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리(逆理)
산길을 가로지르던 다람쥐와 눈이 마주쳤다. 눈길을 뿌리치곤 후다닥 길섶 갈참나무에 오른다. 숲정이 사방을 살핀다. 끊긴 필름 요모조모 맞추는 기억의 눈알이 새까맣다. 갸우뚱거리는 도돌이표 의심은 긴가민가한 붓방아다. 필시 갈무리한 도토리 창고를 찾아갔지만 말짱 허탕이었겠지. 누운 풀도 좌우로 머리 흔들고, 옷 벗은 나무도 팔 벌려 시치미를 떼고 있으니 내려다봐야겠다며 높은 곳을 올랐구나. 의뭉스레 돌리는 갈참나무 팔랑개비에 다람쥐는 우왕좌왕이다.
도토리가 툭 툭 떨어지는 가을이 오면 다람쥐는 정신없이 바쁘다. 겨울 양식인 도토리를 땅에 묻어 갈무리를 해야만 해서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쁘게 여기저기 묻어놓지만 묻은 곳을 모두 기억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묻어놓은 곳이라고 찾아가서 손발이 아프도록 땅을 파보지만 번번이 허탕을 치니 어찌 우왕좌왕하지 않겠는가.
다람쥐가 영특하고 기억력이 뛰어나서 묻어둔 도토리를 모조리 찾아 먹어버렸다면 도토리나무는 번식을 중지하고 점점 씨가 말라갔을 것이다. 다람쥐가 땅에 묻어놓고 잊어버린 도토리가 싹을 틔워 도토리나무로 자라나기 때문이다. 다람쥐의 기억력을 이용한 도토리나무의 번식 기법과 다람쥐의 생존방식이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다. 다람쥐의 허탕과 우왕좌왕, 실망과 망연자실이 도토리나무의 씨가 되고 번식의 동인이 되어 다시 다람쥐의 양식으로 되돌아오는 생존의 방식, 이 어찌 자연의 신비 아니고서 달리 설명할 수 있겠는가.
‘쥐’라고 불리는 집쥐, 들쥐, 박쥐, 청서(청설모) 등이 하나 같이 혐오의 대상이지만 유독 다람쥐만은 너나없이 반갑게 만나는 선호의 대상이다. 이는 줄무늬 황갈색의 모양새부터 다르다고 할 수 있겠지만, 결정적으로 무작정 쳇바퀴를 돌리는 모자람과 자기 것도 바로 챙기지 못하는 어리숙함이 호감으로 발동한다는 믿음이다. 그렇다. 똘똘하고, 셈이 빠르고, 사리 분별력이 뛰어난 것보다 모자라고, 셈이 부족하고, 맹한 것이 오히려 호감을 받는다. 관계의 순리가 아니다. 역리다.
오늘날 우리 세상엔 둔하고, 모자라고, 허수한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모두가 영특하고, 영리하다. 하다못해 영악하기까지 하다. 이익과 손실의 무게를 저울질해대는 영악돌이들의 세상에서 다람쥐처럼 어리석은 사람들이 살아가기란 정말 힘겨울 것이다. 취함에서는 언제나 상대에게 내놓아야 하고, 힘에서는 언제나 상대에게 밀려야 하고, 평가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줄 밖에 서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세상이 꼭 그렇지만은 않는 모양이다. “똑똑한 사람은 따라 할 수 있어도 어리석은 사람은 흉내 낼 수 없다.”는 전래 경구가 “알면서 모르는 것이 최상이요, 모르면서 안다함이 병이다.”라는 기원전 6세기 노자의 가르침과 맞닿아 있어서이다. 인간 세상에도 영명하고, 계산이 빠르고, 사리 분별력이 뛰어난 것보다 조금 둔하고, 셈이 느리고, 사리 분별력이 무딘 것이 오히려 호감을 받는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영리해지기보다 어리석어지기가 더 어렵고 힘들다는 가르침이다. 곧 자기낮춤의 어려움에 대한 가르침일 터이다.
행복은 소유에서가 아니라 관계에서 비롯한다. 사람의 관계란 것이 완벽한 사람에겐 다가가기조차 힘겹지만, 약자에겐 돕고 싶은 마음부터 앞장선다. 모자람은 채워주고, 미숙함은 배려하고, 어리석음은 감싸주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영악한 사람은 상처의 화살을 장전하고 있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사랑의 화살을 받을 수 있는 과녁이 되기 때문이다.
나이를 더할수록 잘난 사람보다 좋은 사람에게, 완벽한 사람보다 좀 부족한 구석이 있는 어리숙한 사람에게 더 끌려든다. 왜일까. 필시 어리석어서 오히려 호감을 받는 관계의 역리 때문이리라.
