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측으로 가는 임도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잡목을 헤치고 올라서니 당성 성곽이 보이고...성곽위로 오른다.
▲당성(唐城:사적 제217호: 화성시 마도면과 서신면, 송산면에 걸쳐있는 당성은 당항성으로도 불리는데 처음에는 백제의 영토였다가 고구려가 점령해 당성군이던 것을 다시 신라가 점령 하면서 당항성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곳은 서해바다를 건너 중국과 교류를 하던 출입지역으 로 군사적으로 보나 교역으로 보나 매우 중요한 요충지여서 이 구봉산 일대에 성을 쌓게 되 는데 그 성이 당성으로 마지막 쌓여진 시기는 통일신라 말기로 추정하고 있다. 또 그 유명한 원효대사의 해골바가지 물에 대한 일화의 진원지가 바로 이곳 당성이기도 하 다. 문무왕(文武王) 1년(661)에 의상대사와 원효대사는 도반으로 당나라로 유학을 가기위해 도착한 곳은 서해안 당주계(신라시대 지명에는 당항성, 당성)이며,그들은 배를 기다리다가 산중에 노숙하였다. 깊은 밤 목이 말랐던 원효대사는 머리맡에 바가지의 물을 마시게 되는 데 자고 일어나니 두 스님이 묵었던 동굴은 무덤 속이었고 간밤에 마셨던 물은 해골 바가지 에 고인 물이었다. 원효대사는 아침에 일어나 어제 저녁에 마신물이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 는 것을 알고 크게 깨달아 "심생즉종종법생 심멸즉종종법멸"(心卽種種法生 心滅卽種種法滅) 이라 간파하였다. 즉 "마음이 있어야 온갖 사물과 형상을 인식하게 되고 마음이 없으면 이 러한 것들도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며, 오직 내 마음 이외 무슨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깨달음을 얻고 당나라로 가지 않고 신 라로 되돌아와 무애행으로 불교 포교에 전념하였다. 큰 깨달음을 얻은 원효대사는 중국으로 가던 발길을 돌려 법상종을 일으키고 훗날 우리나라와 일본 불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 다고 한다.
▲<당성>자료집에는 신라의 문호 최치원(879~?)에 대한 이야기와 시도 한 수 적혀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한 수재였지만, 고국에 돌아와 봉사하려 했으나 현실은 따 돌림을 당했던 모양이다. 그는 여생을 전국을 유랑하며 살았는데, 그 유랑시기의 어느날 당 성에 왔다가 알고 지내던 악관(樂官)을 만난다. 그도 최치원처럼 따돌림을 당하다 당나라로 돌아가던 중이었고, 둘은 술자리를 벌였고, 악공이 두 어 곡을 연주하더니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슬피 울기 시작하였다.최치원은 그의 재주와 이런 인재가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버림 받는 현실이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담은 시를 지어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인생이란 성했다가도 쇠퇴하니덧 없는 인생이 참으로 서럽구나 글쎄, 저 천상의 곡을뉘 알았 으리, 이 해변에 와서 볼 줄이야물가 궁전(안압지?)에서 꽃을 보며 서늘한 난간에서 달을 보 며 불기도 했었지 선왕을 이제 뵈올 수 없으나 이 몸도 그대 더불어 눈물 줄줄 흘리네 (동문선권9, 오언율시)
▲당성 성곽 위에 올라서니 반듯하게 잘 정비된 잔디 임도가 있고 우측으로 간다.
▲북문지 표시판과 돌아보니 코스코 벨리 아파트가 보인다.
▲구봉산 갈림길 ; 어떤 이는 태행지맥 끝지점을 구봉산-봉화산-함경산 -송교리 살고지로 하기도 한다. 화성(태행)지맥을 걸으면서 가장 혼란스러운 갈림길이며 분란의 소지가 있는 곳이지만 딱히 어느 곳으로 가야만 맞다는 결론이 나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산행 고수들도 어떤 분들은 우측의 송산면으로 가서 승학산과 와룡산으로 가서 전곡항으로 가는 게 맞다고 주장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어떤 뷴들은 구봉산, 봉화산, 함경산을 거쳐서 살곶이 방향이 맞다고 하지만 정확히 규명은 안된다 흔히들 낙남정맥길에 용지봉에서 녹산수문으로 떨어지는게 맞느냐 아니면 신어산을 거쳐서 고암나루터로 가는게 맞느냐는 것과 또 하나 금남정맥이 702m봉에서 왕사봉, 천호산을 거 쳐 군산앞바다로 가는냐, 아니면 대둔산, 계룡산을 지나 부여 구드레 나루로 입수 하는게 맞느냐는 식인데 딱히 결론은 없다고 본다
▲구봉산 갈림봉 이정표. 쉼터의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좌측 왕복 약300m거리의 구봉산을 찍으러 좌측으로 간다.
