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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槪觀)
15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상을 받는다면 어떤 상급이 제일 크고 좋을까?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느냐?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라고 했다. 즉 하나님 당신 외에 더 큰 상급은 없다는 말이다.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뭘 두고 기도를 하느냐? 하나님 말고 하늘나라의 금은보화를 달라고 하느냐? 보석으로 된 천국의 성벽을 하나 떼어달라고 하느냐? 하늘나라의 예루살렘을 달라고 하느냐? 예수 믿는 자로서 뭐가 제일 큰 욕심이겠느냐? 뭘 달라고 하는 게 제일 좋은 거겠느냐? ‘하나님 당신을 주옵소서’ 이 이상 더 큰 게 없다. 하나님 한 분이면 다른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거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했는데, 아브람이 이 말을 듣고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라고 한 것을 보면 아브람 마음 속에 늘 ‘하나님께서 아들을 하나 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뭘 줄까?’ 라고 하신다면 여러분들은 뭘 달라고 하겠느냐? 세단 차냐? 아파트냐? 하나님께서는 때마다 사건 환경으로 찾아오셔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길 원하느냐’ 라고 물으신다. 이걸 알았을 때 뭘 달라고 하겠느냐?
아브람이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라고 하셨다. 그러면 ‘네 몸에서 날 자’ 라는 말 속에 들어있는 뜻이 뭘까?
아브람이 아내의 권고로 하갈에게 들어갔는데, 만일 아브라함이 소원적으로 하갈에게 들어갔다면 어떻게 되는 거냐? 가령 그렇게 해서 하갈의 몸에서 이삭이 나왔다면 어떻게 될까? 아브라함의 씨라도 뭐가 안 될까? 교육이 안 된다. 왜냐? 하갈은 애굽에서 온 여종이기 때문에 하갈에게서는 자식에게 하나님 교육이 안 된다.
이스마엘이 하갈의 몸에서 나왔는데, 교육적으로 보면 이스마엘은 하갈로부터 애굽성의 교육만 받게 되지 아브람의 신앙으로 교육이 되지를 않는다. 그 증거로 나중에 하갈이 이스마엘에게 애굽여자를 얻어 주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 안에 들어온 세상성적 사상이다. 세상이 교회의 제도를 타고 교회 안에 들어온 거다.
표면적으로 보면 애굽의 여자들이 이스라엘 여자들보다 미녀가 많다. 이게 우연한 게 아니다. 이걸 영의 눈으로 보면 기독자들이 하나님보다는 세상이라고 하는 여자를 더 예쁘게 본다. 정신적으로만 아니라 사람을 볼 때도 어딘지 모르게 예수를 믿지 않는 여자들은 외모적으로 더 예쁘게 꾸미고 다니니까 교회에 다니는 청년들이 안 믿는 여자들을 택한다. 이러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느냐?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라고 하는 것을 영의 눈으로 보면 본질의 신앙이라야 본질의 신앙을 물려줄 수 있다는 거다. 그런데 아브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이 말을 듣고도 하갈 쪽으로 들어간 것을 보면 온전한 신앙심이 없는 거다. 이게 인본주의다. 아내도 그렇고 남편도 그렇다. 그런데 이 일 후에 보면 사래 자기가 죄를 지어놓고 그 죄를 남편에게 덮어씌우는 것 같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라고 하는 것은 생명적 계대를 말하는 건데, 오늘날 교회 인도자들의 사상 자체가 생명적이 아님에도 제도를 타고 된 목사가 많다. 이게 인본주의 신앙이다. 제도를 타고 목사가 된 사람은 생명적 계대의 신앙을 모른다.
