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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옹海翁 윤 참의尹參議 비문碑文
윤선도(尹善道)의 자는 약이(約而), 본관은 해남(海南)이다. 4대조는 국자 상사(國子上舍) 효정(孝貞)인데,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 이래로 세상에 나오지 않고 숨어 살면서 자신의 호를 어초은자(漁樵隱者)라 하였다. 이분이 홍문 부교리(弘文副校理) 구(衢)를 낳았는데, 또한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그 사실이 《기묘당적(己卯黨籍)》에 실려 있다. 교리는 우참찬 의중(毅中)을 낳았으며, 우참찬은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유심(惟深)이고 작은아들은 유기(惟幾)이다. 유심은 벼슬이 부정(副正)에 그쳤고 유기는 관찰사를 지냈는데, 공은 부정의 아들이자 관찰사의 양자이다. 생모 안씨(安氏)는 좌의정 안현(安玹)의 손녀이다.
공은 만력 15년(1587, 선조20)에 태어났다. 머리가 총명하고 배우기를 잘하여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을 널리 읽었고, 의약, 복서, 음양, 지리 등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26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광해군 때에 초야에서 상소를 올려 왕의 총애를 받던 신하 이이첨李爾瞻이 국정을 전횡하고 있는 것과 의정 박승종朴承宗과 왕후의 오빠 유희분(柳希奮)이 임금을 무시하고 나라를 저버린 행위에 대하여 수천 마디의 말로 강력하게 비판하였는데, 조야(朝野)가 크게 놀라 극변(極邊) 지방인 경원(慶源)으로 귀양을 보냈다. 경원은 서울에서 2000여 리나 되는 최북단 지역으로서 지리적으로 오랑캐의 땅과 인접한 까닭에,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이래로 죄를 얻어 귀양 간 이들 중에 나라를 원망하는 자들이 국가의 기밀을 가지고 오랑캐들과 내통한다는 말이 있어 모두 남쪽 변방으로 귀양지를 옮겼다. 이때 공은 기장(機張)으로 옮겼는데, 그곳은 또한 동해(東海)의 한 모퉁이로 해가 뜨는 곳이다.
계해년(1623, 인조 원년)에 인조가 반정에 성공한 후 죄수들을 대대적으로 석방할 때 공도 귀양살이 13년 만에 돌아왔다.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기도 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보다 앞서, 과거에 죄를 받은 사람들을 모두 발탁해야 한다는 말이 있었으나, 공이 병진년(1616, 광해군8)의 상소에서 김제남(金悌男)의 일을 언급한 것으로 인해 벼슬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공 유(張公維)가 이를 듣고, “형가(荊軻)는 연(燕)나라의 치욕을 설욕하기 위해 살아 있는 번오기(樊於期)의 머리까지도 요구하였다. 그런데 선도(善道)가 이첨(爾瞻)의 주벌을 청하면서 도리어 죽은 제남(悌男)을 애석해하겠는가.”하였으므로, 이를 주장하던 자가 마침내 멈추었다.
무진년(1628, 인조6)에 대군(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는데, 교육과정을 엄하게 세워놓고 가르치는 내용은 《소학(小學)》을 기본 교재로 삼았다. 학문을 강론할 때는 언제나 옛날 왕자들의 득실(得失)과 선악(善惡)을 인용하여 반복해서 곡진하게 가르쳤으므로 인조가 더욱 훌륭하게 여겼으며 왕자들 또한 더욱 존경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어 자리를 옮겨야 했으나 인조가 왕자들을 잘 가르친다고 여겨 5년 동안 옮겨 주지 않다가 임신년(1632, 인조10)이 되어서야 자리를 옮겼다. 그사이 호조의 좌랑과 정랑, 사복시 첨정, 한성부 서윤도 함께 역임하였다.
계유년(1633)에 과거에 급제하여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에 제수되었다. 그런데 세자의 집안에 유언비어가 돌기를, “윤선도가 음모를 꾸며 세자에게 해를 끼치려 한다.” 하였으므로 공이 이 소문을 듣고는 곧장 벼슬을 그만두었다.
