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고(先考)와 선비(先妣)의 묘지
선부군의 휘는 선거(宣擧), 자는 길보(吉甫)이며 성은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다. 시조 휘 신달(莘達)은 고려 시대 태사(太師)를 지냈으며, 15대를 내려와 휘 곤(坤)이 본조에 들어와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지고 소정(昭靖)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또 4대를 내려와 휘 탁(倬)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지냈다. 고조 휘 선지(先智)는 병마절도사를 지냈는데, 이분은 좌윤공의 아들이다. 증조 휘 돈(暾)은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조부 휘 창세(昌世)는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황(煌)은 대사간을 지냈고 모친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우계(牛溪) 선생 휘 혼(渾)의 따님이다.
부군은 만력 38년 경술년(1610, 광해군2) 5월 28일 자시(子時)에 영광군(靈光郡) 관아에서 태어났다. 숭정 6년 계유년(1633, 인조11)에 생원시와 진사시의 두 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으며, 병자년(1636)에 성균관의 유생들을 이끌고 상소를 올려 오랑캐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청하였다. 그해 겨울에 강도(江都)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정축년(1637)에 우리나라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그 후로 시골에 은거하며 평생을 마치려고 하였다.
효종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던 신묘년(1651, 효종2)에 전설사 별검(典設司別檢)과 왕자 사부(王子師傅)에 제수되고 임진년(1652)에 세자시강원 자의(世子侍講院咨議)로 부름을 받았으나 부군은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으며, 관함(官銜)도 쓰지 않고, 연호(年號)도 쓰지 않은 채 강도(江都)의 난리 때에 죽지 못한 것을 들어 자신을 책망하였다.
계사년(1653)에 6품으로 승품하여 형조 좌랑에 제수되었고, 을미년(1655) 봄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고, 겨울에 다시 제수되었으나 과천(果川)까지 올라왔다가 사직하고 돌아갔다.
병신년(1656)에 거듭 사헌부 장령으로 부름을 받았고, 정유년(1657)에 거듭 시강원 진선(侍講院進善)으로 부름을 받자, 무술년(1658) 정월에 부군이 대궐 아래로 나아가 네 번이나 상소를 올려 사정을 아뢰고 사양하였다. 임금이 선비의 복장 그대로 입대(入對)하라고 명을 내리자 부군이 이를 감당할 수 없어 상소를 남겨 놓고 물러나 돌아왔다. 이해 겨울에 또다시 장령에 제수되었다가 체차되어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기해년(1659) 3월에 또다시 진선으로 부름을 받고 약물(藥物)을 하사받았다. 당시에 임금께서 부군을 기어이 불러들이려고 하였으나 부군은 사양하고 가벼이 나아가지 못하였는데, 효종이 갑자기 승하하고 말았다.
현종이 즉위하자 별유(別諭)를 내려 부르고 사헌부 집의에 제수하였으나 부군이 대궐 아래로 달려가 곡하고서 상소를 올려 새로 내린 벼슬을 사양하였다. 장악원 정(掌樂院正)으로 옮기고 음식을 내리면서 입대할 것을 명하였으나 부군은 이를 사양하고 도성을 나왔다. 사업(司業)과 상의원 정(尙衣院正)에 제수하고 또다시 인견(引見)할 것을 명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0월에 국장(國葬)이 끝나고 돌아오자 집의와 사업에 연이어 제수되었다.
을사년(1665, 현종6)에 임금이 온양(溫陽)에 행차하여 별유를 내려 부르자 행궁(行宮)에 나아가 상소를 올려 사양하고 돌아왔다. 또 집의와 원자강학청(元子講學廳)의 요속(僚屬)으로 연이어 제수하고 또 감사(監司)에게 명하여 문안하고 음식을 내렸다. 세자의 책봉식을 거행하게 되어 또다시 진선에 제수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기유년(1669) 4월 18일에 병으로 별세하니, 향년 겨우 60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이 애통해하며 본도에 명하여 초상에 필요한 물품과 일꾼을 보내 주었고, 해당 아문에 명하여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추증하였다. 8월 24일에 교하현(交河縣) 법흥향(法興鄕) 월롱산(月籠山) 서쪽 유향(酉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유인(孺人) 이씨(李氏)는 먼저 안장되어 있다가 공을 안장한 뒤에 그 왼편에 부장(祔葬)되었다.
