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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 문예바다 신인상 수상 작가들 |
꿈
박태호
7월 말에 K-PD는 다큐멘터리 제작팀(여성 3명 남성 5명)을 이끌고 아마존 정글로 떠났다. 그들은 12월 말까지 다섯 달 동안 아마존 정글에서 고립된 원시부족의 생활사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할 예정이었다. 열대 아마존의 우기는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였다. 8월에서 연말까지를 택한 것은 건기와 우기에 걸쳐서 그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였다. 사전 준비를 위해 6개월 전에 출발한 선발대는 거의 일 년 동안이나 아마존 정글에서 살아야만 했다.
다행스럽게도 선발대는 노련한 가이드의 도움으로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한 부족을 찾아 정지작업을 마쳤다. 그들은 문명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전형적인 석기시대의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 둘 만한 인류학적 가치도 충분하지만 문명의 때가 전혀 묻지 않은 원시의 삶에 비추어진 문명의 민얼굴을 보고도 싶었다.
“원주민들이 편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게 개인적인 친분을 쌓고 우리와 다른 내면의 세계가 드러나면 그것을 담아낼 수 있도록 촬영계획에 구애받지 말고 각자가 알아서 그때그때 촬영하세요. 이번 프로젝트의 성패는 우리가 원주민과의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느냐로 결정될 겁니다.”
K-PD가 촬영 계획을 위한 회의를 할 때마다 하는 부탁이었다.
정글에 의존하여 주로 수렵과 채취로 살아가는 원시인들에게 준비된 다음 끼니는 없었다. 아마존 정글은 실개천 하나만 건너도 서식하는 동식물이 완전히 달라질 정도로 변화무쌍한 곳이었다. 그런 환경에서는 예측과 계획이 아니라 창의와 행운이 내일의 삶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삶을 담아내기 위해서 다큐멘터리 제작팀에게도 창의와 행운이 따라야만 했다.
원시인들의 행복지수는 문명인들의 그것보다 높다고 한다.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행복을 느낄 만큼 가진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원시인들은 문명인들보다 가진 것이 적다. 없이는 살 수 없는 편리함이 문명의 멍에인 반면 없이도 살 수 있는 불편함이 원시의 축복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문명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편리를 강매하며 그 대금을 생활비란 명목으로 요구한다. 저렴한 생활비로 불편하게 살 수 있는 생존기반을 허물어 버렸다. 이것은 학대다. 이 문명의 학대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묻는다고? 이것이 원시에 비추어진 문명의 민얼굴일 것이다.
K-PD는 원시성의 존속은 그들의 선택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생물학을 전공한 M-PD는 그것은 환경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주장했다. 우기와 건기는 삶의 연속성을 완전히 파괴할 정도로 극명하게 다르기 때문에 기술의 축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기술의 축적이 없는 삶이 바로 원시상태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끔은 비협조적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다른 종으로 느껴질 만큼 이질적인 그들을 상대로 왜 그러고 있는지를 알아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곡간과 화덕을 만들 수 없는 주거공간이 원시상태가 지속되는, 아니 지속될 수밖에 없는 이유죠. 그 이유를 그들에게 물어 보면 발전할 수도 없었고 발전할 필요도 없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질 겁니다. 그것이 이 다큐 프로그램의 중심 콘셉트가 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어요. 물론 오락성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M-PD가 지난 6개월 동안 줄기차게 K-PD와 각을 세우는 레퍼토리였다. 다른 팀원들과는 달리 M-PD는 사사건건 딴죽을 거는 것 같았으나 K-PD는 AD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PD의 자존심일 거라고 이해했다. 게다가 전에는 그녀의 이견異見이 결정적인 탁견卓見일 때도 있었다. 그동안 ‘겨우살이의 생존법’, ‘매미의 한살이’, ‘겨울의 생태계’ 등 자연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그녀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명품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21세기의 원시인들은 진화가 중단된 문명인들의 조상과 같은 모습일까, 아니면 궤를 달리해 진화해 온 별종일까? 문명의 간섭으로 변질되긴 했지만 죽음의 공포와 맞서는 성인식에 카메라의 눈이 꽂혔다. 그 의식에는 외형상 극한의 고통과 공포체험을 통해 인내심과 용기를 길러 앞으로 마주치게 될 고통과 공포에 대한 면역을 강화한다는 목적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극한의 고통과 기도가 절정에 이르면 초자연의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고 그들은 믿었다.