갑술년(1634)에 성주(星州)가 죄인향(罪人鄕)이 되어 읍호(邑號)가 현(縣)으로 강등되었는데, 공이 그곳의 현감에 제수되었다. 상의 유지(諭旨)에 엄선하여 임명한 것이라고는 하였지만 사실은 마음에 거슬려 내쫓은 것이었다. 그 당시 삼남(三南) 지방에 양전 사업(量田事業)이 시행되고 있어 백성들의 원망이 자자하였으므로 상소를 올려서 전정(田政)을 가볍게 해 줌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자고 요청하였다. 이 일로 당국자가 성을 내어 공이 죄를 얻게 될 판이었는데, 상이 용서함에 따라 마침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더 이상 벼슬살이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공이 변란의 소식을 듣고서 생각하기를, “국가의 대란(大亂)에 함께 국사를 꾀할 만한 사람이 없도다. 하지만 강도(江都)는 종사(宗社)가 옮겨 간 곳이라 공경대신(公卿大臣)들 가운데 그곳에 가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고는 강도로 쫓아가기 위해 고을의 젊은이들을 모집하고 집안의 노복 수백 명을 동원하여 배를 띄워 바다로 나갔다. 강도까지 수천 리 바닷길을 배를 타고 밤낮없이 신속하게 갔으나 도착하고 보니 성은 이미 며칠 전에 함락된 상태였으며, 남한산성은 포위된 지 40여 일이나 되어 왕의 명령이 전해지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와서 전하기를, “임금이 이미 포위를 뚫고 동쪽으로 나갔으며 적들에 의해 임금에게 가는 길이 차단되어 있다.” 하기에 공이 생각하기를, “임금의 수레는 이미 뒤쫓아 갈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호남은 대령(大嶺) 바깥의 먼 지방이라 지세가 막혀 있어 아직 오랑캐의 수중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니, 급히 배를 돌려 남쪽 지방으로 돌아간다면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하였다.
그러나 해남(海南)에 이르러 임금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공은 그대로 바다로 들어가 산이 깊고 물이 맑아 살기에 좋은 조그마한 섬을 발견하고는 마침내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살았다. 사도시 정(司䆃寺正)과 대동 찰방(大同察訪)에 연이어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대간(臺諫)의 논핵으로 체포되어 옥에 갇혔으나 실제 죄가 없는 일이었으므로, 판의금 이덕형(李德泂)이 말하기를, “윤선도가 먼 지방에 살면서 변란의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달려왔습니다. 바닷길이 멀어 제때에 당도하지는 못했으나 충신의 의리를 지킨 것입니다.” 하니, 상이 특별히 공에게 분문(奔問)하지 않은 죄만을 물어 영덕(盈德)에 귀양을 보냈다가 1년 만에 석방하였다. 이를 계기로 금쇄동(金鎖洞)과 문소동(聞簫洞) 같은 속세를 떠난 세상에서 노닐었는데, 이곳들은 모두 바닷가에서 경치가 빼어난 곳들이다.