▲당항성(黨項城)으로 오르는 길: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구봉산(九峰山) 위에 있는 삼국시대의 석축 산성으로, 당성(黨 城)이라고도 하며 둘레 1,200m로, 1971년에 사적 제217호로 지정되었다. 형태는 테뫼형(山 頂式)과 포곡형(包谷形)을 결합한 복합식으로, 현재 동문ㆍ남문ㆍ북문의 터와 우물터, 건물 지가 남아 있다. 원래 백제의 영역에 속하였던 지역인데,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한 뒤에, 백 제의 영향을 받아 복합형 산성으로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항성이 있는 지역은 지금은 화성시이지만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唐恩郡)이었다. 이곳은 신라가 황해를 통해 중국과 교통했던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자세한 내력이 기록되어 있 다. "고구려 영유왕 때 당나라로부터 8학사가 왔는데, 그 가운데 홍씨 성을 가진 학사가 이 곳에 살아서 당성후(唐城候)가 되고, 이후 당성 홍씨(나중에 南陽洪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또 "고려 초에 성을 쌓았는데, 조선 성종 때에 과수원으로 바뀌어 장원서(掌苑署) 관 할에 두었으나 이후에 과수원은 폐지되고 성도 거의 폐허로 변했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 다 구봉산 정상에 지금은 성지만 남아 있고 성내의 망해루도 초석만 남아 있다. 신라가 점유 한 후에는 중국 교역의 관문이었으며, 신라 말기에는 이곳에 당성진을 설치하여 강화의 혈 구진, 완도의 청해진과 더불어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중요시되었던 곳이다. 당성에서 바라본 송산면 사강리(沙江里)의 모습: 사강리는 예전에 바닷물이 주변까지 들어 와 모래가 많아서 붙혀진 지명이며 남양반도의 끝자락에 있는 사강리는 송산면, 서신면, 마 도면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남양부 망해루기: 당성인(唐城引) /문정공(文正公) 목은(牧隱) 이색(李穡) 지음 당성 해안은 화개와 같으니 포구는 이를 둘러 안팎으로 나뉘었네 영령이 모인 곳에 인물이 나고 곧고 웅위한 큰 인재 다 당대에 뛰어났네 덕산 촌 주는 강남에서 자라 요동에서 백모 쓰고 처음 가서 참여하였네 학야 에 양과 개가 가까이 하는 것을 혐오하네 해외에 삼신산을 찾고자 하며 배를 경랑에 뛰워 딴 세상을 만나니 두 눈을 움직이지 않은 채 나는 돋을 멈추고 해안에 내려 해를 점치고 세대를 점쳐보니 남마다 동방을 도와 천만년 길이 가리 신라 이래 우리 고려에 이르기 까지 예악과 시 서로 군자를 내었네 수재는 강도 말에 독보적인 존재여서 반란 기운 쓸어 없애 대궐 문을 열었네 기강이 다시 떨쳐도 벼슬을 사직하였고 쥐들이 다시 설치는 것을 따르는 자가 없었다 태사 가 탄생하사 왕실에 배필 되니 성자 신손 이 오늘에 이르렀네 아 덕산은 출중한 인물이어라 저절로 어울러져 좋은 일만 이루어 지고 푸른 솔 뜬구름은 젖은 듯이 푸르구나 내 일찍 말을 세워 멀리서 우러러 읍 했어 라 양파 선생은 어디에 계시는가 높은 위풍은 천년가도 미칠 자 없으니 뛰어남을 본받지 않는 것은 자손 없는 것과 같고 문하에 사람이 있으나 부질없이 눈물만 흘리네
▲구봉산에서 지나온 길을 되돌아간다.
▲구봉산(九峰山:158.6m): 화성시 마도면, 송산면, 서신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남양반도 중앙 부에서 서남쪽의 바다 방향으로 비스듬하고 길게 늘어서 있는데, 구봉산이란 산 이름도 길 게 늘어선 산줄기의 봉우리가 9개 데서 유래한다고 하며 삼국시대의 당성(唐城)을 품고 있 었으며 망해루지 추정 안내판이 서있고 준.희님의 산패가 걸려있다. 망해루지(望海樓址): 서해도서와 해안이 조망되는 당성의 가장 높은 지점인 구룡산 정상에 위치에있던 누각인 망해루(望海樓)가 있었던 옛 터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 이 지은 “남양부 망해루기(南陽府 望海樓記)”에 의하면 고려말 남양부사 정을경(鄭乙卿)이 고을의 치소에 외관을 웅장하게 하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세웠다고 기록 되어 있다...2001년 발굴 조사 결과,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사용 된 건물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계단및 담장지가 확인되었다. 확인된 장방형의 장축 11m, 단축 8m이며 조선시대 유물이 함께 출토되었다. 한편 유구 노출과정에서 인화문 토기류와 고식(古式)의 기와들이 확인되어 1차 성벽(석축성벽:통일신라)과 관련된 건물지가 중복되었 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구봉산에서 지나온 길을 되돌아간다.
▲다시 돌아온 구봉산 갈림봉. 구봉산을 찍고 내려와 육일리1.2km 방향으로 간다.
▲쉼터. 이곳에서 산책나온 70세된 여자 두분과 만나 20분간 이야기 나누고 휴식을 취한 후 산행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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