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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3장 14-21절. 바울의 기도와 찬양
14절.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this reason I bow my knees before the Father,
Τούτου χάριν κάμπτω τὰ γόνατά μου πρὸς τὸν Πατέρα,
of this for reason I bow down the knees of me before the Father
직역하면 ‘이러므로 아버지 앞에 내가 나의 무릎을 꿇고 있다’는 뜻입니다.
‘무릎을 꿇고 있다’(κάμπτω)는 현재형입니다(I bow down).
15절.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rom whom every family in heaven and on earth derives its name,
ἐξ οὗ πᾶσα πατριὰ ἐν οὐρανοῖς καὶ ἐπὶ γῆς ὀνομάζεται,
from whom every family in heaven and on earth is named
직역하면 ‘하늘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그에게서 이름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름을 주신’(ὀνομάζεται)은 현재 수동태로서(is named) 이름을 받고 있다는 뜻인데, 한글 성경은 능동태로 잘 번역했습니다.
1.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바울은 에베소서 1장 16-19절에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을 알게 해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성도들의 속 사람이 강건하게 해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각 족속’(πᾶσα πατριὰ: every family)에서 ‘족속’이란 단어(πατριὰ)는 원래 ‘아버지’(πατήρ)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한 아버지가 다스리는 가족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란 야곱이 열 두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이루어진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나 땅에 있는 모든 족속에게 이름을 지어주시고, 통치하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저의 집안에서는 제 부친께서 저희들이나 조카들이나 사촌들 이름을 모두 지어주셨습니다.
이처럼 옛날에는 그 집안의 최고 어른이 아이들 이름을 지어주시고 통치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하늘의 천사들을 통치하시고, 지상의 인류도 통치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인류를 다스리시고, 모든 인류를 먹여 살리시고, 모든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아테네 전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17:24-28.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이름을 아시고, 그 사정도 아신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40:26-27.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2. 그런데 바울 사도는 온 인류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사랑이 풍성하셔서 사랑하는 자녀가 기도할 때, 좋은 것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9-11.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특히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기도할 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그래서 바울 사도는 무릎 꿇고 기도하기를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속사람을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주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16절)
3. 무릎을 꿇고 비노니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서서 기도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8:11-13.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물론 에스라는 엎드려 통회 자복하는 기도를 했습니다(에스라 10:1).
그런데 간절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41-42.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바울 사도도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작별기도를 할 때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 20:36-38.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구약에서 솔로몬도 성전 봉헌 기도를 할 때,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열왕기상 8:54. 솔로몬이 무릎을 꿇고 손을 펴서 하늘을 향하여 이 기도와 간구로 여호와께 아뢰기를 마치고 여호와의 제단 앞에서 일어나
다니엘도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면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다니엘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4. 그러나 오늘날은 의자에 앉아서 기도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서서 기도하거나 앉아서 기도하거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거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마음을 쏟아부어서 정성으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얼마나 마음을 기울여서 간절히 기도했던지,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속으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상 1:12-13.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한 것처럼, 성도님들도 자녀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들에게 성령님과 모든 복을 풍성히 주셔서, 복된 성도님들과 가정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6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at He would grant you, according to the riches of His glory, to be strengthened with power through His Spirit in the inner man,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하시오며
ἵνα δῷ ὑμῖν κατὰ τὸ πλοῦτος τῆς δόξης αὐτοῦ
that He might give you according to the riches of the glory of Him
‘하시오며’(δῷ)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이고(He might give) 원형(δίδωμι)은 ‘주다’(give)는 뜻입니다.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δυνάμει κραταιωθῆναι διὰ τοῦ Πνεύματος αὐτοῦ εἰς τὸν ἔσω ἄνθρωπον,