자연이 전부라면 삶의 허무와 절망은 산자의 숙명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극한의 고통과 공포에서 절규하는 간절함으로 초자연을 체험할 수 있다면 자연의 행복과 불행의 의미는 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초자연을 체험한 몇 안 되는 성현들의 가르침을 통해 간접체험이 고작인 문명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초자연의 위로가 원시인들의 행복지수를 높여 주는 또 다른 가진 것이 아닐까.
K-PD가 M-PD를 처음 만났던 것은 18년 전 대학의 친목동아리에서였다. 입대를 앞두고 휴학상태에 있었을 때 동아리 신입생으로 들어온 M을 처음 만났었다. 고3때 전 학년 얼짱으로 뽑힐 만큼 외모가 뛰어났던 그녀를 보자 첫눈에 홀려 버렸으나 내성적이었던 그는 내색을 하지 못하고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갓 대학생이 된 그녀도 그를 좋아했지만 그런 감정을 숨기기에 급급할 나이였다. 또 무엇을 하기에는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입대와 더불어 그들의 관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제대를 하고 복학을 했을 때 그녀는 이미 한 학기 선배가 되어 취직을 위한 스펙을 쌓느라 동아리 활동도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품었던 감정을 무슨 치부인 양 모두에게 숨겼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 앞에서 세련된 남자와 함께 가고 있는 그녀와 우연히 마주쳤다. 못 본 척하고 지나치려 할 때 그녀가 먼저 아는 체하면서 말을 걸어 왔다.
“K형 아니세요? 맞네! 제대하셨다는 소식은 벌써 들었는데 이제야 만났네요! 건강하셨죠?”
“응, 그래. M도 잘 있었지?”
“말하면 당근이지! 남친오빠 소개할게요.”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남친오빠라고 소개했다. 연상의 남자친구라는 뜻이었다. 그녀는 무슨 개선장군인 양 의기양양했다. 그는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역시 부질없는 꿈이었구나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기대하지 않았다면 실망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순간 그는 실망감을 넘어 절망감을 느꼈다. 그녀가 그에게 그런 존재라는 것에 자존심마저 상했다. 그리고 1년 반 후 그들은 N방송국 수습사원 선발시험장에서 다시 만났다.
연말이 되면서 다큐멘터리 제작을 끝내고 만신창이가 되어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늘 그랬듯이 M-PD는 K-PD의 앞좌석에 앉았다. 결코 합석을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멀리 앉지도 않았다. 경계와 관심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몇 시간만 더 가면 인천공항에 도착할 쯤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나스카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귀여운 반려동물에게서도 야성이 느껴지고 전통복장을 한 노인에게서는 귀기鬼氣가 느껴지는 아주 딴 세상에 온 것 같았다. 파란 하늘을 조각내고 있는 새털구름을 뚫고 땅에 얼룩진 아침햇살은 몽환상태에 빠뜨렸다. 시간도 낯설게 느껴졌다. 페루는 처음 온 한국인에게 그런 곳이었다.
‘안데스 일대의 기상 배치가 바다에서 흩어진 수증기를 모아 우연히 리마의 아침하늘을 저렇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라는 과학의 호들갑에 생각을 멈추고 말면 그것은 인간이성에 대한 명백한 배신일 것 같았다. 또 인간에게 이성이 깃든 이래 자연이 그려내는 초자연적 메시지를 읽어 허무와 절망을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던 모든 철학과 종교는 그 길을 잃고 말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아마존 정글에서 다큐멘터리 제작팀의 일원이었던 M-PD가 나타났다. 일단 그가 누구든 아는 사람이 반가웠다. 날선 이성을 접고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과 더불어 학습된 무관심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습관적 일상으로 다시 깨어났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다른 사람들은요?”