갑신년(1644, 인조22)에 상이 병이 들자 태의(太醫)가 상에게 아뢰어 공을 불렀으나 병 때문에 부름에 나아가지 못하고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마음은 육신의 주재자입니다. 장부(臟腑), 규맥(竅脈), 기혈(氣血), 음양(陰陽), 역순(逆順), 성쇠(盛衰)가 모두 마음에 달려 있으므로 마음이 편안하면 육체도 편안해져 풍한(風寒), 서습(暑濕), 귀매(鬼魅), 백사(百邪)가 들어올 길이 없지만, 마음이 편치 못하면 이와 반대가 됩니다.” 하고, 이어서 약석(藥石)으로 질병을 고치는 일을 논하면서 이것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보존하는 방책에 비유를 하였다. 그러나 이 상소는 왕에게 보고되지 않았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자 큰 옥사가 일어나 세 왕손(王孫)을 제주(濟州)에 안치(安置)하였다. 기축년(1649, 효종 즉위년)에 효종이 즉위하자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이 오랑캐를 토벌하여 원수를 갚자는 말로 상의 마음을 움직여 마침내 권력을 잡게 되었는데, 공이 다시 상소를 올려 효종에게 몸을 수양하고 도를 닦을 것을 진언하고, 이어서 왕손을 용서하자는 내용까지 언급하여 현도(縣道)를 통해 올렸으나, 감사 이시만(李時萬)이 올리지 않았다. 이에 공이 아들 인미(仁美)를 시켜 승정원에 올리게 하였는데, 승정원에서 상소를 물리치려고 하다가 오랜 시일이 지난 뒤에야 올렸다. 상이 이를 보고는 정성을 다해 비답을 내리기를, “곧은 말을 친히 듣고 싶도다.” 하였다. 권력자들이 상의 뜻이 공에게 있음을 알고는 공이 다시 조정에 들어올까 두려워 온갖 가지 방법을 써서 이를 방해하였다.
상의 뜻이 공을 삼사(三司)나 관직(館職)에 등용하려는 것이었으나 전선(銓選)을 담당한 자가 사예(司藝) 또한 관직이라고 하여 마침내 사예에 제수하였다. 상이 특별히 부른 것이므로 공이 도성문 밖에까지는 이르렀으나 상소를 올리고 죄를 청한 다음 계속해서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상이 곧바로 공을 불러들여 특별히 승지에 제수하고 경연(經筵)에 항상 입시하게 하니, 권신(權臣)들이 더욱 꺼려하였다. 그리하여 또다시 상소를 올려 강력히 사직을 청하고는 떠나 버렸다. 상이 음모에 밀려난 것이라 여겨 승정원으로 하여금 공을 붙잡게 한 후 특별히 예조 참의에 제수하였으나, 관직을 맡을 수 없다는 뜻을 다시 진술하고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또 시폐(時弊)에 대하여 여덟 조항의 상소를 올리고, 반정공신 원두표(元斗杓)가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므로 그를 제재하여 공신의 도리를 보전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김자점(金自點), 송시열, 원두표가 각각 당을 만들어 권력을 다투다가 김자점은 패사(敗死)하였고 원두표는 송시열에게 들러붙었다. 원두표를 두둔하는 자들이 공의 관작을 삭직하고 문외출송(門外出送)시킬 것을 주장하여 상이 처음에는 이를 허락하였다가 곧바로 다시 서용하였다.
이때 권신이 섬에 사는 백성들과 해안가의 어부들을 모두 강도로 차출하여 성루(城壘)를 쌓게 하자는 논의를 하고 또 양전과 호패(號牌)에 대한 논의를 하게 되자 사방이 시끌시끌하였다. 공이 그것의 불편함에 대하여 강력하게 진언하자 상이 이를 옳게 여겨 받아들이기는 하였으나 조정에서 채택하지 않았다. 이에 섬에 사는 백성들에게 성루를 쌓게 하자는 일은 상이 특명으로 중단시켰고, 해안가의 어부들을 데려오는 것 또한 의논이 분분하여 데려오지 못하였다.
병신년(1656, 효종7)에 또다시 임금의 유지에 따라 진언을 올려 정사의 폐단에 대하여 수천 마디의 말로 논하였다.
정유년(1657)에 왕후가 병에 걸리자 상이 경사(京師)로 불러올려 특별히 공조 참의에 제수하였다. 당시 집권층의 여론이 상의 뜻을 움직이기 어렵다고 여겨 날이 갈수록 비방의 강도를 높여 가자 공이 사정을 피력하여 파직해 줄 것을 청하는 상소를 열 번이나 올렸으나 승정원에서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다가 공이 상소를 중간에서 차단하는 것을 따진 뒤에야 상에게 올렸다. 공이 관직을 그만둘 것을 계속해서 청하자 상이 결국 만류하지 못하고 허락하였다.