with power to be strengthened through the Spirit of Him into the inner man,
‘강건하게’(κραταιωθῆν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수동태 동사로서(to be strengthened) 정말 확실히 강건하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1. ‘그 영광의 풍성’이란 하나님의 영광이 풍성함을 가리키는데, 무한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성령을 통해서 성도들의 속사람에 임재하셔서 성도들의 속 사람이 강건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과 성도의 속 사람과의 연결고리는 성령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속 사람을’(εἰς τὸν ἔσω ἄνθρωπον)이란 ‘속 사람에게로’(into the inner man)란 뜻으로서 성령의 능력이 속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속 사람’(ὁ ἔσω ἄνθρωπον)이란 ‘겉 사람’(ὁ ἔξω ἄνθρωπος: 고린도후서 4:16)과 대조되는 것으로서, 겉 사람은 육적인 본능의 사람, 속 사람은 영적인 자아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속 사람’은 거듭나서 ‘새사람’(ὁ καινὸς ἄνθρωπος)이 되어야 하고(에베소서 4:24),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풍성한 영광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 22절에서 “내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보통 일반인들은 육적인 겉 사람을 아름답고 건강하게 가꾸려고 노력하는데, 바울은 속 사람이 강건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가 성도들의 속사람이 강건해지도록 기도한 이유는 첫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에베소서 4:12)
둘째로 속 사람이 강건해지도록 기도한 이유는 간사한 이단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에베소서 4:14).
셋째 속 사람이 강건해지도록 기도한 이유는 마귀의 간계를 대적하기 위해서입니다(에베소서 6:10-12).
2. 이처럼 우리는 교회를 잘 섬기고, 이단과 마귀를 물리쳐 이기기 위해서 속 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겉 사람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즉 겉 사람의 건강과 필요한 물질과 자식이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6:33).
즉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복음 전도를 위해서 기도하고, 마귀 대적 문제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러기 위해서 건강과 물질을 주시고, 자녀들이 잘되도록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3. 불신자들은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를 따라 살고 있습니다.
예컨대,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세상 풍조이고 미풍양속이라고 주장하면서 귀신 섬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중 제사하는 사람들은 제사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죽이려고 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음란한 풍속을 ‘문화’라는 말로 미화시켜서 마귀를 따르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상숭배하는 타종교와 이단들도 기독교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풍조와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4.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받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말씀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은혜가 목마르거든 예수님께로 와서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영혼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55:1-3.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서 날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또한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5.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주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영광’의 ‘풍성’(πλοῦτο)이란 충만한 정도가 아니라 흘러넘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풍성하신 능력과 은혜를 얼마든지 공급해주신다는 뜻입니다.
마치 태양에서 빛과 에너지가 무한히 지구로 흘러들어와 모든 생물을 살리는 것처럼, 성도들이 기도하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속 사람을 강건하게 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 능력과 지혜를 주시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속사람이 강건하여, 복음 전도를 하시고, 마귀를 이기시고 큰 복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17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New American Standard Bible: so that Christ may dwell in your hearts through faith; and that you,in love,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κατοικῆσαι τὸν Χριστὸν διὰ τῆς πίστεως ἐν ταῖς καρδίαις ὑμῶν,
to dwell the Christ through the faith in the hearts of you
‘계시게 하옵시고’(κατοικῆσ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dwell) 확실하게 계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ἐν ἀγάπῃ ἐρριζωμένοι καὶ τεθεμελιωμένοι,
in love having been rooted and having been grounded
‘뿌리가 박히고’(ἐρριζωμένοι)는 완료분사 수동태이고(having been rooted), ‘터가 굳어져서’(τεθεμελιωμένοι)도 완료분사 수동태로서(having been grounded) 완전히 뿌리가 박히고 완전히 터가 굳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1. 두 번째 기도의 제목은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마음에 내재하시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성도들의 안에 계실 것을 말씀하셨고(요한복음 14:20), 성령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에 내재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4:17).
‘계시게’(κατοικέω)란 단어는 ‘거주하는 것’(dwell, inhabit, settle)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는 방법은 ‘믿음으로’(διὰ τῆς πίστεως, through the faith)입니다.