너무나 뜻밖이라서 그는 주위를 살피며 물었다. 방송사에만 연락을 하고 일행을 이탈했기 때문에 그의 동선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미에 온 김에 나스카라인을 직접 보고 가야 할 것 같아서요. K-PD님은요?”
그녀도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나스카라인은 땅을 긁어서 그려 놓은 그림들이다. 마치 달의 표면처럼 바람이 적고 건조한 기후의 특성 때문에 2000년 이상이나 그 형태가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지구온난화가 일으킬지도 모르는 기상이변은 하루아침에도 그것들은 흔적도 없이 지워져 버릴 수 있는 약한 유적이었다.
“나도 나스카라인의 미스터리를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요. 회사에는 휴가를 신청하고 허락을 받았지만 사실은 다큐 소재를 발굴하기 위한 것이니 잔업수당이라도 받아야 하지 않나?”
하늘과 땅, 심지어 땅 밑까지 볼거리산업의 첨병인 카메라의 눈이 밤낮없이 뒤지고 있었다. 볼거리의 생산을 업으로 하는 다큐멘터리 PD도 이제 카메라의 눈만으로는 시청자들의 눈높이에 이르는 작품을 생산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작품에서 베어나는 작가의 땀 냄새만이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면 다큐멘터리 PD에게 휴식은 사치일 뿐이었다.
“욕심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내 생각으로는 이번에 제작한 아마존의 원시문명도 상당한 반향이 있을 것 같은데. 그만하면 되지 않았나?”
“그걸 어디 나 혼자 했습니까? 팀의 합작이지.”
“뒤치다꺼리를 누가 알아준답니까? 업적은 다 책임 피디의 몫이지. 우리 일이란 게 그렇잖아요? 책임 피디와 나머지들, 나머지들은 언제나 대체 가능하기 때문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아닌가요? 입사하고 지금까지 겪었던 서러움이니까 내가 잘 알지요.”
그녀의 어투에는 언제나 날선 가시가 느껴졌다. 게다가 음색으로 감지되는 K에 대한 희미한 적대감이나 미움 같은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다음부터는 인류학이나 철학 등을 소재로 메타다큐를 개발해 볼까 하는데 자연다큐 제작팀은 M-PD님이 맡아서 걸작을 만들어 보세요.”
“촬영현장에서 라면이나 끓이던 솜씨로 다큐 제작은 무슨! 아무튼 말씀만이라도 고맙네요. 그런데 메타다큐가 무슨 뜻이지요?”
“적절한 용어가 없어서 내가 만들어 본 말이에요. 철학이나 종교 등의 난해한 이론을 다큐 형식으로 입증하거나 설명해 보면 어떨까 해서요. 요수타인 가이더의 『소피의 세계』처럼 철학담론을 소설형식에 담은 것을 메타픽션이라고 하잖아요? 전공인 인류학 지식을 바탕으로 완벽한 원시부족을 상대로 한번 실험해 볼까 해요. 문명을 접촉한 적이 없는 원시인에게 21세기의 문명인이 잘 준비된 각본으로 그럴듯하게 연기하면 그들의 신神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재미있는 착상이네요. 그러나 물리법칙을 파괴할 능력이 없이도 신이 될 수 있을까요?”
“전기전자기술을 잘 이용하면 물리법칙의 파괴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마술의 도움도 필요하겠지만. 성공하면 고대의 신들도 문명이 발달한 외계인들이었을 거라고 추정이 가능할 것 같아서. 지나친 비약인가?”
“지독한 신성모독? 하기야 이젠 신성모독 같은 것은 죄도 아닌 세상이 되고 말았지. 게다가 다큐를 창작해 보겠다 뭐 이런?”
“그렇지요. 다큐도 창작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된 것 같아요. 그냥 베껴서 대중의 눈높이를 따라갈 소재가 남아 있겠어요?”
