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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훈대부, 행 사간원정언, 증 자헌대부이조판서겸, 지경연의금부 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정의공 송암이선생 신도비명과 서문 해의
의성인 김 황 찬
성산인 이천주 서
합천인 이영태 전
貞義公(정의공) 松巖(송암) 이 선생은 남방에서 빼어나게 태어나, 섬 오랑캐의 난리에 功勳(공훈)을 세웠다. 학문의 뜻을 둔다는 열다섯 志學(지학)의 나이에 목적달성을 위한 계책에 뛰어난 업적이 드러나 있으니, 공의 저술이 완비되었다. 이에 그 후인들이 오히려 다시 선생을 宣揚(선양)했더니 이미 누차 追贈(추증)의 은혜를 입어,
정이품 판서의 반열에 이르게 되었던바, 諡號(시호)가 내려지는 節惠之典(절혜지전)이 더해졌는 즉, 여러 예법을 헤아려, 용을 새긴 螭首(이수)와 거북으로 받침돌을 한 龜趺(귀부)로 神道碑(신도비)를 세우니, 餘恨(여한)은 장차 미치는 곳이 없을 지이다.
누누이 나를 향해 말하기를 추가로 보충하는 일을 요청하였다. 나 金榥(김황)을 돌아보니 不佞(불녕, 재주가 없는 자신을 낮추는 말)하여, 인간으로 보나 문장을 가지고도 원래 감당할 바가 아니고, 더구나 지금은 늙어 빠져 폐물이 된 데다가, 더욱이 억지로 시킨다고 그 간절함에 어찌 副應(부응)할 수 있겠는가?
다만, 삼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송암 선생은 내 선조인 東岡(동강) 文貞公(문정공) 金宇顒(김우옹)과는 한 스승에게 배운 벗이며, 道義(도의)가 있어 강론하고 질의하는 講質(강질)의 언약을 맺었다.
게다가 우리 從(종) 선조 文忠公(문충공) 鶴峯(학봉) 김성일이 영남초유사 명을 받은 즉 선생을 먼저 얻어 신임이 符合(부합)하였던 바, 끝내 그 생사의 정을 다하여 맞이하였다.
지금 삼백 여년이 지났건만 서로 마주 보기를 一家(일가)와 같으니, 비록 이 하찮은 後生(후생)이지만, 어찌 선생의 事跡(사적)으로써 함께 걱정하지 않을 수 있다던가? 드디어 蒙昧(몽매) 함을 무릅쓰고, 나아가 살피고 이 글을 적는다.
공의 諱(휘)는 魯(노)이며, 字(자)는 汝唯(여유)이고, 호가 松巖(송암)이다. 李氏(이씨)의 관향은 鐵城(철성)으로 고려 戶部尙書(호부상서) 鐵嶺君(철령군) 璜(황)이 鼻祖(비조)이다. 景安公(경안공) 휘 國軒(국헌)과, 左侍中(좌시중) 嚴冲(엄충)을 지나, 判右軍棇制(판우군총제) 휘 伯(백)에 이르자, 바야흐로 高麗(고려)의 運(운)이 다함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의령현 동쪽마을 世干(세간) 촌에 은둔하여 號(호)를 ‘隱庵(은암)’이라 하였다.
그 아들 少監(소감) 乙賢(을현)은 朝鮮(조선) 조정에서 여러 번 벼슬을 주었으나 나가지 않고, 자칭 ‘採薇叜(채미수)라고 하였다. 또한 그 인근 동네인 孚谷里(부곡리)로 이주하였다. 그의 아들은 訓鍊都正(훈련도정) 山命(산명)인데, 세종 때 對馬島(대마도) 정벌에 나가 공을 세우니, 병조판서에 追贈(추증) 되었다. 바로 공의 5세 조이다. 翊衛司左翊贊(익위사 좌익찬) 휘 克仁(극인), 忠武衛副護軍(충무위 부호군) 휘 文昌(문창), 濟用監僉正(제용감 첨정) 휘 翰(한), 通禮院引儀(통례원 인의) 휘 孝範(효범)은 공의 고조부와 증조부 그리고 조부와 부친이다.