송준길이 정개청(鄭介淸)의 지난 일을 들추어 무함을 하고 심지어 그의 사당을 허물기까지 하자 공이 상소를 올려 강력하게 변론하였는데, 집권층의 여론이 이를 사악한 주장이라고 지목하면서 상에게 기각시킬 것을 건의하고 공에 대한 공격을 더욱 거세게 하니 공이 마침내 파직되었다.
이듬해 효종이 승하하자 좌상 심지원(沈之源)이 상에게 아뢰어 공을 불러서 산릉(山陵)의 일을 논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수원(水原)에 길지(吉地)를 잡게 되자, 송시열과 송준길이 화를 내며, “산릉의 터를 잡는 일은 국가의 대사이니 윤선도의 말만을 전적으로 들어서는 안 된다.” 하여 마침내 산릉 터를 다시 잡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번엔 공이 이를 따르지 않자 그들은 불경죄로 공을 죄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상은 이들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공이 사적으로 말하기를, “나중에 반드시 산릉을 옮기는 변고가 생기게 될 것이다.” 하였다. 그 후 15년이 지나 산릉 안이 붕괴되어 여주(驪州)로 개장(改葬)하였다.
전년에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초상으로 태후(太后)가 장자(長子)에 대한 삼년복(三年服)을 입어야 하거늘 송시열과 송준길이 체이부정(體而不正)의 설을 고집하고 또 단궁지문(檀弓之免)과 자유지최(子游之衰)를 인용하여 기년복(朞年服)으로 내려서 정하였다. 공이 상소를 올려 종통(宗統)과 적통(嫡統)을 나누어서 둘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더욱 비분강개하자, 상이 중간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이때 모든 신하들이 공에 대해 ‘말이 선왕(先王)을 모독하고 현자(賢者)를 무함한다.’ 하면서, 상의 마음을 진노하게 한 뒤에 처벌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상이 삼수(三水)에 안치(安置)하도록 명하였다. 삼수는 북쪽 변방의 궁벽한 지역으로서 옛날 삼강(三江), 허천(虛川), 읍루(挹婁)의 땅이며 나중에 말갈(靺鞨)의 땅이 되기도 하였다. 추위가 빨리 오는 기후여서 오곡이 자라지 않고 청강(靑江) 바깥으로는 파저(婆豬) 등의 종족들이 예부터 살고 있었다. 옥당(玉堂)의 유계(兪棨)라는 자가 상에게 아뢰어 공의 상소를 불태웠다.
신축년(1661, 현종2)에 가뭄이 들어 북청(北靑)으로 이배(移配)하려 하였으나 송시열과 송준길의 방해로 결국 시행되지 못하였다. 판중추 조경(趙絅)이 구언(求言)의 교지에 응하여 차자를 올리기를, “윤선도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입니까. 윤선도는 종통과 적통을 말하여 효종을 편든 죄밖에 없습니다. 윤선도가 상소를 올리는 날 도대체 누가 전하에게 그의 상소를 불태우라는 계책을 올렸습니까? 고려 공민왕은 이존오(李存吾)의 상소를 불태웠고, 지난번 광해군은 정온(鄭蘊)의 상소를 불태웠습니다. 국사(國史)와 야사(野史)에서 이 사건에 대해 ‘아무 왕 아무 때에 예법을 논한 윤선도의 상소를 불태웠다.’라고 기록해 놓는다면 성상의 조정에 누가 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조경을 삭탈관작(削奪官爵)하고 공은 죄를 가중시켜 위리안치(圍籬安置)하였다.
계묘년(1663)에 교리 홍우원(洪宇遠)이 또 상소를 올려 종통과 적통의 설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윤선도를 용서하여 석방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홍우원만 벼슬살이에서 금고(禁錮)되고 말았다.
