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雪신설 / 김현승(1913-1975)
시인들이 노래한 일월의 어느 언어보다도
영하 5도가 더 차고 깨끗하다.
메아리도 한 마정이나 더 멀리 흐르는 듯......
정월의 썰매들이여,
감초인 마음들을 미지의 산란한 언어들을
가장 선명한 음향으로 번역하여주는
출발의 긴 기적들이여,
잠든 삼림들을
이 맑은 공기 속에 더욱 빨리 일깨우라!
무엇이 슬프랴,
무엇이 황량하랴,
역사들 썩어 가슴에 흙을 쌓으면
희망은 묻혀 새로운 종자가 되는
지금은 수목들의 체온도 뿌리에서 뿌리로 흐른다.
피로 멍든 땅,
상처 깊은 가슴들에
사랑과 눈물과 스미는 햇빛으로 덮은
너의 하얀 축복의 손이 걷히는 날
우리들의 산하여,
더 푸르고 더욱 요원하라!
기독교 윤리의식과 우리의 선비 정신이 함께 녹아있는 정신주의를 구현한 시인이 김현승이다. 유난히 커피를 좋아해서 호를 ‘다형茶兄’이라 하였고, 등단이나 추천 제도를 거치지 않고 문단에 나온 고독의 시인이다. 『견고한 고독』이나 『절대 고독』을 통한 고독은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홀로 맞서, 시대를 거부하는 내면의 의지가 강하게 표출되고 있는 인간에 대한 깊은 탐구로 나타난다.
다형을 고독의 시인이라 함은 고독을 극복한 시인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신앙이 무엇인가 나는 아직 모른”(「슬픔」)다고 한 그가 신에 대한 회의와 비판을 통해 추구하던 고독의 가치에서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구원에의 노력을 구현해 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종교시와의 차별성이며, 인간적 삶에 그의 시가 기울어졌다는 사실이다.
“남쪽 십일월의 긴긴 밤을,//차 끓이며”(「무등茶」) 외로움에 젖은 시인에게 십이월은 “흐린 저녁 종점에서 만나는/그것은 겸허하고 서글픈 중년”(「十二月」)이었다. 어쩌면 십이월은 차보다 “술들이/갑절이나 많은”(「十二月」) 달이었다면 이제 일월은 ‘새로 내려 쌓인 눈’(「新雪」)으로 “어느 언어보다도” “더 차고 깨끗”한 눈 덮인 “산하”의 “잠든 삼림들을” 마주하고 있다.
십이월에 내리던 눈, 납설臘雪보다 더 차가운 新雪은 “메아리도 한 마정이나 더 멀리 흐르는”듯 하니 서둘러야 할 일이 있다. “출발의 긴 기적들”인 “정월의 썰매들” “감초인 마음들” “미지의 산란한 언어들”을 번역한 “가장 선명한 음향”인 新雪로 “일깨우라” 명명明命하고 있다.
새해 들어 푹푹 내린 눈 속으로 “역사들 썩어 가슴에 흙을 쌓으면” “희망은 묻혀 새로운 종자”가 되는 것이기에 “슬플” 것도 “황량”할 것도 없는 일월의 기적이 흐르리라 믿는다. 일월을 노래한 시인들의 언어보다 “더 차고 깨끗”한 언어로 메아리가 흐르리라 의심할 수 없는 지금은 “수목들의 체온도 뿌리에서 뿌리로” 흐르고 있는 계절이다. “피로 멍든 땅”과 “상처 깊은 가슴들”을 덮은 “하얀 축복의 손”인 눈이 녹아내리는 날 아득하게(“요원遙遠”) “산하”는 “푸르고” 더 푸르게 펼쳐질 것을 고대하고 있다.
그래서 일월의 눈은 삼월에 내리는 눈과는 다르다. 삼월에 내리는 눈은 한창 자라는 보리에 동해凍害를 입혀 죽이기 때문이다. 산하를 덮은 눈을 “하얀 축복의 손”으로 보는 시인의 통찰력이 눈부시다. 시인에게 新雪은 “사랑과 눈물과 스미는 햇빛”으로 덮을 수 있는 성질이 들어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성질을 가지고 한 해를 시작했는가! “번역”의 바람이 불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죽을 수 있는 “하얀 축복의 손”이어야 하는가!
차지만 맛은 달고 독이 없는 빙하수氷河水 같은 약수로 끓이는 찻물에 정신을 대고 하얗게 씻어〔雪〕내고 싶은 정월 초하루의 아침, 차 한 잔에 흔들리는 손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