나스카행 버스가 들어왔다. 이유도 분명하지 않고 방향도 종잡기 어려운 거의 습관적인 두 사람간의 감정 충돌은 일단 여기서 멈추었다. 너무나 멀고 너무나 낯선 땅에서 그들은 적이든 동지든 또 관광의 목적이 무엇이든 서로 길동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거리와 이질의 익명성에 기대고 미지의 두려움에 떠밀려 처음으로 버스의 좁은 좌석에 합석했다.
왼쪽으로는 안데스의 경치가 시야에 들어오고 오른쪽으로는 태평양의 풍광이 펼쳐졌다. 이국적인 풍광에 빠져들다가 곧 깊은 잠에 빠질 정도로 그들은 지쳐 있었다. 중간 기착지이자 나스카의 관문이랄 수 있는 사막도시 이카에 도착하여 누군가가 깨울 때까지 그들은 자 버리고 말았다.
이카에서 다시 2시간을 더 가야만 목적지인 나스카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차창을 스치며 빠르게 지나가는 사막의 풍광은 외계행성에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바람이 만들어 내는 모래언덕과 골짜기에는 물결이 일고 있었다. 샌드보드를 타고 있는 사람들은 외계인 같았다. 시간마저 정지된 것 같은 사막과 하늘 사이로 움직이는 것이라곤 버스뿐이었다.
“우선 호텔을 잡아서 캐리어라도 맡겨 두고 관광을 해야겠지요?”
나스카에 도착하여 M-PD는 크고 작은 두 개의 캐리어를 끌면서 주위를 살폈다. 연말이라서 임시 시장이 열리고 분위기가 들떠 있었다. 임시로 열리고 있는 시장의 한가운데에 호텔이 있었다. HOTEL PYGMALION & GALATEA.
“방을 따로 얻어야 하나? 2박인데 하나만 얻어서 함께 씁시다. M씨는 정글에서처럼 방 안에 텐트를 치고 자면 되겠지요. 비용도 절약하고 또 서로에게 경호원이 되어 줄 수도 있고. 사람의 관계란 것이 마음의 거리지 공간의 거리는 아닐 테니까요. 나스카에서 2박3일 동안의 모든 경비는 일단 내가 계산할 테니까 헤어질 때 정산하기로 합시다.”
“그래야겠죠. 그런데 경비는 팀장이 책임지는 게 아닌가?”
“아마존 정글에서 가방을 쌀 때 벌써 그 팀은 해체되고 말았는데 팀장은 무슨? 그건 그렇고, 방을 함께 쓰든 따로 쓰든 우리가 나스카를 함께 여행했다는 사실을 세상이 알게 되면 그들은 우리의 말을 믿지 않고 자신들의 상상을 믿을 겁니다. 하지도 않은 짓을 억울하게 한 꼴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아예 만난 일이 없어야 해요.”
“사실 나는 혼자 나스카로 여행할 계획을 하면서 가장 걱정스러웠던 것이 밤이었어요. 이제 믿을 만한 보초를 한 명 구했으니 그 문제는 해결된 것 같고 볼거리나 잘 챙겨 보아야겠네요.”
“나도 그래요. 믿을 만한지는 모르지만 비서(?)를 한 명 구했으니.”
나스카 문화의 중심은 나스카 라인들(Nazca Lines)이었다. 나스카 라인은 500㎢나 되는 평원에 BC100〜AD800년경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될 뿐 누가 그렸는지 또 왜 그렸는지도 알 수 없는 그림문양들이었다. 그것들은 작은 것은 10m에서 큰 것은 300m에서 8㎞나 되는 수많은 선과 기하학적 문양과 경이로운 동식물의 그림들이었다. 땅에서 보면 무엇의 일부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무의미한 선이나 점에 불과했다. 의미 있는 전체의 윤곽을 볼 수 있는 눈높이는 하늘에 있었기 때문에 항공여행이 유행하기 시작했던 20세기 초까지는 그것들이 무엇을 그린 그림인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일단 미스터리 지상화(나스카 라인)의 관광을 시작했다. 10m가 조금 넘는 전망대에 올라가자 지상화가 희미하게 보이긴 했으나 눈높이가 맞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나 굵고 두드러진 팬아메리칸하이웨이가 그 그림들의 일부를 지워 버리며 뻗어 있는 것은 뚜렷이 볼 수가 있었다.