즉 믿음이란 문밖에서 두드리시는 그리스도를 마음 문을 열어 맞아들이는 것입니다(요한계시록 3:20).
2.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장소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마음’(καρδία)이란 ‘마음, 내적 자아, 성격, 의지, 중심’ heart, mind, inner self, character, will, center)을 가리킵니다.
즉 ‘마음’이란 내적 자아와 인격의 중심을 가리키며, 속사람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격의 중심에 계셔서, 우리의 언행심사가 성령님의 지도와 인도를 받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현저히 통치하시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즉 말할 때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고, 봉사할 때도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베드로전서 4:11. 누가 무슨 말을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즉 날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요셉은 항상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했을 때도, 즉각적으로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일이라고 단호히 거절했습니다(창세기 39:9).
3. 본절에는 세 가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② 너희가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③ 터가 굳어져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믿음’이란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즉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을 마음속에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손님을 집 안에 영접해서 함께 먹고 마시며 살 듯이, 예수 믿는 것도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모셔들여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예수님과 함께 살지 못하고 나 혼자서 살 때가 많습니다.
즉 교회에 왔을 때는 예수님을 찾지만, 막상 장사를 하거나,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내 마음대로 내 성질대로 살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마다 일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란 말씀은 ‘성령님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란 말씀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바로 예수님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9-11.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처럼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을 마음속에 모셔들이면, 우리는 성령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3:16).
우리는 항상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귀신을 제압할 수 있고(사도행전 13:6-12), 갑작스러운 마귀의 시험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창세기 39:9).
4.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뿌리가 박힌다’는 것은 농사의 비유인데, 우리 성도들은 나무나 식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즉 나무가 뿌리를 땅에 깊이 박듯이,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믿음의 뿌리를 깊이 박고, 나무가 열매를 맺듯이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떠나서는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은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살면, 예수님이 주시는 그 사랑으로 우리도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4-9.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5. 터가 굳어져서
‘터가 굳어진다’는 단어(θεμελιόω)는 ‘기초를 놓는다, 터를 놓는다’( found, lay the foundation)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7장 25절에는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for it was founded upon a rock)라고 했으며, 골로새서 1장 23절에는 ‘믿음에 거하고 터위에 굳게 서서’(in the faith firmly established and steadfast)라고 했고, 베드로전서 5장 10절에는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may he establish may he strengthen may he ground you)고 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항상 마음에 모시고 살아서, 우리의 믿음이 굳건해지기를 기도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항상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모시고 살아서,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굳건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승리의 삶을 사시고, 복된 생활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8절.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may be able to comprehend with all the saints what is the breadth and length and height and depth,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ἵνα ἐξισχύσητε καταλαβέσθαι σὺν πᾶσιν τοῖς ἁγίοις τί τὸ πλάτος καὶ μῆκος καὶ ὕψος καὶ βάθος,
so that you may be fully able to comprehend with all the saints what (is) the breadth and length and height and depth,
직역하면 ‘모든 성도와 함께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너희가 완전히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한다)’이란 뜻입니다.
한글 성경은 19절과 함께 혼합해서 번역했습니다.
‘너희가 완전히 깨달을 수 있도록’(ἐξισχύσητε καταλαβέσθαι)에서 앞의 단어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이고(you may be fully able), 뒤의 동사(καταλαβέσθ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입니다. (to comprehend)
앞의 동사의 원형( ἐξισχύω)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 완전히 가능하다’( have strength for a difficult task, am perfectly able)는 뜻이고, 뒤의 동사의 원형( καταλαμβάνω)은 원래 ‘꽉 붙잡다, 체포하다’(seize tight hold of, arrest, catch)란 뜻인데, 부정과거로서 ‘파악했다, 이해했다’(perceived, comprehended)는 뜻으로 쓰입니다.
