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를 감싸 주던 남인 시파(時派) 영수(領首) 영의정 채 제공(蔡濟恭)이 1799년 1월 사망한다. 이어서 이듬해 6월 28일 정조마저 49세의 나이로 창덕궁에서 급서 한다. 정조의 뒤를 이어 11세의 어린 왕자 순조(純祖)가 1800년 7월 4일 창덕궁에서 즉위하게 된다. 그때 56세이던 계증조모(繼曾祖母)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궁중에서 최고 어른이라는 명목으로 희정당(熙政堂)에 나와서 발(䚨)을 내리고 수렴청정을 시작한다. 정순왕후 친정 오빠 김 구주(金龜柱)가 정조 즉위년 (1776)에 사도세자 장인 홍 봉한(洪鳳漢)을 죽일 것을 상소하였다가 흑산도로 귀양 갔다가 나주로 옮겨져 1785년 죽게 된 원수를 갚으려고 시파인 천주교 신자들에게 모진 박해를 가하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신유교난(辛酉敎難)이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기간 동안 노론벽파는 약진했지만 정조 대왕의 탕평책 일환으로 중용되었던 시파와 남인 세력은 피바람을 맞았다. 정순왕후는 남인들이 서학(西學)으로 받아들인 천주교를 이용하여 그들을 일소하고자 했다. 일찍이 정조는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다.’라며 천주교에 유연한 태도를 취했지만, 정순왕후는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패륜지당으로 몰아 가혹한 조치를 취했다.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1800년 11월17일 형조에 명하여 교인 최 필공(崔必恭)을 잡은 후 19일은 사촌 최 필제(崔必梯) 검거함으로써 신유대박해를 시작한다. 신유년 1801년 1월 9일에는 총회장 최 창현(崔昌顯)을 잡아 옥에 가두고 다음날부터는 오가작통법을(五家作統法)을 발휘하여 교인들을 남기 없이 검거하라는 임금의 교서를 내린다. 이에 포졸들이 전국적으로 퍼져 2월 5일에는 내포지방 이 존창을 9일에는 전 판서 이 가환, 전 현감 이 승훈, 전 승지 정 약용, 전 정언 홍 낙민을 체포하고 이어서 11일에는 권 처신, 정 약종, 24일에는 여성회장 강 완숙과 그 가족들을 체포하였고 또한 많은 신자들을 잡아들이니 서울의 의금부, 좌우포도청, 지방 감영의 옥은 천주교 신자들로 가득 찼다.
이때에 체포된 신자들은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옥사를 하거나 배교를 한다고 하면 귀양을 가고 주동자들은 대부분 참수형을 받고 순교를 하게 된다. 2월 24일에는 권철신, 25일에는 이 가환이 옥사하고 26일에는 이 승훈, 정 약종, 홍 낙민, 홍 교만, 최 필공, 최 창현을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하고 이 존창은 충청도 감영으로 보내 죽인다. 온갖 악형으로 배교를 선언한 정 약전, 정 약용형제는 2월 28일 전라도 강진군 신지도와 경상도 장기현으로 귀양 보내졌으나 그해 9월 29일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만들어 북경으로 보내려 하였던 황사영백서가 발각되어 국사범으로 몰린 황사영이 능지처참형으로 죽자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지가 바뀐다.
이러한 일련의 큰 박해는 주 문모신부는 자신 때문이라 판단하고 중국으로 되돌아가기 위하여 의주(義州)에 도착한다. 도착 후 잘못된 판단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서울로 돌아와 그해 3월 12일 의금부에 자수한다. 그러나 대국으로 섬기는 청나라 사람이라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16일 지난 후에서야 간단한 문초를 하고 방치했다가 4월 19일 30대 정강이 매질을 당하고 남대문밖 한강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를 당 한다. 외국인 신부였던 주 문모 신부는 한양성에서 멀리 떨어진 새남터에서 참수함으로써 모든 외국인 신부들은 새남터에서 효수하는 선례가 된다.