을사년(1665)에 또다시 가뭄으로 인하여 광양(光陽)에 이배되었다. 이곳은 또한 남쪽 끝 바닷가로 풍토가 너무 나빠 몸이 마비되는 기괴한 질병이 돌았는데,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 10에 8, 9는 죽어 나갔다. 2년 뒤에 큰 가뭄이 들자 상이 오랫동안 벌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염려되어 이들을 석방하려고 대신들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모두들 석방하라고 하고 수상 홍명하(洪命夏)만이 반대하였으므로 상이 특별히 석방하였다. 공이 사면을 받고 나오게 되자 곧바로 바다로 들어가 섬 주위를 돌면서 노래를 읊었는데, 당시의 작품으로 〈산중신곡(山中新曲)〉과 〈어부사(漁父詞)〉가 있다. 바다로 들어간 지 5년 만에 85세의 나이로 별세하니, 현종 12년(1671) 6월 11일이다. 문소동 고향 마을에 돌아와 안장하니, 공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그 이듬해에 관작이 복구되었다.
3년 뒤 인선왕후(仁宣王后)가 훙서(薨逝)하고 태왕태후(太王太后)가 첩자부(妾子婦)에 해당하는 대공복(大功服)을 입게 되자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상소를 올려 고례(古禮)의 경문(經文)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고 아뢰었다. 상이 이를 깨닫고 친히 경문을 읽어본 후 공이 경자년(1660)에 예법을 논한 상소를 들이라고 명하였으나, 이미 궐 아래에서 불태워졌고 실록(實錄)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결국 들이지 못하였다.
금상(今上)이 즉위하자 당시 예법을 논하다 죄를 입은 신하들을 불러서 등용하고 송시열은 북변에 안치하였다. 그때 권신이 덕원(德源) 또한 북변의 고을이라 하면서 덕원에 안치하였다가 나중에 웅천(熊川)으로 바꾸었다. 수상 허적이 말하기를, “웅천은 병이 도는 고을이니, 이곳에 안치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고는 또다시 장기(長鬐)로 배소를 옮겼다. 이유정(李有湞)의 사건이 일어나 송시열은 거제(巨濟)에 위리안치되었고 송준길은 이미 죽었으므로 삭탈관작하였다. 나라의 예가 바로잡히게 되었으므로 종묘(宗廟)에 이를 고하고 전교를 반포해야 마땅하였으나 허적의 방해로 시행되지 못하였으며, 공이 또한 의정(議政)으로 추증되어야 마땅하였는데 허적이 또다시 반대하여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강등되었으며, 봉상시(奉常寺)에서 시호를 의논하여 충헌(忠憲)이란 시호를 내렸다. 금상 6년(1680)에 허적이 패사(敗死)하고 송시열 등 귀양 간 자들이 다시 진출함에 따라, 송시열은 작위를 회복하였고 반대로 공은 추증된 작위와 하사받은 시호를 모두 삭탈당하였다.
공은 성품이 준엄하고 정직하였다. 인의(仁義)의 덕을 쌓아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은혜를 베푸는 데에 관심을 두었으며 세세한 예의와 자잘한 은혜를 베풀어 명예를 구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또한 말을 할 때나 행동을 할 때나 구차하게 남들에게 영합하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일들은 공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한결같이 지켰다. 때문에 정도(正道)를 지키려다 배척을 받아 죄인으로 지낸 세월이 전후 20년이나 된다. 하늘을 두고 맹세할 수 있을 만큼 정당하여 아홉 번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다. 의리를 보는 것이 분명하고 목숨 걸고 지키는 것을 쉽게 하는 이가 아니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또 집안에서의 일상생활을 살펴보면, 가정교육에 있어 법도를 잃지 않았으며, 특히 남녀의 구별과 내외의 구별에 신경을 쏟아 〈곡례(曲禮)〉와 〈내칙(內則)〉의 가르침대로 하였으니, 풍속을 더럽히고 가르침이 없는 사회에 경종을 울린 것이 또한 크다 하겠다. 용주(龍洲)는 말하기를, “예로부터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의 기로에 선 시기에는 하늘이 반드시 한 인물을 내려 보내 예의(禮義)를 목숨 걸고 지키게 하여 한 세상에 경종을 울리고 후세 사람들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하였다.
