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단지맥 3구간(남한산성-은고개-용마산-검단산(657m)-현충탑)終.
☞산행일자 : 2024년 3월 9일(토요일)
☞ 참석인원 :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 : 남문(자하문)-△482.6m- 청량산(수어장대497.1m)-△남한산
(522m)-△303m봉-은고개(43번도로)-190.3m봉-제2중부고속도로지하통로-425.8m봉-△용마산(536m)-536m봉-두리봉(569m)-검단산(658.4m)-현충사
▲남한산성남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의 4개의 대문이 있는데 그중에서 남문이 가장 크고 웅장하여 실질적으로 남한산성의 정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지금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출 입하는 문이다서문은 서울 송파나루와 제일 가깝기는 하지만 길이 험하여 암문(暗門)의 성 격을 갖고 있다면남문은 주변이 평탄하여 지금도 성남에서 광주 은고개로 연결되는 도로가 지나간다. 병자호란 당시 무능한 인조 임금이 남문으로 들어와서 남한산성에서 45일을 버티 다가 치욕적인역사를 맛본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조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이 세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남문은 인조2년(1624)수축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정조3년(1779)에성곽 을 보수할 때, 개축하고 지화문(至和門)이라 하였다.1976년 문루(門樓)를 복원하였고, 2009 년에 정조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전면에 현판을 설치했다. 남문 우측에는 19세기 후반에 이폴리트 프랑뎅(Hippolyte Frandin)이 찍은 남문사진이 보인 다.프랑뎅은 1892년 4월 조선주재 제2대 프랑스 영사및 전권공사의 신분으로 조선에 들어 와1894년 2월 프랑스로 돌아갈 때 까지 외교관으로서 조선사람들을 만나고, 서울과 주변의 산하를 둘러 보면서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겼다 남한산성 홍예(虹霓)홍예란 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원형이 되게 만든 문으로 남한산성의 석축과방어시설의 대부분은 조선 후기의 숙종때에 완성되었는데 남문은 송파나루와 성남을통해서 남한산성으로 들어오는 정 문 역할을 하는 성문이지만 경사진 언덕에 위치하고있어서 당시 많이 구축하였던 옹성을 별 로 쌓지는 않고 있었다.성문은 조총 공격을 대비하여 철판으로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2012년 12월22일 사진임)
▲무망루 옆에는 커다란 나무 한그루가 있고 뾰족한 돌비석이 있는데 ‘리대통령 각하 행차 기 념식수’라는 글씨가 쓰여져 있고 뒷면에는 단기 4285년 9월 6일이 쓰여져 있는데 68년 전 인 1953년에 이승만 대통령이 식수(植樹)를 한 것으로 보인다. 무망루(無忘樓): 조선 영조 27년(1751년) 광주유수(廣州留守 이기진(李箕鎭)이 증축한 수어 장대 2층의 내편(內便)의 문루로서 그 편액(扁額)이 2층 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 고 이 안에 현판(懸板)을 세워 일반인들에게 볼 수 있게 하였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 가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귀국 후 북벌(北伐) 을 꾀하다가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탁지부측량소 삼각점(度支部測量所 三角點:광주시 향토문화유산 제7호)광주시 남한산성면 수어장대 기단부 서쪽에 있는 삼각점으로 대한제국은 토지조사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지구 곡률을 고려한 대삼각측량을 거쳐 소삼각측량을 하여야 하나 규모가 크고 경비가 많이 들어 1908년부터1909년까지 아래와 같이 탁지부 주관으로 경기도와 경상북도의 11개 지역을 선 정하여 최초로 독립적인삼각측량을 실시하여 구소삼각원점을 설치한 후 이를 기초로 하여 구소삼각점을 설치하고, 도근측량 및 세부측량을 실시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인해 호조에서 관장하던 호구∙공부∙전량∙식화∙조세∙재정 등의 사무 가 운데 조세와재정 관련 사무는 탁지아문이 승계하고, 경제 관련 사무는 공무아문과 농상아문 이 승계하였다. 탁지아문은 1895년 을미개혁 때 탁지부로 변경되었으며 정부의 회계∙출납∙ 조세∙국채∙화폐∙은행 등의사무 일체를 통괄하며 지방의 재무를 감독하였다. 탁지부는 근대적 인 지적제도를 수립하기 위하여 전국에 11개 지역을 선정하여 최초로 삼각측량을 실시하였 다. 이 사업을 위해 설치된 삼각점 가운데 1점이 1908년 수어장대 기단부 서쪽에 설치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으며 탁지부측량소 삼각점(度支部測量所 三角點)은 지상으로 노출된 부분이 높이22㎝, 폭 12×12㎝의장방형이며, 정상부에 십자(十字) 표시가 있다. 전면에는‘度 部’라 음각되어 있다. 이 삼각점은 조본원점(鳥本原點)을 기초로 한 구소삼각점 34번 장대 (將坮)로 위도 37°20′37.445", 경도 127°10′32.180" 지점에 설치되어 있으며, 현대의 측량 성과와 비교할 때 좌표점의 오차가 30㎝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대단히 양호하다고 평가된다.