부친 引儀公(인의공)은 남평문씨 가문에 장가들기를 忠肅公(충숙공) 克謙(극겸)의 玄孫(현손)인 판관 垠(은)의 딸이었다. 中宗(중종) 갑진(1544)년 3월 2일 부곡리 집에서 공을 낳았다.
나면서부터 뛰어나게 특출하여 才氣(재기)가 매우 빨랐다. 일곱 살에 처음 배움에 나섰고, 십여 세에는 經史(경사)에 널리 통하니, 詩想(시상)이 깨끗하고 헌칠하였으며, 글을 짓는 것에 條理(조리)가 있었다. 이윽고 널리 배워서 일정한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음과 양이 상호 순환하고, 군대의 진영을 奇襲(기습)과 正攻(정공)으로 하고, 물음에 따라 환하게 깨달아 알았으니, 보고 들은 사람들은 驚異(경이)롭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에 앞서 舍人(사인) 遊軒(유헌) 丁煌(정황, 1512~1560)에게 배웠는데, 그는 文正公(문정공) 靜庵(정암) 趙光祖(조광조)의 문하생으로, 直言(직언)에 연루되어 巨濟(거제)로 유배를 왔다. 공이 부친의 명을 받들어 찾아가서 拜謁(배알)하니, 머물러 受業(수업)을 하게 되었다. 돌아와서는 동생 畜庵(축암) 普(보)와 栢庵(백암) 旨(지) 두 공과 함께 徵士(징사) 崔永慶(최영경, 1529~1590) 선생을 따라 배웠다.
인하여 다시 南冥(남명) 曺植(조식, 1501~1572) 선생에게 나아가 依歸(의귀)하였다. 조 선생 역시 매우 소중하게 인정하였는데, 동문과 선배로는 德溪(덕계) 吳健(오건, 1521~1574)과 東岡(동강) 金宇顒(김우옹, 1540~1603), 寒岡(한강) 鄭逑(정구, 1643~1620)와 같은 현인이었다. 모두 함께 가르쳐 열심히 인도하는 것을 즐겨 하였으니, 그 德性(덕성)이 이루어졌다.
나아가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1664년 사마시에 합격한 즉, 학봉 김성일, 율곡 이이, 오리 이원익 등과 함께 榜目(방목)에 들었다. 이것이 일시에 전해지니, 다들 갸륵한 일이라 여겼다. 장차 太學(태학)에 유학할 때, 을사(1545)년 士禍(사화)로 희생된 忠賢(충현) 들을 伸冤(신원)해 줄 것을 疏箚(소차)를 내었는데, 자못 正義(정의)의 명성이 있었고, 시론을 진동시키고 빛나게 하였다.
南冥(남명) 선생이 卒(졸) 하자 장례에 참여하여 제문을 지으니, 많은 사람이 모두 다 칭찬하였는데, 공의 나이가 아직 채 서른이 되지 않았다. 이로부터 뒤에는 쓸데없는 출입을 다시 하지 않고, 오로지 집안에 寄居(기거)하며, 부모님을 모시는 직무에 힘썼다.
34세 때인 정축(1577)년에 부친상을 치루고, 기묘(1579)년 36세에 연이어 內艱喪(내간상)을 당하니, 전후로 居喪(거상)하면서 情緖(정서)와 문장이 모두 극진하였다. 1581년 10월 삼년 상복을 벗고 난 이후, 1584년 갑신년에 奉先殿(봉선전)의 祠官(사관)을 지냈다.
47세인 경인(1590)년에 增廣文科(증광문과,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보이던 과거) 甲科(갑과)의 探花郎(탐화랑, 전체 33명 중에 3위 순번)으로 입격하였다. 月沙(월사) 李廷龜(이정구)와 仙源(선원) 金尙容(김상용) 등이 함께 선발되었는데, 그 때 세상은 ‘龍虎榜(용호방)’이라고 稱頌(칭송)하였다.