제도를 타고 목사가 된 사람도 성경을 역사적으로 얼마든지 말을 한다. 도덕성적으로 얼마든지 얘기한다. 그런데 정신 사상은 하나님의 의도에 들어있지를 않다. 하나님의 의도성에 든 사람은 사람의 심령을 잡고 흔들지만 세상에 속한 가르침은 몸으로 왜 일을 안 하느냐는 식으로 흔든다. 의미가 다르다.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밖으로 이끌고 나가서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라고 하셨다. 여기서 우러러 보는 의미성을 알아야 한다. 아브람의 후손이 어떤 후손이냐? 하늘을 우러러 보는 신앙사상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인본주의 사고방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많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라고 하는 것의 영적인 뜻은 별은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하늘에 떠 있는 것이니, 땅이 아닌 성품적 위치적 존귀적으로 하늘의 차원의 신앙정신을 말하는 거다. 본 절의 말씀을 보고 차원 높은 신앙을 생각해야 할 텐데 숫자적 개념으로 아브라함의 신앙의 후손이 많다고 하는 것으로만 생각을 하면 깨달음이 빈약한 거다.
아브람의 후손이 바다의 모래와 같다고 하신 말씀도 있는데, 이 말씀 역시 모래알이 많듯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이어받은 신앙의 후손이 많을 것이라고 하는 숫자적 개념보다 바닷가의 모래는 바닷물이 사람들에게 침범을 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듯이 성도들 속에 세상사상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후손을 말하는 거다. 이렇게 볼 때는 신앙사상이 된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자연만물은 하나님께서 지은 그대로 내려가지만 사람만큼은 마음 속의 정신이 후대로 내려간다. 교훈은 위로부터 내려가는 거다. 에덴동산에서 생명과는 먹고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사람이 생명과를 먹으면 가치판단 평가가 하나님처럼 나오는 거고, 선악과를 먹으면 인간의 눈에 보기 좋은 대로 선택을 하게 되는 거다. 그러니까 여기서 ‘네 몸에서 날 자’ 라고 하는 것은 교훈을 통한 이룰구원의 사상이 들어있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친구처럼 대하고 있다. 아브람에게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신다. 이것은 아브람을 주관하고 있는 신앙성이 하나님의 본질로 들어가 있다는 걸 말한다. 이런 아브라함을 통해서 메시아가 나오는 거다. 사람의 인격과 소원과 목적성의 모든 바탕이 하나님의 본질로 되어있어야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친구처럼 대하시는 거다.
안 믿는 사람들의 후손은 그 사상이 아브람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는 사상이냐? 아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눈에 예쁘게 보였고 잘 보였기 때문에 그런 약속을 하시는 거지 속화되고 타락된 사람에게 아브람에게 하신 것과 같은 약속이 나올 리가 없는 거다.
사람은 몸보다 중요한 것이 정신 사상이고,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면인데, 영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본질의 정신 사상으로 되어있지 못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도 없는 거다.
‘마지막 시대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는 것은 육적인 신앙을 말하는 것인데, 이런 신앙은 하나님의 본질에서 빗나간 거다. 교회 안에서는 이걸 봐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가 숫자 많은 거, 건물 큰 거, 이런 게 척도가 되어있다. 이런 게 척도라면 계:의 큰 성 바벨론 음녀교회를 어떻게 해석을 할 거냐? 음녀라는 것은 정신세계의 얘기다. 그런데 음녀교회는 여전히 충성봉사를 가지고 신앙의 척도로 삼는다. 주님 오실 때까지 이렇게 나갈 거다.
8절에서 아브람이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라고 한 것을 보면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는 믿는데 상당히 궁금했던 모양이다. 9절-1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라고 했다. 아브람이 새는 너무 작으니까 쪼개지 않았던 모양이다.
11절에서는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하고 했는데, 작은 새를 쪼개지 않았더니 솔개가 날아와서 아브라함이 밤에 잠도 못 자고 쫓고 있었다. 이게 뭘까? 지극히 작은 거라도 쪼개지 않으면, 즉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사건과 환경 가운데서 말씀으로 구별 분별을 하지 않으면 사단 마귀가 덤빈다는 거다.
성경은 일점일획이라도 변치 않는 말씀이라고 했는데, 구약성경을 기록한 히브리어는 점 하나가 안으로 붙거나 밖으로 붙는 데 따라 그 뜻이 확 확 달라진다. 이걸 우습게 생각하면 안 된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쪼개라. 안 쪼개면 큰 실수다. 안 쪼개고자 하는 사상이 점점 커지면 어떻게 되겠느냐?