공이 바다로 들어간 뒤로 내가 그를 해옹(海翁)이라 불렀는데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불렀다. 혹 고산(孤山) 선생이라고도 하는데, 고산은 서울 동쪽 교외 강가의 구업(舊業)에 있는 산이다. 그 묘명(墓銘)은 다음과 같다.
비간은 심장을 갈라 죽었고 比干剖心
백이는 굶어 죽었으며 伯夷餓死
굴원은 강에 몸을 던졌는데 屈原沈江
해옹은 궁할수록 뜻이 더욱 굳어 翁窮且益堅
죽어도 변하지 않았으니 至死不改
의를 위해 목숨 걸기는 똑같다네 其見義守死一也
정부인(貞夫人) 윤씨(尹氏)는 본관이 남원(南原)으로 판서 윤돈(尹暾)의 따님이다. 부인 또한 부덕(婦德)을 갖추고 있어 온 집안이 칭송하였다. 공보다 1년 뒤에 태어나 공보다 17년 먼저 68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분묘는 예전에 바닷가 수정동(水晶洞)에 있다가 공을 안장할 때 문소동으로 옮겨 부장(祔葬)하였다.
장남 인미(仁美)는 학식과 견문이 많은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였으며, 공이 삼수에 귀양 가 있을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분관(分館)을 할 때부터 배척을 받아 13년 동안 벼슬길이 막혀 지냈다. 공이 별세한 지 4년 뒤에 사망하였고, 금상 3년(1677)에 사간원 헌납에 추증되었다. 둘째 진사 의미(義美)와 셋째 예미(禮美)는 모두 일찍 죽었다. 딸 둘을 두었는데, 사위는 심광면(沈光沔), 이보만(李保晚)이다.
또 서출의 아들이 둘인데, 순미(循美)와 직미(直美)이며, 딸이 셋인데, 직강(直講) 이익로(李翼老)의 첩과 황도빈(黃道彬), 양헌직(楊憲稷)의 처가 되었다.
인미의 아들은 이석(爾錫)인데, 상이 특별히 이산 현감(尼山縣監)에 제수하였고, 의미의 아들은 이후(爾厚)인데, 금년에 새로 국자 생원(國子生員)에 뽑혔으며 선조의 가장(家狀)을 가져와 나에게 비명(碑銘)을 부탁한 사람이다.
海翁尹參議碑
尹善道字約而。海南人。四世祖國子上舍孝貞。自戊甲以來。隱居不出。自號漁樵隱者。生弘文副校理衢。亦己卯名人。事在己卯黨籍。校理生右參贊毅中。右參贊二男。長惟深。次惟幾。惟深官止副正。惟幾爲觀察使。公副正之子。而觀察使之後子也。其本生母安氏。左議政玹之孫也。萬曆十五年公生。聰明善學。博讀經史,百家。如醫藥,卜筮,陰陽,地理。無所不究。二十六。補國子進士。當光海時。從草野上疏。極言嬖婞臣李爾瞻專政擅國。議政朴承宗,王后兄柳希奮忘君負國。疏凡累千言。朝野大驚。竄極邊慶源窮北二千餘里。地接胡。以爲戊甲以來。凡得罪流竄怨國者。持國陰事以與虜通。盡遷之南邊。公移機張。亦東海隅日出。癸亥。仁祖旣反正。大釋