1.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란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가리킵니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넘치는 사랑을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 내재하시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이고 인격적이고 체험적으로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와 도덕적인 완전성과 완전한 지식과 풍성한 성령의 은혜를 그리스도의 임재로 성도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2.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는 무한히 넓어서 그 대상에 제한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세리도, 창녀도, 남자와 여자도, 아이들도, 귀신 들린 사람도, 십자가를 진 강도도, 종도, 자유인도, 헬라인도 야만인도 모두 사랑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길이는 영원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높이는 우리를 지옥에 가지 않게 하신 정도만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앉혀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는 지옥에 갈 죄인을 구원하신 그 깊으신 사랑이십니다.
이 그리스도의 사랑은 지식에 넘치고 지식을 초월하고 상상을 초월한 큰 사랑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했습니다(베드로후서 3:18).
그 정도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데까지(εἰς πᾶν τὸ πλήρωμα τοῦ Θεοῦ: to all the fullness of God) 자라가라는 뜻입니다.
3. ‘능히’란 ‘능력을 갖게 해주셔서’(NIV: may have power)란 뜻입니다.
즉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능력을 주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는 알 수 없고, 성령님께서 능력을 주셔야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즉 지혜를 추구하는 헬라인이 생각할 때는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이 미련한 것이고, 표적을 추구하는 유대인이 생각할 때는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은 무능하고 꺼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입니다.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고( Cur Deus Homo),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죄수로 죽어야 했습니까?
이것은 세상 기준으로는 대단히 미련하고 바보 같은 일이 아닙니까?
왜 예수님은 죄 없이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매를 맞고, 피를 흘리고, 십자가에서 부끄러운 죽음을 죽어야 했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 죄인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과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이 거기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
요한일서 4;9-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4. ‘모든 성도와 함께’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영지주의자와 같은 일부 성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깨달아 알아야 하는 보편적인 목표란 뜻입니다.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실천함으로써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성도들이 그리스도께 받은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요한일서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요한이서 1: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에베소서 4:2.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골로새서 3:13.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로마서 15:7.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5.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적 지식으로는 도저히 다 알 수 없는 초월적인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2: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린도전서 13:8-10.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이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은 크고 놀랍고 영원한 것입니다.
로마서 8: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인간의 지식의 한계를 초월한 놀라운 사랑이지만, 바울 사도는 성도들이 이 사랑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컨대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서 흘린 눈물은 시험관에서 분석을 해가지고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이 어머니의 눈물은 자신이 어머니가 되어서 자식을 길러보면서 눈물을 흘려야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사랑도 내가 예수님처럼 가족과 성도와 이웃을 위해서 희생과 봉사를 해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주일학교 교사를 해보고, 찬양대를 해보고, 구역에서 구역장으로 일해보고, 식당 봉사를 해보고, 심방하면서 기도해보고, 전도도 해보아야 그리스도의 사랑을 점점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욱 큰 은혜를 체험하고, 더 큰 주의 사랑을 체험하기 위해서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해서 내 몸에 채운다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19절.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to know the love of Christ which surpasses knowledge, that you may be filled up to all the fullness of God.
γνῶναί τε τὴν ὑπερβάλλουσαν τῆς γνώσεως ἀγάπην τοῦ Χριστοῦ,
to know then the surpassing of the knowledge love of the Christ
직역하면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도록’이란 뜻입니다.
한글성경에는 앞절에 번역되어 있습니다.
‘알도록’이 구문상으로는 앞구절 첫 동사(ἐξισχύσητε: you may be fully able, 한역에는 ‘능히 알도록’)과 연결됩니다.
‘알도록’(γνῶναί)은 부정과거 부정사형으로서(to know) 확실히 아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ἵνα πληρωθῆτε εἰς πᾶν τὸ πλήρωμα τοῦ Θεοῦ.
so that you may be filled unto all the fullness of God.
직역하면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너희가 가득해지기를’이란 뜻입니다.
‘너희가 가득해지기를’(πληρωθῆτε)은 부정과거 가정법 수동태 동사로서(you may be filled) 확실하게 가득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1.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는 십자가에서 양팔을 벌리고 죽기까지 하신 사랑을 가리킵니다.