12절에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라고 했다. 잠이 들었을 때 두려운 게 있느냐? 어떤 면에서 ‘깊이 잠든 중’이냐? 신앙 면의 잠을 말한다. 이 말씀을 신앙적인 면으로 보지 않으면 해석이 안 된다. 우리는 깊이 잠들더라도 깨어있어야 한다. 이게 무슨 뜻이냐?
13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왜 이렇게 하시는 건지 본 절 앞뒤로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라고 했는데, 이런 일이 없으면 좋을 텐데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일부러 만드는 거냐? 우리 인간 편에서 생각하면 없어야 할 일 같으나 이룰구원 면으로는 우리들에게 필연적으로 있어야 할 일들이 많다.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한다는 것도 우리의 구원에 꼭 필요한 거다.
14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그 섬기는 나라를.’ 누가 어느 나라를 섬긴다는 거냐? 이스라엘이 애굽을 섬기는 걸 말한다.
‘내가 징치할찌며.’ 하나님께서 왜 애굽을 징치하는 거냐? 단순하게 보면 애굽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종으로 삼고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만 보지 말고 그 앞으로 가서 보면 요셉이 애굽에서 살 때 7년 풍년과 7년 흉년을 미리 말해줘서 그 덕으로 애굽사람들이 흉년 중에도 편히 먹고 마시며 산 역사가 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요셉의 덕으로 애굽사람들이 편히 살았다. 따라서 애굽사람들은 요셉은 죽고 없다고 해도 그 후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핍박을 해서는 안 되는 거다.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 있는 동안에 위해줘야 했다.
만일 우리나라에 계속 흉년이 든다면 몇 년 동안이나 생존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때 예수 믿는 사람들도 같이 몰살을 당할까, 아니면 예수 믿는 사람들 덕으로 다른 사람들도 무사히 흉년을 넘기게 될까? 그런데 이런 흉년이 오지 않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살기 때문이다.
애굽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모세가 올 때까지 요셉이 애굽을 구한 일에 대한 얘기가 계속 내려가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잘 해줘야 했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그 얘기가 슬슬 사라져 버린 거다. 아울러 애굽 왕으로서는 애굽 땅 안에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독특성이 뻗어나가는 게 싫고, 자기 식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애굽사람들의 뇌리에서 요셉의 이야기를 빨리 지워버리고 싶었을 거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스라엘 사람들을 핍박하게 된 거다.
요셉 이후로 400여년이 지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끌어내고자 하시는 건데, 해방을 시키고자 하시는 건데 그 방편이 애굽사람들이 이스라엘을 핍박을 하게 하신 거다. 그러면 핍박을 주는 바로의 입장에서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려고 하는 하나님의 일에 한 몫을 도와야 되겠다’ 하고 이스라엘에게 핍박을 주는 거냐? 그건 아니다.
만일 애굽사람들이 이스라엘을 핍박하지 않고 위해준다면 이룰구원 면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되겠느냐? 이룰구원이 더 잘 될까, 아니면 애굽의 물이 더 진하게 들까? 애굽의 물이 더 진하게 든다. 이게 보이느냐?
모세나 십계 영화를 보면 애굽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부려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우리는 이런 사역적인 노예만 보지 말고 육신적 정신적으로 평안할 때 죄와 세상에 노예가 되는 면도 알아야 한다. 애굽사람들이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지 말라고 하면서 대우를 잘 해 주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더 좋아지겠느냐, 애굽에 더 푹 빠지겠느냐? 애굽에 더 푹 빠진다. 하나님의 모든 주권 섭리가 당신의 백성들의 구원에 있는 건데 애굽이 이스라엘이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푹 빠져서 계속 그대로 살게 된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살았던 것이 그랬듯이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이 세상을 차지해서 평안히 살려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은 어디까지나 훈련장이다. 훈련을 받는데 침대에 누워서 받느냐? 아니다.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이 따르는 게 훈련이다. 이걸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신앙훈련을 위해서는 정신적 노동과 함께 반대편도 있어야 하는 거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한 것은 당신의 백성들의 이룰구원을 위한 목적인데, 이 목적을 놓고 보면 성도가 기도로 ‘세상 것을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 달라’ 할 게 없는 거다. 이 세상은 성도들의 이룰구원의 훈련장소이기 때문에 내가 믿음이 좋으면 사건을 이길 수는 있어도 사건 자체가 없는 세상이 아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주권 섭리대로 움직이는 거다. 그런데 세상 속화된 기독교인들은 우리의 이룰구원을 위해 주권적 섭리적으로 사건 환경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자기에게 고통스런 사건 환경이 없게 해 달라고 하고 있다. 이게 기독교 타락이다. 그런다고 해서 없는 사건이 오는 것도 아니고, 주려고 했던 사건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믿음에 필요한대로 적절하게 주시는 거다.