한해 전에 守愚(수우) 최영경이 옥중에서 凶毒(흉독)에 얽어 무고하게 추위에 굶어 죽었다. 공은 이미 伸冤(신원)의 疏狀(소장)의 첫머리에 이름을 나타내었다. 이듬해 직장에 제수되었을 때, 조정은 일본에 통상사절을 보냈는데, 오랑캐 추장의 편지가 온 즉, 그 悖惡(패악)이 극에 달하였다. 공이 上奏文(상주문)을 올리기에 忠憤(충분)을 펼쳐 내었더니, 겸하여 答書(답서)도 진술하였다. 선조 임금이 답하여 국경 경비대책을 講修(강수)하였다.
孤査(고사) 文德粹(문덕수, 1516~1595)는 공의 외삼촌이었다. 경상감영의 金睟(김수) 감사에게 投書(투서)하기를 당시 사정에 極言(극언)을 하니, 나라의 근본에 우려가 많아 동요하는 형상이었다. 도리어 巡察使(순찰사)는 거스르고 체포하여 三嘉縣(삼가현)의 옥에다 가두었다. 공이 이 일로 上京(상경)하여 批答(비답)을 담고자 하였으나, 아직 귀환하지 못하였을 적에 임진왜란의 때를 만나 놀랐던 것이다.
공이 왜적의 틈새를 가만히 살펴보니, 그 세력이 猖獗(창궐)하는 것이 하루가 아니었다. 장차 그들은 못하는 짓이 없을 지경인 즉, 영남이 최우선 要衝地(요충지)였다. 곧 大笑軒(대소헌) 忠毅公(충의공) 趙宗道(조종도, 1537~1597)와 더불어 약속하기를, 귀향하여 倡義(창의)를 하고자 통문을 요청하였다. 咸陽(함양)에 도착하니, 때마침 文忠公(문충공) 鶴峯(학봉) 金誠一(김성일, 1538~1593)이 嶺南招諭使(영남초유사)로 부임해 있었다.
공과 조종도가 들어가 보고, 그간의 사정을 고하였다. 이에 문충공 김성일이 크게 기뻐하면서 하는 말이 “이것은 하늘이 나를 도운 까닭이다. 요즘 적의 예봉이 바야흐로 융성하니, 여러 郡邑(군읍)이 분탕질을 당하여, 백성들이 숨어들기를 바삐하여, 사람 구하기가 불가하니, 무슨 수를 구하여 수습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곧 공을 召募官(소모관)으로 差任(차임)하여, 여러 고을을 巡行(순행)하도록 하였다.
공이 지성으로 曉諭(효유)를 하니 感慨(감개) 奮發(분발)하여 響應(향응)하지 않은 자가 많았다. 金沔(김면, 1541~1593)은 居昌(거창), 鄭仁弘(정인홍, 1535~1623)은 陜川(합천), 朴思謙(박사겸)·朴思齊(박사제)·權世春(권세춘)·許國柱(허국주)·張翎(장령)·全致遠(전치원)·李大基(이대기)등 제공들이 단성과 진주 그리고 삼가와 초계 등지에서 연이어 起兵(기병)하여 명성과 공적을 쌓은 의병장이다. 일은 이미 모여 보고가 되었다.
문충공이 조종도와 함께 진양성 중에 들어 간 즉, 목사는 이미 도주하고, 군민은 모두 비어 있었다. 모두 함께 남강 위 矗石樓(촉석루)에 올랐다. 문충공 성일이 술을 몇 순배하고 시를 지으니, 촉석루중삼장사 구절이 그것인데, 죽음을 맹세한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공이 이내 청하기를 성의 垓子(해자)를 수리하고, 城砦(성채)를 나누어 설치함으로써 적의 침범을 수비하도록 하고, 밤을 달려 宜寧(의령)까지 적을 追及(추급)해서 전투를 독려하니 大捷(대첩)을 거두었다. 문충공이 列邑(열읍)의 군사를 살펴보니, 그 군세가 점차 떨쳐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는데, 곧 召募(소모)의 공이라고 狀啓(장계)를 올렸다. 龍彎(용만)의 행재소에서 批答(비답)이 있었는데, 조정의 명으로 成均館典籍(성균관전적)에 제수되고, 褒獎(포장)이 하교되었다.
