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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알자 (고전3:1-9)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지혜로운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늘 3가지를 살핀다.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에 있나? 어디로 가나?" 이 3가지는 본질(실존), 현재, 종말에 관한 질문이다. 세상의 무엇보다, 우리는 나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참된 지식은, 나를 바로 아는 데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을 아는 자만이 나를 알 수 있고, 나를 아는 자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나를 알면 겸손해진다. 또한 괜한 열등의식에 빠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리석은 현대인들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인생을 안다고 밥이 생기냐? 돈이 생기냐?"고 말한다.
그래서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질문은 하지 않는다. 최첨단 자본주의 산업사회를 사는 현대인은, 밥이 생기고, 돈이 생기는 일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려고 나와서 물었다. "이 배의 최고속도는 얼마냐? 몇 명이나 탈 수 있느냐? 배의 무게가 얼마나 되느냐? 식당에서 밥은 많이 주는가?"만 묻고, 정작 이 배가 어디로 가는지를 묻지 않고 배를 탔다면,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그런데 철학은 이렇게 늘 근본적인 문제를 묻지만, 답을 주지는 못한다. 오직 성경만이 이 근본 문제에 대하여 답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답을 모아놓은 책이다. 성경은 바로 하나님의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디서 왔는가? 이 질문에는 대한 대답이, 그가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단순하게 2가지로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저절로 생겼다'이고, 또 하나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말이다. 곧 진화론과 창조론으로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말하는가?
성경은 이 세상 사람들을, 2종류로 구분한다. 육에 속한 자와 또한 신령한(영에 속한) 자이다.
육에 속한 자는, 죄 가운데 태어나, 용서받지 못해 마귀에게 끌려가는 자요, 신령한 자는 죄를 용서받고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 가는 백성들이다. 본문은 이렇게 말한다.
1. 육에 속한 자(고전2:14).
성령의 일을 받지 않고, 깨닫지 못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구원을 깨닫게 하신다. 즉,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다.
성령께서는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우리 구세주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신다. 그럴 때 그 사실을 깨닫고 믿는 사람은, 신령한(영에 속한)자가 된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육에 속한 자이다.
믿기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어리석게 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핍박한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이요, 인간의 가치를 상실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돈 많고 지식이 많거나, 착한데 인간의 가치를 참된 가치를 두지 않으신다.
육신에 속한 자들은, 우주도, 저절로 생겼다고 믿는다.
탁월한 변증가 '찰스 콜슨'은, 저절로 생겼다는 말을 3가지로 설명한다.
(1) 순환론
'우주는 그 시작이 없이, 저절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적 시간과 같이, 끝없이 돌고 돈다는 말이다. 시작도 없이, 끝도 없이 그냥 돌고 돈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나요?
저는 이렇게 애매한 가설은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이 우주가 창조되었음을 분명히 말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우주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데 있다면 이성으로 믿을 수 없다.
(2) 우연론
지구는 '우연히' 현재와 같은 적절한 크기로 조절되었고, 지구와 태양의 거리도 '우연히' 이 정도가 되었으며, 지구에 '우연히' 생명이 탄생되었고, '우연히' 지금 같은 지구생태계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바닷가 모래밭에 시계가 하나 놓여 있는데, 누군가 그 시계를 보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 바다의 철분이 가라앉았다가, 저절로 뭉쳐서 철판이 되고, 바람과 파도의 풍화작용에 의해서 철판이 작게 잘라지고, 멍게가 뜯어먹는 바람에 나사가 만들어졌다.
또 유리도 바다 속 어떤 성분들이 화학작용을 일으켜서, 유리가 생겼고, 유리가 불가사리에 의해 녹이고 깎여서, 조그만 유리 뚜껑이 되었는데, 바람이 불어서 우연히 결합되더니, 시계가 되었다.
우연론은 바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아니 더 허무맹랑하다. 그런데 이런 이론을 합리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보다도 훨씬 더 정교하고 광대한 우주를 바라보면서, 우연히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안 믿으려고 작정했으니까 그렇지, 조금만 생각하면 이 이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
(3) 돌연변이론
부모 계통에는 없던 새로운 형질이, 자손이 되는 생물체에 돌연히 나타나, 유전하는 일을 말한다.