학교의 시험이 공부를 못하는 학생에게만 있는 거냐, 잘하는 학생에게도 있는 거냐? 둘 다에게 있다. 그런 것처럼 성도의 구원이 전제가 되어있는 이 세상에서는 예수를 믿고 안 믿고 간에 모든 사람에게 사건이 오게 되어있는 거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기의 미련한 것으로 사건 환경을 떠받으며 ‘아이고 죽겠네’ 하는 거고, 말씀에 영리한 사람은 그걸 피하면서 통과하면서 나가는 거다.
올림픽을 할 때 장애물을 뛰어넘는 경주가 있는데, 뛰어가다가 장애물에 걸려서 한 번 넘어지면 마음이 어떻게 될까? 다음의 장애물을 앞에 두고 마음에 부담이 온다. 이렇게 되면 다음의 장애물을 못 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장애물에 한 번도 걸리지 않고 달린 사람은 마음에 용기가 넘쳐서 그 다음의 장애물을 쉽게 뛰어넘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게 어제의 연결이 오늘이요, 오늘의 연결이 또 내일로 가는 거다.
해가 떴다가 지는 것은 오늘의 이룰구원은 오늘 다 이뤄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다음 날 또 해가 뜨는 것은 우리로 눈을 뜨게 해서 새로운 날에 그 날의 구원을 이루라는 신호다. 만일 창세 때 뜬 해가 세상 마지막 날까지 그대로 떠 있다고 하면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되겠느냐?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건만 보지 말아라. ‘왜 하라고 하느냐? 왜 하지 말라고 하느냐?’ 하는 것이 앞의 것과 연결이 되어있다. 이것을 연결해서 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애굽사람들에게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했다. 그래서 요셉 때의 바로 왕처럼 그 후대의 애굽사람들도 이스라엘을 위해주고 좋게 해 준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찌될까? 애굽사람들이 고맙다고 하나님을 더 잘 섬길까, 아니면 요셉 덕으로 애굽의 땅을 차지하고 잘 먹고 잘 살다보면 신앙이 자꾸 변질이 될까? 이런 것도 생각을 해 봐라.
세상은 사람들의 마음대로 움직여지는 곳이 아니라 성령과 악령이 활동하는 세상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세상에 살면서 요셉 당시의 사람들이 죽고 새로 나고 죽고 하면서 요셉의 사상이 연속이 되는 게 아니라 후대로 내려갈수록 신앙이 좋아지거나 나빠지거나 하는 변동이 있는 거다. 세상만사가 그렇다. 이걸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 그대로 놔두면 애굽에 정이 들대로 들어서 배를 깔고 애굽에 찰싹 붙어있을 것이기 때문에 애굽에 새 왕을 일으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핍박하게 한 거다.
사람은 이 땅에서 천 년 만 년 사는 게 아니라 태어났으면 죽는 시간이 있는 존재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이룰구원을 이루는 기간이다. 하나님의 주권섭리로 된 이것은 인간이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이니 하나님의 이 주권섭리를 인간이 스톱시키려고 한다거나 자기 좋도록 돌아가게 하려고 한다고 해서 그대로 되는 게 아니다. 이런 세상에 살고 있는, 이런 애굽 땅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 애굽에 붙어서 애굽의 안일로 살려고 할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 애굽의 왕을 갈아치우는 거다.