▲청량산 수어장대(守禦將臺) 전경: 남한산성의 최고봉 청량산(497,1m) 정상에 위치하며 서울권 전망 최고의 명소이다.
청량산(淸凉山:482.6m)은 광주시 남한산성면과 하남시 학암동의 경계에 있는 산이지만 남한산성의 주봉(主峰)이다. 그러나 흔히들 남한산성으로만 알고 있지, 청량산이 남한산성의 주봉이라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데, 실제 정상은 수어장대가 자리 잡고 있어서 지금은 수어장대에서 조금 떨어진 성곽 옆에 삼각점이 있는 곳을 청량산으로 보고 있다. 주봉인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주봉(467.7m), 동쪽으로는 남한산의 주봉인 벌봉(522m), 망월봉(502m), 남쪽으로는 한봉(414m)이 있다. 지형은 서고동저(西高東低)의 기복을 형성하며, 서쪽은 대체로 경사가 급하고 험하지만, 내부의 평지를 지나 동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대체로 완만한 편이다. 산정을 중심으로 서쪽 저지에는 한강의 지류인 탄천, 동쪽에는 또다른 지류인 광안천이 북으로 흘러본류와 하며 결코 완만하지 않은 산 자체의 경사가 성벽과 결합하여 단단한 자연 방어선을 이루는 관계로 공격자의 입장에서 굉장히 공략하기 어려운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수어장대(守禦將臺보물지정:497.1m): 광주시 남한산성면 청량산 정상에 있는 수어장대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산성 서편에 남한산성4장대 중의 하나로 인조 2∼4(1624∼1626)년 사이에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이다. 수어장대란 요새 방어를 맡은 수어사가 지휘, 명령하는 곳이며, 건립 당시는 단층누각으로 '서장대'라 하였고,영조27(1751)년 유수 이기진이 2층 누각을 증축하여 내편은 무망루, 외편은 수어장대라 명명하였다.이 수어장대는 인조14(1636)년 병자호란때 인조가 친히 수성군을 지휘하면서 청태종의 12만 대군과대치하며 45일간 항전으로 버티던 곳이며, 항전 45일만에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아래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 위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익공계(翼工系) 팔작지붕 건물로 면적은 1층 105.08㎡, 2층 43.29㎡이다. 아래층 평면은 내진(內陣) 3×2칸과 외진 (外陣) 5×4칸으로 구분되어 있다. 자연석을 허튼층으로 쌓은 낮은 축대 위에 한단 높여 다 듬은 돌로 기단을 마련하였으며, 맨 바깥둘레에는 8모뿔대 주춧돌을 높게 세우고 안두리기 둥 밑에는 그보다 낮은 반구형(半球形) 주춧돌을 받쳤다. 외진부에는 전돌을 깔았고, 내진부 에는 긴마루를 깔았다. 기둥은 모두 민흘림 둥근기둥이다. 공포는 익공계인데 1층은 초익공, 2층은 2익공으로 되어 있으며, 첨차 끝은 모두 수서(垂 舌)이다. 2층 평방 위에만 화반(花盤: 주심도리 밑 장혀를 초새김한 받침)과 운공(雲工: 화 반 상부에 얹혀 장여와 도리를 가로 받친 물건)을 사용하고 있다. 가구(架構)는 5량가(五樑架)로서 고주(高柱) 위에 대들보를 건너지르고, 그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마루보를 받쳤다. 마루보 위에는 판대공(板臺工)을 세우고 그 위에 마루도리를 걸었다. 