유인의 본관은 공주(公州)이다. 고려 말에 강릉 부사(江陵府使)를 지낸 휘 엽(曄)이란 분이 감찰어사 지제고(監察御史知制誥)를 지낸 휘 명성(明誠)을 낳았는데, 본조에 들어와 이천(伊川)의 산속에 은거하면서 벼슬에 나오지 않았다. 몇 대를 내려와 휘 척(滌)에 이르러 강화 부사(江華府使)를 지냈는데, 유인의 고조가 된다. 증조 휘 경지(慶祉)는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조부 휘 건(鍵)은 사도시 정(司䆃寺正)을 지냈다. 부친 휘 장백(長白)은 성균관 생원이 되었는데, 뛰어난 재능과 훌륭한 뜻을 지니고 있었으나 일찍 별세하였다. 모친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돈녕 도정(敦寧都正) 휘 민일(民逸)의 따님이다.
유인은 만력 정미년(1607, 선조40) 윤6월 16일에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총명함을 보였으며, 4, 5세부터는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민첩하며 말씨가 차분하여 마치 어른을 보는 것 같았다. 8세에 부친 생원공이 별세하자 슬픔을 다하고 거의 말을 하거나 웃지도 않았으며,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제사에 꼭 참석하였다.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나 길쌈이나 바느질 등의 집안일은 눈으로 한 번 보기만 해도 곧바로 배워서 어느 것 할 것 없이 정교하게 잘하였고, 문자는 귀에 스치기만 해도 잊지 않아 《소학(小學)》, 《열녀전(烈女傳)》 등의 책을 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성품 또한 명민하고 의리에 밝아 여자로서 갖추어야 할 행실들을 잘 갖추었다. 부군에게 시집와서는 시부모를 모시고 동서들과 지내는 데에 정성과 예의를 다하여 항상 그들의 환심을 얻었다. 강도의 난리 때에 적병이 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부군과 영결(永訣)하기를,
“적의 칼날에 죽느니 미리 자결하겠습니다.”
하고, 노비들을 불러 어린 자식들을 부탁하며 말하기를,
“부디 잘 돌보거라. 죽고 사는 일에는 명이 있느니라.”
하였다. 뒷일을 처리하고서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나가라고 이른 후 자결하니, 정축년(1637, 인조15) 정월 23일의 일이다. 이듬해 무인년(1638) 2월 27일에 부친 생원공의 묘소와 같은 언덕의 왼편에 안장하였다. 기유년(1669, 현종10)에 부군에게 관직이 추증됨에 따라 숙부인(淑夫人)으로 추증되었고, 금상(今上) 7년 신유(1681) 7월에 왕명으로 정려(旌閭)되었다.
부군은 딸 하나에 아들 여섯을 두었다. 딸은 사인(士人) 박세후(朴世垕)에게 시집갔다. 장남은 증(拯)이고 둘째는 추(推)인데 모두 천거를 받아 벼슬에 올랐고, 추는 현감을 지냈다. 셋째는 녹성(祿星)인데 3살 때 강도에서 죽었다. 발(撥), 졸(拙), 읍(挹)은 측실 김씨(金氏)의 소생이다. 발과 졸은 모두 진사이다.
박세후는 일찍 죽었고 계자(繼子) 태보(泰輔)는 응교(應敎)이다. 장남 증은 좌윤 권시(權諰)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에 아들 둘을 두었다. 아들은 생원 행교(行敎)와 충교(忠敎)이고, 딸은 임진영(任震英)에게 시집갔다. 둘째 추는 군수 조진양(趙進陽)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자교(自敎)와 가교(可敎)이다. 다시 사인 이류(李𣞗)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넷째 발은 참의 이유겸(李有謙)의 서녀(庶女)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에 딸 둘을 두었다. 아들은 건교(健敎), 후교(厚敎)이고 사위는 이순상(李舜相)이며,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다섯째 졸은 이제(李濟)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남은 민교(敏敎)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여섯째 읍은 좌랑 박유연(朴由淵)의 서녀에게 장가들어 딸 셋에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증손은 아들딸 10여 명이 된다.
부군은 타고난 자질이 관대하면서도 강인하고 도덕과 행실이 순수하고도 돈독하였다. 학문은 성리학의 정맥(正脈)을 전수받고 몸소 대의(大義)를 자임하여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도를 지키면서 평생을 지냈다. 부군이 세상을 떠난 후 부군의 종형(從兄) 용서공(龍西公) 휘 원거(元擧)와 계형(季兄) 석호공(石湖公) 휘 문거(文擧)가 함께 부군의 유사(遺事)를 지어 묘표(墓表)의 뒤에 새겨 넣었으며, 반남(潘南) 박군 세채(朴君世采)가 행장을 기술하였다. 유고(遺稿) 10권, 연보(年譜) 1권이 사본(寫本)으로 집에 보관되어 있다.
숭정 기원 무진년 후 66년 계유(1693, 숙종19) 정월에 불초자 증(拯)은 피눈물로 삼가 쓰노라.