왕을 갈아치우는 여기에 이스라엘의 이룰구원이 오르막 내리막이 있는 거다. 그래서 요셉을 모르는 왕이 나서 이스라엘에 핍박이 오는 거다. 애굽의 왕을 갈아치우니 상황이 달라지는 거다. 애굽이 이스라엘을 대하는 것이 요셉 때와는 천지차이가 되는 거다. 사람들이 편할 때는 ‘내가 하나님 덕으로 사는구나’ 하는 걸 잘 모른다. 어렵게 고생을 해야 신앙심이 생긴다. 그래서 애굽의 왕을 갈아치우는 거다.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해 주면 이룰구원 면에 좋겠느냐? 잘 해 주는 거겠느냐, 핍박을 하는 거겠느냐? 이룰구원의 정신을 모르는 사람에게 잘 해 주면 거기에 푹 빠지겠느냐, 하나님 쪽으로 붙겠느냐? 이스라엘에게는 이룰구원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사건을 쓰시는 거다.
왕을 바꾼다는 것이 바로 자기가 알아서 바꾸는 거냐, 대국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주권 섭리에서 그렇게 돌리는 거냐? 후자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건 환경이 오던 나의 이룰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빨리 생각하는 게 지혜롭다. 안 그러면 자기가 계속 부딪힌다. 자기에게 사건 환경이 왔을 때 ‘내가 앞으로 잘 할께요. 제발 이런 사건은 주지 마세요’ 라고 한다면 이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뜻을 깨달은 거냐, 못 깨달은 거냐? 못 깨달은 데서 나오는 옛사람의 소리다.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이스라엘이 섬기는 애굽을 징치하겠다는 거다. 우리가 이룰구원만을 놓고 보면 바로 왕에게 ‘이스라엘을 훈련을 시키니 참 잘 한다’ 라고 할 수도 있는 건데, 하나님께서는 애굽사람들을 징치한다고 한다. 대국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신앙훈련을 위해 애굽이 이스라엘을 핍박하게 한 거지만 애굽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을 미워하고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원수를 갚는다는 거다.
만일 애굽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 해 준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게 돌아갈까? 노예 신분을 망각하고 ‘우리가 너희들의 종이냐?’ 라고 하면서 불평불만을 하거나 ‘애굽사람들이 어느 신을 믿기에 이렇게 잘 살지? 우리도 그 신을 믿자’ 라고 할 거다.
반대로 애굽사람들이 자신들이 잘 사는 것은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덕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 애굽사람들의 신앙이 올라가겠느냐? 이들은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아예 없는 거고 육의 생각만 자꾸 커진다. 세상 안일주의에 더 빠져버린다. 이럴 때 우리 마음 같으면 애굽사람 자신들이 이스라엘 덕으로 잘 산다는 것을 깨닫고 진정코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큰 축복인데 그렇지 않은 게 인간이다.
사람은 육신이 잘 되면 하나님 쪽으로 붙는 게 아니라 점점 세상 쪽으로 붙는다. 그런데 세상 속화된 교회는 양쪽의 생각을 가지고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으려 하는데, 이치와 법칙이 그렇게 되어지는 거냐? 안 되는 거다. 이것도 저것도 아무 것도 안 되는 거다. 이치가 그렇다. 그런데 마지막 시대의 신앙이 이렇게 흘러간다. 우리는 신앙 믿음을 가지는 것이 이치가 분명해야 한다. ‘신앙이다’ 할 때는 어느 한 쪽을 취해서 그 쪽으로 가는 거다. 하늘나라를, 천국을 향해서 가는 거다. 이게 인간창조의 목적대로 가는 거다.
‘내가 징치할지며.’ 왜 벌을 주는 거냐? 애굽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잘했다는 거냐, 잘못했다는 거냐? 잘못했다는 거다. 이스라엘의 덕을 보면서, 하나님의 덕을 보면서 이스라엘을 핍박을 했다는 거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애굽이 자신들에게 어떻게 대우를 하던 정신이 애굽에 빠지거나 안 빠지거나 하는 것은 이스라엘 각자의 책임이다. 애굽이 잘 해 준다고 해서 빠져버리고, 해롭게 한다고 해서 안 빠지고 그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어떤 사건 환경을 주더라도 애굽에 빠지고 안 빠지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각자가 할 일이다.
