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우 옛집'을 찾아서
오늘은 지난 달에 이어 두 번째 성북동 순례길이다.
"문을 닫으면 곧 깊은 산중이다."
'최순우 옛집'에 대한 느낌으로 이보다 더 적확하고 멋진 표현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표현을 실감나게 하기에 아래 한 컷의 사진만으로 족할지는 자신할 수 없다. '최순우 옛집'의 사랑방 뒷마당 전경이다.
"건축은 땅이 꾸는 꿈이고, 사람들의 삶에서 길어 올리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집구경을 위해서는 집주인에 대한 탐구가 먼저여야 함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혜곡 최순우. 그는 1916년 개성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개성의 부립박물관 직원으로 근무하면서부터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장(1974~1984)까지 오직 한국문화유산의 보존과 발굴에 헌신해 온 인물이다.
최순우의 본명은 희순(熙淳).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순우(淳雨)는 그의 필명이며 그의 아호 혜곡(兮谷)과 함께 간송 전형필이 지어주었다는 건 나도 이번 순례를 통해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이런 인연이 1976년 최순우를 간송 전형필이 살고 있는 이곳 성북동으로 이사오게 만들었을 게다. 그가 타계한 해가 국립박물관장으로 재직중이던 1984년이었으니 그와 이 집의 살아생전 인연은 고작 8년이다. 하지만 그의 아내마저 작고하고 2002년 이 집이 팔리면서 멸실의 위기를 맞이하자 뜻있는 시민들이 후원금을 모아 시민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하면서 지금은 '혜곡최순우기념관'으로 재탄생 시켰으니, 이 집을 통해서 최순우의 삶에서 길어 올리는 이야기는 앞으로도 끝을 모르고 이어지리라.
하일라이트를 먼저 보느라 순서가 꼬였지만 이제부터라도 '선생의 안목과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집안을 입구에서부터 방 안 구석구석까지 찬찬히 살펴보자.
여기가 이 집 대문이다. '최순우 옛집' 간판이 집앞에 다 와서야 보일 정도로 작다.
왕릉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고매한 인상의 문인석 하나가 이 집의 품격을 한껏 높이고 있다.
뒷뜰 한 켠에 옹기종기 모아놓은 항아리. 대개 장독대는 햇빛 잘드는 곳이 제자리인데 뒷뜰 구석이라니 다소 뜬금없어 보였다. 알고보니 집주인이 달을 모으느라 놓은 항아리라고 해서 역시 재밌는 분이셨구나 싶다. 항아리 앞의 돌탁자에 잘 빚은 술 호리병 올려놓고 교교한 달빛 아래 벗님네들과 오순도순 앉아서 한 잔 하신 건 아닐까 상상하니 내 얼굴에도 미소가 번진다.
여기서 이달부터 10월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매달 각종 강연, 체험, 음악회가 열린다니 관심 있는 분은 참고하세요.^^
일부 관람객들이 사랑방 툇마루에 앉아 도란도란 담소도 나누고 책도 읽고 있다.
사랑방 뒷편 툇마루 위에 걸린 '午睡堂' 현판. 이 '오수당' 현판은 사랑방 앞에 걸린 '杜門卽是深山'(두문즉시심산) 현판과 함께 선생께서 이 집에 이사오며 바로 직접 써서 걸었던 현판이라고 한다. 그만큼 이 집의 정체성이자 시그시쳐 그 자체라는 뜻이다.
이 '杜門卽是深山' 현판의 뜻이 바로 이 글 앞머리에 인용했던 그 문구다.
"문을 닫으면 곧 깊은 산중이다."
그런데 현판 왼쪽의 낙관엔 '午睡老人'(오수노인)이라고 새겨져 있다. 선생께선 생전에 '낮잠'을 참 많이 즐기셨나보다.^^
다시 또 현판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본문과 낙관 사이에 나중에 장난삼아 새겨넣은 듯한 한글 전각이 눈에 들어온다. 세 글자 중에 '낮잠' 두 글자는 확실히 알겠는데 나머지 한 글자가 헷갈린다. 얼핏 보기에는 '막' 字인데 이 '막'을 '낮잠'과 붙여 읽으려니 어떻게 읽어야 할지 당최 모르겠는 거다. 하는 수 없이 관리사무실에 근무하는 안내 학예사를 불러 손가락으로 현판을 가리키며 묻는다.
"저 한글 전각을 선생님이 새겨 넣으신 게 맞지요?"
"한글이라니요?" 학예사는 의아한 듯 되묻는다.
"저기 '낮잠' 한글 낙관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옆에 있는 글자가 무슨 글자에요?"
젊은 학예사는
"글쎄요. 저도 오늘 처음 보네요."라며 겸언쩍어 한다.