공이 처음 소모관을 시작할 때 招諭(초유)하는 木牌(목패)를 많이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하여, 각 지역으로 나누어 보내어 그것을 보고 응하니, 號令(호령)이 시행되게 하였다.
각 지방에 개인이 저축한 곡물이 있었지만 양식을 내어 군대를 먹이는 것은 달가와 하지 않았다. 문충공 김성일은 법으로 그들을 엄격하게 다스리고자 하였지만, 공이 義理(의리)로써 曉諭(효유)하도록 간청하드니, 양곡 만 몇천석을 얻기에 이르렀다.
또 듣자하니, 조정은 중국에 急報(급보)를 하여, 명나라 조정이 군사를 일으켜 원조를 해왔다. 우선 平壤(평양)의 적을 토벌하고, 멀리 적을 쫓아 南下(남하)를 하니, 守令(수령)들이 모두 致賀(치하)를 하면서 이르기를 “당연히 하루에 회복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홀로 걱정하면서 하는 말이 “평양은 비록 수복을 하였으나, 한양도성은 오히려 왜적의 據點(거점)이 되어 있으니, 대병력이 속히 온다면 반드시 기약할 수 없으므로, 당연히 천천히 변화하는 것을 보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모두 다 이를 일러 에둘러 怪異(괴이)하다고 하였지만, 문충공은 마음속으로 그렇다고 여겼다. 서쪽 길을 가서 살펴 보라는 命(명)으로 인하여, 西厓(서애) 柳成龍(유성룡)을 만났는데, 때마침 體察使(체찰사)로서 臨津(임진)에 주둔하고 있었다. 곡식 종자를 청하여 수백 石(석)을 구해서 돌아오니, 백성들로 하여금 적기에 농사를 짓게 하였다. 온 道內(도내) 백성이 공에게 은혜를 입었다.
합천의병장 鄭仁弘(정인홍)이 공의 명성을 듣고, 參佐(참좌)가 되고자 하였다. 사람을 시켜 문충공에게 청하였지만 문충공이 불허하였다. 공은 역시 말하기를 “나와 김공은 함께 始終如一(시종여일)하기로 誓約(서약)하였으니, 이곳을 버리고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 그 서로 믿는 바는 이와 같다.”라고 하였다.
공은 또 忘憂堂(망우당) 郭再祐(곽재우)와 同鄕(동향)에 살아 情誼(정의)가 특히 각별하였다. 곽공이 창의하여 의병장이 되었을 때, 군병에게 斬首(참수)하여 首級(수급) 바치는 것을 금지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功(공)을 바라 賞(상)을 탐하면, 죽이는 것이 많다는 것을 잊어버리므로, 이미 이는 仁義(인의)의 군대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이에 이르기를 “그대의 말은 실로 功名(공명)을 세우고자 하는 마음과 같을지니, 그것은 사람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라, 머리를 베어 바치는 것은 無效(무효)가 될 것이다. 아마도 몸을 게으르게 하는 걱정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곽공이 그렇다고 여겨 이를 따르니, 이후로부터 믿고 성공하는 자가 많았다.
다음 해 1593년 4월 문충공이 경상우도감사로 순찰차 晉州(진주)에 도착하여 疫疾(역질)에 걸렸는데, 매우 심각하였다. 공은 大庵(대암) 朴惺(박성, 1549∼1606)과 함께 아침 저녁으로 官舍(관사)를 떠나지 않고, 혼신을 다해 보살폈지만 마침내 구하지 못하였다. 친히 殮襲(염습)하여, 方丈山(방장산) 자락에 임시로 장사를 지내고, 하도 慟哭(통곡)을 하고 나니 목소리마저 잃어버리고 그만두고 나왔다.
덕산동으로 들어가서도 줄줄이 눈물흘리기를 다하니, 마치 인간세상에 뜻이 없는 것과 같았다. 더군다나 그해 겨울 刑曹佐郎(형조좌랑) 겸 春秋館記事官(춘추관 기사관)에 제수되고, 곧바로 慶尙右道(경상우도) 都事(도사)에 배수되었다가, 다음에 居昌假守(거창가수)를 하였는데, 공은 부득이하게 일어나 應命(응명)을 한 것이다.