교회의 교훈이 인격과 성품을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는 것은 사람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딱 맞도록, 정상적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교훈이다. 이게 주님이 하신 교훈이다. 그런데 거짓 종들은 이게 없다. 거짓 종들은 교인이 하나님의 눈에 들도록 한다는 것이 마치 노예들이 주인의 눈에 들려면 일을 잘 해야 하듯이 사역으로 몰아붙인다.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소원 목적을 하나님 앞에 바로 놓아야 할 텐데 이건 하지 않고 자꾸 일을 시키는 거다. ‘무슨 큰일을 해야 인간 눈에도 보기 좋고, 하나님 앞에도 보기 좋다’ 라고 하며 신앙을 사역으로 몰아붙인다.
마지막 시대의 신앙이 이렇게 들어가 있다. 믿음의 다림줄이 사역에 들어가 있다. 거짓 종, 거짓 선지자, 적그리스도들은 뭘 갖다 붙여도 사역에 들어가 있다. 이게 신앙이 아니라고 하는 이치를 누가 밝히느냐? 애굽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붙여서 말을 한다면 모세가 와서 밝혀서 애굽에서 끄집어내야 한다.
거짓 종들은 ‘신앙이 있네. 없네’ 하는 것을 물질적 다림줄에 놓고 말을 한다. 이건 사람의 중심이 육으로 돌아간 건지, 영으로 돌아간 건지 까맣게 모르는 거다. 오늘날 육적인 생각을 가지고 충성봉사를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 거짓 종들은 그걸 또 이용한다. 그러다 보니 이방 종교에서도 보지 못하는 희한한 일들이 교회 안에서 막 벌어지는 거다.
예수님께서는 말하자면 다 주러 오셨는데 거짓 종들은 자기가 다 주는 것처럼 말을 하면서 노동을 시키고, 여기에서 나오는 소득을 자기가 다 가져간다. 이런 자들이 교인들을 데리고 간다면 어떤 교인을 뽑아서 데려가겠느냐? 물질적 충성봉사를 잘 하고, 자기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을 뽑아가게 된다. 오늘날 이런 교회를 볼 수 있겠느냐?
이런 신앙으로 나가면 나를 만드신 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이 통째로 날아간다. 뱀은 먹이를 머리부터 통째로 삼킨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사단 마귀의 역사가 교회 인도자를 먼저 먹는다. 머리부터 먼저 먹는다. 이러면 그 밑의 꼬리도 다 먹게 되는 거다. 이걸 알겠느냐? 안 믿는 사람들은 고작 해봐야 ‘민주주의다. 공산주의다’ 하는 제도 면을 보지만 믿는 우리 입장에서는 영적 소원 목적을 보는 거다. 거짓 종들은 그 사상이 100% 육 쪽으로 들어가 있다.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이 재물이 누구의 재물이냐? 표면적으로는 애굽사람들의 재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섭리 면으로 보면 사람이고 짐승이고 금은보화고 간에 세상에 있는 것은 다 하나님 거다. 그런데 여기서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온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 살면서 품삯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가혹한 노동을 한 밀린 품삯을 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환난 핍박을 받으며 애굽에서 산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보수해 주시는 것을 영적으로 보면 ‘성도가 말씀을 잡고 사건과 상황을 통과하며 매일 매일을 살아온 것을 다 아시고 갚아주시는구나’ 이걸 깨달을 수 있다. 성도가 진리대로 사는 것은 절대로 헛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구원의 이치를 가지고 보면 성도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산 믿음은 절대로 공짜가 없는 거다.
15절: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누구 얘기냐?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이 몇 살에 죽었느냐? 175세다. 969살을 산 무두셀라보다 엄청 짧게 산 건데 왜 ‘장수하다가’ 라고 했나?