先考妣墓誌
先府君諱宣擧。字吉甫。坡平尹氏也。始祖諱莘達。高麗太師。十五世至諱坤。入本朝。坡平君。諡昭靖。又四世至諱倬。漢城左尹。高祖諱先智。兵馬節度使。寔左尹公之子也。曾祖諱我。贈左承旨。祖諱昌世。 贈吏曹參判。考諱煌。大司諫。妣昌寧成氏。牛溪先生諱渾之女。府君以萬曆三十八年庚戌五月二十八日子時。生于靈光郡衙。崇禎六年癸酉。中生員進士兩試。遊國庠。丙子。率諸生。抗疏請斬虜使。冬。入江都。明年丁丑。國家有城下之盟。自此屛居鄕曲。爲終焉計。孝宗卽位之三年辛卯。除典設司別檢。王子。師傳。壬辰。以世子侍講院咨議召。府君上疏辭。不書官銜。不書年號。引江都臨亂不死。以自咎。癸巳。陞六品。除刑曹佐郞。乙未春。拜司憲府持平。冬。再除。行至果川。辭歸。丙申。再以司憲府掌令召。丁酉。再以侍講院進善召。戊戌正月。府君詣闕下。四疏陳情以辭。命以士服入對。府君不敢當。留疏退歸。是冬。又除掌令。遞移成均館司業。己亥三月。又以進善召。賜藥物。時上意必欲致府君。府君辭謝。不敢輕進。而孝宗遽已昇遐矣。顯宗卽位。下別諭召。拜司憲府執義。府君赴哭闕下。陳疏辭新命。移掌樂院正。賜食物。命入對。府君辭出城。除司業,尙衣院正。又命引見。皆辭。十月。過大葬而歸連。除執義,司業。乙巳。大駕幸溫陽。以別諭召。詣行宮。拜疏辭謝而歸。又連除執義。元子講學廳僚屬。又命監司。存問賜食物。世子冊禮行。又拜進 善。竟不起。己酉四月十八日。以疾終。壽僅六十。訃聞。上痛悼。命本道給喪需及役夫。命該曹贈吏曹參議。八月二十四日。葬于交河縣法興鄕月籠山西酉向之原。孺人李氏。先葬而祔于左。孺人之先公州人。麗末有諱曄。江陵府使。是生諱明誠。監察御史知制誥。入本朝。隱居伊川山中不仕。數世至諱滌。江華府使。孺人之高祖也。曾祖諱慶祉。贈左承旨。祖諱鍵。司䆃寺正。考諱長白。成均生員。有高才美志。早卒。妣坡平尹氏。敦寧都正諱民逸之女。孺人生於萬曆丁未閏六月十六日。生而明粹。自四五歲時。擧止端敏。言語靜愼。已如成人。八歲。生員公捐世。哀慕不懈。罕發言笑。朝夕祭奠。必參。聰悟過人。女紅之事。一見輒能。而無不精妙。文字過耳輒不忘。如小學列女傳等書。無不通覽。性又明達。曉義理。女則甚備。及歸府君。奉事尊章。承接諸姒。盡其誠禮。常得歡心焉。江都之難也。聞賊兵渡江。卽與府君訣曰。與其死於賊鋒。不如早自決。招婢輩託以諸幼曰。須善護之。死生則有命焉。旣處置後事。令引出諸幼。而後自決。卽丁丑正月二十三日也。葬以明年戊寅二月二十七日。考生員公墓同原。而在其左。己酉。府君有贈典。從贈淑夫人。今上七年辛酉七月。命旌表門閭。府君有一女六男。女適士人朴世垕。男長曰拯。次曰推。俱以薦登仕。推縣監。次曰祿星。生三歲。死於江都。曰撥,拙,挹。側室金氏出也。撥,拙。俱進士。朴早歿。繼子曰泰輔。應敎。拯娶左尹權諰女。生一女二男。男曰行敎。生員。曰忠敎。女適任震英。推娶郡守趙進陽女。生二男。曰自敎,可敎。再娶士人李𣞗女。撥娶參議李有謙庶女。生三男二女。男曰健敎,厚敎。壻曰李舜相。餘幼。拙娶李濟女。生三男。敏敎。餘幼。挹娶佐郞朴由淵庶女。生三女一男。皆幼。曾孫男女十餘人。府君天資弘毅。德行純篤。學傳正脈。身任大義。安貧守道。以終其身。旣棄世。府君之從兄龍西公諱元擧。季兄石湖公諱文擧。相與記府君遺事。刻于表陰。潘南朴君世采 述行狀。有遺稿十卷。年譜一卷。藏于家。崇禎紀元戊辰之後六十六年癸酉正月日。不肖子拯。泣血謹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