세스나 경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자 눈높이가 잘 맞았다. 나스카에 도착했을 때 건물 벽에 축소해서 그려 놓았던 거미, 원숭이, 벌새, 콘도르, 개, 나무 등이 무지막지한 크기로 평원에 그려져 있었다. 누가 왜 저런 것들을 그려 놓았을까? 30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거리가 만들어 준 무의미의 의미를 읽으며 그린 자들의 마음을 엿보려 했다.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나스카의 지상화들을 포함한 그 지역의 문화를 나스카 문화라고 한다. 나스카 문화를 관광한다는 것은 피라미드와 호텔이 공존하는 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나스카 라인들을 관람하기 때문에 2000년의 시간을 동시에 관광하는 것이다. 2000년의 시간에 펼쳐진 인류문명의 또 다른 나스카 라인들이었다.
호텔 로비로 나가 K와 M은 맥주 한 병씩을 들고 마주 앉았다. 아직도 세스나 경비행기에서 지상화를 내려다본 생생한 모습이 아른거렸다.
‘18년 전의 뜨거웠던 우리의 감정은 단 18년의 풍상에도 싸늘하게 식어 버리고 마치 남의 일기장의 기록처럼 읽기조차 어려운데 나스카 라인은 2000년의 풍상을 견디고도 저렇게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인간의 마음이 나스카 대평원보다 그만큼 더 거칠고 변화가 심한 곳임을 말하고 있겠지.’
라고 생각하며 머나먼 타국의 연말 분위기에 기대어 새로운 감정으로 건배했다.
“여성이 혼자 여행하기에는 너무나 멀고 험한 곳이었는데 그만한 용기를 낼 만했던가요?”
M도 기왕에 아마존까지는 왔기 때문에 용기를 냈지만 서울에서라면 가정주부가 엄두를 낼 수 있는 여행이 아니었다.
“미스터리를 보러 왔는데 그걸 봤으면 됐잖아요? K-PD님은 이끌어야 할 팀도 버리고 도망치듯 빠져 나올 만큼 가치가 있었나요?”
미스터리들은 대부분은 과학의 칼날에 해체되고 말았으나 나스카 지상화들은 과학의 칼날에도 잘 견뎠기 때문에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하하, 혼자 빠져 나오다니요? 그러면 페루를 여행할 사람들을 공모라도 해야만 했을까요?”
“그건 그렇고, 뭘 봤어요? 원숭이? 거미……?”
“세상을 봤어요. 지금 여기가 세상의 일부가 아닌가?”
나스카 라인은 너무 커서 지상에서는 그 무엇의 일부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지상을 벗어나 하늘에 올라가야만 한다. 세상도 그렇다. 지금 여기는 볼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일부에 불과하다. 또 우주는 물론 은하계 태양계 심지어 지구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온전히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곳까지 나가 보지 않았다. K-PD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도 지금 여기가 아니라 그때 거기를 찍어야 의미 있는 그림이 나올 것 같다고 했다.
“사실 전망대에서 보았을 때는 실망했어요. 그러나 비행기에서 내려다보고는 전율을 느꼈죠. 그 그림들을 그린 자들과의 소통의 눈높이가 거기란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어요. 그 높이에서 대화 상대라면 그건 신들이 아닐까요? 또 다른 높이에 가면 45억 년의 지구의 역사에 숨겨진 또 다른 나스카 라인들은 없을까요?”
“나스카 라인들이 신들의 언어라고? 비행술이 신이 될 수 있는 조건? 그렇다면 인류는 지금 신이 되고 있는 중인가요? 하기야 인간은 신을 모상으로 빚어졌고 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종교도 있잖아요? 지나친 비약인가?”
“나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신까지는 모르지만,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알고 싶었어요. 내가 잘 아는 사람이 나를 놀라게 하거나 실망시킬 때가 자주 있었거든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물론 내가 사람을 잘 못 본 것이었겠지만.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M일 겁니다.”