이룰구원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고 사는 우리 입장에서 장수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 거냐? 구원에 있다. 예수님께서 33세에 돌아가셨는데, 나이적으로만 보면 이게 장수한 거냐, 일찍 죽은 거냐? 한창 나이에 죽었다. 우리가 앞으로 1, 2년을 더 살더라도 100% 이룰구원을 이루며 사는 게 가치가 있는 거냐, 이룰구원이 없이 2, 300년을 사는 게 가치가 있는 거냐?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 땅에 사시면서 100% 신령세계에 합당하게 사셨다. 예수님의 이 33년의 삶은 영원한 장수성이다. 발 하나 움직이는 것, 눈동자 움직이는 것 등 전부가 영원한 장수성이다. 그 가치를 알겠느냐?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보다 훨씬 오래 사는 사람이 많은데 이들을 예수님과 비교해 보면 오래 산 그것이 자랑할 만한 게 있느냐? 이룰구원이 없이 전부가 사망적으로 산 삶이라면 오래 사는 것이 앙화다.
16절: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온다고 했는데 ‘이 땅’이 어디냐? 가나안이다. 그런데 지금 당장이 아닌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는 이유가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언제 그 땅으로 돌아온다는 거냐?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완전히 찼을 때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이때가 언제인지를 아느냐? 모른다. 앞으로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시는데, 이 땅에 죄악이 관영했을 때 오시느냐, 아니면 조금 남아있을 때 오시느냐?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관영할 때까지’란 ‘이스라엘이 올라올 때까지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올라올 때까지는’ 이 말이기도 하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때까지는 아모리 족속의 사람의 수도 적을 거고, 범죄의 수도 적을 거다. 빨리 차여지면 빨리 올라온다는 건데,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그것만 보지 말고 올라오면서 이룰구원의 훈련 연단을 받는 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게 있어야 만이 아모리 족속이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실력이라면 실력인데 나쁜 그것에 안 먹히고 안 넘어가는 거다. 여기에서 실력이 붙는 거다. 올라오면서 이 실력을 키워야 한다.
지금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는 교인들의 이런 신앙사상이 보이느냐? 이런 면은 보지 못한 채 자기 좋도록 세상 것을 이뤄달라고 하고 있으니 여기에는 이룰구원의 실력이고 뭐고 없는 거다. 집안 식구고, 사회고, 나라고, 신불신 간에 다 이렇게 나가고 있는데 교인들마저 인간 자기 눈에 보기 싫으면 싫고, 자기 눈에 보기 좋으면 좋고 식으로 돌아가고 있다.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건 환경 가운데서 훈련 연단을 할 줄은 모른 채 원망불평을 하고 있다.
이런 이치를 가지고 보면 아직까지 주님이 안 오신 것을 보면 세상에 죄악이 덜 관영한 것 같다. 어쨌든 주님이 빨리 오시든지 늦게 오시든지 하는 것은 주님이 알아서 하는 것이니 우리는 그것을 상관할 것 없이 깨어서 기도하라. 졸지 말아라. 잠자지 말아라. 영적인 면에서 깨어있어라.
영이 깨어있는 사람은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다’ 하는 것을 알고 하나님 쪽으로 붙어서 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말씀을 귀로 들을 때는 ‘그렇구나’ 라고 하지만 그 마음은 세상에 푹 빠져 있다. 이건 깨어있는 상태가 아니다. 주님께서 믿는 우리들에게 영적으로 깨어있으라고 하는 것은 깨어있을 수 있는 것이니까 하는 말씀이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는 게 아니다. 믿는 우리도 생활을 위해서 일을 하는데, 의식주 목적이 아니라 이룰구원을 목적으로 일을 한다. 이게 깨어있는 신앙이다.
17절: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무슨 뜻으로 이런 모습을 보이신 걸까? 이 점에 대해서는 내가 더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다.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라고 한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는 쪼개는지 안 쪼개는지 확인을 하시는 거다. 그리고 쪼갠 것을 받으신 거다.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자났다고 했는데, 만일 횃불을 들지 않고 그냥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면 어떻게 될까? 쪼갠 고기가 잘 안 보일 거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날고기를 싫어하셔서 구워먹으려고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신 거냐? 이렇게 표현을 하신 것은 드려진 제물을 하나님께서 확인하고 보신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거다.