諸囚。公居謫十三年而返。累除官。皆不就。前時且言被罪者。皆當擢用。而公丙辰疏。言金悌男事。有沮之者。張公維曰。荊軻雪燕之恥。而求首於生於期。善道請誅爾瞻。而顧惜於死悌男乎。言者乃止。戊辰爲大君師傅。嚴立學範。敎訓以小學爲本。每講學。必引古公子得失善惡。反復盡之。上愈賢之。公子亦尊禮益謹。仕滿當遷上以爲善於敎訓。不遷者五年。壬申。乃得遷。爲戶曹佐郞正郞,司僕寺僉正,漢城府庶尹。癸酉。登科目。爲侍講院文學。世子家爲飛語曰。善道陰有謀。將不利於世子。公聞之。卽棄去。甲戌。星州以罪人鄕。降爲縣。公爲縣監。有上旨。極選任之。而實心忤而斥也。時三南量田多怨。上疏言輕田政以寬民。當事者怒。公當得罪。上寬之。遂謝歸。不復以仕進爲心。丙子之亂。公聞變以爲國大亂。無可與計事者。而江都宗社所往。諸公卿大臣多往者。欲從之。募鄕邑子弟。出家僮百數。浮海出大洋。江都數千里。舟行無晝夜甚迅。至則城陷已數日。南漢受圍四十餘日。命令不通。或傳上已潰圍東出。賊塞路。公度車駕已不可追。而湖南絶遠。大嶺之外。以阻阨得全。急回船還至南方。可以得達行在所。至海南。聞車駕下城。仍欲入海。得小島山深水淸可居。遂居焉。連爲司䆃寺正,大同察訪。皆不就。而臺諫論之。至逮繫而實無事。判義禁李德泂曰。善道居遠方。聞變浮海赴亂。海路絶遠。縱不及。忠臣義也。上特以不奔問。徒配盈德。周年乃還。因遨遊物外。如金鎖,閒簫。皆海上山水處。甲申。上有疾。太醫白上。召之。公病不赴召。上疏曰。心爲一身之主。臟腑,竅脈,氣血,陰陽,逆順,盛衰。皆係於心。心安則體安。風寒暑濕鬼魅百邪無自以入。心不安則反是。仍論藥石攻疾。以喩治國保民。不報。及昭顯卒而有大獄。置三王孫於濟州。己丑。孝宗卽位。時烈,浚吉以伐胡復讎。動上意。遂用事矣。公復上疏。言修身修道。仍及寬赦王孫事。從縣道上之。監司李時萬不上。公令其子仁美上政院。政院欲却之。久而後乃上。上傾心答之曰。願欲親聞讜言。用事者。見上意在公。恐復入。沮抑百計。上意欲用之三司館職。而掌銓選者以爲司藝
亦館職也。遂除之。上特召之。至都門之外。上疏請罪。乞退不已。上卽召公入。特拜承旨。令常侍經筵。用事者益忌之。又上疏力辭。乞退遂行。上以爲陰計所擠。令政院勉留之。特拜禮曹參議。更陳不可冒進之意。乞生還故里。又上時弊八條。功臣元斗杓所爲絶橫。請裁抑之。以保全功臣云。金自點,宋時烈,元斗杓。各立儻爭權。點敗死。杓付於時烈。右斗杓者論以削職放黜。上初旣許之。而卽復敍。時用事者方議盡出島民沿海諸漁子于江都。築諸城壘。又有量田號牌之議。四方騷擾。公極言不便。上寵答之。而朝廷不用也。島民築城事。上特罷之。而移沿海諸漁子。亦多議。不果移。丙申。又應旨進言。論政弊累千言。丁酉。王后有疾召。至京師。上特拜工曹參議。時論以爲。上意難動。詆毀日甚。公陳情乞罷疏十上。政院終不納。公言其擁蔽。然後乃上之。公請去不已。上知終不可強留。乃許。浚吉追誣鄭介淸事。至毀其祠。公又上疏極言卞白。時議指爲邪說。白上却之。攻擊益作。公遂罷。明年。孝宗登遐。左相沈之源啓上。召議山陵事。旣卜吉於水原。而時烈,浚吉怒曰。卜山大事。