그러나 부분적인 돌연변이는 있어도, 전혀 새로운 형질은 나타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잘 아는 생물이, 이상한 생물체로 변해서, 유전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아무리 쥐를 교배시켜도, 전혀 다른 쥐는 나오지 않는다. 쥐는 아무리 많이 교배해도, 쥐일 뿐이다.
일정한 유전자는, 아무리 교배해도 특이하고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는다.
이런 진화론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가치는 없다. 우연히 돌연변이에 의해서 인간이 여기까지 진화해왔다면, 인간과 짐승은 다르지 않다.
이런 사상에 뿌리를 두면, 히틀러와 같은 극단적인 인종주의자도 나오게 된다. 필요하면 사람도 얼마든지 죽일 할 수 있다. 장애인이나, 독일에 폐해를 주는 유대인을 살려둘 필요가 없다. 그러나 기독교 관점에서 보면, 장애를 입은 사람도, 엄연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다.
2. 신령한 자(고전2:15)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고 받아들인 사람이다.
신령한 자들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1:27)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말씀으로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 사람을 맨 나중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1) 쉽게 말하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생명과 영광을 공유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존재로 우리를 만드셨다.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예배는, 인간에게만 부여된 특권이요, 존엄성의 결정체이다.
개들이 밥 먹으면서 기도하지 않는다. 소들이 예배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예배할 수 있다. 또 하나님께서는 지성과 의지, 감정을 가진 분이시기에, 우리를 지정의를 가진 인격체로 만드셨다. 그래서 인간은 생각하고, 상상하고, 추론하고,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베이컨은 "나는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차리리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고 했다. 사람은 아주 작은 존재지만, 그 안에 신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조그만 인간이 우주를 품을 수 있는 마음을 가졌고, 창조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창2:7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먼저 흙으로 인간의 몸을 만드시고, 거기에 영을 불어넣으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 인간은, 신체와 영혼의 2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2) 연합되어야 신령한 자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불어넣으신 생기를, 영이라 한다. 신체와 영혼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영과 육은 하나의 유기체며, 신체와 영혼이 분리할 때, 인간은 죽음을 맞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지으신 후, 혼자 있음이 좋지 못하다 하시며, 돕는 배필로 여자를 만드셨다. 다른 동물들도 많았지만, 동물들은 인격이 없으므로 사람의 협력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잠들게 하신 후, 그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의 배필로 주셨다.
인간은 지정의를 가진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서로 연합하여 동거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래서 사회적인 존재로, 공동체를 이루며 살면서 삶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므로, 그 속에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있다. 육신이 있어 자연 세계와 조화를 이룰 수 있고, 영이 있으므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셔서 서로 사랑하고 연합하여 더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셨다.
뿐만 아니라, 저들이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도록 축복하셨다. 사람은 관계 속에 살며, 관계 속에서 자기를 인식하게 된다. 사람은 3가지 근본적이고 실존적인 관계 속에 있다.
①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그의 형상으로서의 관계에 있다. 이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와 더불어 즐거워하는 관계이다.
② 자연만물과의 관계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요, 그 관리자로서의 관계에 있다. 사람과 자연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발전할 때, 사람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③ 사람들과의 관계
인간은 서로 돕고 협력하며 사랑하는 관계에 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본연의 모습이다. 이 3가지 관계가 조화를 잘 이룰 때, 행복할 수 있다. 그런데 관계가 깨짐으로 죽음이 왔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아, 영생을 누리며 살아야 할 사람이, 하나님을 피하여 숨는 비극이 일어났다. 인간이 복된 자리를 떠났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존자가 아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함으로 영생을 누릴 수 있는데,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였기에 관계가 깨지고 말았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대로, 정말 죽고 말았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3가지다.
① 영과 육의 분리다. 사람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죽음이다.
② 사망이라는 죽음인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최종적인 심판을 받고, 지옥 불에 던져진다.
