로그램 관련 편성은 81년 19%, 82년 27%, 83년 28.2%로 늘었다. 해도 너무 했다고 생각한 건지 84, 85년대엔 25%를 유지했다. 또 85년 6월 20일엔 <일간스포츠(69년 9월 26일 창간)>에 이어 당시 관영언론사였던 서울신문사에 의해 <스포츠서울>이 창간됨으로써 5공의 ‘스포츠 정치’는 강한 원군을 얻게 되었다.(2권 66쪽)
2). 개인적 기억
시대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또 다른 사건이었다. ‘올림픽’을 유치했을 때, 가장 처음 든 생각은 ‘과연 유치할 능력이 있는 것일까?’였다. 얼마 전까지 수출 100억달러, 국민소득 1000불에 목이 맨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새롭게 등장한 대머리 지도자의 냉정한 얼굴은 자신감의 상징이었을까? 유치 확정 후, 환호하는 대표단의 모습을 보며 마냥 기뻐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7. 통행금지 해제
1). 자료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 : 1980년대>
- 1945년 9월 7일 미 군정치하에서 미군사령관 하지의 군정포고 1호로 시작된 통행금지가 그로부터 1982년 1월 5일 밤 12시를 기해 전방 접경지역과 후방 해안 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해제되었다.(2권 83쪽)
- (조선일보 82년 1월 5일자) “밤을 걷어내는 먼동이 텄다. 통금이여 안녕. 마지막 통금을 넘긴 5월 새벽 4시는 유보된 권리가 회복되고 ‘24시’가 비로소 시작되는, 기억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것은 37년 세월 동안 일상 속에서 길들여졌던 밤의 통제와 제한이 마지막을 고하는 순간이었고, 또 다른 자제와 절제의 시민의식이 요구되는 시작이기도 했다.”(2권 86쪽)
- 통금해제가 가져다준 해방감은 민주화 쪽으로 나아가진 않았다. 통금이 해제된 후, 호황을 누리기 시작한 건 본격적인 밤 문화와 성적 욕구의 배설물이었다. 특히 서울 강남에는 새로운 숙박업소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는데, 이런 풍경에 대해 <주간중앙> 82년 1월 17일자는 이렇게 그리고 있다. “영동의 신흥 숙박업소들이 활황이다. 이들은 컬러TV에 침대는 물론 도색필림을 구경할 수 있는 VTR시설까지 완비, 시간제를 구가하고 있다.”(2권 88쪽)
2). 개인적 기억
소설가 이병주가 전두환 찬양으로 바뀌게 된 계기였던 ‘통금해제’는 분명 국민 위무책 중에서는 매력적인 정책임에 틀림없었다. 5공은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면서 대신 욕구의 분출을 허용하였다. ‘밤’의 시간을 허용한 일은 개인적 즐거움을 누리되 불필요한 사회적 관심에는 눈과 입을 닫으라는 메시지였다. 하지만 그것 또한 의도와는 다른 ‘자유’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각성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억압의 해제, 즉 국가에 의한 개인의 자유 제한은 결코 허용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통금해제’는 시간의 자유만를 허락하려 했지만 결국 근본적인 인간의 자유를 추구하게 만들었다.
통금해제 후, 밤의 시간을 즐기기 위해 술에 취한 채 동대문에서 광화문까지 새벽의 거리를 걸었던 기억이 난다. 버스도, 지하철도, 끊긴 시간 텅 빈 거리에 앉아 방랑의 고독(?)을 즐기던 시간은 분명 ‘젊음’이었다. 차가 운행하는 새벽 시간까지 다시 방향을 알 수 없는 거리를 걸었다. ‘어둠’에서 ‘새벽’을 맞이하는 순간에, 내가 생각했던 것은 사회적 변화보다는 궁극적인 나의 변화였다. 여전히 나의 의식은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러있었다.
-통금해제는 흥미로운 계획을 추진하게 만들었다. 83학년도 동아리 신입생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하였다. 거의 30명에 가까운 신입생 참가자들과 함께 추진한 일명 ‘야경촬영’이었다. 4-5명 정도를 한 팀으로 하여 서울의 대표적인 야경명소를 사진에 담고 마지막에 남산 근처에서 모인다는 기획이었다. 문제는 팀을 인솔할 책임있는 선배들이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할 수 없이 몇몇 친구들에게 부탁을 하였고 친구들은 기꺼이 팀의 인솔을 맡아주었다. 통금해제가 가져다 준 뜨거운 서울의 밤과 함께, 각자의 야경촬영을 마친 후 새벽 포장마차에서 나누었던 한 잔의 술은 더욱 달콤했었다.