관직에 부임하여서는 檄文(격문)을 왜장에게 보내고, 또 명나라 李如松(이여송) 제독에게 啟文(계문)을 통하여 오랑캐와 中華(중화)의 和議(화의)는 불가하다는 것을 논증하였더니, 公論(공론)은 다 그것을 훌륭한 일이라고 하였더라.
이듬 해 갑오(1594)년에는 比安縣監(비안현감)이 되었다. 그 다다음해 봄에 관직에서 물러나 돌아왔다. 梧里(오리) 李元翼(이원익, 1547~1634)이 체찰사로서 공을 종사관으로 불렀다. 아직 부임하기 이전인데도 守城(수성)하는 책략을 지었으며, 아울러 관리들이 백성을 괴롭히는 弊端(폐단)을 밝혔다.
다음 해 정유(1597)년에 司諫院正言(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곧 遞差(체차)되었다. 翌年(익년) 무술(1598)년 봄에, 다시 正言(정언)이 되어 임금의 부름에 나가는 도중에 病疾(병질)이 들어, 김천의 객관에서 2월 29일에 終命(종명)하니, 享壽(향수)가 55세였다. 4월에 상여가 돌아와 士林(사림)이 모여, 소산의 坤坐(곤좌)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바로 부모의 宅兆(택조)가 있는 곳이었다.
그 후 168년이 지난 英祖(영조) 연간 을유(1765)년에 처음으로 수소문하여 禮曹參議(예조참의)에 追贈(추증)이 되었다. 또 48년 이후인 純祖(순조) 임신(1812)년에 吏曹參判(이조참판)으로 加贈(가증)되었다. 6년이 지나는 정축(1817)년에 吏曹判書(이조판서)에 증직되드니, 관례대로 兼任(겸임)의 직관도 받았다. 또 55년 이후 高宗(고종) 임금 신미(1871)년이 되어 ‘貞義(정의)’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淸白(청백)이 스스로 조심하여 지키는 것을 ‘貞(정)’이라 하고, 義理(의리)를 보고 충성을 다하는 것을 ‘義(의)’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諡號(시호)로써 이름을 바꾼 것이다. 오호라! 이와 같이 선생의 뛰어난 一代記(일대기)가 이곳에 살아 있는 것이다. 浮沈(부침)으로 낮은 자리에 있어, 마음 속에 蓄積(축적)한 바를 다 펼쳐보지 못하고, 사후에사 드러내어 밝힌 것이다. 또 이는 늦은 듯하고, 그 역시 그 사이에 天命(천명)이 존재하는 것이다.
儒林(유림) 논의의 숭배는 이곳에서 비롯되었다. 純祖(순조) 연간 임술(1802)년에 洛山書院(낙산서원)을 본향인 景山(경산)에다 건립하고, 景德祠(경덕사)라고 이름하여, 위패를 봉안하였다. 高宗(고종) 초기에 나라의 禁令(금령)으로 인하여 毁撤되어, 거듭 書堂(서당)이라 하였지만, 해마다 釋菜(석채)의 제를 올리니, 이 역시 공평한 여론이 오래되어, 泯滅(민멸)되지 않았던 것이다.
선생의 부인은 草溪鄭氏(초계정씨)로 護軍(호군) 渭(위)의 딸인데, 莊襄公(장양공) 俊(준)의 증손이다. 슬하에는 자녀가 없고, 측실의 맏딸이 곽망우당의 부실이 되었다. 막내동생 栢庵公(백암공)은 아들 曼勝(만승)이 있는데, 관직은 別提(별제)이고, 호는 槐堂(괴당)이다. 선생의 제사를 權奉(권봉, 임시로 모시는 예(禮)를 말한다)하였다. 두 아들 錫生(석생)과 錫龜(석구)를 낳았는데, 錫龜(석구)를 세주(世主)로 後嗣(후사)를 정하였다. 지금 이 신도비를 세우고자 일하는 자는 곧 두 공의 후손들이다. 나에게 와서 請(청)하는 사람은 經(경)과 炳滿(병만) 그리고 鍾熺(종희)이다.