“내가 왜?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나스카 라인이 될 수 있겠지요. 부분을 보고 전체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으니. K형도 나에겐 나스카 라인이걸랑요. 오늘만 해도 그렇죠. 한 작품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음 작품을 생각하고. 저런 발상을 어떻게 할까 싶을 정도로. 그건 내가 알고 있는 만만한 K형이 결코 아니거든요.”
“그거야 살기 위한 몸부림이죠. 재주도 없는 놈이 주어진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열정과 노력 말고 뭐가 더 있겠어요?”
M은 K를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무엇인가 작심한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꼭 한 번 물어 보고 싶었는데, 입대하고 제대할 때까지 왜 단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았죠?”
“그것은 내가 물어 보고 싶었던 겁니다. 사실 많이 기다렸었는데.”
“기다려요, 뭘? 내가 전화하기를? 병영생활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그것도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철부지 여학생이?”
K는 천장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우린 둘 다 전화할 용기는 없었고 기다리는 인내심만 있었나? 뭐야! 우리는 서로를 짝사랑하면서도 스치며 지나다녔다고? 왜? 나도 꼭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 M-PD님이 자연다큐 제작팀에 합류한 후로 나를 도왔습니까 아니면 방해했습니까?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면 내가 범할 뻔했던 결정적인 실수를 막아 준 것도 M-PD님이고, 또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딴죽을 걸어 짜증나게 했던 것도 M-PD님이었거던요.”
“하 하 내가 그랬던가요? 나는 그저 생긴 대로 굴었을 뿐인데……. 나도 잘 모르는 실체도 없는 배신감 같은 것을 느꼈나? 예를 들면 짝사랑의 배신감 같은 거? 그거라면 그걸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나?”
“그거면 충분하지요. 그것도 나스카 라인이 준 교훈인가? 그때는 몰랐겠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이해가 되는 것이.”
K자신도 그동안 M을 겉으로는 무심한 척 대했지만 미묘한 감정을 한 자락 깔았었다. 그 이유가 짝사랑의 배신에 대한 보복인 것 같았다.
“역사도 나스카 라인일 거예요. 현재는 전체의 일부를 가지고 아전인수로 호들갑을 떨지만 훗날 한 시대를 가늠할 수 있는 시점이 되면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할 수 있겠지요.”
그들은 서로에게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돋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조국의 통일은 어때요? 갈라진 지 칠십 년이 넘었으니 시간적으로 조망이 가능할 만큼 흘렀고 또 공간적으로도 지구의 반대편이니 충분하지 않나?”
“가능성을 묻는 거요, 아니면 필요성을 묻는 거요?”
“당연히 필요성을 묻는 거지.”
“어떤 전직 대통령도 ‘통일은 대박’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것은 민족의 숙원이니까. 나도 동의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뇌 없는 의견일치가 아닌가? 인접한 강대국의 침략으로 망족의 위기에 내몰린 때가 통일국가였을 때란 것을 알아야지. 원의 침략은 고려 때였고, 병자호란이나 임진왜란은 조선이었잖아? 삼국으로 갈라졌을 때는 고구려가 중국대륙을 넘보았고, 남북으로 갈라진 지금은 북은 핵 보유로 유명하고 남은 경제대국으로 대접받고 있잖아? 남북통일은 대박이라고?”
“그러네. 왜 그렇지?”
“그야 덩치로 싸우는 것보다는 쪽수로 싸우는 것이 유리할 뿐만 아니라 또 저들끼리 스파링 파트너로 아옹다옹하면서 실력을 길렀기 때문이겠지.”
역사를 돌아보면 한민족韓民族은 두 조각이든 세 조각이든 갈라졌을 때가 살 만하지 한반도에 3국의 역동성이 남아 있었던 통일신라를 제외하고 통일국가였던 고려와 조선의 역사란 나스카 라인을 지금 돌아보면 외침으로 민족의 존망이 우려되었던 비극도 이 시기였던 것이 우연이었을까? 상대할 수 있는 스파링 파트너도 없는 큰 덩치의 대국들 사이에 끼어 있는 한민족은 서로 갈라져 피 터지게 경쟁하며 힘을 길러야 보다 효과적인 생존의 그림이 되는 것은 아닌지?