③ 영적인 죽음이다. 하나님과의 분리를 말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으로, 성경에서 가장 흔하게 말하는 죽음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다는 말은, 나무에서 그 가지가 잘려나감과 같다. 잘렸을 때에도 살았다고 느껴지지만, 잘려진 순간에 이미 죽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면, 3가지 관계속에서 살펴봐야 한다. 이 관계가 깨어짐이 죽음이요, 인간 상실이요, 자기 위치를 잃었음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찾고 계신다.
이 음성은 잃어버린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탄식소리며, 방탕하여 집을 떠나간 자식을 부르시는 안타까운 아버지의 목소리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나?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나?
3. 육신에 속한 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2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곧 신령한 자와 육신에 속한 자이다. 신령한 자는 믿음이 장성하고 성숙한 신자를 말하며, 육신에 속한 자는 믿지만, 성숙하지 못한 신자를 말한다.
구원은 받았지만, 자신의 육체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 자신을 위해 살아간다. 나이와 상관없다.
구원받은 자는 예수님이 그 마음 속에 계시기에,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야만 한다.
태어났다고 다 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처럼 자라나야 한다.
자식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 심리가 있다. 때가 되면 말도 하고, 걷기도 하고, 정상적인 사람으로 성숙하기를 바란다. 이런 기대심리가 충족될 때, 낳은 기쁨과 키운 보람을 느낀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성도들에 대한 기대 심리를 가지고 계신다.
교회에 나와서 신자가 되고, 신앙 연륜이 깊어질수록 신앙이 성숙해지고, 목자의 심정을 이해하고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기 바란다. 그럴 때 목회의 보람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보고, 믿음이 장성한 신령한 자가 되지 못하고, 육신에 속한 자, 어린아이와 같다고 했다.
(1) 연약한 성도, 영적 어린이로 계속 젖만 먹고 밥을 먹지 못하는 신앙이다(고전3:1-2).
은혜 받아라, 축복 받으라는 설교는 좋아하지만, 봉사하라 헌신하라는 말에 대해서는 핑계를 대며 헌신하지 않는 신앙, 칭찬과 격려해 주는 말을 좋아한다.
그러나 책망과 꾸중은 믿음으로 받지 못하고, 소화하지 못하는 신앙이, 바로 젖을 먹는 신앙이다.
온전한 주일성수, 십일조, 기도, 전도 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도,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아이는 부모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해 주지 않으면, 온갖 투정을 다 부린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어도, 육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생각과 고집대로 행한다.
(2) 시기와 분쟁을 일삼으며, 사람을 따라 행한다(3).
좋아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뭉쳐서, 시기와 분쟁을 늘 일삼는다. 충성하는 자들을 괜히 미워한다.
예수님의 발에 옥합을 깨서 향유를 부은 마리아를 보고, 성숙하지 못한 제자들은 꾸짖었다.
팔면 300데나리온도 더 되는데 하면서 아까워했지만, 은혜를 충만하게 받았던 마리아는 아깝지 않았다. 왜냐하면 받았던 은혜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도 마찬가지다.
은혜를 맛본 사람의 섬김과, 은혜를 모르는 사람의 섬김은 다르다. 은혜를 받지 못하면, 예수님을 위한 일들이 다 지나치게 보인다. 주님께 바치는 시간, 예물, 봉사가 하나도 아깝지 않다.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았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다 은혜를 크게 받았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목숨도 아깝지 않았다.
은혜를 받지 않고 일하면, 그것만큼 어색하고 힘든 일이 없다. 그래서 헌금을 해도, 아니니아와 삽비라처럼 헌금하게 된다. 사람을 속이고 풍성할 수 없다. 인색하다. 자기가 가진 향유를 절대로 다 부을 수가 없다. 따라서 먼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기 전에, 은혜 받는 자리로 나가기 바란다.
그러나 이렇게 시기하던 제자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으니, 주님을 위해 목숨을 드릴 수 있었다.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믿음의 자리로 나가서, 은혜를 받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신령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신령한 사람은 구원받고, 영혼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 영적인 공동체를 위해 살아간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이다. 물질보다 직업보다, 자녀보다 주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21:5).
그때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다 라고 말했지만, 실상은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다.
수준을 낮춰서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릴 때, 주님을 이제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었다.
지금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알고, 우리는 모두 주님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성도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