8. 프로야구 출범
1). 자료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 : 1980년대>
- “어린이에게 꿈을, 젊은이에게 정열을, 온 국민에게는 건전한 여가선용을!” 이런 슬로건을 내세운 프로야구가 82년 3월 23일 출범했다. 5공이 ‘스포츠 공화국’임을 입증하겠다는 듯 올림픽 유치와 더불어 야심작으로 내놓은 작품이었다.(2권 104쪽)
- 전두환이 프로야구 성공을 위해 정부에 지시한 내용은 ‘문교부와 문공부는 언론기관을 통해 대대적인 홍보를 할 것이며/각 구단이 흑자가 될 때까지 면세조치를 해주고/선수들의 바위병 근무를 몇 년간 분할해서 하는 방법’을 연구해보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또한 구단주들에게 몇 가지 내용을 당부하였는데 ‘전력이 평준화될 수 있도록 훈련을 철저히 하라/지방 유지들이 관심을 갖도록 지역적 특색이 있는 응원을 하라/고교야구 팬들을 프로야구 팬으로 끌어들이도록 하라/스타를 만들어라. 그것이 프로야구가 발전하는 길이다/운동선수도 부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등이다.(2권 108쪽)
-프로야구가 막 시작되었을 당시 우리나라는 스포츠공화국이라 불릴만큼 스포츠 중계를 많이 하였고 이 중에서도 프로야구 중계가 핵심을 이루었다. 언론사 중 하나인 MBC가 서울을 연고지로 한 청룡팀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텔레비전 방송사를 비롯한 각종 신문 등을 통해 프로야구에 관한 담론들이 넘쳐났다. (...) 보통 경기가 시작되는 3월 하순부터 시즌이 마무리되는 10월까지 언론은 가능한 많은 이야기짓거리를 만들어냈다. 경기가 끝나는 10월말부터 스토브리그라 하여 각 구단별 훈련상황이나 선수영입에 관련된 이야기, 그리고 선수들의 일상생활까지 기삿거릴 등장하였고 이는 곧바로 일상적인 담론의 공간에서 재현되었다.(2권 112쪽)
2). 개인적 기억
-‘프로야구’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 각 지역에 야구팀을 배당하고 기업이 운영한다는 ‘프로야구’의 운영계획은 웃기기(?)까지 했다. 영, 호남 비롯하여 ‘지방차별’ 및 ‘지역갈등’이 여전한 상황에서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확대재생산 하려는 의도로까지 느껴졌다. 일시적으로 자기 고장의 야구팀이 승리하는 것에 그토록 열광적으로 몰두해야 하는 일인지도 의심스러웠다. ‘프로야구’에 대한 인식은 대학시절 내내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프로야구’에 열광적인 친구와의 대화에서는 약간의 관심을 보이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단지 사교적인 대화에 지나지 않았다. ‘대머리 아저씨’가 가지가지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9. 이산가족 찾기
1). 자료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 : 1980년대>
-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부터 KBS-1TV를 통해 특별 생방송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비극적인 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던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11월 14일까지 138일간 총 방송시간은 모두 453시간 45분이었으며, 방송기간 동안 방송 신청자 10만952명 중 5만3536명이 출연해서 1만189명이 상봉하는 대기록을 세웠다.(2권 137쪽)
-(장사국 <분단 아픔 재회 기쁨 - 4천만이 울었다>) “진행을 맡았던 유철종, 이지연 아나운서는 단숨에 인기스타가 됐다. 이산가족들이 서로를 확인하며 울부짖던 '맞다, 맞아'는 그 무렵 최대의 유행어였다. 10만장의 벽보가 붙은 KBS 본관 건물벽은 마치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을 연상케 했다. 기막힌 사연도 많았다. 어릴 적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해 애태우다가 엉덩이에 있는 반점 하나로 혈육임을 확인한 사람, 서로 가족을 찾으려고 방청석에 나란히 앉아 있다가 만난 남매, 어떤 쌍둥이 형제는 KBS현관에서 우연히 만나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기도 했다.”(2권 139쪽)
-(KBS 안국정 증언) “83년 6월 어느날, 이원홍 당시 KBS 사장이 기획제작1부장이던 나를 방으로 불렀다. 그는 낙동강 전투에 참여한 옛 전우들의 재회를 다룬 6·25 특집 생방송 <낙동강 1300리>를 잘 만들었다고 한참 칭찬하더니, 한 가지 주문을 했다. ‘남북이산가족도 그런 방식으로 TV를 통해 만나보도록 하면 어떨까? 뜻밖의 주문이었다. 몇몇 소집단의 경우라면 몰라도 몇 십만, 몇 백만에 달할지 모를 이산가족들을 TV를 통해 만나게 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기상천외한 발상이었다.’”(2권 142쪽)
-이원홍은 일종의 반공 프로그램으로서 그런 아이디어를 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 어떤 프로그램이건 오직 정권안보에 해가 가지 않는 한에서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출연자들이 잃어버렸던 가족을 찾게 돼 울부짖은 장면은 시청자들에게 가슴 저미는 슬픔과 함께 벅찬 감동을 안겨주었지만, 80년 5월 광주학살의 현장엔 TV가 없었다.(2권 142쪽)
2). 개인적 기억
- ‘이산가족 찾기’는 우리 가족의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함경북도 함흥 출신이셨다. 할아버지는 한의사였고 그 지역의 유지였다고 한다. 그 덕에 아버지는 어렸을 적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고 상업학교까지 마치고 지역 은행에 근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 전쟁은 모든 것을 뒤바꿔버렸다. 아버지와 배다른 두 동생만 남쪽으로 피신하였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할아버지는 공산당에 의해 학살당하셨다고 한다. 또 다른 친척들도 피난하였다고 했지만 남한에서의 피곤한 삶은 과거를 잊게 만들었고 현실의 삶 속으로 매몰시켰다.