부모님은 자식을 사랑하여 혹 죽기도 하지만, 예수님은 원수 같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한 그 넓은 사랑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용서하고 품에 안아준 아버지의 사랑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9장에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 되신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7장에는 죄 많은 여인을 용서하고 구원해준 예수님의 사랑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혀 와서 죽게 된 여인을 용서하고 살려주신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런 예수님은 자신을 욕하고 때리고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21장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를 용서하고 다시 사명을 주신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때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죄를 깨닫고 어찌할꼬 통회자복 할 때 용서하시고 성령을 주신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의 넓이는 무한하십니다. 할렐루야!
2. 예수님의 사랑의 길이는 영원합니다.
인간의 사랑이란 한동안 목숨을 바칠 것 같지만, 서로 이혼하고 원수가 된 그런 길이가 짧은 사랑입니다.
심지어 부부로 살던 사람도 원수가 되고 살인까지 하는 것을 봅니다.
보통 인간의 사랑은 호르몬 분비가 되는 3년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의 길이는 영원합니다.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하나님 크신 사랑 측량 다 못하네, 영원히 변히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3. 예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는 천국만큼 높고, 지옥만큼 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천국 보좌를 내 놓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지옥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3: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영문 사도신경: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갔다가, 죽음에서 부활하여 하늘에 올라가신 것을 믿습니다( he descended into hell, and raised up again from the dead, and ascended into heaven).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가 연약할수록 더욱 사랑하시는 깊은 사랑이십니다.
찬송가 563장. 3절.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자를 보시네. 날 사랑하신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셨네.
4.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이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지혜가 충만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충만하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채워져 있었습니다.
골로새서 1: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충만’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라고도 했습니다.
에베소서 4:13.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래서 예수님을 보는 것은 곧 하나님 아버지를 보는 것과 동일하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8-11.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이런 하나님의 충만이 예수님 안에 거하셨고, 우리도 성령으로 거듭날 때 충만해졌습니다.
골로새서 1:9-10.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5. 그런데 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채워지기를 기도했습니다. (본 절)
처음 예수 믿고 중생할 때 일단 성령으로 충만해진 것을 경험한 성도들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 성령 충만해져 가야 합니다.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처음 예수 믿을 때 성령으로 충만했던 성도들도 살아가면서, 대부분 성령 충만을 잃어버리고, 성령 충만을 갈망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처음 중생할 때 같은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받고, 봉사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이미’와 ‘아직’의 구도>(‘already and yet not’ system)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구원파에서는 이미 구원받은 성도는 다시 성령충만을 위해서 기도할 필요가 없고, 죄를 회개할 필요도 없다고 잘못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가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아가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늘 성령 충만하시고, 주님의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0절.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ow to Him who is able to do far more abundantly beyond all that we ask or think, according to the power that works within us,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Τῷ δὲ δυναμένῳ ὑπὲρ πάντα ποιῆσαι ὑπερεκπερισσοῦ ὧν αἰτούμεθα ἢ νοοῦμεν
to the (One) now being able above all things to do exceedingly that we ask or think
‘우리가 구하거나’(αἰτούμεθα)는 현재형이고(we ask), ‘생각하는’(νοοῦμεν)도 현재형입니다(think).
‘하실’(ποιῆσαι)은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do) 단호하게 행하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능히’(δυναμένῳ)는 현재분사로서(being able) ‘가능하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κατὰ τὴν δύναμιν τὴν ἐνεργουμένην ἐν ἡμῖν,
according to the power that working in us,
‘역사하시는’(ἐνεργουμένην)은 현재분사입니다( working).
1.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 이상으로 주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그 대상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사람들과 달리 구하는 것 이상으로 좋은 것을 풍성히 주시는 분이십니다.
바울 사도는 앞에서 세 가지를 기도했습니다.