不可專聽於善道。遂有改卜之事。公不從。則論以不敬請罪。而上不聽。公私謂曰。後必有遷陵之變。後十五年。山陵內崩。改葬驪州。前年大行之喪。太后當服長子三年之制。而時烈,浚吉執體而不正之說。又引檀弓之免。子游之衰。降而爲期。公上疏言宗統嫡統。不可岐而貳之。慷慨彌切。上持之。於是皆以爲語犯先王。誣陷賢者。以感怒上心。請按律。上命安置三水。三水。北邊窮處。古三江虛川挹婁之地。後爲靺鞨。山澤早寒。五穀不生。靑江以外。婆猪雜種故居。玉堂兪棨者白上焚其疏。辛丑。以天旱。移配北靑。時烈,浚吉沮之。亦不果移。判中樞趙絅。因求言應旨。上箚曰。善道何罪也。善道之罪。言宗統嫡統。爲孝廟左袒也。善道獻疏之日。誰爲殿下進焚疏之策也。高麗恭愍王。焚李存吾之疏。曩時光海。焚鄭蘊之疏。國史書之野史記之曰某朝某時。焚尹善道論禮之疏。爲聖朝之累何如也。絅削奪官爵。公加罪圍籬安置。癸卯。校理洪宇遠又上疏。極言宗統嫡統之說。請寬釋善道宇遠禁錮。乙巳。又因旱移配光陽。亦極南海濱。風土甚惡。有癱痪奇怪疾。客居者十死八九。後二年。大旱。上念其被罪積久。欲釋之。問于大臣。皆曰可釋也。惟首相洪命夏不可。上特釋之。公旣赦出。因入海。行吟島濱。有山中新曲漁父詞。入海五年八十五。公歿。顯宗十二年六月十一日。歸葬聞簫故里。從治命云。其明年。復官爵。後三年。仁宣王后薨。太王太后服妾子婦大功。儒生都愼徵上疏言。古禮經文不然。上覺之。乃親考經文。命入善道庚子論禮疏。而旣焚之闕下。亦不載實錄。不入也。及上卽位。召用論禮得罪者諸臣。烈安置北邊。用事者以爲德源亦北邊邑。安置德源。後改熊川。首相積曰。熊川病鄕。此殺人也。又改長鬐。有李有湞事。烈巨濟圍籬安置。吉已死削奪官爵。邦禮旣正。當告廟頒敎。爲積所沮。不果。公亦當追爵。議政積又不可。降吏曹判書。太常議諡曰忠憲。上之六年。積敗死。烈諸客復進。烈復爵位。公削贈爵賜諡。公峻正。以積仁累義。博施利物爲心。曲禮小惠。干名要譽爲恥。言不苟合。行不苟容。於患難窮阨一也。以直道擯斥。居囚籍前後二十年。指天而正。雖九死而不悔。終始一節。見義不明。守死不易。其能此乎。又考其居家敎家。不失儀式。尤致謹於男女之別。內外之分。如曲禮內則之敎。爲汚俗無敎之警。亦大矣。龍洲曰。自古當興國亡國之際。天必生一人。守禮死義。有以警一世而敎後人者。有如此人云。自公入海。老人號之曰海翁。一時皆以呼之。或曰孤山先生。孤山。國東郊江上舊業。其墓銘曰。比干剖心。伯夷餓死。屈原沈江。翁窮且益堅。至死不改。其見義守死一也。貞夫人尹氏。籍南原。判書暾之女。亦有婦德。一門稱賢。後公一年生。先公十七年六十八卒。墳墓舊在海上水晶之洞。及葬公。遷祔聞簫。長男仁美。亦以多學聞有名譽。公謫居三水時登第。擯斥於分館。禁錮十三年。公死之後四年死。至今上三年。追爵司諫院獻納。次男義美。進士。又其次禮美。皆早殀。有二女。壻沈光沔,李保晩。又庶出男二人。循美,直美。女三人。直講李翼老妾。黃道彬,楊憲稷妻。仁美子爾錫。上特除尼山縣監。義美子爾厚。今年新補國子生員。持先狀乞銘於老人者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