갈참나무에서 내려온 다람쥐 숲정이를 뒤지느라 바쁘다. 우왕좌왕하는 것이 귀엽고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
그냥
친구 S의 전화를 받았다. 한참 만이라고 했지만 한 주간이다. “그냥 해봤어”라는 말의 ‘그냥’이란 그 한마디가 긴 여운으로 밀려온다. 무심코 던진 말일 것이다. 누군가에 따라서는 할 말을 하지 않아서 성의 없는 말로 들일 수도 있겠지만, 친구의 그 한마디는 친밀함을 확인하기 위해서든, 목소리라도 듣고파서이든 정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외모일 수도, 학벌일 수도, 능력일 수도, 재력일 수도, 권력일 수도, 차별화된 다른 것일 수도 있다. 그 수많은 이유 중에서 나더러 제일 멋진 이유를 꼽으려면 ‘그냥’을 꼽는다. ‘그냥’은 ‘아무 이유 없음’이고 ‘아무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이다. 왜냐고 물어 와도 ‘설명할 수 없음’이고, ‘설명할 필요도 없음’이다.
그냥 왠지 좋고, 이유도 없이 그냥 좋은 것은 사랑에 빠지게 한다. 외모, 학벌, 능력, 재력, 권력 기타 등등 이유가 붙어서 좋아하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서 이유가 사라지는 날 사랑을 잃게 된다. 사람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붙어 있는 이유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좋아할 이유 없이 좋아하는 사람이 가장 좋은 사람이다. 콕 꼬집어서 한 마디도 할 수 없어도, 싫은 느낌이 전혀 없이 그냥 좋은 사람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애정이 그러할진대 우정인들 다르랴. ‘오래도록’과 ‘친하게’가 친구의 요건이자 함의다. 덕 보겠다는 것이 이유가 되어 사귀는 친구는 그 이유가 담보되지 않는 날 인연을 끊는다. 부모 팔아서 산다는 친구다. 가족처럼 기쁨과 슬픔, 어려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친구다. 나누면 배가 된다는 기쁨이 질투가 될까, 나누면 반이 된다는 슬픔이 약점이 될까 염려하는 세상이다. 친구랍시고 설쳐대고, ‘친구’라는 말을 앞세우는 이들은 대개 친구가 아니라 그저 아는 사람이다. ‘그냥’이란 말이 어색하지 않고, 정겨움 내지는 동심의 세계를 맛보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친구다움이 아닐는지. 하고자 하는 말 앞에 ‘그냥’이란 말 한마디만 얹어도 관계는 한결 넉넉하고 부드러워질 것이라고 여겨짐은 ‘그냥’을 여유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곧이곧대로 표현하기엔 언어적 한계가 있다. 사람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기기묘묘한 감정을 한두 마디로 표현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자연발생적으로 태어난 절묘한 한마디가 ‘그냥’일 것이라고 믿는다. 이유란 것들이 삶의 여정에 비춰보면 자잘한 것들인데 미주알고주알 일일이 상대하지 않겠다는 여유로움의 발로이리라.
만년의 길은 가본 적이 없는 서툰 길이지만 생각보다 멋지고 여유롭다. 외모를, 인기를, 학벌을, 재력을, 권력을 걷어낸 본래의 모습들에서 긴장의 끊을 놓는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의식주에 거리낌이 없어진다. 세상의 모든 것이 점점 더 아름답고 신비스럽게 보인다. 내 안의 빈자리, 상대가 편히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인 여지가 생긴다. 만나는 사람들이 그냥 좋아진다. ‘그냥’이란 말도 그냥 좋아진다.
친구 S에게 전화를 한다.
“왜 전화했어?”
“······.”
“그냥······.”
은종일 약력
- 소보면 출생
- 《한국수필》 수필, 《창작에세이》 평론, 《문학시대》 시 등단.
- 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 한국문인협회 이사, 대구문인협회 감사.
- 대구문인협회 부회장, 달구벌수필문학회 회장, 군위문인협회 창립회장 역임
- 수필집 『거리』, 『재미와 의미 사이』, 『춘화의 춘화』, 『아린』.
- 시집 『사소한 자각』, 『허공 도장』.
- 한국수필작가회 문학상, 월탄 박종화문학상, 대구문학상, 한전전우회 대경예술상
- 이-메일: eunji4513@hanmail.net
- 주소: 42099 대구광역시 수성구 동대구로 274, 3동 1202호(범어동, 궁전맨션)
- 전화: 010-8859-0212
첫댓글 옥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