“나는 통일을 대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국도 일본도 덩치로는 안 되니 쪽수로 상대하기 위해 분단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 지난 이야기를 길게 할 필요는 없겠죠? 다음 스케줄은 어떻게 됩니까?”
“귀국해야죠. 딸도 보고 싶고, 남편도 빨리 오라고 재촉이니. K-PD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나는 마추픽추까지 가 볼까 했는데, 동행이 있다가 갑자기 혼자가 될 자신이 없네요. 나도 그냥 귀국해야겠죠.”
익숙한 소리와 진동 때문에 죽음 같은 잠에서 깨어났다. 아마존에서 오는 길인지 아니면 나스카에서 오는 길인지가 헷갈렸다.
‘현실과 꿈이 헷갈리네. 꿈이 현실이야 현실이 꿈이야? 그건 누가 알지?’
옆 좌석에서 M-PD도 막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나스카 라인이란 말 들어 보았어요?”
K-PD는 너무나 생생한 꿈을 함께 꾸지 않았을까 해서 물어 보았다.
“책에서 읽어 보긴 했어요.”
연말의 인천은 추웠다. 설령 그것이 종말의 길을 밝히는 불빛일지라도 문명의 야경은 매혹적이었다. 인천공항에서 M-PD와는 해어졌다. 머나먼 타국에서 가족 이상으로 가까웠던 동지애도 낯익은 서울의 불빛에 희석되었다. 집에 와서 샤워를 하고 보송보송한 잠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눕자 원시정글에서 문명까지의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실감할 수가 있었다. 원시인들이 극한의 고통에서만 체험했을지도 모르는 낙원을 현실에 옮겨 놓은 것이 문명이 아닐까? 죽음 같은 잠에 빠져들었다.
노크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K-PD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무슨 잠을 그렇게 자나? 벌써 열두 시가 넘었네! P씨가 두 번이나 전화했어요, 휴대전화를 안 받으니까.”
아내 L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못마땅하다는 듯이 투덜댔다. 어젯밤 9시부터 15시간을 잤다. 정글에서 겪었던 불면의 고통이 말끔히 사라진 것 같았다.
“커피나 한잔 줘요, 지금 곧 나가 봐야겠어. 오늘 그 친구를 만나기로 했거든, 좀 늦었네.”
“오래만이다. 왜 갑자기 포기한다는 거야?”
K-PD는 서울의 북촌 뒷골목 허름한 찻집에서 친구 P를 만났다. 고등학교 때부터 단짝친구로 P는 같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계속 낙방하자 실망하여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린 적도 있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니까 의욕이 사라졌어. 자신도 없고.”
“그럼 이제 뭐 할 거니? 경복궁 대들보를 꿈꾸던 놈이 성황당 문설주가 될 수는 없을 것 아니야?”
“문지방이면 어떠냐? 우선 먹고살아야 하니까 다 내려놓고 아버지가 사시던 집을 카페로 개조하고 좋아하는 그림이나 그리며 살아 볼까 해.”
P의 아버지는 북촌의 어떤 샛길에 자리한 허름한 2층집에서 평생을 사셨다. P는 1층을 찻집으로 꾸미고 2층을 화실 겸 생활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 카페 이름은 ‘나스카 라인’으로 하자. 좀 더 넓고 길게 보며 살자는 뜻으로. 나스카 라인은 땅에서 보면 직선이나 곡선의 일부에 지나지 않잖아? 하늘에서 보아야 전체의 윤곽을 볼 수 있다고. 나스카 라인을 축도한 그림을 줄 테니까 그것을 좀 더 확대해서 벽과 천장을 장식하라고. 바닥도 그걸 그리는 게 좋겠어. 비용은 내가 줄게.”
“고마워! 너 많이 컸다. 발상이 마음에 들어. 하기야 다큐의 거장이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니겠지. 그만한 내공은 있어야…….”
박태호 | 2023년 『문예바다』 신인상 소설 당선. 저서 장편소설 『시간의 창-천부경의 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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