첫째는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것이고,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마음에 계시도록 하는 것이고, 셋째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깊이 뿌리 박고, 이 사랑이라는 터 위에 굳건하게 서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인 기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에 대해서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더욱 넘치도록 주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2.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바울 사도는 성령님께서 우리 성도들 가운데 능력으로 역사하고 계심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희 가운데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또한 너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3:5.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리운 자니라.
그래서 성도의 몸은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령의 전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6:19).
2. 그래서 바울은 사람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을 알아보겠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4:19-20.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바울 사도는 가는 곳마다 성령님의 능력을 행했습니다.
심지어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는 바울의 앞치마나 손수건을 병든 자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가고 악귀도 나갔습니다. (사도행전 19:12)
그래서 에베소 교인들은 ‘우리에게 역사하는 능력대로’라는 바울 사도의 말을 실감있게 이해했습니다.
스룹바벨 성전을 건축할 때는 사람의 힘이나 능력으로 되지 않는 것도 성령님의 능력으로 된다고 하셨습니다.
스가랴 4: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그리고 이 능력이 믿는 자 가운데 역사한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 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바울 사도는 자기 속에서 역사하시는 그 분의 역사를 따라 자기도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29).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면, 그 말씀이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한다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
3.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넘치게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넘치게 주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나 골로새 교회보다 빌립보 교회나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5장 10절에서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권면했습니다.
또한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8:8).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더욱 힘쓰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좋기로 소문난 교회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2-3.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빌립보 교회도 선교 헌금을 열심히 드려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빌립보서 4: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와 빌립보 교회는 에베소 교회에 비해서 작은 교회였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두 교회에 대해서 <나의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9-20.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빌립보서 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이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구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6:33)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 풍성한 대로 모든 쓸 것을 주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4:18-19.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늘 기도하여 성령의 능력 받고 말씀의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의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풍성하게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21절.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o Him be the glory in the church and in Christ Jesus to all generations forever and ever. Amen.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αὐτῷ ἡ δόξα ἐν τῇ ἐκκλησίᾳ καὶ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εἰς πάσας τὰς γενεὰς τοῦ αἰῶνος τῶν αἰώνων· ἀμήν.
to Him (be) the the glory in the church and in Christ Jesus to all the generations of the age of the ages. Amen.
직역하면 ‘교회 안과 그리스도 안에서 그 영광이 세대들의 모든 세대들까지 그에게 (있을찌어다)’란 뜻입니다.
1. 20절은 하나님의 영광의 질적인 무한성을 가리키고, 21절은 하나님의 영광의 시간적인 무한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은 질적으로 무한하시지만, 시간적으로도 영원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 세계에 나타나곤 했습니다.
즉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십계명의 돌판을 받아올 때, 시내산에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가득했습니다.
출애굽기 24:16-18.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모세는 구름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모세가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길을 걸을 때도 성막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영광이 가득했습니다.
출애굽기 40:34-38.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했을 때도,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했습니다.
역대하 5:14. 제사장들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이사야도 이상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엎드렸습니다. (이사야 6:1-5, 이사야 6:6-9).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장차 성도들은 천국에서 하나님의 영광 아래서 살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23-24.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2.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광야 이스라엘 백성 중에 임재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 안에 임재하십니다.
교인이라면 누구나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만의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한 곳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엎드렸지만, 고라당은 대적하다가 멸망을 당했습니다.
민수기 163:19-21. 고라가 온 회중을 회막 문에 모아 놓고 그 두 사람을 대적하려 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회중에게 나타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 그 두 사람이 엎드려 이르되 하나님이여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여 한 사람이 범죄하였거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와 갈렙을 죽이려고 했을 때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민수기 14:10.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데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아론을 돌로 치려고 했을 때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민수기 16:41-45)
스데반은 순교를 당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도행전 7:55-56.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한 곳임을 알고, 싸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에베소서 1:5-6.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베드로전서 4:12-14.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베드로전서 5:10)
요한계시록 21:22-24. 성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 생활 하실 때, 육신의 눈으로 사람만 보지 마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심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려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