합각벽(閤閣壁)은 전벽돌쌓기로 되어 있고, 용마루·합각마루 및 1층 추녀마루에 용두(龍頭) 를 얹었으며, 사래[蛇羅: 추녀 끝에 잇대어 댄 네모난 서까래] 끝에는 토수(吐首: 용머리와 鬼頭 모양의 장식)를 끼웠다. 지붕마루는 모두 양성바름을 하였고, 기와골 끝에는 막새를 사용하였다. 창호(窓戶)는 위층에만 있으며 매칸마다 2짝 판문(板門)을 달았고, 위층으로 오 르는 계단은 아래층 내진의 북동쪽 칸에 설치되어 있으며 단청은 모로단청이다.. 외부 정면에 ‘수어장대(守禦將臺)’라고 쓴 현판이 있으며, 무망루(無忘樓)’라고 쓴 현판은 수 어장대 내부에 있었던 것을 보호각을 새로 지어 그곳에서 보호관리 하면서 일반인들에게 공 개하고 있다.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 는 중요한 건물이다.
2012년 12월 22일 사진
▲북문(北門, 全勝門):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를 하게 된 ‘법화골 전투’가 이 성문을 나서서 있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조선의 군사 300명이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여 말았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진 것이 인조가 항복하여 치욕의 역사적 사건을 가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북문(전승문)에서 오늘 산행을 시작한다.
▲북문에서 성곽 따라 계속 올라간다.
▲롯데월드타워가 미세먼지로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성곽 북쪽으로 보이는 하남시
▲성곽 우측에 402m봉이
있다.
▲제1군포지(軍鋪址)터:「군포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 건물이며, 남한산성 내에는 125개소의 군포가 있었으나 현재는 한군데도 남아 있지 않다. 군포지에서는 다수의 와편과 조총탄환이 나왔고, 목조건물에 기와를 얹고 토석벽을 두른 건물로 보인다.」
▲현절사갈림길이정표(전승문(북문)0.7km, 동장대암문, 현절사) 동장대암문 방향
▲현절사(顯節祠):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병자호란 때 끝까 지 항복하지 않고 청(淸)나라 선양[瀋陽]에 끌려가 순절한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 (吳達濟) 삼학사(三學士)의 우국충절(憂國忠節)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1688년(숙종 14) 삼학사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유수 이세백(李世白)이 세웠고, 1693년 봄에 사액(賜 額)하였다. 삼학사와 같이 청나라에 항복하기를 반대했던 주전파(主戰派)의 거두 김상헌(金 尙憲)·정온(鄭蘊) 두 충신도 1699년부터 함께 모시고 있다. 남한산성(南漢山城) 동문(東門) 내 북쪽 산기슭에 있으며, 건평은 29.5평이다. 목조 단층 와즙(瓦葺:기와로 지붕을 이는 것) 에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부속건물로 동재(東齋)·서재(西齋)·내외일주문(內外一柱門), 1978년 복원된 내삼문(內三門)이 있다. 수복사(守僕舍)·외삼문(外三門)은 없어졌다.
▲제4암문(북암문)은 북문의 보조기능을 하였으며, 1km정도 내려가면 하남시 상사창동에 도달할 수 있으며, 이 문은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홍예문이다.
▲제4암문 바로 앞에 있는 제2군포터(해설판)를 지난다.