18절: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이 언약은 하나님과 아브람과의 언약으로 아브람의, 즉 성도들의 이룰구원을 위한 언약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이 언약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의 언약이다. 따라서 만일 하나님이 이 언약을 어긴다면 성자와 성령님께서 그것에 호응을 하겠느냐? 안 된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성도의 구원에서 빗나간다면 선재적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것에 호응을 하시겠느냐?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애굽의 나일강에서부터 큰 강 유브라데까지 아브람의 자손에게 준다고 한다. 그러면 땅만 주신다는 말이냐?
19-21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이 족속들은 나일강에서부터 유브라데강까지의 사이에 사는 자들이다. ‘족속’ 하게 되면 그 나라에 왕이 있고, 그 나라 안에서 소원과 목적이 같고 언어가 같은 백성끼리 사는 거다. 그런데 하나의 족속이 아니라 많은 족속이 나오는데, 각 족속마다 소원 목적과 취미적으로 제각각이다. 이게 세상이다. 문화나 풍속이나 습관이나 문물의 발달이 족속마다 다 다른데, 아무리 종류가 많아도 다 세상이다. 이처럼 각양의 많은 족속이 사는데, 각 족속마다의 정신적 흐름이 있는 거다. 우리는 이걸 봐야 한다.
행:에 보면 철학자들이 나오는데, 이들이 사도바울의 말을 듣고 ‘네가 전하는 말은 생전 처음 듣는 소리라서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라고 했다. 그러니까 바울이 전하는 도가 엄청나게 월등한 거다. 그래서 최고의 철학자들인데도 바울의 말을 듣고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고 하는 거다.
바울이 전하는 도와, 철학자들이 가진 사고방식은 하늘과 땅 차이인데, 그들의 입장에서는 바울의 도가 하늘의 것인지를 모른다. 그들의 철학적 차원이 그런 거다. 그들의 주장이 철학이지 우리가 구원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세상철학의 수준이 그런 거다.
세상의 철학자들은 세상초월이 아니다. 하늘나라 천국성이 아닌 세상성의 철학은 아무리 올라가도 여전히 세상에 속한 거다. 그래서 그들이 사도바울의 말을 못 알아듣는 거다. 철학이라고 하면 희랍의 아테네 쪽을 쳐주는데, 이룰구원의 사상은 천국의 철학이니 이 천국의 철학을 가진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철학적 주장은 말도 안 되는 거다.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에서 보면 선악과 따먹은 세상의 철학은 철학도 아니고 사람을 망치는 거다. 일반적인 사람들만도 못한 거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은 천국철학이요, 이 속에는 인간창조의 목적이 들어있는 건데 기독교계에서 이것을 모른 채 세상철학을 하나님 차원의 학문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높은 철학이라도 하나님을 모르는 학문이라면 그걸 어디에 쓰겠느냐? 불교의 팔만대장경에 하나님이 한 마디라도 나오느냐? 세상 철학자들이 자기들 세계에서 아무리 높다고 하고 굉장하다고 해도 하나님의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예수 믿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의 모든 학문은 인간구원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가지고 그것을 다 정죄할 수 있다. ‘세상을 판단할 너희들’이라고 했지 않느냐? 우리가 교회에서 터득하고 깨닫는 것은 성령으로 되는 거다. 성령으로라야 세상을 보고 판단을 할 수 있는 거다. 그 수준이 그렇다. 그런데 세상 속화된 목사들은 설교시간에 성경을 들고 ‘소크라테스가 무슨 말을 했다느니, 공자가 무슨 말을 했다느니’ 라고 하고 있으니 이건 하나님을 세상사람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거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훈련 연단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성으로 인격이 되면 본 절에 나오는 족속들을 다 쳐서 없앤다고 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말씀을 따라 사는 이스라엘이 가진 머리, 학문이 이 족속들보다 월등하다는 거다. 그래서 정복을 하는 거다. 오늘날 기독교회도 이런 정복을 할 수 있는 사상과 이치가 있어야 한다. 무조건 ‘믿사오니’가 아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헬라철학자들도 바울이 전하는 뜻이 뭔지를 모른다. 그럼에도 그들이 자꾸 바울의 말을 들으려고 하는 것은 바울이 전하는 도를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하던 세상의 새로운 학문으로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들을 때 이런 식으로 받으면 믿음으로 접해지지를 않고 말씨름밖에 안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