‘이산가족 찾기’와 ‘남북이산가족 찾기’ 행사에 모든 이산가족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했던 것은 아니었다. 전쟁은 각자에게 다른 상황을 만들었다. 새로운 환경은 과거의 일을 수용하기 어렵게도 하는 것이다. 우리 가족도 그랬다. 하지만 그것은 제기하지 않고 묻혀진 역사일 뿐이었다.
10. KAL 격추 & 아웅산 테러
1). 자료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 : 1980년대>
-모두 269명을 태우고 뉴욕에서 김포로 오던 대한항공(KAL) 정기여객기 007편은 중간 귀착지인 앵커리지 공항을 1983년 8월 31일 밤 9시 58분에 이륙한 직후부터 조금씩 우측으로 항로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KAL 007기는 소련영공을 침범해 세 시간 가까이 비행하다 소련 미사일에 의해 격추되었다.(2권 152쪽)
-레이건은 이 사건을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철저히 이용했다. KAL기가 격추된 지 몇시간 후 슐츠 국무장관을 비롯한 레이건의 각료와 보좌관들은, 이 사건을 퍼싱미상일의 유럽 배치에 대한 국내외의 반대를 누를 수 있는 정치선전용으로 거론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레이건은 이 사건을 ‘소련의 대량학살’이라고 규정짓고, 그러한 ‘야만적 행위’는 미국이나 한국에 대한 공격일 뿐만 아니라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전세계에 대한 공격이라고 선언하였다. 레이건의 성명, 그리고 국무성의 공식발표 이외의 다른 정보에는 접할 수 없는 미 언론은 맹목적으로 레이건의 대소공격에 가담하기 시작했다.(2권 154쪽)
- 이 비극적인 사건은 엉뚱하게도 5공치하에서 방송이 얼마나 권력의 주구로 유린됐는지를 웅변해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자국민 수백명이 억울하게 죽은 사건인데도 그게 톱뉴스가 되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5공치하에서 신문과 방송은 5공정권 홍보와 미화를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런 일에 신문에게 선두자리를 양보하지 않겠다는 방송사들의 맹활약은 이른바 ‘땡전 뉴스’(또는 뚜뚜전 뉴스)로 나타났다.(2권 157쪽)
-1983년 10월 대통령 전두환은 동남아와 대양주 6개국 순방길에 올라 미얀마(버마)를 제일 먼저 방문했다. 10월 9일 전두환 일행은 미얀마 독립전쟁의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의 묘소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전두환의 도착 직전인 오전 10시 28분 아웅산 묘소에서 폭발사건이 발생했다. 이 폭발사건으로 전두환의 묘소 참배에 배석하기 위해 도열중이던 공식·비공식 수행원 가운데 부총리 서석준을 비롯한 16명이 사망하고, 1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전두환은 나머지 일정을 중단하고 10일 새벽 급히 귀국하였다.(2권 159쪽)
-(박보균) “미얀마행의 진짜 숨은 의도가 네윈식 통치체제를 관찰해보려는 것이었다는 지적이 만만치 않다. 미얀마가 뒤늦게 순방 대상국에 포함된 데는 허문도 문공차관의 아이디어를 전대통령이 수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허차관은 전대통령을 비밀리 독대, 네윈식 통치의 노하우와 퇴임 후의 독특한 영향력 행사방법 등을 현장 경험하는 것이 국가 관리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미얀마 순방을 건의했다고 한다.”(2권 164쪽)
C. 개인적 기억
83년 터진 두 개의 사건은 우리에게는 ‘공산주의 정권’의 잔혹성을 확인하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또한 아무리 비극적인 사건이라도 그것의 정당한 진실은 감춰지고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된다는 점을 확인시켜준 사건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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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내일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