銘에 이르기를:
道學(도학)에 方道(방도)가 있기를, 體(체)를 밝히고 用(용)을 알맞게 하여,
文(문)으로써 淸靜(청정)함을 지키고, 武(무)를 가지고 움직임을 제어한다.
忠孝(충효)와 義旅(의려)를 통솔하던 것 또한 오로지 그 때인데,
구름과 우레처럼 六韜三略(육도삼략)은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지난 날 어진 사람이 많아, 견주어 서서 아름다움을 칭송하니,
우리 선생과 같은 사람이, 실로 몇이나 있겠는가.
근본은 배움에 있어, 산과 바다마저 참된 깨달음을 진해(眞解)하니,
오로지 청정함에 물러남을 생각하여, 사물의 根源(근원)이 곁에 열렸도다.
강구하여 밝히기를 이미 성숙히 하여, 行動擧止(행동거지)가 매 한가지라,
도사리고 뒤틀림을 不遇(불우)하니, 利器(이기)가 어찌 차이가 있을 것인가.
龍蛇(용사) 왜란이 시작될 때, 嶺南(영남)의 치우침이 매우 심하여,
招諭使(초유사)가 가려 뽑기를, 召募官(소모관)이 그 任務(임무)일다.
지성한 명령으로 위태로움을 걱정하여, 기미를 살펴 잘 처리하니,
크고 작은 일이 있어도,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計策(계책)을 잘하여 능히 이룸에, 취한 바가 그 무엇이란가,
生死(생사)는 이미 끝났음을 알기에, 사방을 돌아보아도 다른 것이 없도다.
어찌 조문하지 않겠다고 이를 것이며, 끊어진 거문고를 꿰메 새기고 나니,
좋은 벼슬이 저절로 따라와, 오로지 나라에 남김이 없었더라.
백년이나 논의하고 결정하여, 公(공)과 私(사)를 서로 맞대어 책망하드니,
나로 하여금 그것을 보게 한 즉, 그 大綱(대강)을 이은 것이다.
宜寧(의령)의 백성은 뛰어난 氣稟(기품)을 기렸으니,
이곳에 그대로 보관하였다가, 이곳에 돌아와서 쉬도록 하였다.
길가에 돌이 있다고 말하여, 詩章(시장)에도 실었다지만,
공경하며 바라보며 行路(행로)는 篤實(독실)하여 잊지 못할 것임에야!
단기 4311년 무오년 10월 어떤 날 건립하다.
通訓大夫, 行司諫院正言,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 春秋館成均館事, 五衛都摠府都摠管, 貞義公松巖李先生神道碑銘幷序
聞韶 金 榥 撰
星山 李憲柱 書
陜川 李韺兌 篆
貞義公松巖李先生, 挺生南服, 樹功島夷之亂. 其才志學, 識謨猷業績之著在秉,公之述備矣. 迺玆其後人者, 猶復以爲先生, 旣蒙累贈, 至正卿而加之節惠之典, 則揆諸禮數合, 有神道螭龜之竪而恨其無及也. 亟向余爲言而要請追補之作. 顧余榥不侫, 以人以文, 元非所敢當而況此耄洫廢物, 尤何能勉强以副其誠懇也.
第竊伏惟念, 先生與我先朝東岡文貞公, 學同師友, 宿有道義, 講質之契. 粤我叔先祖鶴峯文忠公之奉命招諭嶺南也, 則首得先生而信任符合, 終見其生死盡情. 只今三百許年, 相視如一家, 雖此么麽後生, 亦安得不以先生事爲同憂? 遂不免冒昧而就按書之.
公諱, 魯; 字, 汝唯; 松巖號也. 李氏世貫鐵城, 高麗戶部尙書鐵嶺君璜, 爲鼻祖. 歷景安公國軒·左侍中嚴冲, 至判右軍棇制伯, 見高麗運方歇, 棄官歸遯于宜寧東坊世干村, 號‘隱庵’. 其子少監乙賢, 不就新朝徵辟, 自稱採薇叜. 又移居其傍孚谷里. 其子訓鍊都正山命, 世宗朝以從征對馬島有功, 贈兵曹判書. 是於公爲五世祖. 翊衛司翊贊克仁·忠武衛副護軍文昌·濟用監僉正翰·通禮院引儀孝範, 其高曾祖考也.