주 문모 신부가 자수하여 의금부 옥에 갇히자 주 문모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왕족 송 마리아 그의 며느리 신 마리아는 경희궁에서 사약을 받는다 강화도에 귀양가 있던 은언군(恩彦君)도 5월 29일 현지에서 사약을 받고 유명을 달리한다. 주 문모 신부를 감추고 돌보 왔던 강 완숙 골롬바도 잔인한 형벌 주리형을 6회씩 받은 후 5월 23일 서소문밖 사거리에서 궁녀 강 경복, 문 영인 등 9명과 함께 효수형을 받는다. 당시 강 완숙의 나이 41세였다. 박해는 지방으로 까지 퍼져 전주에서는 사도라 불리던 유 항검, 유 관검 형제, 윤 지헌, 이 우집, 김 유산이 잡혀 5월 16일 한양으로 압송되고 전주지방 신자들 200여 명도 체포된다. 한양으로 압송된 유 항검외 5명은 4개월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9월 11일에 다시 전주로 보내져 남문밖에서 효수형에 처해진다. 옥에 갇혀 있던 146명은 배교를 선언하자 귀양 또는 석방되었다.
그렇지만 유 항검 아들 유 중성 요안은 신앙을 지키다 10월 9일 전주 남문밖에서 효수되고 그의 아내 왕족이었던 이 윤하(李潤夏)의 딸 순이 누갈다는 시어머니 신 희, 시숙모 이 윤희와 함께 1802년 1월 31일 (음 12월 28일) 20세의 나이로 효수된다. 이 윤하 아들 이 경도는 서울에서 잡혀 권 철신 양자 권 상문 외 15명과 12월 26일 서소문밖에서 효수형을 받는다. 9월 29일 황 사영 알렉시오가 충북 제천 배론 토굴에서 잡혀 의금부도사에 의하여 한양으로 압송된다. 황 사영은 정 약현의 딸 난주의 남편으로 약현의 사위이다. 그는 유복자로 태어나 아현동에서 성장하였는데 1790년 17세에 진사가 된 수재였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배론 옹기굴로 피신하여 명주비단에 13,311자에 달하는 장문의 황사영백서를 썼다.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북경주교에게 보낼 청원서였다. 이글에는 조선천주교 역사적 내용이 많이 적시되어 있어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이 백서는 의금부에서 보관되어 오다 조선왕국이 해체되면서 관리로 있던 자에 의하여 당시 한불수호통상조약으로 종교의 자유가 되고 독일 베네딕도 수도회에서 동소문 안 성곽 안 잣골에 자리를 잡은 수도회, 신학교, 기술위주의 학교 등을 세웠다. 조선총독부와 여러 가지 갈등으로 베네딕도 수도회는 파리외방전교회에 물려주고 수도원을 원산으로 옮겨 가게 된다. 의금부 관리를 지낸 자가 원본을 파리외방전교회 주교 신부에게 전달하게 되어 받은 즉시 로마 교황청으로 보내 교황청에서 귀중한 한국천주교사 자료로 보관하고 있다.
황사영의 백서가 발각되어 황 심, 김 한빈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고 1801년 11월 5일 황 사영, 옥 천희, 현 계흠이 순교하게 된다. 황 사영의 어머니와 딸 등은 거제도의 관노비가 되고 부인 정 난주와 젖먹이 아들 경환은 어머니의 지혜로 추자도에 남겨지고 정 난주는 제주도 대정으로 가 관노비의 신분으로 살다 생을 그곳에서 마감한다. 신유박해로 인하여 신유년 마지막 날까지 처형이 이어져 막을 내린다. 이때까지 순교한 사람 수는 3백여 명이 된다. 신유대박해가 막바지에 이르자 정순왕후는 순조의 이름으로 10월 21일 토사교문(討邪敎門) 교서를 내려 성학은 더욱더 존중하고 발전시키고 사학인 천주교는 근멸하도록 하라는 신년사를 백성들에게 알린다. 순조는 새해 들어 왕비를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