나는 그녀의 겸언쩍음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요량으로
"아마도 '막'자인 듯해요. 이제 막 낮잠이 들었다는 뜻이 아닐까요?"라며 눙친다.^^
내가 찍은 '최순우 옛집'의 최고 핫 스팟 사진이다. 오른쪽 밑 구석에 보이는 관람객의 발이 이 집이 살아 숨쉬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여긴 안방이다.
큰 함지박이 아무런 설명 없는 명패와 함께 전시되어 있다. 분명 무슨 사연이 있을 텐데 그것이 사뭇 궁금하다.
여기는 안방과 사랑방 사이의 대청마루.
대들보 밑에 걸려 있는 현판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최순우 옛집 중수기'가 빼곡히 적혀 있다. 날짜를 보니 2014년 4월 10일이다. 하필이면 진도 앞바다에서 참혹한 일이 벌어진던 날로부터 불과 엿새 전이라니...
이제 그만 이 집을 나서려는데 앞마당에 뚜껑을 덮어놓은 우물이 보인다. 이 우물의 물이 말랐는지 여부가 궁금해서 아까 그 학예사에게 묻는다. 당연히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물은 마르지 않았다는 학예사의 답변이 반갑다. 그녀로서는 아까의 겸언쩍음을 만회할 기회였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최순우의 삶과 그의 옛집에 어린 한국미의 우물물이 마르지 않았다는 뜻으로 들려서 더욱 반가웠다.
지난 달 kbs의 '예썰의전당' <창덕궁 완전 정복>편에서 유홍준 교수는 김부식의 <삼국시기>에서 인용하면서 우리나라 궁궐미의 진수를 "儉而不陋 華而不侈"(검이불누 화이불치,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으며,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 두 문장으로 압축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오늘 이 옛집에서 내가 어렴풋이 느꼈던 한국미는 최순우 자신이 그의 저서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 낱낱으로 보는 한국미»에서 자상하고 친절하게 잘 설명하고 있는 듯하다.
"한국적이란 말은 한국 사람들의 성정과 생활 양식에서 우러난 무리하지 않는 아름다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소박한 아름다움, 호젓한 아름다움, 그리움이 깃들인 아름다움, 수다스럽지 않은 아름다움 그리고 이러한 아름다움 속을 고요히 누비고 지나가는 익살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아울러서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나로서는 이번이 최순우 옛집의 세 번째 순례길이다. 그런데 워낙 오랜만이어서인지 그 입구를 찾는데 엄청 애를 먹었다. 지하철4호선 한성대입구역 5번출구를 나와서 성북동 주민자치센터 쪽으로 700여 미터 쯤 가면 된다는 정보를 검색하고 한참을 걸었으나 지난 달에 갔던 선잠단 터까지 가도록 그 입구를 못 찾고 다시 되돌아 오다가 마침 성북동 관광안내센터가 있기에 들어가서 물어보고서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혹시 이 포스팅을 보고 '최순우 옛집'을 찾아갈 의향이 있다면 '나폴레옹제과점'을 지나서 '일락'이라는 주점 앞에 보이는 '성북동헤어살롱'을 끼고 골목으로 들어가면 50미터 쯤 앞에서 '최순우옛집' 간판을 만날 것이다.
* 위 사진의 '나폴레옹제과점'은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했던 1968년에 이 자리에서 개업한 이래 지금까지 서울의 손꼽히는 유명 제과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다만 원래 위치(당시 성북천을 복개한 바로 그 자리)에서 약 500여 미터 떨어진 곳으로 옮겨졌다.
성북 국민학교 시절 온 동네 꼬마들로 들끓었던 만화가게 자리에는 선잠박물관이 우뚝 서있다. 그 만화가게에서 일정 금액 이상의 만화를 읽으면(나는 주로 백산의 야구만화를 즐겼음) 저녁에 TV를 시청할 수 있는 딱지를 주는데 김일과 천규덕의 프로레슬링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그 딱지를 들고 가서 그들의 박치기와 당수에 환호했던 꿈같은 추억이 서린 곳이다.
또한 한양 도성 밑으로 하꼬방 집이 따닥따닥 붙어 있던 '나의살던고향' 동네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성북역사문화공원'이 원래 자기 자리인 듯 예쁘게 조성되어 있으며 그 옆으로는 '성북근현대문학관' 신축 공사가 한창 진행되는 중이고 이런 조감도가 눈길을 끌고 서있어 세월의 속절없음을 실감하게 해준다.
2023. 4. 15
to be continued...^^
첫댓글 읽으면서 직접 가본듯
느낄수 있게
공간,,인물에대한
자세한 설명과 사진이
몰입하게 되네요,,,
잼있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4는 더 재미 있을 겁나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
신부 님! 감사합니다.
#4에는 마리아께서 오십니다.^^
옛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인상 깊은 글이었습니다. 감회가 새롭습니다.
감사합니다.
방금 #4도 올렸습니다.
마저 즐감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