引儀聘南平文氏, 忠肅公克謙玄孫判官垠女. 以中宗甲辰三月二日, 生公于孚谷世第. 生而翹拔, 才氣頴超. 七歲, 始上學; 十餘歲, 通涉經史, 思致發越, 屬詞有條理. 旣又博學無方. 旁及陰陽屈伸, 兵陣奇正, 隨輒通曉, 聞見莫不驚異之.
先是遊軒丁舍人煌, 以靜庵趙文正先生之徒, 坐直言, 謫流巨濟. 公以親命往拜仍留受業. 及還與弟畜庵普·栢庵旨二公, 從學崔徵士守愚先生.
因復進就南冥曺先生而爲之依歸. 曺先生, 亦深加愛詡而同門先輩與德溪·兩岡之賢. 皆樂與之提撕刮劘, 以成其德. 出而應擧, 中司馬試, 則鶴峯·西厓·栗谷·梧里俱列同榜. 一時傳之, 爲盛事. 其遊太學也. 疏陳乙巳忠賢之寃, 頗有直聲, 震耀時論. 及南冥先生之卒而會葬, 祭侑之文, 多爲人豔賞, 則公年未三十矣. 自後, 不復事閑出入, 專以家居養親爲職務.
三十四, 丁外憂; 三十六, 連遭內艱; 前後居喪, 皆極其情文. 服闋三年, 除奉先殿參奉. 四十七歲庚寅, 以增廣擢甲科. 李月沙廷龜·金仙源尙容與之同選, 時稱龍虎榜. 前年, 守愚先生, 爲凶毒搆誣瘐斃獄中, 公旣出身首陳伸冤之疏. 明年除直長時, 朝庭通使日本而虜酋書來, 極其悖逆. 公上封事以攄忠憤而兼陳答書, 辭命及講修備邊之策. 孤査文公德粹, 公之內舅也. 投書巡營, 極言時事, 多虞邦本,動搖之狀. 反爲巡使所忤逮囚鄕犴. 公爲是上京, 報聞以捄之, 未歸而際值壬辰亂, 警矣.
公以爲倭賊之窺釁, 非日一而其勢之猖獗. 將無所不至, 則嶺南, 其最先當之要衝也. 卽與大笑軒忠毅公宗道, 約歸鄕倡義, 發通文告還. 到咸陽, 適會鶴峯文忠公以招諭使到境. 公與趙公入見, 告以其故. 文忠公大喜, 曰: “是天所以贊我乎! 當今賊鋒方盛, 郡邑波蕩, 士民奔竄, 不有得人, 收合其何以濟?” 則差公召募官, 巡行列邑. 至誠曉諭, 莫不感奮響應. 諾金沔於居昌, 鄭仁弘於陜川, 朴思謙·朴思齊·權世春·許國柱·張翎·全致遠·李大基. 諸公之於丹城·晉州· 三嘉·草溪等地, 皆其繼起而有聲績者也. 事旣集還報.
文忠公與趙公從入晉陽城中, 則牧使已逃, 軍民一空. 同登江上矗石樓. 文忠公引飮賦詩, 有矗石樓中三壯士之句, 示以誓死之志.
公因請修城壕分壘隊, 以設守備賊來犯而宵遁追之宜寧, 督戰大捷. 文忠公觀兵列邑, 知其軍勢漸振, 由於召募之爲功陳啓. 報聞龍彎行朝, 朝命除成均館典籍, 下敎褒獎之. 公自始任召募, 請多造招諭木牌, 分送各地, 觀其所應, 以施號令. 地方有私儲, 而不肯出穀以助軍餉者. 文忠公將用重律威之, 公請以義曉諭, 得穀至萬餘千石.
又聞, 朝廷告急於中國而中朝發兵來援. 先討平壤賊, 長驅南下, 守令皆賀, 謂: “當不日恢復.” 公獨憂之曰 : “平壤雖拔, 漢都尙爲賊據, 大兵之速來, 未可必期, 且當徐徐觀變以待之.” 衆皆以爲迂恠, 而文忠公心然之. 因命徃候西路, 見西厓柳文忠公, 方以體察使, 駐臨津. 請得穀種幾百石而歸, 使民及時耕稼, 一方賴之.
陜川鄭大將, 聞公名, 欲得爲參佐. 介人請于文忠公, 文忠公不許. 公亦曰: “吾與金公, 誓共終始, 舍此而將奚適也? 其相信如此.” 公又與忘憂堂郭忠翼公再祐居同鄕, 誼殊別. 郭公起義爲將, 禁軍兵斬首獻, 公曰: “要功貪賞, 妄殺必多, 非仁義之師.” 公曰: “君言固善然功名之心, 人皆有之, 獻馘無效. 恐有懈體之虞.” 郭公然而從之, 自後多賴以成功者.
明年四月, 文忠公以右監司, 巡到晉州, 遘厲疾甚劇. 公與大庵朴公惺, 日夕不離館次, 殫力調護及竟不救. 親手殮殯, 權厝于方丈山麓, 慟哭失聲而退. 入德山洞, 涔伏忽忽, 若無人世意. 況是年冬, 除刑曹佐郎兼春秋館記事官, 旋拜慶尙右道都事, 次居昌假守, 公不得已起應命. 赴職, 移檄倭將又啓于明東援將李提督如松, 論華夷之不可和, 公議韙之. 明年甲午, 除比安縣監. 再明年春, 解官, 歸. 梧里李文忠公元翼, 以體察使, 辟公爲從事官. 未赴而書論守城之策, 竝及官吏剝民之弊.
明年丁酉, 除司諫院正言, 尋遞. 翌年戊戌春, 復以正言, 赴召道中疾作, 二月二十九日, 終命于金山旅次, 享壽才五十五. 喪歸四月, 士林會, 葬于所山坤坐之原. 從先考妣兆也. 去其世後百六十年, 英廟乙酉, 始下搜訪, 贈禮曹參議. 又後五十八年, 純廟壬申, 加贈吏曹參判. 越六年丁丑, 加贈至判書兼帶如例. 又後五十五年, 大皇辛未, 賜諡‘貞義’. 淸白自守曰, ‘貞’, 見義能忠曰, ‘義’, 是其易名也. 於虖! 以若先生之鍾英一代, 生焉.
浮沈下位, 不得展盡所蘊, 身後闡發. 又若是其晩, 其亦有數存於其間者乎. 儒論尸祝之所始自. 純廟壬戌, 建洛山書院于本鄕之景山而祠曰, ‘景德’, 奉安位版. 大皇初, 因邦禁毁撤而仍書堂, 歲薦舍菜, 是亦可謂公議之久而不泯者乎.
先生夫人, 草溪鄭氏, 護軍渭女, 莊襄公俊之曾孫. 無育, 側房一女, 爲郭忘憂堂副室. 季氏栢庵公, 有一子曼勝, 官別提, 號槐堂. 權奉先生祀. 生二子錫生·錫龜, 以錫龜世主其後. 今其有事于神道之役者, 卽二公後也. 而來余請者, 經·炳滿·鍾熺也.
銘曰:
道學有述, 明軆適用, 文以守靜, 武以御動.
孝忠仗節, 亦惟其時, 雲雷韜畧, 不出範圍.
若昔多賢, 比立稱美, 如我先生, 宲能有幾.
本之在學, 山海眞詮, 維靜維退, 傍啓淵源.
講明旣熟, 擧措則一, 不遇盘錯, 利器奚別.
龍蛇之創, 偏甚嶺南, 招諭之選, 召募是任.
孚號惕厲, 審幾處寘, 大小有事, 罔不適意.
好謨能成, 所取伊何, 生死知已, 四顧靡他.
云何不吊, 斷絃輟斵, 好爵寧縻, 殄瘁惟國.
百年論定, 公私交讙, 以余觀之, 次其大端.
宜春之野, 間氣藏待, 于焉藏待, 于焉歸息.
有石可語, 載以詞章, 瞻竦行路, 篤爾弗忘.
檀紀 四千三百十一年, 戊午十月 日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